고린도 후서 1:1-24
각주
연구 노트
고린도 전서: 이 편지의 원문에는 이러한 제목이 없었던 것 같다. 고대 사본들을 보면 이러한 제목이 나중에 붙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편지들을 쉽게 구분하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이다. P46으로 알려진 파피루스 책자본은 서기관들이 제목을 사용해 성경 책들을 구분했음을 보여 준다. P46은 바울의 편지들이 들어 있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책자본으로, 여러 학자들은 이 책자본이 기원 2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책자본에는 바울의 편지 중 아홉 통이 들어 있다. 그중 고린도 전서의 시작 부분에는 프로스 코린티우스 A(“고린도 사람들에게 1”)라는 제목이 들어 있다. (미디어 갤러리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바울의 첫째 편지” 참조) 기원 4세기에 만들어진 바티칸 책자본과 시나이 책자본 같은 초기 사본들에도 동일한 제목이 들어 있다. 이 사본들에는 고린도 전서의 시작 부분과 끝부분 모두에 제목이 나온다.
고린도 후서: 이 편지의 원문에는 이러한 제목이 없었던 것 같다. 고대 사본들을 보면 이러한 제목이 나중에 붙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편지들을 쉽게 구분하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이다.—고린도 전서 책명 연구 노트 참조.
사도: 롬 1:1 연구 노트 참조.
바울과 우리 형제 디모데가 ··· 편지합니다: 원문에는 “~가 . . . 편지합니다”에 해당하는 표현이 없다.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내는 이 편지를 쓴 사람은 바울이다. 하지만 바울은 편지 서두의 인사말에서 자신과 함께 디모데도 언급한다. 바울이 기원 55년경에 이 편지를 썼을 때 디모데는 그와 함께 마케도니아에 있었던 것 같다. (행 19:22) 바울과 디모데는 영적인 의미에서 형제였으므로 그는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부른다.
아카이아: 행 18:12 연구 노트 참조.
거룩한 자: 롬 1:7 연구 노트 참조.
과분한 친절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자신이 쓴 편지들 가운데 11통의 편지에서 이러한 인사말을 사용한다. (롬 1:7; 고전 1:3; 갈 1:3; 엡 1:2; 빌 1:2; 골 1:2; 살전 1:1; 살후 1:2; 딛 1:4; 몬 3) 그는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들에서도 매우 비슷한 인사말을 사용했지만 그 인사말에는 “자비”라는 특성이 함께 언급되어 있다. (딤전 1:2; 딤후 1:2) 학자들은 바울이 일반적으로 인사말로 사용되는 단어(“안부를 전합니다!”, 카이레인)가 아니라 그와 발음이 비슷한 다른 그리스어 단어(카리스)를 자주 사용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들은 바울이 그렇게 함으로 회중들이 “과분한 친절” 즉 “은혜”를 온전히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행 15:23 연구 노트 참조) “평화”를 언급한 것은 유대인들이 인사할 때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샬롬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막 5:34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과분한 친절과 평화”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대속을 통해 여호와 하느님과 누리게 된 관계를 강조한 것 같다. 바울은 관대한 친절과 평화의 근원으로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분하여 언급한다.
부드러운 자비의 아버지: 여기서 “부드러운 자비”로 번역된 그리스어 명사(오익티르모스)는 다른 사람에 대한 동정심 즉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리킨다. 하느님을 부드러운 자비의 아버지 즉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동정심이 그분에게서 나오며 그분의 본성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그러한 부드러운 감정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고난을 겪는 자신의 충실한 종들을 위해 자비롭게 행동하신다.
모든 위로의 하느님: 여기서 “위로”로 번역된 그리스어 명사 파라클레시스는 문자적으로 “곁으로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거나 슬픔을 느낄 때 그의 곁에 서서 그를 돕거나 격려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롬 12:8 연구 노트 참조) 일부 학자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강조한 바울의 이 말이 사 40:1에 나오는 사상과 비슷하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그 구절은 이러하다. “‘위로하여라, 내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또한 사 51:12 참조) 또한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그리스어(파라클레토스)는 요 14:26에서 “돕는 자”로 번역되었는데 여호와의 성령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관점에서 희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강력한 활동력을 사용하여 위로와 도움을 베푸신다.—행 9:31; 엡 3:16.
시련: 또는 “고난; 환난”.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는 기본적으로 압력이 되는 상황으로 인해 겪는 고난이나 괴로움이나 고통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박해를 받을 때 겪게 되는 고통을 가리키는 데 자주 사용된다. (마 24:9; 행 11:19; 20:23; 고후 1:8; 히 10:33; 계 1:9) 그러한 환난에는 충절을 지키다가 투옥되거나 죽임을 당하는 것이 포함될 수 있다. (계 2:10) 하지만 기근, (행 7:11) 가난, 고아와 과부가 흔히 겪는 어려움, (약 1:27) 심지어 가정생활, 결혼 생활과 같은 상황들도 그 정도는 다양하지만 “환난”을 가져올 수 있다.—고전 7:28.
위로해: 또는 “격려해”.—고후 1:3 연구 노트 참조.
시련: 또는 “환난”.—고후 1:4 연구 노트 참조.
아시아 속주에서 우리가 겪은 환난: 성경에서는 바울이 어떤 일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지 않는다. 그는 행 19:23-41에 나오는,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동을 염두에 두었을 수 있다. 또는 고전 15:32에 언급된, “에베소에서 야수들”을 상대했던 일을 가리켜 이 말을 했을 수도 있다. (연구 노트 참조) 어떤 경우이든 바울은 그 일로 인해 목숨을 잃을 뻔했던 것 같다.—고후 1:9.
간구의 기도로: 또는 “간절한 기도로”. “간구의 기도”로 번역된 그리스어 명사 데에시스는 “겸손하고 간절한 간청”으로 정의된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명사는 하느님께 간청하는 경우에만 사용된다.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는 개인이 드리는 기도이든 여러 사람이 함께 드리는 기도이든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알려 준다. (약 5:14-20. 창 20:7, 17; 살후 3:1, 2; 히 13:18, 19 비교) 마음에서 우러나와 여호와의 뜻과 일치하게 진실한 기도를 드리면 그분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 따라 행동하신다. (시 10:17; 사 30:19; 요 9:31; 요1 5:14, 15) 하느님께 드리는 간구의 기도는 그분이 어떤 일을 언제 하시는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행 4:31 연구 노트 참조.
많은 사람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또는 “기도에 힘쓰는 많은 얼굴 때문에”.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를 직역하면 “많은 얼굴들에서”가 되는데, 이것은 하느님을 향해 얼굴을 들고 기도를 드리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바울은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드리는 기도에 하느님께서 응답하실 때 그로 인해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자신이 유익을 얻는 것보다는 여호와께 영광이 돌아가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다.
육적인 지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의 지혜를 가리킨다.—고전 3:19 비교.
읽고: 달리 번역하면 “이미 잘 알고 있고”.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아나기노스코를 문자적인 의미에 가깝게 “잘 알다”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단어가 글과 관련하여 사용될 경우에는 “알아보다”를 의미하며 대부분 “읽다” 또는 “소리 내어 읽다”로 번역된다. 이 단어는 성경을 개인적으로 읽는 경우나 공개적으로 읽는 경우에 모두 사용된다.—마 12:3; 눅 4:16; 행 8:28; 13:27.
온전히: 직역하면 “끝까지”. 여기서 이 그리스어 표현은 “온전히; 완전히”를 의미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 표현의 문자적 의미가 시간과 관련이 있다고 이해하여, 그들이 “끝까지” 이해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여러분이 기뻐할 두 번째 기회를 갖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2차 선교 여행 중에 고린도를 처음으로 방문했다. 그때는 기원 50년이었다. 바울은 그곳에 1년 6개월 동안 머물면서 회중을 세웠다. (행 18:9-11) 그는 3차 선교 여행 중에 에베소에 있을 때 고린도를 다시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고전 16:5; 고후 1:16, 23) 바울은 고린도를 두 번째로 방문하려던 계획을 가리켜 “기뻐할 두 번째 기회”라고 했을 수 있다. 또는 다음 구절에서 알려 주듯이, 고린도를 연이어 두 번 방문하려던 계획을 가리켜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고후 1:16 연구 노트 참조.
기뻐할: 여러 그리스어 사본에서는 이 부분에 “기쁨”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카라가 아니라 “과분한 친절; 은혜; 유익”을 의미하는 카리스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구절의 뒷부분은 “두 번 유익(은혜)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여러 성경 번역판에서도 그러한 표현을 사용한다.
여러분에게 들러서 마케도니아로 갔다가: 바울은 3차 선교 여행 중이던 기원 55년에 에베소에 있을 때, 에게해를 건너 고린도로 갔다가 그곳에서 마케도니아로 가려고 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고린도 회중을 다시 방문하려고 했다. 아마도 이전에 편지에서 언급한 것처럼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을 위한 기부금을 가져가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고전 16:3) 하지만 바울은 그러한 계획을 변경했는데,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후 1:17 연구 노트 참조.
내가 ··· 경솔했다는 말입니까?: 바울은 고린도 전서를 기록하기 전에 쓴 편지에서 (고전 5:9 연구 노트 참조)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이 마케도니아로 가는 길에 그들을 방문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후에 고린도 전서에서 그는 자신이 계획을 바꾸어 먼저 마케도니아로 간 다음 고린도로 가겠다고 알려 주었다. (고전 16:5, 6) 따라서 회중의 일부 사람들, 아마도 “특출한 사도들”은 (고후 11:5) 바울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했던 것 같다.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면서 자신이 “경솔했던”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여기서 “경솔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에는 변덕스럽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이 단어는 믿을 수 없고 생각을 무책임하게 바꾸는 사람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하지만 바울은 변덕스러운 사람이 아니었으며 육적인 동기로 다시 말해 이기적인 동기로 또는 불완전한 인간의 생각에 따라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방문을 미룬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고후 1:23에서 그는 그들을 “아끼기” 때문에 원래 계획을 바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들에게 자신이 편지에 쓴 조언에 따라 행동할 시간을 주려고 했다. 그러면 그가 나중에 그곳을 방문했을 때 서로 더 큰 격려를 받게 될 것이었다.
“예” 하면서 “아니요” 하는: 또는 “‘예’ 하고 금방 ‘아니요’ 하는”. 직역하면 “‘예’ 하고 ‘아니요’ 하는”.—고후 1:17 연구 노트 참조.
실루아노: 실루아노는 바울이 기록한 살전 1:1; 살후 1:1과 베드로가 기록한 벧전 5:12에서도 언급된다.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서 그는 실라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는 예루살렘에 있던 1세기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예언자로 일했고 바울의 2차 선교 여행에도 함께했다. 실루아노는 로마 시민이었던 것 같다. 이 구절에서 그의 로마식 이름이 사용된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행 15:22, 27, 32, 40; 16:19, 37; 17:14; 18:5.
그분에 의해 “예”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이 예수를 통해 확증되고 성취되고 실현되었다는 의미이다. 예수를 통해 즉 그분의 모든 가르침과 그분이 하신 일을 통해 히브리어 성경에 기록된 모든 약속이 이루어졌다. 예수께서는 지상에서 흠 없이 충절을 지키심으로 여호와의 약속들에 대한 의심의 여지를 말끔히 지워 버리셨다.
그분을 통해 하느님께 “아멘”이라고 함으로: “아멘”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그렇게 되소서” 또는 “확실히”를 의미하는 히브리어를 음역한 것이다. 계 3:14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아멘”이라고 하셨다. 그분이 지상에 계실 때 자신에 관한 모든 예언을 성취시키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아멘”이시라고 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그분이 충실한 삶을 살다가 희생적인 죽음을 맞이하심으로 하느님의 모든 선언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보증이 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러한 보증이 되신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를 끝마칠 때 “아멘”이라고 하는 것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고전 14:16 연구 노트 참조.
인장: 성경 시대에 인장은 어떤 사실이나 소유권이나 합의를 확증하기 위한 서명으로 사용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통해 비유적인 인장을 찍으셨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자신의 소유이며 하늘 생명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을 확증하셨다.—엡 1:13, 14.
오게 될 것의 증표: 또는 “계약금; 오게 될 것의 보증(담보)”.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는 그리스어 아라본이 세 번 나오는데, 모두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영 즉 하느님의 성령 또는 활동력으로 기름부으시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고후 5:5; 엡 1:13, 14) 성령의 이러한 특별한 작용은 오게 될 것의 계약금과도 같다.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증표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희망에 대해 확신을 갖는다. 그들이 받을 온전한 값 즉 상에는 하늘에서 썩지 않을 몸을 입는 것이 포함된다. (고후 5:1-5) 또한 불멸성이라는 선물을 받는 것도 포함된다.—고전 15:48-54.
내 목숨: 또는 “내 영혼”.—용어 설명 “영혼” 참조.
여러분의 믿음의 주인이 아니라: 바울은 형제들이 옳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충실한 그리스도인임을 확신했다. 그들이 굳건히 서 있는 것은 바울이나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믿음 때문이었다. ‘주인이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키리유오)는 다른 사람을 압제하거나 위압적인 태도를 나타낸다는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하느님의 상속 재산인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말라고 교훈할 때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단어를 사용했다. (벧전 5:2, 3)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서 어떤 권위를 갖고 있든 그 권위를 압제적인 방식으로 행사해도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바울이 우리는 ··· 여러분의 기쁨을 위한 동료 일꾼이라고 말한 점을 볼 때 그가 자신과 동료들을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보다 우월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자신과 동료들을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여호와를 기쁨으로 숭배하도록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종들로 여겼다.
미디어
사도 바울은 선교 여행 중에 적어도 한 번 이상 고린도를 방문했다. 처음 고린도에 갔을 때 그는 18개월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행 18:1, 11; 20:2, 3) 당시 고린도는 번영하는 상업의 중심지였다. 그 도시가 번영할 수 있었던 주된 이유는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도시는 펠로폰네소스반도와 그리스 본토를 연결하는 지협(좁고 잘록한 땅)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한 위치 덕분에 고린도는 인근에 있는 두 항구인 레카이움과 겐그레아에서 이루어지는 무역 활동을 관리할 수 있었다. 고린도는 로마 제국 전역에서 온 상인들과 여행객들이 거쳐 가는 곳이었기 때문에 전파 활동을 하기에 아주 좋은 장소였다. 이 영상을 통해 에라스도 비문 같은 고대 유물을 비롯해 고린도의 역사에 대해 알아볼 수 있다. 또한 영상에는 고린도의 아고라(장터)와 베마(재판석)가 나오며, 바울 시대에 고린도에 있던 극장 하나를 그래픽으로 재구성한 모습이 나온다.
여기 보이는 것은 P46으로 알려진 파피루스 책자본의 한 페이지이다. 이 책자본은 기원 2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이 책자본에서 86개 장이 남아 있다. 이 책자본에는 바울이 영감을 받아 기록한 편지 9통이 로마서, 히브리서, 고린도 전서, 고린도 후서, 에베소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 전서의 순서로 들어 있다. 붉은 선으로 표시된 부분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2”라고 되어 있는 제목이다. 이 책자본은 초기부터 서기관들이 제목을 사용해 성경 책들을 구분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미디어 갤러리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바울의 첫째 편지” 참조.
사진에 나오는 청동 인장에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로마 시대에 사람들은 인장을 사용하여 밀랍 또는 진흙에 문자나 문양을 찍었다. 그러한 인장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도공은 자신이 만든 항아리를 구분하거나 만든 사람 또는 용량을 표시하기 위해 인장을 찍었다. 때로는 항아리에 뚜껑을 덮은 뒤 회반죽을 발라 밀봉하기도 했다. 회반죽이 굳기 전에, 상인이나 운반하는 사람의 인장을 회반죽에 찍었다. 또한 어떤 물건이 자신의 소유임을 표시하기 위해 인장을 찍는 경우도 있었다. 바울은 소유권을 나타내는 인장을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하여,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장을 찍으셨다”고 즉 성령으로 기름부으셨다고 말했다. 그러한 인장은 그들이 하느님의 소유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고후 1:2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