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 전서 1:1-20
연구 노트
디모데 전서: 이 편지의 원문에는 이러한 제목이 없었던 것 같다. 고대 사본들을 보면 이러한 제목이 나중에 붙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편지들을 쉽게 구분하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기원 4세기에 만들어진 잘 알려진 사본인 시나이 책자본에는 이 편지의 끝에 “디모데 전서”라는 제목이 들어 있다. 다른 초기 사본들에도 이와 비슷한 형태의 제목이 들어 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바울이 기록한 디모데 전서와 디도서에는 “구원자”라는 표현이 여호와 하느님을 가리키는 데 여섯 번 사용되었다. (이 구절과 딤전 2:3; 4:10; 딛 1:3; 2:10; 3:4) 이것은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서 이 표현이 하느님을 가리키는 데 두 번밖에 사용되지 않은 것과 대비가 된다. (눅 1:47; 유 25)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여호와를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자주 언급한다. (시 106:8, 10, 21; 사 43:3, 11; 45:15, 21; 렘 14:8) 여호와께서 예수를 통해 인류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기 때문에, 예수도 “구원자”로 언급된다. (행 5:31; 딤후 1:10) 예수는 “구원의 수석 대표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히 2:10) 천사는 하느님의 아들을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를 의미하는 예수라는 이름으로 부르라고 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그가 자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오.” (마 1:21 및 연구 노트) 따라서 예수라는 이름은 예수를 통해 이루어지는 구원의 근원이 여호와이시라는 점을 강조해 준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모두를 구원자로 언급한다. (딛 2:11-13; 3:4-6) “구원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와 「칠십인역」에서 그 단어를 번역하는 데 사용된 그리스어는 하느님의 백성을 적들로부터 “구할 구원자들”로 일으켜진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도 사용된다.—느 9:27; 삿 3:9, 15.
우리의 희망이신 그리스도 예수: 바울은 여호와를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으로 여겼다. (롬 15:13) 여기서 그는 디모데에게 여호와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신뢰할 만한 희망을 주신 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라는 점을 일깨워 준다. 예수께서는 여호와의 모든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시며 영원한 생명의 희망이 실현되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신다.—고후 1:20 및 연구 노트; 벧전 1:3, 4 참조.
진정한 아들: 바울은 이러한 애정이 담긴 말을 사용하여,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따뜻한 감정을 표현한다. 성경은 바울이 디모데와 그의 가족에게 좋은 소식을 처음으로 전했는지 알려 주지 않는다. 하지만 디모데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바울의 여행 동료가 되었다. (행 16:1-4)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 편지를 쓸 당시 디모데를 자신의 믿음 안의 아들 즉 영적 아들로 여겼다. (딛 1:4 비교) 두 사람 간의 그런 특별한 관계는 10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형성된 것이었다.—고전 4:17; 빌 2:20-22.
디모데: “하느님을 공경하는 자”라는 의미.—행 16:1 연구 노트 참조.
과분한 친절과 자비와 평화가 그대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롬 1:7 연구 노트 참조.
에베소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이 구절은 디모데 전서의 배경에 대해 중요한 점을 알려 준다. 디모데는 이 편지를 받을 당시 에베소 회중에서 감독자로 섬기고 있었다. 바울은 그 회중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행 19:1, 9, 10; 20:31) 그는 디모데에게 에베소에 머물면서 ‘일부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이 다른 교리를 가르치지 않게’ 하라고 권한다. 바울은 로마의 가택 연금에서 풀려난 때와 로마에서 마지막으로 수감된 때 사이의 어느 시점 즉 기원 61-64년경에 이 편지를 기록했다.—디모데 전서 소개 및 미디어 갤러리 “기원 61년경 이후에 바울이 한 여행” 참조.
다른 교리를 가르치거나: 바울은 디모데가 에베소 회중에서 상당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한다. 디모데는 예수와 예수께서 임명하신 사람들의 영감받은 가르침과 다른 교리를 가르치지 않도록 일부 사람들에게 명령할 권한을 받았다.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명령하다”에 해당하는 단어는 긴급히 수행해야 할 의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바울의 이러한 지시를 보면 그가 계속해서 배교와 맞서 싸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살후 2:3 연구 노트 참조) 몇 년 전인 기원 56년경에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이야기하면서 “압제적인 이리들”에 대해 경고했다. 그는 책임 맡은 남자들 가운데서 이리 같은 사람들이 일어나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왜곡된 것을 말할 것”이라고 했다. (행 20:29, 30) 바울은 다른 영감받은 편지들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다른 좋은 소식”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 경고했다. (갈 1:6 및 연구 노트; 고후 11:4) 그러한 거짓 가르침을 조장하는 사람들 중 일부가 당시 에베소 회중에도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거짓 이야기: 딤후 4:4에서 바울은 “거짓 이야기”와 “진리”를 대조한다. 한 사전에서는 “거짓 이야기”로 번역된 그리스어 미토스를 “전설, 설화 … 꾸민 이야기, 신화”로 정의한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항상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바울은 종교적 거짓말을 조장하는 꾸며 낸 전설이나 귀를 솔깃하게 하는 소문을 염두에 두었을 수 있다. (딛 1:14; 벧후 1:16. 딤전 4:7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러한 거짓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말라고, 다시 말해 정신을 빼앗기지 말라고 교훈한다. 그러한 이야기는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며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들어 있는 진리에 정신을 쏟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딤후 1:13.
족보: 바울은 개인의 가계 즉 가문의 혈통을 적은 기록물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을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러한 것들에 대해 연구하고 토론하는 데 주의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가문을 자랑하거나 지식을 뽐내려고 그렇게 했을 수 있다. 하지만 족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쓸모가 없는 일이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혈통을 연구할 이유가 없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인 회중 내에서 유대인과 비유대인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두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갈 3:28)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다윗 가계에서 나온 그리스도의 혈통에 대해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마 1:1-17; 눅 3:23-38.
억측: 여기서 바울은 거짓 이야기와 족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위험한 한 가지 이유를 언급한다. (이 구절에 나오는 거짓 이야기와 족보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한 사전에서는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를 “쓸모없는 추측”으로 정의한다. 다른 참고 문헌에서는 이 표현이 “답을 알 수도 없고 답할 가치도 없는 의문을 갖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바울은 그러한 추측을 “믿음과 관련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과 대조한다. 따라서 바울은 여기서 믿음을 강화시켜 주는, 확고한 성경적 근거에 기초한 건전한 생각과 추리를 언급한 것이 아니다. (행 19:8; 각주; 고전 1:10)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연합시키기보다는 분열시킬 가능성이 높은 헛된 질문과 의심스러운 대답에 대해 경고한 것이다.
지시: 또는 “명령”.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앞서 디모데에게 했던 말 즉 회중 내에서 “일부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이 다른 교리를 가르치거나 거짓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하라는 지시를 언급한 것이다. (딤전 1:3, 4) 한 사전에 따르면 여기서 “지시”에 해당하는 단어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바울은 그 단어와 그와 어근이 같은 표현들을 이 편지에서 여러 번 사용한다.—딤전 1:18; 4:11; 5:7; 6:13, 17.
목적: 또는 “목표”.—롬 10:4 연구 노트 참조.
깨끗한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 이 구절에서 바울은 비이기적인 그리스도인 사랑을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 “위선이 없는 믿음”과 연관 짓는다. 그리스도인이 마음 즉 속사람이 깨끗하다는 것은 도덕적, 영적으로 깨끗한 것을 가리킨다. 그런 사람은 동기가 순수하며 여호와께 온전히 정성을 바친다. (마 5:8 및 연구 노트) 그러한 깨끗한 마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한 사랑을 나타내도록 그를 움직인다.
선한 양심…에서 나오는 사랑: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양심 즉 자신을 살피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판단하는 능력을 주셨다. 불완전한 인간은 여호와의 표준에 따라 문제를 올바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말씀을 사용해 자신의 양심을 훈련해야 한다. 선한 양심 즉 하느님의 뜻에 따라 훈련받은 양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저지른 죄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회개하고 악한 일에서 돌아섰으며 현재 옳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벧전 3:16, 21. 롬 2:15 연구 노트 참조) 여기서 바울이 한 말은 선한 양심이 비이기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을 보여 준다.
위선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 바울은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그로 인한 해로운 결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행 26:4, 5. 마 23:13 비교) 그는 그처럼 진실하지 않고 가식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디모데에게 권고한다. (딤전 4:1, 2) 위선이나 위선자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단어들은 원래 연극 중에 여러 등장인물의 역할을 하기 위해 얼굴에 가면을 쓴 배우를 가리켰다. (마 6:2 연구 노트 참조) 여기서 “위선이 없는”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연기하지 않는”; “배우처럼 가장하지 않는”으로 정의된다. 바울은 진실하고 참된 믿음이 그리스도인들이 비이기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들은 법을 가르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바울이 언급한 사람들은 회중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될 때 얻게 되는 것으로 보이는 명성과 권위를 이기적으로 갈망했던 것 같다. 그런 야심에 찬 사람들은 하느님의 양 떼를 돌보고 가르칠 자격을 갖춘 것도 아니었고 그런 역할을 하도록 임명된 것도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과는 달리, 사랑에서 우러나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함으로 그들을 섬기려고 하고 성경적 자격 조건을 갖춘 그리스도인 남자들은 “훌륭한 일을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딤전 3:1.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올바로 적용한다면 좋은 것입니다: 바울 시대에 일부 사람들은 모세 율법 규정들이 구원의 필수 조건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규정들을 밀접히 따라야 한다고 가르쳤다. 바울은 그런 사람들이 율법을 잘못 적용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세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대속이 구원을 위한 수단이라고 믿는다. (갈 2:15, 16) 하지만 모세 율법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법에 담긴 원칙을 “올바로”(직역하면 “적법하게”) 적용한다면 그들에게 유익을 준다. 율법은 그리스도 예수와 관련하여 “오게 될 좋은 것들의 그림자”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연구함으로 유익을 얻을 수 있다. (히 10:1) 또한 율법은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이 필요하다는 점을 잘 보여 준다. (갈 3:19) 무엇보다도 율법은 여호와의 생각을 밝혀 준다.—출 22:21; 레 19:15, 18; 롬 7:12.
율법은 의로운 사람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하느님의 표준을 받아들였다는 의미에서 의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영의 영향력에 기꺼이 순응했다. (갈 5:16-23) 따라서 그들에게는 모세 율법에 나오는 것과 같은 세세하고 많은 법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에 기초한 더 우월한 법인 “그리스도의 법”을 따랐다.—갈 6:2 및 연구 노트.
성적 부도덕을 저지르는 자: 고전 5:9; 갈 5:19 연구 노트 참조.
동성애를 하는 남자: 또는 “남자와 성관계를 갖는 남자”. 직역하면 “남자와 함께 눕는 남자”.—고전 6:9 연구 노트 참조.
행복하신 하느님: 여기서 바울은 행복이 여호와의 성품 가운데 두드러진 특성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하느님께서는 영원히 존재하시며 늘 행복하신 분인데, 혼자 계실 때도 그러하셨다. (말 3:6) 그분은 맏아들을 창조하시고 그와 함께하시면서 더 큰 행복을 느끼셨다. (잠 8:30) 사탄의 반역과 중상으로 인해 슬픔과 고통이 초래되었지만, 여호와께서는 여전히 행복하신 분이며 충성스러운 자들이 그분을 충실히 섬기는 모습을 보며 기뻐하신다. (잠 27:11)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을 만났을 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예수의 말씀을 인용했다. (행 20:35 및 연구 노트) 그 말씀은 여호와께서 “행복하신 하느님”이신 한 가지 이유를 알려 준다. 그분이 주는 일을 하는 면에서 우주에서 으뜸가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시 145:16; 사 42:5) 여호와를 본받는 그분의 숭배자들도 행복할 수 있다. (엡 5:1) 시 1:1, 2에서는 여호와의 법을 매일 읽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알려 준다. 「칠십인역」의 이 구절에서는 바울이 딤전 1:11에서 사용한 것과 동일한 그리스어가 사용되었다. 산상 수훈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이 고난을 겪고 박해를 받을 때에도 행복할 수 있다는 점을 거듭 알려 주셨다.—마 5:3-11. 마 5:3; 롬 4:7 연구 노트 참조.
영광스러운 좋은 소식: 좋은 소식은 그 내용이 얼마나 놀랍고 인상적인지 생각해 볼 때 참으로 “영광스럽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좋은 소식은 그 놀라운 소식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성품과 특성을 밝혀 준다. 이 좋은 소식을 사용하여 “행복하신 하느님”께서는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는 영광스러운 희망을 주셨다. 따라서 바울이 그러한 좋은 소식을 맡게 된 것을 영예롭게 생각한 것도 당연하다.—고후 4:4, 6 연구 노트 참조.
그리스도 예수께 감사합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맡겨진 “봉사의 직무”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에게 나타내신 자비와 사랑과 신뢰의 증거로 여겼다. 이전에 그는 “박해하는 자, 불손한 자”였으며 스데반이 살해된 것을 좋게 여기기까지 했다. (딤전 1:13; 행 6:8; 7:58; 8:1, 3; 9:1, 2) 바울은 감사하는 마음을 나타내려고 다른 사람들의 영적 필요를 위해 기꺼이 봉사했다. 예를 들어 그는 좋은 소식을 열정적으로 전파했다.—롬 11:13 연구 노트 참조.
우리 주의 과분한 친절: 바울은 자신이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함으로 죄를 지었다는 것을 늘 잊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여호와의 과분한 친절을 받았다는 긍정적인 점에 초점을 맞춘다. (행 13:43; 고전 15:10; 갈 2:20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여호와의 친절이 자신에게 넘치도록 풍성했다고 말함으로 그 점을 강조한다. 여기서 그가 사용한 그리스어 동사는 액체가 용기에 가득 차서 넘치는 것을 묘사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한 참고 문헌에서는 이 단어를 “넘치고 또 넘칠 정도로 풍성하다”로 정의한다.
나는 그들 중에서도 가장 큰 죄인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죄인들에 대해 한 말을 보면 그가 얼마나 겸손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강한 희망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함으로 지은 죄를 축소하려고 하지 않음으로 겸손을 나타냈다. 또한 그러한 큰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희망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을 확신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마 9:13 비교.
나를 본보기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자비를 통해 자신이 얻은 유익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여기서는 자신의 예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유익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께서 바울에게 베푸신 자비에 대해 알게 되면 죄를 용서받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가장 큰 죄인”이었던 바울은 심각한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기만 하면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는 하느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다는 살아 있는 증거가 되었다.
영원하신 왕: 직역하면 “시대들의 왕”. 이 칭호는 여호와 하느님에게만 사용된다. 또한 그분은 “옛날부터 계신 분”이라고도 불리신다. (단 7:9, 13, 22) 그분은 우주에 다른 누군가나 다른 어떤 것이 있기 전부터 영원히 존재해 오셨으며 미래에도 영원히 존재하실 것이다. (시 90:2) 따라서 여호와만이 “영원한 목적”을 세우고 이루실 수 있다. (엡 3:11 및 연구 노트) 또한 그분만이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다. (요 17:3; 딛 1:2) “영원하신 왕”이라는 칭호는 계 15:3에서 “하느님의 종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 가운데도 나온다. 출 15:18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노래했다.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으로 통치하실 것입니다.”—시 10:16; 29:10; 146:10.
아멘: 롬 1:25 연구 노트 참조.
내 아들: 바울은 애정을 나타내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했다.—딤후 1:2; 딛 1:4; 몬 10. 마 9:2; 딤전 1:2 연구 노트 참조.
그대에 관한 예언들과 일치하게: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에 관한 예언들이 있었음을 언급한다. 그 예언들은 디모데가 회중에서 할 역할에 대한 것이었던 것 같다. 그 예언들은 하느님의 영의 작용에 의한 것이었다. (딤전 4:14 연구 노트 참조) 그 예언들에는 디모데를 임명하는 것을 승인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던 것 같다. 바울이 디모데가 이 예언들에 의해서 거짓 선생들에 맞서 영적 싸움을 계속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 점을 알 수 있다.
지시: 또는 “명령”.—딤전 1:5 연구 노트 참조.
훌륭한 싸움을 계속하면서: 고후 10:3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바울은 해로운 영향으로부터 회중을 보호하려고 계속 애쓰는 것을 싸움에 비한다. 이 싸움에서 디모데의 역할은 회중에 침투해서 거짓 교리로 회중을 오염시키려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회중을 보호하는 것이었다.—딤전 1:3, 4. 고후 10:3 연구 노트 참조.
믿음의 파선을 겪었습니다: 바울은 믿음과 선한 양심을 저버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 주기 위해 생생한 비유를 사용한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을 잃는 것을 배가 파선하는 것에 비한 것이다. 바울은 이전에 쓴 편지에서 자신이 세 번 문자적인 파선을 당했다고 언급했다. (고후 11:25 및 연구 노트) 바울은 디모데 전서를 쓸 무렵에는 적어도 한 번 더 파선을 경험했다. (행 27:27-44) 따라서 그는 파선을 당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바울이 고의적으로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이 결코 회복되지 못할 수 있다고 경고한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파선을 당한다고 해서 반드시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을 잃는 안타까운 일을 겪은 사람들도 영적 도움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회복될 수 있다.—갈 6:1; 약 5:14, 15, 19, 20.
그들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습니다: “믿음의 파선”을 겪은 이 사람들은 (딤전 1:19) 거짓 교리를 퍼뜨리고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딤후 2:16-18에 나오는 바울의 말에 따르면, 후메내오는 빌레도와 함께 부활이 이미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일부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딤후 2:18 연구 노트 참조) 여기에 나오는 알렉산더는 딤후 4:14, 15에 언급된 구리 세공인과 동일한 인물일 수 있다. 그는 바울에게 “많은 해를 입혔”으며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전파하는 소식을 “심하게” 반대했다. (딤후 4:14 연구 노트 참조) “그들 가운데”라는 표현을 볼 때 믿음에 고착하지 않고 그리스도인 회중의 일부 형제 자매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던 사람들이 이미 많이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나는 그들을 사탄에게 넘겨주어: 이 표현은 그들을 회중에서 추방하는 즉 제명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러한 조처가 필요했던 이유는 바울이 언급한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고의적으로 계속 죄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고전 5:5 연구 노트 참조.
신성을 모독하지: 또는 “모욕적으로 말하지”.—마 12:31; 골 3:8 연구 노트 참조.
징계를 통해 가르침받게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죄를 저지르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사탄에게 넘겨주는” 즉 회중에서 추방하는 한 가지 목적이 무엇인지 밝힌다. (이 구절에 나오는 나는 그들을 사탄에게 넘겨주어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이 구절에 언급된 두 사람은 믿음의 파선을 겪었으며 “신성을 모독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배우도록 제명되어야 했다. (딤전 1:19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그들이 처벌을 받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교훈을 얻게 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한 참고 문헌에서 알려 주듯이, “그들이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은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