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1-32
각주
연구 노트
로마서: 이 편지의 원문에는 이러한 제목이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제목은 책들을 쉽게 구분하여 부를 수 있게 하기 위해 나중에 붙여졌을 것이다. 현존하는 사본들 가운데 이러한 제목이 들어 있는 사본들로는 기원 4세기에 만들어진 바티칸 책자본과 시나이 책자본, 기원 5세기에 만들어진 알렉산드리아 책자본과 에프라임 시루스 재생 책자본이 있다. 바울의 편지들이 들어 있는 현존하는 사본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사본(P46)에는 로마서의 앞부분이 나오지 않는다. 그 파피루스 책자본에는 바울의 편지 아홉 통이 들어 있는데, 로마서를 제외한 다른 여덟 통의 편지에는 제목이 나온다. 이 점을 볼 때 로마서에도 제목이 있었을 것이다. 여러 학자들은 이 파피루스 책자본이 기원 2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책자본을 통해 초기부터 서기관들이 제목을 사용해 성경 책들을 구분했음을 알 수 있다.—미디어 갤러리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바울의 첫째 편지” 참조.
그리스도 예수의 종: 일반적으로 “종”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둘로스는 남의 소유가 된 사람, 많은 경우 남에게 팔려 종이 된 사람을 가리키는 데 쓰인다. (마 8:9; 10:24, 25; 13:27) 또한 이 단어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한 종을 가리키기도 한다. (행 2:18; 4:29; 갈 1:10; 계 19:10) 예수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대속 희생으로 바치심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생명을 사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더는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며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종”으로 여긴다. (엡 6:6; 고전 6:19, 20; 7:23; 갈 3:13)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의 영감받은 편지의 필자들은 모두 회중들에게 교훈을 베풀 때 적어도 한 번 이상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임을 언급했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주이자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복종한다는 것을 나타냈다.—롬 1:1; 갈 1:10; 약 1:1; 벧후 1:1; 유 1; 계 1:1.
바울이 편지합니다: 원문에는 “~이 편지합니다”에 해당하는 표현이 없다. 7절까지 이어지는 이 편지의 서두는 고대의 일반적인 편지 형식을 따르고 있다. 대개 편지를 쓰는 사람이 언급되고 그다음에는 편지를 받는 사람이 언급되며 이어서 일반적인 인사말이 나온다. (롬 1:7) 바울은 서두에서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일과 자신이 전하는 소식에 대해 설명하는데, 이러한 서두는 당시의 일반적인 편지글에 비교해 볼 때 상당히 긴 편이다. (그리스어로는 1절부터 7절까지가 한 문장이다.) 일부 학자들은 로마 회중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바울이 그 회중을 아직 방문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서두를 길게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 (행 15:23; 23:26 연구 노트 비교) 바울은 성경에 처음 언급될 때는 히브리식 이름 사울로 불리지만 행 13:9 이후로는 로마식 이름(파울로스, 당시 흔히 사용되던 라틴어 이름 파울루스의 그리스어 형태)으로 불린다. 그는 히브리서를 제외한 모든 편지에서 자신을 바울로 언급하며, 히브리서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비유대인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라는 임명을 받은 “이방 사람들에게 보내진 사도”였으므로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롬 11:13; 행 9:15; 갈 2:7, 8. 행 7:58; 13:9 연구 노트 참조.
사도: 그리스어 명사 아포스톨로스는 “보내다”라는 의미의 동사 아포스텔로에서 나온 단어이다. (마 10:5; 눅 11:49; 14:32) 요 13:16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에 이 단어의 기본 의미가 분명히 나타나 있는데, 그 구절에서는 이 단어가 “보냄을 받은 사람”으로 번역되어 있다. 바울은 부활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선택에 의해 이방 사람들 즉 비유대인들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행 9:1-22; 22:6-21; 26:12-23) 바울은 자신이 부활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으며 (고전 9:1, 2) 기적을 행했다는 (고후 12:12) 점을 들어 자신의 사도직을 확증했다. 또한 침례받은 신자들에게 성령이 내려질 때 그가 통로 역할을 했다는 점 역시 그가 진정한 사도라는 증거였다. (행 19:5, 6)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는 점을 여러 번 언급했지만, 자신을 “열두 제자” 가운데 포함시킨 적은 한 번도 없다.—고전 15:5, 8-10; 롬 11:13; 갈 2:6-9; 딤후 1:1, 11.
구별된: 그리스어 아포리조는 “구별하다”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 누군가를 선택하거나 임명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하느님의 좋은 소식 즉 하느님의 왕국에 관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얻게 되는 구원에 관한 소식을 전하라는 임명을 받았다는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한다. (눅 4:18, 43; 행 5:42; 계 14:6) 또한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좋은 소식”, (롬 1:9) “그리스도에 관한 좋은 소식” (롬 15:19) 같은 표현들도 사용한다.
성경: 여기서는 영감받은 히브리어 성경을 가리킨다. 이 구절과 일치하게 「신세계역」의 제목에는 “성경”이라는 표현이 들어 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영감받은 히브리어 성경이 “거룩한 기록들”로 언급되기도 한다. (딤후 3:15, 16) 때때로 “율법”(요 10:34; 12:34; 15:25; 고전 14:21)이나 “율법과 예언서”(마 7:12; 눅 16:16)라는 표현도 넓은 의미로 사용되어 히브리어 성경 전체를 가리킨다.—마 22:40. 마 5:17; 요 10:34 연구 노트 참조.
육체로는: “육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사르크스)는 여기서 친족 관계, 육적(지상의) 혈통을 의미하며 인간으로서 예수의 혈통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마리아는 유다 지파에 속해 있었으며 다윗의 후손이었으므로, 그의 아들인 예수께서는 육체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나셨다고 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어머니의 혈통으로 볼 때 “다윗의 뿌리이고 그의 자손”이셨으므로 “조상 다윗의 왕좌”에 대한 혈통상의 권리를 가지고 계셨다. (계 22:16; 눅 1:32) 예수의 양아버지인 요셉도 다윗의 후손이었으므로 예수께서는 다윗의 왕좌에 대한 법적 권리도 가지고 계셨다.—마 1:1-16; 행 13:22, 23; 딤후 2:8; 계 5:5.
자손: 또는 “후손”. 직역하면 “씨”.—부록 가2 참조.
거룩함의 영: 하느님의 성령을 가리킨다. “거룩함의 영”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표현은 시 51:11과 사 63:10, 11에서 “성령”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표현(직역하면 “거룩함의 영”)과 구성이 비슷하다. 여호와의 영 즉 활동력은 그분의 통제를 받고 있으며 언제나 그분의 목적을 이룬다. 그것은 깨끗하고 정결하고 신성하며 하느님께서 사용하시도록 따로 구별되어 있다.
선언되셨습니다: 또는 “증명되셨습니다; 확정되셨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되신 일을 통해 하느님의 아들로 선언되셨다고 말한다. 행 13:33에서 바울은 예수께서 부활되심으로 시 2:7의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설명했다. 시 2:7은 예수께서 침례받으셨을 때에도 성취되었다. 그때 그분의 아버지 여호와께서는 ‘이는 내 아들이다’라고 선언하셨다.—마 3:17 연구 노트 참조.
우리: 또는 “나”. 고대에 필자들은 저술물에서 자신을 가리킬 때 복수형 대명사를 사용하기도 했다. 여기서 바울도 자기 자신을 가리켜 “우리”라고 한 것 같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언급하면서 자신이 이방 사람들을 위한 사도가 되라는 특별한 임명을 받았다고 말한다. 또한 바울이 편지를 보낸 사람으로 언급한 사람은 그 자신뿐이며 (롬 1:1) 그는 롬 1:8-16에서 일인칭 단수 대명사를 사용한다. 따라서 문법적으로는 “우리”에 다른 사람들도 포함될 수 있지만 바울이 다른 사도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가리켜 이 표현을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이치적일 것이다.
거룩한 자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회중들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적 형제들을 가리킬 때 “거룩한 자(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행 9:13; 26:10; 롬 12:13; 고후 1:1; 13:13) 이 표현은 “영원한 계약의 피” 즉 예수께서 흘리신 피를 통해 새 계약을 맺음으로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게 된 사람들을 가리킨다. (히 10:29; 13:20) 따라서 그들은 성별되고 깨끗해졌으며 하느님에 의해 “거룩한 자들”이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사망한 뒤부터가 아니라 지상에서 성별된 행로를 시작할 때부터 그들을 거룩하다고 여기신다. 따라서 어떤 개인이나 단체가 사람들을 “거룩한 자들”(일부 성경 번역판에서는 “성도”)이라고 선언할 만한 성경적 근거는 없다. 베드로는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므로 그들도 “거룩해야 한다”고 말한다. (벧전 1:15, 16; 레 20:7, 26) “거룩한 자들”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거룩한 자들”이라고 불리기 500여 년 전에, 하느님께서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왕으로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알려 주셨다.—단 7:13, 14, 18, 27.
로마의 모든 사람: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기원 33년 오순절에 “로마에서 온 체류자들, 곧 유대인들과 개종자들”은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성령이 부어진 결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다. 그중 일부 사람은 그때 침례받은 3000명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행 2:1, 10, 41) 아마도 그들은 로마로 돌아와 그리스도인 회중을 구성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 회중의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서 두루 이야기되고 있다”고 말했다. (롬 1:8) 기원 1세기에 태어난 로마 역사가들인 타키투스(「연대기」 The Annals, XV, XLIV)와 수에토니우스(「황제들의 생애」 The Lives of the Caesars, 네로, XVI, 2)도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언급했다.
과분한 친절: 또는 “관대한 친절”. (용어 설명 참조) 바울은 “과분한 친절”(그리스어 카리스)을 다른 어떤 성경 필자보다도 많이 언급했는데, 14통의 편지에서 약 90회나 언급했다. 예를 들어 그는 히브리서를 제외한 모든 편지의 서두 인사말에서 하느님이나 예수의 과분한 친절을 언급했으며, 각 편지의 맺음말에서도 그 표현을 사용했다. 다른 성경 필자들도 자신의 기록을 시작하고 끝맺을 때 그와 비슷하게 “과분한 친절”을 언급했다.—벧전 1:2; 벧후 1:2; 3:18; 요2 3; 계 1:5; 22:21. 행 13:43 연구 노트 참조.
과분한 친절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자신이 쓴 편지들 가운데 11통의 편지에서 이러한 인사말을 사용한다. (고전 1:3; 고후 1:2; 갈 1:3; 엡 1:2; 빌 1:2; 골 1:2; 살전 1:1; 살후 1:2; 딛 1:4; 몬 3) 그는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들에서도 매우 비슷한 인사말을 사용했지만 그 인사말에는 “자비”라는 특성이 함께 언급되어 있다. (딤전 1:2; 딤후 1:2) 학자들은 바울이 일반적으로 인사말로 사용되는 단어(“안부를 전합니다!”, 카이레인)가 아니라 그와 발음이 비슷한 다른 그리스어 단어(카리스)를 자주 사용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들은 바울이 그렇게 함으로 회중들이 “과분한 친절”을 온전히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행 15:23 연구 노트 참조) “평화”를 언급한 것은 유대인들이 인사할 때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샬롬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막 5:34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과분한 친절과 평화”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대속을 통해 여호와 하느님과 누리게 된 관계를 강조한 것 같다. 바울은 관대한 친절과 평화의 근원으로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분하여 언급한다.
내 영으로: 이 문맥에서 “영”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프뉴마)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와 그 사람이 특정한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가리키는 것 같다. (용어 설명 “영” 참조) 여기서 바울은 그의 전부를 다 바쳐 봉사를 드린다는 의미로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이 표현은 “마음을 다해”로 번역할 수도 있다.
신성한 봉사를 드리는: 또는 “섬기는(숭배하는)”. 그리스어 동사 라트류오는 기본적으로 “섬기다” 또는 “봉사하다”를 의미한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나 그분의 숭배와 관련이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마 4:10; 눅 2:37; 4:8; 행 7:7; 빌 3:3; 딤후 1:3; 히 9:14; 12:28; 계 7:15; 22:3) 여기서 바울은 신성한 봉사를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좋은 소식과 연관 짓는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이 이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것은 신성한 봉사 즉 여호와께 숭배를 드리는 행동이다.
영적인 선물: 여기서 “선물”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카리스마는 흔히 “과분한 친절”로 번역되는 카리스와 어근이 같다. 카리스마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17번 나오며, 받을 만한 노력도 하지 않았고 받을 자격도 없는데 하느님의 관대한 또는 과분한 친절 덕분에 받게 되는 선물이나 은혜나 축복을 의미한다. 카리스마가 영에 의한 초자연적인 선물을 가리키는 데 쓰이기도 하지만 (고전 12:4, 9, 28-31) 이 구절의 문맥과 바울이 “영적인”(그리스어 프뉴마티코스)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한 것을 볼 때 그가 형제 자매들을 영적으로 돕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은 그들의 믿음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강화하여 그들이 굳건하게 되도록 돕기를 원했다. 바울이 표현한 것처럼, 격려를 주고받아 다른 사람의 믿음을 강하게 해 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벧전 4:10, 11 비교.
격려를 주고받으려는: 직역하면 “함께(서로) 격려(위로)를 받으려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그리스어 신파라칼레오마이는 이 구절에만 나온다. 바울은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동사인 파라칼레오를 자주 사용했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곁으로 부르다”를 의미하며 “격려하다; 위로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롬 12:8; 고후 1:4; 2:7; 7:6; 살전 3:2, 7; 4:18; 5:11; 히 3:13; 10:25) 여기서 바울은 앞으로 있을 자신의 방문을 통해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유익을 얻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회중이 서로의 믿음의 표현을 통해 격려를 주고받게 될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형제 여러분: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 남자를 “형제”로, 그리스도인 여자를 “자매”로 구분하여 언급하기도 한다. (고전 7:14, 15) 하지만 이 구절을 비롯한 여러 구절에서는 “형제들(형제 여러분)”이라는 단어를 남자와 여자 모두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한다. “형제들”이라는 단어는 남자와 여자 모두가 포함된 집단을 부르는 말로 흔히 사용되었다. (행 1:15; 살전 1:4) 이 단어는 대부분의 영감받은 그리스도인 편지에서 이러한 의미로 사용된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형제 여러분”이라는 표현을 그리스도인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여러 번 사용한다.—롬 7:1, 4; 8:12; 10:1; 11:25; 12:1; 15:14, 30; 16:17.
여러분 가운데서도 얼마의 열매를 거두려고: “나의 일(나의 전파 활동)이 여러분 가운데서도 좋은 결과를 거두게 하려고”라는 의미이다. 농사와 관련된 그리스어 카르포스(“열매”)는 성경에 자주 나온다. 이 단어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 영적 성장과 번영을 가리킨다. (마 3:8; 13:8; 요 15:8, 16; 빌 1:11, 22) 바울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영의 열매”를 더 온전히 맺는 모습을 보기를 원한다는 의미로 이 말을 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의 말에는 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다. (갈 5:22, 23; 롬 1:11, 12) 다른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라는 표현을 볼 때, 바울이 로마에서 그리고 아마도 그보다 먼 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기를 원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롬 15:23, 24.
그리스인: 이 문맥에서 “그리스인”이라는 단어는 “외국인”과 대비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반드시 그리스에서 태어난 사람이나 조상이 그리스인인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 출신이라 하더라도 그리스어를 사용하거나 그리스 문화에 영향을 받은 사람을 가리킬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인과 외국인 모두에게’라는 표현을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표현으로 사용한 것 같다.—이 구절에 나오는 외국인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외국인: 또는 “비그리스인”. 일부 오래된 성경 번역판은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바르바로스를 “미개인; 야만인”을 뜻하는 단어로 번역한다. 이 그리스어에 들어 있는 “바르 바르”라는 표현은 말을 더듬거나 옹알거리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원래 그리스어 바르바로스는 그리스인들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외국인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던 말이었다. 이 단어에는 미개하거나 교양이 없거나 예의가 없다는 의미가 들어 있지 않았으며, 경멸하는 느낌도 담겨 있지 않았다. 바르바로스는 단지 그리스인이 아닌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요세푸스와 같은 일부 유대인 저술가들은 자신이 바르바로스로 불린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일 때까지 자신들을 바르바로스라고 불렀다. 따라서 바울이 모든 사람을 포괄하여 ‘그리스인과 외국인 모두에게’라고 말했을 때 그가 사용한 그리스어 바르바로스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지 않았다.
빚진 사람입니다: 또는 “의무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빚진 사람”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나 빚을 지는 것과 관련된 다른 표현들은 금전적인 빚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의무나 책임을 가리키는 폭넓은 의미로도 사용된다. 요 13:14(연구 노트 참조)에서는 “빚을 지다; 의무가 있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동사가 “~어야 합니다”로 번역되었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이 만나는 각 사람에게 빚을 지고 있으며 그 사람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야만 그 빚을 갚을 수 있다고 밝힌다. (롬 1:15) 바울은 자신이 받은 자비에 대해 깊이 감사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로부터 유익을 얻도록 도와야 한다고 느꼈다. (딤전 1:12-16) 사실상 그는 ‘하느님께서 인류를 위해 하신 일과 나 자신을 위해 해 주신 일을 생각해 볼 때, 나에게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소식을 열심히 전파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라고 말한 셈이다.
그리스인: 기원 1세기 당시에는 그리스어 헬렌(“그리스인”)이 그리스에서 태어난 사람이나 조상이 그리스인인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여기서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그리스인”과 “유대인”을 함께 언급하는데, “그리스인”이라는 표현을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민족을 가리키는 넓은 의미로 사용한 것 같다. (롬 2:9, 10; 3:9; 10:12; 고전 10:32; 12:13) 바울이 그렇게 한 것은 분명 로마 제국 전역에서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가 널리 퍼져 있고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인해 살 것이다: 롬 1:16, 17은 로마서의 주제 성구로 불리기도 한다. 이 구절에 로마서의 중심 사상 즉 ‘하느님께서 편파적이지 않으시며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신다’는 사상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롬 1:16) 로마서 전체에서 바울은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믿음”과 관련된 그리스어 표현들을 약 60회 사용한다. (예: 롬 3:30; 4:5, 11, 16; 5:1; 9:30; 10:17; 11:20; 12:3; 16:26) 이 구절 즉 롬 1:17에서 바울은 합 2:4을 인용한다. 또한 다른 두 통의 편지에서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을 나타내도록 권고하는 문맥에서 합 2:4을 인용한다.—갈 3:11; 히 10:38. 이 구절에 나오는 믿음으로 인해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믿음으로 인해: 여기서 바울이 인용한 합 2:4에는 “충실함으로 살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많은 언어에서 충실과 믿음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표현이다. “충실함”으로 번역된 히브리어(에무나)는 히브리어 아만(충실하다; 신뢰할 만하다)에서 나온 것인데, 아만에도 믿음을 갖는다는 사상이 들어 있다. (창 15:6; 출 14:31; 사 28:16) 따라서 합 2:4(각주 참조)의 내용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바울은 합 2:4의 「칠십인역」 표현을 인용한 것일 수 있는데, 「칠십인역」에는 그리스어 피스티스가 사용되었다. 이 그리스어는 주로 확신, 신뢰심, 굳은 신념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대부분 “믿음”으로 번역되지만 (마 8:10; 17:20; 롬 1:8; 4:5) 문맥에 따라 “충실(성)”이나 “신뢰할 만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마 23:23, 각주; 롬 3:3; 딛 2:10) 히 11:1에서 바울은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믿음”(그리스어 피스티스)을 정의한다.—이 구절에 나오는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인해 살 것이다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기록된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영감받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인용할 때 이 표현(그리스어 카토스 게그랍타이. 게그랍타이는 “쓰다”를 의미하는 그라포의 한 형태)을 자주 사용했다. (롬 2:24; 3:10; 4:17; 8:36; 9:13, 33; 10:15; 11:26; 15:3, 9, 21; 고전 1:31; 2:9; 고후 8:15) 로마서에서 바울은 히브리어 성경을 50회 이상 인용했으며 그 밖에도 여러 차례 히브리어 성경을 직접적으로 또는 암시적으로 언급했다.
불경건: 또는 “불경”. 성경에서 그리스어 아세베이아와 그와 어근이 같은 다른 표현들은 하느님에 대한 숭상심이 없거나 그분에게 도전하기까지 하는 것을 가리킨다. (유 14, 15) 아세베이아의 반대말인 유세베이아는 “경건한 정성; 경건함”으로 번역된다. 그러한 숭상심은 하느님을 위해 봉사하고 그분께 정성을 바치고 그분을 숭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행 3:12; 딤전 2:2; 4:7, 8; 딤후 3:5, 12.
세상이 창조된: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그리스어 코스모스(“세상”)는 일반적으로 인류 전체나 그 일부를 가리킨다. 이 문맥에서도 바울은 인류가 창조된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인류가 창조됨으로써, 보이는 창조물을 관찰하여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특성들을 깨달아 알 수 있는 지성을 가진 존재가 비로소 지상에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어 코스모스는 세속 문헌에서 우주와 창조물 전체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바울은 그리스 사람들에게 연설할 때 행 17:24에서 그러한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한 것 같다.—행 17:24 연구 노트 참조.
신성: 또는 “신격”. 그리스어 테이오테스는 테오스(하느님)와 어근이 같은 단어이다. 문맥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바울은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물질계의 창조물이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해 준다고 말한다. 하느님의 목적, 그분의 이름, 그분의 성품의 많은 부면을 알려면 성경을 살펴보아야 한다. 하지만 창조물은 그분의 보이지 않는 특성들(직역하면 “그분의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를 제시한다. 그러한 특성들 가운데는 그분이 우주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데 사용하시는 영원한 능력이 포함된다. 물질계의 창조물은 창조주께서 “신성” 즉 신격을 가진 분, 다시 말해 참으로 하느님이시며 우리의 숭배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증거를 제시한다.—계 4:11.
변명할 수 없습니다: 또는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직역하면 “변호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어 아나폴로게토스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설득력 있는 증거를 전혀 제시할 수 없는 상황을 가리키는 법률 용어였다. 이 구절에서는 이 단어가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계속 제시되어 온 증거는 하느님께서 존재하신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그분의 특성들을 분명히 볼 수 있으므로, 하느님에 대한 진리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거나 그에 대해 타당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다. 바울은 이어서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을 통해 그분의 특성들을 깨달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깨달아 알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정신”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누스와 어근이 같은 단어로, 정신으로 파악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 번역판의 표현처럼, 하느님의 특성들은 “이성의 눈으로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창조 작품을 보고 그에 대해 묵상함으로 창조주의 많은 특성을 유추해 낼 수 있다. 그러한 이해를 얻는 것에 더해, 성경을 연구해서 창조주의 생각과 목적에 대한 자세한 지식을 얻는 것은 강한 믿음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 더러움에 내주시어: 바울은 이 말을 할 때 배교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염두에 두었을 수 있다. 그들은 하느님과 그분의 의로운 법령에 대해 알고 있던 진리를 오랫동안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과 바꾸었다.” (롬 1:16, 21, 25, 28, 32)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우상 숭배와 성적 부도덕에 대해 미리 구체적으로 경고하셨지만, (레 18:5-23; 19:29; 신 4:15-19; 5:8, 9; 31:16-18) 그들은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따라 만든 이교 신들이나 여신들을 숭배하는 일에 거듭 빠져들었다. (민 25:1-3; 왕상 11:5, 33; 12:26-28; 왕하 10:28, 29. 계 2:14 비교)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더러움에 내주셨다.” 다시 말해 더러운 행동을 계속하도록 내버려 두셨다. 바울이 한 말(롬 1:24-32)은 이방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이방 사람들 역시 동물과 사람을 숭배하는 것이 전혀 이치에 맞지 않으며 하느님의 분노를 사는 일이라는 점을 이해했어야 했다.—롬 1:22.
거짓: 우상 숭배를 가리킨다. 우상은 거짓이다. (렘 10:14) 하느님의 창조 작품은 그분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증언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에 대한 진리를 억눌렀다. (롬 1:18, 21, 25) 그들은 하느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에 대한 진리와 일치하게 그분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만들어 숭배했다. 그들은 거짓된 우상 숭배에 빠짐으로 온갖 타락한 행위를 저지르게 되었다.—롬 1:18-31.
아멘: 또는 “그렇게 되소서”. 그리스어 아멘은 히브리어 아멘을 음역한 단어이다. 히브리어 아멘은 “충실하다, 신뢰할 만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어근 아만에서 나온 것이다. (용어 설명 참조) 사람들은 맹세나 기도 또는 다른 사람의 말에 동의할 때 “아멘”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의 필자들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표현을 하면서 자신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 “아멘”을 자주 사용했다. 바울도 여기서 “아멘”을 그렇게 사용한 것이다. (롬 16:27; 엡 3:21; 벧전 4:11) 또는 상대방이 하느님의 은혜를 받기를 바라는 마음을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 “아멘”을 사용하기도 했다. (롬 15:33; 히 13:20, 21) “아멘”은 앞서 나온 표현에 필자가 진심으로 동의한다는 것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었다.—계 1:7; 22:20.
치욕스러운 성욕: 그리스어 파토스는 강한 욕구, 절제되지 않은 욕망을 가리킨다. 문맥을 볼 때 성적 욕망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러한 강한 욕망을 “치욕스럽다”(그리스어 아티미아, “불명예; 수치”)고 한 이유는 그러한 욕망이 사람에게 치욕 즉 불명예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관계: 직역하면 “자기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것”. “자연스러운 성관계”를 가리킨다. “자연스럽다”로 번역된 그리스어(피시코스)는 자연에 기본적으로 확립되어 있는 사물의 질서나 기능과 일치한 것을 가리킨다. 바울은 롬 1:26, 27의 논증을 뒷받침하기 위해 창 1:27의 창조 기록에 나오는 표현을 언급한 것일 수 있다. 바울은 “남자”와 “여자”에 해당하는 일반적인 그리스어 단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성(性)의 측면을 더 강조한, “남성”과 “여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 단어들은 「칠십인역」의 창 1:27과 그 구절을 인용한 마 19:4과 막 10:6에도 사용되었다. 창세기 기록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첫 인간 부부를 축복하시고 그들에게 번성하고 “땅을 가득 채우라”고 말씀하셨다. (창 1:28) 동성애 행위는 인간을 위한 창조주의 원래 마련이 아니었으며 그 행위로는 자손을 출산할 수 없기 때문에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성경에서는 동성애 행위를 반역한 천사들 즉 악귀들이 노아 시대의 대홍수 전에 여자들과 가진 성관계에 비한다. (창 6:4; 19:4, 5; 유 6, 7) 하느님께서는 그런 행위들을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신다.—롬 1:27 연구 노트 참조.
자연스러운 관계: 직역하면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것”. 또는 “자연스러운 성관계”. “자연스럽다”로 번역된 그리스어(피시코스)는 자연에 기본적으로 확립되어 있는 사물의 질서나 기능과 일치한 것을 가리킨다. 이 구절과 앞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동성애 행위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목적에 어긋나는 것이다. (창 1:27. 롬 1:26 연구 노트 참조) 동성애에 대한 하느님의 견해가 히브리어 성경의 레 18:22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 금지 규정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도덕에 관한 많은 법들 중 하나였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 주변 민족들 가운데서는 모세 율법에서 금지하는 동성애, 근친상간, 수간과 같은 행위가 널리 퍼져 있었다. (레 18:23-25)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도 하느님께서 동성애를 금하신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사실은 유대인이든 비유대인이든 그러한 행위를 하는 것을 그분이 어떻게 여기시는지를 보여 준다.—고전 6:9, 10.
음탕한 일을 해서: 또는 “불미스러운(부끄러운 줄 모르는) 행동을 해서”.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는 치욕스러운 행동을 의미한다.
응분의 벌: 또는 “충분한 보응”.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는 합당한 정도로 받는 대가를 의미한다. 이 구절에서는 적절한 처벌이나 좋지 않은 결과를 가리키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고후 6:13에서는 “우리가 여러분에게 한 것처럼”(이전 「신세계역」에서는 “그 보답으로”)이라는 표현에 이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합당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가리킨다.
탐욕: 또는 “탐심”. 그리스어 플레오넥시아의 문자적 의미는 “더 갖고 있는 것”이며, 더 갖고 싶어 하는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을 뜻한다. 이 그리스어 단어는 엡 4:19; 5:3에도 나온다. 바울은 골 3:5에서 “탐욕”에 대해 언급한 다음 “탐욕은 우상 숭배”라고 덧붙인다.
수군거리고: 또는 “남의 이야기를 하고”. 이 그리스어 단어는 습관적으로 해로운 남의 이야기를 하면서 어쩌면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리기까지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고후 12:20 연구 노트 참조.
합의한 일을 지키지 않고: 또는 “어떤 합의든 반대하고”. 이 그리스어에는 합의한 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의미에 더해, 믿을 수 없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의미가 들어 있을 수 있다. 한 참고 자료에 따르면, 이 단어는 “상대방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협상이나 대화를 통해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
비정하고: 또는 “본연의 애정이 없고”. 이 표현은 그리스어 아스토르고스를 번역한 것이다. 아스토르고스는 “없다”를 의미하는 접두사 아와 “본연의 애정”을 의미하는 스토르게가 결합된 단어이다. 이 단어는 가족 간의 본연의 애정이 없는 것, 특히 부모가 자녀에게 또는 자녀가 부모에게 본연의 애정이 없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가족에게 본연의 애정이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바울의 말과 일치하게,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역사가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거나, 자녀가 연로한 부모를 돌보지 않거나, 허약하거나 기형인 아이를 비롯해 원치 않는 아이를 부모가 죽게 한 사례들이 있었다. 바울은 이 구절 즉 롬 1:31에서 사람들이 원래의 완전성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했다. 딤후 3:3에서는 이 위급한 마지막 날에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묘사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했다.
미디어
이 그림은 로마나 로마 인근의 항구 도시 오스티아에 있던 대형 공동 주택의 모습을 추정하여 그린 것이다. 그러한 주택은 여러 층으로 되어 있었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주택은 중앙에 뜰이 있는 구조였으며 사면이 거리에 접해 있었다. 전형적인 공동 주택의 경우 1층에 있는 방들은 상점으로 세를 주었으며, 각 상점에는 주거 공간이 딸려 있고 거리 쪽으로 입구가 있었다. 2층에는 방이 여러 개 있는 집들이 있었는데,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세 들어 사는 경우가 많았다. 높은 층들에 있는 방은 크기가 다양했으며, 작은 방은 임대료가 쌌지만 생활하기가 불편했다. 높은 층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 공용 수조에서 물을 길어 오고 대중목욕탕을 이용해야 했다. 로마 사람들 중 다수가 그림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건물에 살았다. 분명 로마의 일부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집에서 살았을 것이다.
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는 테베레강 가의 일곱 개의 언덕이 있는 지역에 세워졌다. 제국이 번영함에 따라 도시도 확장되었다. 기원 1세기 중반에 로마의 인구는 100만 명에 달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곳에는 규모가 큰 유대인 공동체도 있었던 것 같다. 로마에 있던 유대인들과 개종자들 중 일부가 기원 33년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왔다가 사도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전파하는 내용을 듣고 제자가 되었던 것 같다. 이 새로운 제자들이 로마로 돌아가면서, 로마에도 처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있게 되었으며 좋은 소식이 전해지게 되었다. (행 2:10) 사도 바울은 기원 56년경에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서 두루 이야기되고 있다”고 말했다. (롬 1:7, 8) 이 영상은 바울 시대에 로마의 모습이 어떠했을지를 추정해서 만든 것이다.
1. 아피아 가도
2. 막시무스 대경기장
3. 팔라티누스 언덕과 카이사르의 궁전
4. 카이사르 신전
5. 극장
6. 판테온(만신전)
7. 테베레강
사진에 나오는 것은 로마의 항구 도시 오스티아에 있던 회당의 유적이다. 기원 1세기 후반에 지어진 이 건물은 후에 개축되고 보수되긴 했지만 원래 회당으로 지어진 것 같다. 이곳에 회당이 있는 것을 볼 때 로마 지역 일대에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거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원 49년이나 50년경에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로마 도시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하기는 했지만 그 지역에 유대인 공동체가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행 18:1, 2) 클라우디우스가 사망한 기원 54년 이후에 많은 유대인들이 로마 도시로 돌아왔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쓴 기원 56년경에, 그곳 회중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 편지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관련된 문제를 다루면서 그들이 연합을 이루도록 교훈했다.—롬 1:15, 16.
1. 로마
2. 오스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