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2:1-21

12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나는 하느님의 동정심으로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거룩하고+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실 만한+ 산 희생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이지력으로 드리는 신성한 봉사입니다.+ 2  더는 이 세상 제도를 따라 틀 잡히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되어+ 하느님의 선하고 받아들이실 만하고 완전한 뜻이 무엇인지 확인하십시오.+ 3  나에게 베풀어진 과분한 친절을 통해서 그곳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말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 건전한 정신으로+ 생각하십시오.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지만+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5  이와 같이 우리도 수가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며 각각 서로에게 속한 지체입니다.+ 6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베풀어진 과분한 친절에 따라 서로 다른 선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언이면 믿음의 분량대로 예언을 하고, 7  봉사의 직무이면 봉사의 직무에 힘쓰고,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에 힘쓰고,+ 8  격려하는 사람이면 격려하는 일을 하고,+ 나누어 주는 사람이면 후하게 그 일을 하고,+ 주재하는 사람이면 부지런히* 그 일을 하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면 즐겁게 그 일을 하십시오.+ 9  여러분의 사랑에 위선이 없게 하십시오.+ 악한 것을 몹시 싫어하고+ 선한 것을 굳게 붙잡으십시오.+ 10  형제 사랑 안에서 서로 부드러운 애정을 가지십시오.+ 서로 존중하는 면에서 솔선하십시오.+ 11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십시오.*+ 영으로 타오르십시오.+ 여호와를 섬기십시오.+ 12  희망 가운데 기뻐하십시오. 환난 중에 인내하십시오.+ 꾸준히 기도하십시오.+ 13  거룩한 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어 주십시오.+ 후대에 힘쓰십시오.+ 14  박해하는 사람들을 계속 축복하십시오.+ 축복하고 저주하지 마십시오.+ 15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십시오.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16  자신을 보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보십시오. 높은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 것에 이끌리십시오.+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이 좋게 여기는 일을 고려하여 행하십시오. 18  가능하다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19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하지 말고 진노에 맡겨 두십시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복수는 나의 것이니, 내가 갚아 주겠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0  또 “네 원수가 굶주리거든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함으로 너는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을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21  악에게 지지 말고 계속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각주

또는 “나누어 주신”.
또는 “진지하게”.
또는 “일을 할 때 빈둥거리지 마십시오.”
또는 “거만한 생각을 품지; 거만하게 되지”.

연구 노트

그러므로: 바울은 이 편지에서 지금까지 자신이 논한 내용과 이제 하려고 하는 말을 연관시키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한 것 같다. 그는 사실상 “앞서 설명한 것을 근거로, 내가 이제부터 하는 말대로 행할 것을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바울은 앞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아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 통치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다고 설명했다. (롬 1:16; 3:20-24; 11:13-36) 12장부터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하느님께 순종하고 자기희생적인 삶을 삶으로 믿음과 감사를 표현하도록 권한다.

형제 여러분: 롬 1:13 연구 노트 참조.

여러분의 몸을 ··· 바치십시오: 모세 율법 아래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동물을 잡아 그 죽은 동물을 희생으로 바쳤다. 그렇게 하고 나면 그 동물을 다시 바칠 수는 없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몸 즉 전부를 계속해서 산 희생 제물로 바친다. 그러한 “희생 제물”에는 그의 정신과 마음과 힘 즉 그의 모든 신체적, 정신적 기능이 포함된다. 그것은 생활의 모든 부면이 관련된 전적인 헌신이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거룩하고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실 만한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덧붙인다. 이 표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리를 절거나 결함이 있는 동물과 같이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시지 않는 동물을 바쳐서는 안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을 수 있다. (레 22:19, 20; 신 15:21; 말 1:8, 13) 그와 비슷하게, 그리스도인도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시는 희생을 바치려면 그분이 승인하실 만한 깨끗한 생활을 해야 한다.

이지력으로: “이지력”이라는 표현은 그리스어 로기코스를 번역한 것이다. 이 단어는 이 문맥에서 “논리적”이거나 “이성적”이거나 “지성 있는” 방식으로 신성한 봉사를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한 사전에서는 이 단어를 “주의 깊이 생각하는, 신중한”으로 정의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 원칙을 주의 깊이 고려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성경 원칙들이 서로 어떤 관련이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내리고자 하는 결정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여호와의 승인과 축복을 받게 해 주는 균형 잡힌 결정을 내리기 위해 하느님께서 주신 이지력 즉 사고력을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숭배 방식은 그리스도인이 된 많은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것이었다. 이전에 그들은 전통에 근거한 많은 규칙에 따라 살았기 때문이다.

신성한 봉사: 또는 “숭배”.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라트레이아는 숭배 행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명사는 모세 율법에 근거한 유대교 숭배 제도와 관련하여 사용되기도 한다. (롬 9:4; 히 9:1, 6) 하지만 여기서 바울은 이 단어를 그리스도인이 드리는 숭배를 가리키는 데 사용한다.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그리스어 동사 라트류오(“신성한 봉사를 드리다”)는 모세 율법에 따라 숭배를 드리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하고 (눅 2:37; 히 8:5; 9:9) 그리스도인이 숭배를 드리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빌 3:3; 딤후 1:3; 히 9:14; 계 7:15) 롬 1:9에서 바울은 자신이 드리는 신성한 봉사의 중요한 부면이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좋은 소식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 다시 말해 이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밝혔다.

더는 ··· 틀 잡히지 말고: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는 “본이나 틀에 따라 모양을 만들다”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기름부음받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말을 하면서 이미 하고 있는 행동을 그만두는 것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동사 시제를 사용했다. 이것을 볼 때 로마 회중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당시 세상 제도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롬 1:7) 당시 기원 56년경에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세상 제도란 로마 세계의 특징이 되는 표준, 관습, 행동 방식, 옷차림 등을 가리키는 것이었다.—이 구절에 나오는 이 세상 제도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이 세상 제도: 그리스어 아이온의 기본 의미는 “시대”이다. 이 단어는 특정한 기간이나 시대를 구분 짓는 상태나 특징을 가리킬 수 있다. 이 문맥에서는 어떤 기간의 특징이 되는 표준, 관행, 행동 방식, 관습, 방식, 견해, 옷차림 등을 가리킨다.—용어 설명 “세상 제도(들)” 참조.

정신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되어: “변화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는 메타모르포오이다. (이 그리스어에서 나온 메타모르포시스[변신, metamorphosis]라는 단어가 여러 언어에서 사용된다.) 여기서 “정신”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기본적으로 사고력을 의미하지만, 사고방식이나 태도도 가리킬 수 있다. “정신을 새롭게 하다”라는 표현은 성향과 가장 깊이 자리 잡은 태도와 감정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변화가 얼마나 큰 것인지는 이 구절에서 “변화되다”로 번역된 동사의 용법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동사는 마 17:2과 막 9:2에서 예수께서 “변형되신” 것을 묘사할 때에도 사용되었다. (마 17:2 연구 노트 참조) 이 변형은 단지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철저한 변화였다. 당시 예수께서 아직 “하느님의 왕국”의 왕이 아니셨는데도 “권능을 가지고 이미 온 것”으로 묘사될 정도였다. (막 9:1, 2) 이 그리스어 단어는 고후 3:18에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묘사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신을 새롭게 하라고 권고한 것은 하느님의 생각과 일치한 완전히 새로운 사고방식을 갖기 위해 계속해서 내면을 변화시켜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확인하십시오: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 도키마조는 “시험을 통해 확인하다”라는 뜻으로, 무언가가 좋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의미로 자주 쓰인다. 실제로 이 단어는 일부 문맥에서 “승인하다”로 번역할 수도 있으며, “분별하다”로 번역되기도 한다. (롬 2:18; 고전 11:28) 따라서 바울은 맹목적으로 믿거나 무조건 의심하는 태도를 권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의 요구 조건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시험해 보라고 권한 것이다. 그 조건들을 이해하고 적용하고 그 유익을 경험해 봄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선하고 완전한 길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격려하는: 또는 “권고하는”. 그리스어 파라칼레오는 문자적으로 “곁으로 부르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폭넓은 뜻을 담고 있으며, “격려하다”(행 11:23; 14:22; 15:32; 살전 5:11; 히 10:25); “위로하다”(고후 1:4; 2:7; 7:6; 살후 2:17)를 의미할 수 있고 일부 문맥에서는 “강권하다; 권고하다”(행 2:40; 롬 15:30; 고전 1:10; 빌 4:2; 살전 5:14; 딤후 4:2; 딛 1:9, 각주)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권고와 위로와 격려가 이처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은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에게 권고할 때 결코 거칠거나 불친절한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려 주는 것일 수 있다.

격려하는 일: 또는 “권고하는 일”. 그리스어 명사 파라클레시스는 문자적으로 “곁으로 부르는 것”을 의미하며, 많은 경우 “격려”(행 13:15; 빌 2:1)나 “위로”(롬 15:4; 고후 1:3, 4; 살후 2:16)를 의미한다. 이 구절에는 파라클레시스와 그와 어근이 같은 동사 파라칼레오가 함께 사용되었는데, 대체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두 단어 모두 “권고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일부 문맥에서는 본문에 “권고”로 번역되었다. (살전 2:3; 딤전 4:13; 히 12:5) 이 그리스어 단어들이 권고, 위로, 격려라는 세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에게 권고할 때 결코 거칠거나 불친절한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려 주는 것일 수 있다.

나누어 주는: 또는 “도움을 베푸는”. 이 그리스어 동사는 눅 3:11; 롬 1:11; 엡 4:28에서도 “나누어 주다”로 번역되었으며, 살전 2:8에서는 “주다”로 번역되었다.

주재하는 사람: 또는 “인도하는 사람”. 그리스어 프로이스테미는 문자적으로 “앞에 서다”라는 의미로, 인도하거나 사회하거나 지도하거나 관심을 나타내거나 돌본다는 뜻이다.

몹시 싫어하고: 그리스어 아포스티게오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나온다. 이 단어는 “미워하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동사의 강조 형태이며, 따라서 “몹시(극도로) 미워하다”를 의미한다. 이것은 강한 혐오감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굳게 붙잡으십시오: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는 문자적으로 “접착제로 붙이다”를 의미하며 이 구절에서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진정한 사랑을 가진 그리스도인에게는 선한 것이 그의 성품에서 분리할 수 없는 부분이 될 정도로 단단히 접착되어 즉 달라붙어 있다. 동일한 그리스어가 남편과 아내가 강하게 결속되어 있는 것을 묘사하는 데도 사용되었다.—마 19:5 연구 노트 참조.

형제 사랑: 그리스어 필라델피아는 문자적으로 “형제에 대한 애정”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 단어를 롬 12:10; 살전 4:9; 히 13:1에서 세 번 사용한다. 베드로는 자신의 편지들에서 이 단어를 세 번 사용하는데 (벧전 1:22에 한 번, 벧후 1:7에 두 번) 세 경우 모두 “형제 애정”으로 번역되었다. 바울과 베드로가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을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친가족처럼 친밀하고 따뜻하고 강한 유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부드러운 애정을 가지십시오: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 필로스토르고스는 사랑과 애정을 의미하는 두 단어가 결합된 형태이다. 이 표현의 어근 중 하나인 스테르고는 가족들이 서로 느끼는 것과 같은 본연의 애정을 의미한다. 다른 한 어근은 친한 친구를 의미하는 필로스이다. (요 15:13-15) 이 두 단어가 합쳐진 필로스토르고스에는 가족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강한 애정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사실, 이 구절에 사용된 두 단어(“형제 사랑”으로 번역된 필라델피아와 “부드러운 애정”으로 번역된 필로스토르고스) 모두 가족들이 서로에게 당연히 나타내야 할 애정을 가리킨다. 바울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로 그처럼 강한 사랑과 애정을 나타내도록 권하고 있는 것이다.—이 구절에 나오는 형제 사랑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솔선하십시오: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프로에게오마이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나온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앞서가다”를 의미하며, 이 문맥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존중심을 나타내는 면에서 기꺼이 솔선하려는 태도를 뜻한다. 1세기 당시에 그리스와 유대와 로마 사회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존중을 받고 영예를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눅 20:46) 하지만 여기서 바울은 그와는 반대되는 견해, 즉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존중심을 나타내고 영예를 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이야기한 것이다. 사실,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바울이 사용한 이 표현에는 남을 존중하는 면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뛰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고 한다.

부지런히 일하십시오: 또는 “열심히 일하십시오”.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스푸데는 문자적으로 “움직임이나 행동이 재빠른 것; 서두르는 것; 속도”를 의미한다. (눅 1:39) 하지만 많은 문맥에서 이 단어는 “의무를 이행하는 데 진지하게 전념하는 것; 열의; 진지함; 기꺼이 하려는 태도; 열심”을 뜻한다. 이 그리스어는 롬 12:8의 “부지런히 그 일을 하고”라는 표현에도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히 6:11에서는 “부지런함”으로, 벧후 1:5에서는 “진지한 노력”으로 번역되었다.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동사 스푸다조는 “부지런히 노력하다”(벧후 1:10), “최선을 다하다”(딤후 2:15; 4:9, 21; 벧후 3:14)로 번역되었다.

영으로 타오르십시오: “타오르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끓다”를 의미한다. 이 구절에서는 하느님의 “영”(그리스어 프뉴마) 즉 활동력이 작용한 결과로 열심과 열정이 넘치거나 가득하다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영은 여호와의 뜻과 일치하게 행동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힘을 줄 수 있다. (막 1:12 연구 노트 참조) 하느님의 성령으로 “타오르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하게 하는 힘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옳은 일을 하려는 열심과 열정으로 가득 차게 할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 그리스어 표현이 단지 큰 열의와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의 관용구라고 생각하지만, 현재 본문의 번역 표현은 여기 나오는 “영”이 하느님의 성령을 가리킨다는 견해에 무게를 둔 것이다.—이 경우를 포함하여 성경을 번역할 때 어떤 원칙을 따랐는지 알아보려면 부록 가1 참조.

여호와: 현존하는 그리스어 사본들에는 이 부분이 “주”(토이 키리오이)로 되어 있지만, 부록 다에서 설명하듯이, 이 구절의 원문에 하느님의 이름이 사용되었으며 후에 “주”라는 칭호로 대치되었다고 볼 수 있는 타당한 이유들이 있다. 따라서 「신세계역」 본문에서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부록 다3 소개; 롬 12:11 참조.

여호와를 섬기십시오: 또는 “여호와의 종이 되십시오”.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동사(둘류오)는 종으로 일하는 것, 다시 말해 주인의 소유가 되어 그의 명령에 따라 일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그리스어 동사는 마 6:24(연구 노트 참조)에도 나오는데, 그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고 말씀하셨다. 「칠십인역」에서는 “여호와를 섬기라”고 권하는 비슷한 형태의 히브리어 표현들을 번역할 때 이 동사가 사용되기도 한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그 표현들을 보면 테트라그람마톤이 들어 있다.—삼상 12:20; 시 2:11; 100:2(99:2, LXX); 102:22(101:23, LXX).

후대에 힘쓰십시오: 또는 “후대의 길을 따르십시오”. “힘쓰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서두르다; 달리다”를 의미할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은 이 표현을 사용함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단지 요청받았을 때 후대하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고 권고한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후대를 추구하라고, 즉 솔선해서 자주 후대하라고 말한 것이다. “후대”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필록세니아는 문자적으로 “낯선 사람에 대한 사랑; 낯선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단어에는 후대가 단지 가까운 사람에게만 베푸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담겨 있을 수 있다. 바울은 히 13:2에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는데, 창세기 18장과 19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롯에 대한 기록을 언급한 것 같다. 그들은 낯선 사람들을 후대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천사들을 대접했다. 창 18:1-8에서는 아브라함이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달려갔고 서둘렀다고 알려 준다.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형용사 필록세노스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세 번 나오는데, 그 구절들에도 후대하라고 권고하는 내용이 나온다.—딤전 3:2; 딛 1:8; 벧전 4:9.

모든 사람이 ··· 여기는: 또는 “모든 사람이 보는 데서”. 여기서 그리스어 안트로포스(남자; 사람)는 남자와 여자 모두를 가리킨다.

진노에 맡겨 두십시오: 문맥을 볼 때 여기서 “진노”는 하느님의 진노를 가리킨다. 바울은 이어서 신명기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하느님의 말씀을 인용한다. “복수는 나의 것이며 보응도 나의 것이다.” (신 32:19-35) 롬 12:19의 그리스어 본문에는 “하느님의”라는 표현이 들어 있지 않지만, 많은 성경 번역자들은 사상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하느님의 진노”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은 의미인 것 같다. ‘하느님께 진노를 맡겨 두십시오. 언제 누구에게 복수할 것인지를 그분이 결정하게 하십시오.’ 이러한 교훈은 화를 터뜨리지 말라는 성경의 경고와 조화를 이룬다. (시 37:8; 전 7:9; 마 5:22; 갈 5:19, 20; 엡 4:31; 약 1:19) 분노를 제어해야 할 필요성이 성경 잠언에 거듭 강조되어 있다.—잠 12:16; 14:17, 29; 15:1; 16:32; 17:14; 19:11, 19; 22:24; 25:28; 29: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바울은 신 32:35을 인용한 것인데, 문맥을 보면 바울이 인용한 내용이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신 31:16, 19, 22, 30; 32:19-34. 마 1:22 연구 노트 비교. 부록 다1다3 소개; 롬 12:19 참조.

네 원수가 굶주리거든: 바울은 여기서 잠 25:21, 22을 인용하면서 앞서 하던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을 것이다: 이 표현은 바울이 잠 25:21, 22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 잠언의 내용과 바울이 그것을 적용하여 한 말은 고대에 광석을 제련하는 방법을 가리키는 것 같다. 광석을 제련할 때는 숯 더미 위에 광석을 놓고 그 위에도 숯을 쌓은 다음 열을 가했다. 그렇게 하여 광석을 녹이고 순수한 금속과 불순물을 분리시켰다. 그와 비슷하게, 적대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사람들에게까지 친절을 보이면 그들의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그들의 내면에 있는 좋은 특성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원수에게도 선을 행하라는 이러한 교훈은 성경의 다른 구절들에도 많이 나온다. (출 23:4, 5; 마 5:44, 45; 눅 6:27; 롬 12:14) 이러한 이해가 타당하다는 것은 바울이 인용한 잠언의 문맥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잠언의 그 구절에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에게 ‘여호와께서 상을 주실 것’이라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잠 25:22; 각주) 학자들은 이 비유적 표현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로마서의 문맥을 볼 때, 바울이 반대자들을 처벌하거나 그들에게 수치를 준다는 의미로 숯불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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