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레몬서 1:1-25
각주
연구 노트
빌레몬서: 이 편지의 원문에는 이러한 제목이 없었던 것 같다. 고대 사본들을 보면 이러한 제목이 나중에 붙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성경의 책들을 쉽게 구분하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기원 4세기에 만들어진 잘 알려진 사본인 시나이 책자본에는 이 편지의 끝에 “빌레몬에게”라는 제목이 들어 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갇혀 있는: 직역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갇힌 자인”. 바울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이유로 로마에 수감되어 있었다.—몬 9. 딤후 1:8 연구 노트 참조.
갇혀 있는: 또는 “갇힌 자인”. 바울은 자신이 쓴 많은 편지에서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언급한다. (예를 들어 고전 1:1; 엡 1:1; 골 1:1; 딤전 1:1; 딛 1:1 참조) 하지만 그는 여기서 그러한 칭호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직책 때문에 빌레몬이 자신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압력을 받기를 원치 않았던 것 같다. 바울은 적절하게도 자신을 “갇힌 자”로 언급한다. 한 참고 문헌에서는 이것이 “친구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빌레몬은 이 표현을 보고 바울이 얼마나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지 떠올렸을 것이며, 바울에게 동정심을 느껴 편지의 뒷부분에 나오는 그의 개인적인 부탁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수 있다.—몬 9-12, 17.
바울과 … 디모데가 … 편지합니다: 원문에는 “~가 … 편지합니다”에 해당하는 표현이 없다. 빌레몬서의 필자는 바울이지만 그는 다른 몇몇 편지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사말 가운데 디모데도 함께 언급한다. (고후 1:1; 골 1:1; 살전 1:1; 살후 1:1) 바울이 로마에서 첫 번째로 수감되어 있으면서 이 편지를 썼을 때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있었다. (빌 1:1 연구 노트 참조) 빌레몬은 디모데를 알고 있었을 수 있다. 골로새를 비롯해 에베소 주변 지역의 도시들에 좋은 소식이 전해졌을 때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 에베소에 있었기 때문이다.—행 19:22; 고전 4:17; 16:8-10. 부록 나13 참조. 또한 고전 16:9 연구 노트 참조.
우리의 사랑하는 동료 일꾼인 빌레몬: 빌레몬은 아시아 속주의 도시 골로새에 있는 회중에서 섬기는 그리스도인이었다. (골 4:9) 그는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알게 된 것 같다. (몬 19) 바울은 골로새에서 전파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동안 ‘아시아 속주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주의 말씀을 듣게’ 되었으며, 그때 빌레몬은 에베소에서 바울을 만났을 수 있다. (행 19:10) 빌레몬은 바울과 함께 선교 여행을 하지는 않았지만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에 참여했기 때문에 바울은 그를 동료 일꾼으로 여겼다.—롬 16:3; 고전 3:9 연구 노트 참조.
압비아 … 아르깁보: 빌레몬의 집에서 모인 회중 사람들 가운데 빌레몬 외에 이 편지에서 이름이 언급되는 사람은 이 두 사람뿐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압비아가 빌레몬의 아내이고 아르깁보가 그의 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더해 일부 학자들은 바울이 그들의 이름을 언급한 이유가 오네시모가 그들의 집안에서 일한 종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만일 그렇다면, 세 사람 모두 바울이 편지에서 다룬 문제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빌레몬의 가족이었든 그렇지 않든, 바울은 압비아와 아르깁보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바울은 압비아를 우리 자매라고 부름으로 그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나타냈다. 아르깁보는 골로새서에 나오는 아르깁보와 동일한 사람인 것 같다. (골 4:17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아르깁보를 우리의 동료 군인이라고 부름으로 그가 자신과 가까운 관계이며 그리스도를 충성스럽고 용감하게 섬기는 사람임을 강조한다.—빌 2:25 비교.
그대의 집에 모이는 회중: 이 편지의 내용은 바울이 주로 빌레몬에게 쓴 것이지만, 바울은 편지를 받는 대상에 압비아와 아르깁보와 회중 전체를 포함시킨다.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개인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골 4:15. 고전 16:19 연구 노트 참조) 이 편지 내용의 대부분은 바울이 직접적으로 빌레몬에게 하는 말이지만, 3, 22, 25절에 “여러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복수 대명사들이 사용되었다는 점은 유의할 만하다. 따라서 바울은 이 편지가 회중 전체에 낭독되기를 바랐을 수 있다. 회중 사람들은 이 편지에 담긴 중요한 교훈과 원칙을 통해 분명 유익을 얻었을 것이다.
과분한 친절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롬 1:7 연구 노트 참조.
나는 기도 가운데서 그대를 언급할 때에: 이 내용을 보면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었던 바울이 어떻게 기도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빌레몬을 위해 자주(“항상”) 기도했다. 또한 그의 기도에는 감사(“나의 하느님께 감사합니다”)와 개인적인 내용(“그대를 언급할 때에”)이 포함되었다. 바울이 “그대”에 해당하는 단수형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면 그가 친구인 빌레몬을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롬 1:9; 고전 1:4; 엡 1:16; 빌 1:3-5; 살전 1:2 비교.
그대의 믿음과 그대가 … 가진 사랑: 믿음과 사랑이라는 특성은 바울이 빌레몬에게 보낸 이 개인적인 편지의 중요한 주제이다. 바울은 다른 편지들에서도 이 두 가지 특성을 자주 연관 짓는다. (엡 1:15; 골 1:4) 여기서 그는 빌레몬(“사랑하는”이라는 의미)이 그 두 가지 특성을 나타내는 면에서 본이 된다고 칭찬한다. 빌레몬은 거룩한 자들 즉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대하는 방식을 통해 예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나타냈다.
형제여: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불렀다. (롬 16:1; 고전 7:15; 몬 1, 2) 그들은 친밀감이 느껴지는 이 표현들을 사용함으로,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연합되어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한 아버지 여호와의 영적 가족으로서 가까운 관계를 누린다는 것을 나타냈다. (마 6:9; 23:9; 엡 2:19 및 연구 노트; 벧전 3:8)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바울이 이 구절과 20절에서 빌레몬을 가리켜 사용한 “형제”라는 단어는 두 사람 사이의 따뜻한 우정을 나타내는 호격(어떤 대상을 부르는 말) 형태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일부 번역판에서는 이 단어를 “나의 형제여” 또는 “사랑하는 형제여”로 번역한다.
마음: 또는 “부드러운 애정”.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 스플랑크논은 문자적으로 몸속에 있는 장기들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마음”으로 번역되었다. 이 단어가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강렬한 감정 또는 그러한 감정이 생기는 곳을 가리킨다. (또한 고후 6:12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12절과 20절에서도 동일한 그리스어 단어를 사용한다. 한 참고 자료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바울이 이 짧은 편지에서 그 단어를 여러 번 사용한 것을 보면 그가 이 문제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무 거리낌 없이: 또는 “말의 큰 자유를 가지고; 매우 담대하게”. 그리스어 파레시아는 기본적으로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이 그리스도와 관련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가 예수에게 받은 사도로서의 권위를 언급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다음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바울은 그 권위를 사용해 빌레몬에게 명령하려 하지 않았으며, 동료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을 이용해 빌레몬이 원치 않는 일을 억지로 하게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몬 9, 14) 따라서 이 문맥에서 바울은 “아무 거리낌 없이”라는 표현을 친구 사이에 서로 솔직한 대화를 한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 같다.
오히려 사랑 때문에 그대에게 호소합니다: 앞서 바울은 빌레몬이 그리스도와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을 나타내는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고 언급했다. (몬 5, 7) 바울은 빌레몬이 그러한 사랑에서 우러나와 최선을 다해 친절을 나타낼 것이라고 확신했다. (몬 21) 하지만 그는 빌레몬에게 사랑을 나타내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구절에 관해 한 참고 자료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사랑을 나타내라고 권할 수는 있지만 강요할 수는 없다.”
나이가 많고: 바울은 이 편지를 쓸 당시 50대나 60대였을 수 있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단어는 “50-56세의 남자”를 가리키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 하지만 그리스어 「칠십인역」에서는 이 단어가 나이가 훨씬 많은 아브라함과 엘리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창 25:8; 삼상 2:22; LXX) 따라서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한 것만으로는 빌레몬에게 편지할 당시 그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 분명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바울의 삶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생각해 보면 그의 나이를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는 기원 34년경에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그로부터 약 25년 뒤인 기원 60-61년에 빌레몬에게 이 편지를 썼다. 개종할 무렵 대제사장이 바울을 알고 신임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그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을 것이다. 일부 사람들의 견해에 따르면 그는 예수께서 태어나신 때와 비슷한 시기에 혹은 그로부터 얼마 뒤에 태어났다.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를 일부 성경 번역판에서는 “대사이고”로 번역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단어를 “나이가 많고”와 같은 표현으로 번역하는 쪽을 선호하며, 눅 1:18과 딛 2:2에서도 그와 비슷하게 번역되었다.—고후 5:20 및 연구 노트; 엡 6:20 및 연구 노트 비교.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갇혀 있기: 몬 1 연구 노트 참조.
오네시모: 오네시모는 로마로 도망하기 전에 그리스도인인 그의 주인 빌레몬의 소유물을 훔쳤을 수 있다. 그 후 그는 로마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몬 18. 골 4:9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이 쓴 이 짧은 편지는 주로 오네시모에 관한 것이지만 그의 이름은 이 구절에서 처음으로 언급된다. 바울은 자신이 로마에 갇혀 있는 동안 비유적으로 말해 오네시모를 낳았다고 말한다. 그는 오네시모를 내 아들이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이 표현을 볼 때 오네시모가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바울이 큰 역할을 했을 수 있다.—고전 4:15; 갈 4:19 비교.
그가 전에는 …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오네시모의 삶이 어떻게 크게 달라졌는지 묘사한다. 오네시모는 ‘전에는 쓸모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주인에게서 도망쳤으며 그 전에도 신뢰하기 어려운 일꾼이었을 수 있다. (몬 18 연구 노트 참조) 하지만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므로 바울과 빌레몬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다.
쓸모없는 ··· 쓸모 있는: 오네시모라는 이름은 “이익이 되는; 쓸모 있는”을 의미한다. 몇몇 참고 자료에 따르면 이것은 기원 1세기에 흔한 이름이었다. 특히 종들 가운데는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라는 이름과 의미가 비슷한 “쓸모 있는”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재미있게 표현한 것 같다. 또한 그는 재치 있게도 “쓸모없는”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아크레스토스)와 “쓸모 있는”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유크레스토스)를 함께 사용했다. “쓸모 있는”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오랫동안 “쓸모없는” 사람이었다가 이제는 진정으로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 셈이다.—또한 골 4:9; 몬 10 연구 노트 참조.
내 심장과도 같은: 또는 “내가 부드러운 애정을 품고 있는”.—몬 7 연구 노트 참조.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냄으로 정부의 권위에 합당한 복종을 나타냈다. (롬 13:1) 바울이 종의 신분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합법적으로 자유롭게 될 수 있다면 “그 기회를 이용하라”고 권한 것은 사실이다. (고전 7:21)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이 노예 제도에 반대하여 정부의 법을 거스르는 것은 허용하지 않으셨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요 17:15, 16; 18:36 및 연구 노트. 또한 딤전 6:1 연구 노트 참조.
나를 섬기게: 바울은 오네시모가 자신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다양한 일들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했을 수 있다. 그리스어 디아코네오(“섬기다”; “봉사하다”)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겸손하게 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문맥에서는 바울을 위해 식품을 구하거나 음식을 만들어 주거나 그 밖의 실제적인 방법으로 그를 돕는 일을 하는 것을 가리킬 수 있다. 오네시모가 바울을 도운 것은 결국 “좋은 소식을 위해” 겸손하게 일한 것이었다.—눅 8:3; 22:26 연구 노트 참조.
자유 의지로: 또는 “기꺼이; 자원해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오네시모와 관련된 문제를 처리할 권한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자유 의지를 잘 사용하여 사랑에 기초한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확신했다. (고후 9:7) 자유 의지를 사용하는 것 즉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신 30:19, 20; 수 24:15; 갈 5:13; 벧전 2:16) 이 구절에서 “자유 의지”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칠십인역」에서 자원 제물을 언급하는 데 여러 번 사용되었다. (레 7:16; 23:38; 민 15:3; 29:39) 여호와께서는 자신에게 자원 제물을 바치라고 요구하지도 않으셨고 자원 제물을 바치지 않는다고 처벌하지도 않으셨다. 그러한 제물은 사랑과 감사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와 바쳐야 했으며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잠시 동안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마도 … 영원히 돌려받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바울은 오네시모가 주인에게서 도망한 후에 그리스도인이 된 것에 여호와의 손길이 있었다는 점을 암시적으로 언급한 것 같다. 빌레몬은 이제 오네시모를 종이 아니라 영적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다. 또한 바울은 오네시모가 없어서 빌레몬이 어려움을 겪은 기간은 상대적으로 “잠시”(직역하면 “한 시간”) 동안이었다고 말한다. 반면 두 사람 사이의 영적인 관계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었다. 이제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하느님을 섬기게 되었기 때문이다.—유 21; 계 22:5.
종 이상으로, 곧 … 형제로서: 여기서 바울은 이제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주인과 종의 관계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 형제이자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는 동료 일꾼의 관계라는 점을 지적한다. (마 23:8; 28:19, 20)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집안에서 계속 종으로 일했을 수도 있지만, 일부 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빌레몬이 그를 종의 신분에서 자유롭게 해 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몬 12 연구 노트 참조) 오네시모가 계속 종으로 일했다 하더라도 그는 그리스도인 믿음 덕분에 더 나은 일꾼이 되었을 것이다. 경건한 원칙에 따라 행동하게 되었기 때문이다.—엡 6:5-8; 골 3:22, 23; 딛 2:9, 10. 딤전 6:2 연구 노트 참조.
벗: 여기서 “벗”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함께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한 번도 자신을 사도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동료”로 번역될 수도 있는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 자신과 빌레몬이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여긴다는 점을 나타냈다. 이 단어는 동료 관계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사업을 함께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눅 5:10; 고후 8:23; 벧전 5:1) 하지만 이 문맥에서는 더 따뜻한 느낌을 전달한다. 한 참고 자료에서는 바울과 빌레몬의 친밀한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들의 ‘동료 관계’는 … 한 분의 주께 속해 있다는 점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러한 깊은 유대는 그들이 믿음과 사랑으로 같은 일을 수행하도록 이끌었다.” 또한 유의할 만한 점으로 고대 그리스의 저술가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벗 관계를 이렇게 정의했다. “벗이란 함께하는 사람이다.”
그를 친절하게 맞이하십시오: 바울은 빌레몬에 대해 강한 확신을 나타냈다. 당시에 일부 주인들은 종이 말을 듣지 않으면 매질을 하고 낙인을 찍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는데, 다른 종들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의도로 그렇게 했다.
그것을 나에게 청구하십시오: 기원 1세기의 다른 문헌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표현은 빚을 갚겠다는 의사를 표현할 때 흔히 사용되었다. 이 구절을 근거로 일부 주석가들은 오네시모가 도망치기 전에 주인의 소유물을 훔쳤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동안 도망자로 지내려면 음식을 사고 뱃삯을 낼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바울은 두 사람이 관계를 회복하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에 자신이 빚을 대신 갚아 주겠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나 바울이 내 손으로 직접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보통 때와는 달리 바울은 이 짧은 편지를 자신이 직접 쓴 것 같다. 바울이 시력이 좋지 않았다면 편지를 직접 쓰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갈 4:15; 6:11 연구 노트 참조)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바울이 아마도 편지의 이 부분에서 단지 몇 단어만 직접 써서 일종의 서명을 했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바울이 직접 썼다는 사실은 바울의 부탁에 힘을 실어 주었을 것이며 오네시모가 갚아야 할 빚이 있다면 대신 갚겠다는 약속을 보증하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그대도 나에게 그대 자신을 빚지고 있다는: 이 표현을 볼 때 빌레몬이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바울이 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몬 1 연구 노트 참조) 여기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그가 얼마나 물질적 손해를 입었든 그가 얻은 모든 것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 준다.—몬 18. 엡 1:18; 2:12 비교.
나의 마음: 또는 “나의 부드러운 애정”.—몬 7 연구 노트 참조.
나는 … 확신하기 때문에: 바울이 빌레몬에게 가지고 있었던 확신은 단순한 바람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는 강한 확신이나 신뢰를 의미하며, 그가 쓴 다른 편지들에서도 자주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관련된 목적을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을 표현할 때 (빌 1:6) 그리고 예수께서 하느님을 신뢰하신다는 점을 언급할 때 (히 2:13) 이 단어를 사용했다. 롬 8:38에서도 동일한 단어가 “나는 확신합니다”로 번역되었다. 바울은 빌레몬이 단지 마지못해 자신의 말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일을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내가 말하는 것 이상으로 그대가 할 것임을 나는 압니다라고 말한다. 빌레몬은 바울이 자신에게 보여 준 확신 때문에 그의 말을 기꺼이 따르려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바울이 부탁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여러분의 기도로 … 바라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그리스어 복수형 대명사(“여러분의”)를 사용한 것을 볼 때, 그는 빌레몬의 집에서 모이는 회중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염두에 두었을 수 있다. (몬 2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로마에 수감되어 있는 자신이 풀려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데 그러한 기도가 큰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기도가 여호와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여 그분이 조처를 취하시는 시기를 앞당길 수도 있고, 그분이 하지 않으셨을 일을 하시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히 13:19.
내가 여러분에게 가게 되기를: 또는 “내가 여러분을 위해 자유롭게 되기를”.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표현은 문자적으로 “내가 여러분에게 은혜로 주어지게 되기를”을 의미한다. 그는 골로새 회중 사람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자신이 풀려나게 된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한 참고 자료에 따르면, 여기서 바울이 수동형 동사를 사용한 것은 “하느님만이 바울이 풀려나게 하실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준다.
나와 함께 갇혀 있는: 바울은 이 그리스어를 에바브라를 가리키는 데만이 아니라 다른 편지에서 아리스다르고, 안드로니고, 유니아를 가리키는 데도 사용했다. (롬 16:7; 골 4:10) 그 사람들은 바울과 함께 실제로 수감되었을 수 있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이 표현은 그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수감되어 있는 바울을 용기 있게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에바브라: 골로새 출신의 그리스도인. 그곳에 회중을 설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골 1:7; 4:12 연구 노트 참조) 에바브라는 바울이 첫 번째로 수감되어 있을 때 로마에 왔다. 그는 로마에 한동안 머물렀던 것 같은데, 바울이 인사를 전하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혀 있는 에바브라”라고 한 것을 보면 그 점을 알 수 있다.
마가: 골 4:10 연구 노트 참조.
아리스다르고: 바울과 함께 여행한 데살로니가 출신의 마케도니아 사람. 아마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골 4:11 연구 노트 참조) 아리스다르고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바울 곁에 머물렀다. 그는 에베소에서 폭도들의 공격이 있었을 때 그리고 그리스에서 유대인들이 음모를 꾸몄을 때도 바울과 함께 있었다. (행 19:29; 20:2-4) 나중에 바울이 죄수로 로마에 호송될 때 이 충성스러운 친구는 그와 함께 갔다. 도중에 그들은 파선을 당하기도 했다. (행 27:1, 2, 41) 아리스다르고는 바울이 로마에서 가택 연금되어 있을 때에도 계속 곁에서 그를 도와준 것 같다. (행 28:16, 30) 그는 한동안 바울과 함께 감옥에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를 “큰 위로의 원천”이라고 부르며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다.—골 4:10, 11. 또한 몬 23; 고후 8:18 연구 노트 참조.
데마: 골 4:14; 딤후 4:10 연구 노트 참조.
누가: 골 4:14 연구 노트 참조.
여러분이 나타내는 영: 바울은 편지를 끝맺으면서 그리스어 복수형 대명사(“여러분”)를 사용한다. 그는 “[빌레몬]의 집에 모이는 회중”을 비롯해 1, 2절에 언급된 모든 사람에게 이 말을 한 것 같다. (몬 2 및 연구 노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과분한 친절이 그들의 “영”과 함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다. 여기서 “영”은 특정한 방식으로 말하거나 행동하게 하는 강력한 내적 힘 또는 지배적인 정신적 성향을 가리킨다. (용어 설명 “영” 참조) 그리스도의 축복이 있으면 그들은 계속 하느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모범과 일치하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을 것이었다.—갈 6:18 및 연구 노트; 빌 4:23.
미디어
오네시모가 로마에 가택 연금되어 있는 사도 바울의 편지를 갖고 골로새에 있는 주인 빌레몬의 집에 도착한다. 오네시모는 로마로 도망갔다가 그곳에서 바울을 만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오네시모의 상황을 알고 있던 바울은 빌레몬에게 돌아가도록 격려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돌아가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걱정이 되었을 수 있다. 빌레몬에게 자신을 엄하게 처벌할 법적 권리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오네시모를 단지 종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형제로서 친절하게 맞이하라고 호소한다. (몬 15-17) 또한 바울은 빌레몬이 자신이 부탁하는 대로 할 것이라는 확신을 표현한다. (몬 21) 빌레몬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서로를 경제 상황이나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형제로 대하도록 권고하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롬 12:10; 고전 16:20; 골 4:15; 살전 4:9, 10.
노예 제도는 로마 제국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다. 로마에는 노예와 주인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법이 있었다. 노예들은 로마 제국 영토에 사는 부유한 사람들의 집에서 많은 일을 수행했다. 그들은 요리와 청소를 하고 주인의 자녀들을 돌보았다. 공장이나 광산이나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들도 있었다. 교육을 많이 받은 노예들은 의사나 교사나 비서로 일했다. 사실 노예는 군대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일했다.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는 일도 있었다. (용어 설명 “자유인; 자유를 얻은 사람” 참조)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노예 제도와 관련해서 정부의 권위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지도 않았고 노예 반란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고전 7:21) 그리스도인들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노예를 소유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존중해 주었다. 사도 바울 역시 그러한 권리를 존중하여 노예인 오네시모를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냈다. 오네시모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에 동료 그리스도인인 주인에게 기꺼이 돌아가 그에게 복종했다. (몬 10-17) 바울은 노예 신분인 사람들에게 정직하고 부지런하게 일하라고 교훈했다.—딛 2: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