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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기도

(prayer)

참 하느님 혹은 거짓 신들에게 숭배의 일환으로 하는 말. 하느님께 드리는 말씀이라고 해서 다 기도는 아니다. 예로서 에덴에서의 재판 장면과 카인의 경우에서 그 점을 엿볼 수 있다. (창 3:8-13; 4:9-14) 기도에는 그 대상이 되는 이에 대한 정성, 신뢰심, 존경심 및 의뢰심이 내포되어 있다. 기도와 관련된 여러 가지 히브리어 및 그리스어 단어들은 ‘청하다, 요청하다, 청원하다, 간청하다, 간구하다, 탄원하다, 빌다, 애청하다, 애원하다, 구하다, 요망하다’ 같은 개념과 ‘찬양하다, 감사하다, 찬송하다’ 같은 개념을 전달한다.

물론 간청이나 간구는 인간에게도 할 수 있는 것이고, 원어 단어들도 때때로 그렇게 사용되었다. (창 44:18; 50:17; 행 25:11) 그러나 그런 경우에는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는 “기도”가 적용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해 달라고 ‘간절히 청’하기도 하고 “애원”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 상대방을 자신의 하느님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그런 사람에게는 소리 없이 탄원하는 일이 없는데, 그 대상이 눈에 보이게 함께 있지 않다고 해서 하느님께 기도할 때처럼 그에게 소리 없이 탄원하는 일은 없다.

“기도를 들으시는 분” 전체 성경 기록은 기도를 드리는 대상이 되어야 할 분은 여호와이시고(시 5:1, 2; 마 6:9) 그분은 “기도를 들으시는 분”으로서(시 65:2; 66:19) 청원하는 사람을 위해 행동하실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고 증언한다. (막 11:24; 엡 3:20) 거짓 신들이나 우상들에게 기도하는 것은 미련한 일이라고 밝혀져 있다. 왜냐하면 우상은 듣거나 행동하지 못할 뿐 아니라, 우상이 대표하는 신들도 참 하느님과 견줄 만한 자들이 못 되기 때문이다. (판 10:11-16; 시 115:4, 6; 사 45:20; 46:1, 2, 6, 7) 갈멜 산에서 바알과 여호와 사이에 벌어진 신격과 관련된 시합은 거짓 신들에게 기도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임을 드러내 주었다.—왕첫 18:21-39. 판 6:28-32 비교.

하느님의 아들 같은 다른 이들에게 기도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증거에 의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물론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말씀을 드린 것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혹간 있는 것은 사실이다. 스데반은 죽음을 바로 앞에 두었을 때 예수께 “주 예수여,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부탁하였다. (행 7:59) 그러나 문맥에 나타나 있는 상황을 보면 그런 예외적인 표현을 사용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스데반은 바로 그 순간에 “예수께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환상으로 보았는데, 필시 그는 마치 예수께서 몸소 계신 곳에 자신이 있기라도 한 듯한 반응을 보여 자기가 그리스도인 회중의 머리로 인정한 분에게 그 호소를 거리낌 없이 말씀드린 것이다. (행 7:55, 56; 골 1:18) 그와 유사하게 계시록의 결론에서 사도 요한도 “아멘! 주 예수여, 오십시오” 하고 말한다. (계 22:20) 그러나 이 경우에도 문맥을 보면 요한은 환상 중에(계 1:10; 4:1, 2) 예수께서 장차 오실 일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요한은 그렇게 오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위와 같이 표현함으로 호응한 것이다. (계 22:16, 20) 스데반의 경우와 요한의 경우 모두, 상황은 이 계시록의 환상 가운데서 요한이 하늘의 인격체와 대화를 나눈 상황과 거의 다를 바 없다. (계 7:13, 14. 행 22:6-22 비교)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후로 벌어진 그 외의 상황하에서는, 그리스도인 제자들이 예수께 그런 식으로 말씀드렸음을 보여 주는 흔적이 전혀 없다. 사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술한다. “모든 일에 감사와 더불어 기도와 간구로 여러분의 청원을 하느님께 알리십시오.”—빌 4:6.

하느님께 나아감 항목에서는 그리스도 예수가 기도의 통로 역할을 하신다는 것을 설명한다. 하느님께 희생으로 바쳐진 예수의 피를 통해서 우리는 “거룩한 곳에 들어가는 길로 나아갈 담대함을” 즉 하느님께서 계신 곳에 기도로 나아갈 담대함을 갖게 되면서, “믿음의 온전한 확신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히 10:19-22)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화해하고 하느님께 기도로 나아가게 해 주는 유일무이한 “길”이다.—요 14:6; 15:16; 16:23, 24; 고첫 1:2; 엡 2:18.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목적에서 극히 중요한 예수의 위치) 참조.

하느님은 어떤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가 “육체를 가진 사람”은 누구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인 여호와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 (시 65:2; 행 15:17) 심지어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개인 재산” 곧 그분의 계약 백성이던 시대에도 타국인들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임명받은 도구임을 인정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희생을 바칠 장소로 택하신 곳임을 인정함으로써 기도로 여호와께 나아갈 수 있었다. (신 9:29; 대둘 6:32, 33. 사 19:22 비교) 훗날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면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분은 영원히 제거되었다. (엡 2:11-16) 고넬료라는 이탈리아인 집에서 베드로는 “하느님은 편파적이 아니시고, 도리어 모든 나라에서 그분을 두려워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은 받아 주신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행 10:34, 35) 그러므로 결정적인 요소는 개개인의 마음이며 마음으로부터 그가 무엇을 하고자 하느냐 하는 것이다. (시 119:145; 애 3:41) 하느님의 계명을 준수하고 “그분의 눈에 기쁨이 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귀”도 그들을 향해서 열려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요첫 3:22; 시 10:17; 잠 15:8; 베첫 3:12.

그와는 반대로, 하느님의 말씀과 법을 무시하여 피를 흘리거나 그 외의 악을 행하는 자들은 하느님으로부터 호의적인 응답을 받을 수 없다. 그들의 기도는 그분에게 “가증한” 것이다. (잠 15:29; 28:9; 사 1:15; 미 3:4) 그런 사람들의 기도 자체가 ‘죄가 될’ 수 있다. (시 109:3-7) 사울 왕은 주제넘고 반역적인 행로를 걸음으로 하느님의 은혜를 상실하였으며, “사울여호와께 물어도,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예언자로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삼첫 28:6) 예수께서는 기도를 함으로써 자기들의 경건함에 주의를 끌려고 한 위선적인 사람들은 하느님에게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서 이미 ‘상을 다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마 6:5) 경건한 체하는 바리새인들은 기도를 길게 하고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월등하다고 자랑하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적인 행로를 정죄하셨다. (막 12:40; 누 18:10-14) 그들이 입으로는 가까이 나아갔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느님과 그분의 진리의 말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마 15:3-9. 사 58:1-9 비교.

개개인은 하느님을 믿고 그분이 자신을 “진지하게 찾는 사람들에게 상 주시는 분임을” 믿는 가운데(히 11:6), “믿음의 온전한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히 10:22, 38, 39)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또한 심각한 죄를 범한 사람이라면 ‘여호와의 얼굴을 부드럽게 해 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데(삼첫 13:12; 단 9:13), 우선 진실한 회개와 겸손과 뉘우침을 통해 자신의 마음부터 부드럽게 함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대둘 34:26-28; 시 51:16, 17; 119:58) 그래야 하느님께서 간청에 응하시어 용서를 베풀기도 하시고 호의적으로 응답하실 수도 있다. (왕둘 13:4; 대둘 7:13, 14; 33:10-13; 야 4:8-10) 그렇게 하는 사람은 더는, 하느님이 자신에게 ‘가까이 오는 것을 구름 덩이로 막으시어 기도가 통과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애 3:40-44) 사람이 하느님의 조언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의 기도는 하느님께 상달되지 않도록 완전히 차단되지는 않을지라도 ‘방해를 받을’ 수 있다. (베첫 3:7) 용서를 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잘 용서해 주어야 한다.—마 6:14, 15; 막 11:25; 누 11:4.

어떤 일들에 대해 기도하는 것이 적절한가?

기본적으로 기도에 포함되는 것은 고백(대둘 30:22), 청원 혹은 요청(히 5:7), 찬양과 감사의 표현(시 34:1; 92:1), 서원(삼첫 1:11; 전 5:2-6) 등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알려 주신 기도문은 모본, 즉 기본 형식을 가르쳐 주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나 제자들이 그 이후에 드린 기도를 보면 그 모범이 되는 기도문의 특정한 자구들에 엄격히 고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 6:9-13) 시작 부분의 몇 마디를 보면 그 기도문은 첫째가는 관심사에 집중하는데, 그것은 에덴에서 반역으로 인해 더럽혀지기 시작한 여호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 예언된 씨 곧 메시아가 그 수반으로서 인도하는 약속된 왕국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것 등이다. (창 3:15. 여호와 [입증되어야 할 주권, 거룩해져야 할 이름] 참조) 그런 기도를 하려면, 그 사람은 여호와의 주권이 관련된 쟁점에서 분명하게 하느님의 편에 선 사람이어야 한다.

누가 19:11-27에 나오는 예수의 비유가 알려 주듯이, ‘왕국이 오는 것’은 심판을 집행하기 위해서, 모든 반대자들을 멸하기 위해서, 왕국에 희망을 두는 사람들을 구제하고 그들에게 상을 주기 위해서 오는 것을 의미한다. (계 16:14-16; 19:11-21 비교) 그러므로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하고 이어지는 표현은 주로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에 관한 언급이 아니고 하느님 자신이 땅과 그 거주자들에 대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행동하심으로, 선언하신 목적을 실현할 능력을 내보이실 것을 언급하는 표현이다. 물론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 자신도 그 뜻을 애호하며 그 뜻에 복종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마 6:10. 마 26:39 비교) 일용할 빵을 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시고 악한 자에게서 구출해 달라는 요청은 모두 청원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은혜 안에서 계속 살기를 바라는 마음과 관련이 있다. 그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믿음을 가진 그 외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런 것들을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다.—골 4:12 비교.

모범이 되는 이 기도에 나오는 이상의 사항들은 믿음의 사람 모두에게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닌 것으로서, 그들 모두에게 공통으로 필요한 것들을 표현한 것이다. 한편, 성경 기록을 보면, 개개인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주는 것, 혹은 특정한 상황이나 일로 인해 초래되는 것으로서 기도의 소재로 삼기에도 적절한 그 외의 일이 많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일들이 예수의 모범 기도문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아도 그 기도문에 나와 있는 사항들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기도에는 사실상 생활의 모든 부면을 포함시킬 수 있다.—요 16:23, 24; 빌 4:6; 베첫 5:7.

그러므로 누구나 증가된 지식이나 이해 및 지혜를 구하는 것이 합당하지만(시 119:33, 34; 야 1:5), 그러한 것이 특별한 면으로 필요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모세처럼, 판결을 내리는 일에 있어서 하느님께 인도해 주시기를 요청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출 18:19, 26. 민 9:6-9; 27:1-11; 신 17:8-13 비교),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서 사람들을 특별한 책임에 임명하는 일을 인도해 주시기를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 (민 27:15-18; 누 6:12, 13; 행 1:24, 25; 6:5, 6) 특별히 맡겨진 일을 수행할 수 있도록, 또는 특정한 시련이나 위험을 이겨 낼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구하는 경우도 있다. (창 32:9-12; 누 3:21; 마 26:36-44) 하느님을 찬송하고 그분에게 감사하는 이유도 각 사람의 개인적 경험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고첫 7:7; 12:6, 7; 데첫 5:18.

디모데 첫째 2:1, 2에서 사도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 관하여”,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 관하여” 기도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보내신 마지막 밤에 기도하시면서, 자신이 세상에 관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람들에 관해서 요청하였는데 이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미움을 받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요 17:9, 14)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세상 관리들에 관해 기도하는 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는 것 같다. 그 사도가 이어서 “우리가 경건한 정성을 다하여 진지한 가운데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계속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런 기도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디첫 2:2) 이 점을 보여 주는 그 이전의 사례가 있다. 느헤미야는 하느님이 자기로 하여금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 왕 앞에서 “불쌍히 여김을 받는 자가 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였으며(느 1:11. 창 43:14 비교),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들이 유배 생활을 하는 터전이 될 “도시[바빌론]의 평화를 추구”하여 그 도시를 위해 기도하라고 교훈하시면서 “그 평화 가운데 너희 자신에게도 평화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렘 29:7) 그와 유사하게 그리스도인들도 당시의 통치자들의 위협에 관하여 기도하였다. (행 4:23-30) 그리고 투옥된 베드로를 위한 기도도 틀림없이 그를 풀어 줄 권한을 가진 관리들이 관련된 기도였을 것이다. (행 12:5) 그리스도의 교훈과 일치하게 그들은 자기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마 5:44. 행 26:28, 29; 로 10:1-3 비교.

식품과 같은 하느님의 마련에 감사드리는 일이 행해진 지는 오래되었다. (신 8:10-18. 또한 마 14:19; 행 27:35; 고첫 10:30, 31 유의) 그러나 비단 물질적 축복에 대해서만 아니라 “모든 것”에 있어서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감사를 나타내야 한다.—데첫 5:17, 18; 엡 5:19, 20.

결론적으로 말해서 기도의 내용을 좌우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대한 지식이다. 간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요청이 받아들여지려면 반드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간구여야 함을 자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간구하는 사람은, 악한 사람과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은혜를 받을 수 없음을 알고 있으면서, 하느님의 아들이나 그분의 영감받은 제자들의 가르침 등 의와 하느님의 계시된 뜻에 상반되는 것을 요청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하다. (요 15:7, 16)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청하라는 말씀(요 16:23)을 문맥과 무관하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무엇이든지”라는 말에는 개개인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는 것들, 혹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는 것들이 포함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하여 가진 확신은 이것이니, 곧 무엇이든지 우리가 그분의 뜻대로 청하면 그분이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요첫 5:14. 야 4:15 비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 가운데 두 사람이 땅에서 합의하여 무슨 중요한 일이든지 요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마 18:19) 식품 같은 물질적인 것들은 기도의 합당한 소재가 되지만 물질적 욕심이나 야심은 합당한 소재가 아니다. 마태 6:19-34 및 요한 첫째 2:15-17 등의 성구들이 그 점을 알려 준다. 또한 하느님께서 단죄하시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옳지 않다.—렘 7:16; 11:14.

로마 8:26, 27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도대체 무어라고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도 있겠지만, 그래도 하느님께서는 말로 표현되지 않은 그의 “신음 소리”를 이해하신다고 알려 준다. 사도는 하느님의 영, 곧 활동력을 통해 그런 일이 이루어진다고 알려 준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영을 통해 성경에 영감을 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디둘 3:16, 17; 베둘 1:21) 성경에는 훗날 하느님의 종들에게 일어날 일과 비슷한 사건들이나 상황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성경에는 하느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종들을 인도하시고 필요한 도움을 베푸시는지 알려 주는 내용이 들어 있다. (로 15:4; 베첫 1:6-12) 필요한 도움을 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은 아마도 자기가 기도로 구했어야 했던(하지만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랐던) 내용이 하느님의 영으로 영감받은 말씀에 이미 나와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첫 2:9, 10 비교.

기도에 대한 응답 고대에는 하느님께서 특정한 사람들과 쌍방 의사소통을 하신 일도 상당히 있었지만, 그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고 대부분의 경우 아브라함이나 모세 같은 특별한 대리자들에게 국한된 경우였다. (창 15:1-5; 출 3:11-15. 출 20:19 비교) 그런 경우에도, 그분의 아들이 지상에 있는 동안 아들에게 혹은 아들에 관하여 말씀하신 때를 제외하고는, 하느님의 말씀은 천사들을 통해 전달되었을 것이다. (출 3:2, 4; 갈 3:19 비교) 물질화한 천사가 직접 소식을 전달하는 일도 흔한 일은 아니었다. 소식을 받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그로 인해 당황한 것을 보면 그 점을 알 수 있다. (판 6:22; 누 1:11, 12, 26-30) 그러므로 대다수의 경우 기도에 대한 응답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혹은 요청을 들어주시거나 들어주기를 거부하시는 것을 통해서 주어졌다. 기도에 대한 여호와의 응답은 종종 분명히 식별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이를테면 그분이 자신의 종들을 그들의 적들에게서 구출하셨을 때(대둘 20:1-12, 21-24) 혹은 심한 고갈 사태 때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셨을 때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출 15:22-25) 그러나 대다수의 응답은 그렇게 쉽게 식별할 수 없었음이 분명한데, 도덕적인 힘과 계몽을 베풀어 주시어 사람으로 하여금 의로운 행로에 고착하고 하느님께서 맡기신 일을 수행할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이 응답에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디둘 4:17)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도에 대한 응답은 주로, 고대에 하느님께서 강력한 행동을 하신 것처럼 극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와 똑같이 긴요한 영적인 일과 관련이 있다.—마 9:36-38; 골 1:9; 히 13:18; 야 5:13.

기도가 받아들여지려면 합당한 분 곧 여호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여야 하고, 합당한 문제 곧 하느님의 선언된 뜻에 부합되는 문제여야 하며, 합당한 방식으로 곧 하느님이 정한 길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올바른 동기와 깨끗한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야 4:3-6 비교) 이 모든 것과 더불어 끈덕짐이 필요하다. 예수께서는 ‘계속 청하고 찾고 두드림’으로 포기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누 11:5-10; 18:1-7) 그분은 자신이 장차 ‘도착했을’ 때 지상에서 기도의 힘에 대한 믿음을 보게 될 것인지의 여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셨다. (누 18:8) 어떤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 지체되는 것같이 보이는 것은 무능력하시거나 해 주실 마음이 없으시기 때문이 아니라고 성경에서는 명백히 밝힌다. (마 7:9-11; 야 1:5, 17) 응답이 있으려면 하느님의 ‘시간표’를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 (누 18:7; 베첫 5:6; 베둘 3:9; 계 6:9-11)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로 청원하는 사람이 얼마나 깊이 염려하는지, 얼마나 간절히 바라는지, 동기가 얼마나 진실한지를 드러내게 하시는 분임이 분명하다. (시 55:17; 88:1, 13; 로 1:9-11) 때때로 그들은 축복을 받기 위해 장시간 씨름을 한 야곱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창 32:24-26.

그와 유사하게, 여호와 하느님이 인원수로 인해 압력을 느껴 행동하시는 분은 아니지만, 그분이 자신의 종들이 일단의 무리로서 어느 정도나 염려하는지에 유의하시고, 그들이 집단적으로 깊은 염려와 연합된 관심을 나타낼 때, 조처를 취하시는 분임은 분명하다. (출 2:23-25 비교) 무관심이 어느 정도라도 나타날 경우에는 하느님께서 행동을 하지 않으실 수 있다.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때 그 건축 계획이 한동안 제대로 후원을 받지 못하면서(라 4:4-7, 23, 24; 학 1:2-12) 이래저래 중단되기도 하고 지연되기도 하였지만, 훗날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때는 기도하는 가운데 제대로 후원을 받으면서 단 52일만에 작업이 완료되었다. (느 2:17-20; 4:4-23; 6:15) 바울은 고린도 회중에 편지하면서 하느님이 자신을 죽음의 위험에서 구출하신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도 우리를 위한 간구로 도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에 힘쓰는 많은 얼굴 때문에 우리에게 친절하게 주어진 것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를 드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둘 1:8-11. 빌 1:12-20 비교) 개인이 드리는 기도든 집단이 드리는 기도든 다른 사람을 위해 간청하는 기도에는 힘이 있음이 반복적으로 강조되어 있다. 야고보는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과 관련하여 “의로운 사람의 간구는 그것이 작용할 때에 많은 힘이 있”다고 하였다.—야 5:14-20. 창 20:7, 17; 데둘 3:1, 2; 히 13:18, 19 비교.

또 유의할 만한 것은 주권을 가진 통치자 여호와 앞에 자신의 사정을 ‘탄원’하는 것을 빈번히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탄원하는 사람은 그 요청이 정당하다고 자신이 믿는 이유, 자신에게 정당하고 비이기적인 동기가 있다는 증거, 그리고 단순히 자신의 관심사나 생각만 아니라 그 이상의 요인들이 더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논증을 제시한다. 이러한 것들은 하느님 자신의 이름의 영예나 그분의 백성의 복지가 관련된 것일 수도 있고, 하느님이 행동하시거나 행동하지 않으시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 결과적으로 끼치는 영향이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하느님의 공의, 그분의 사랑의 친절, 그분이 자비의 하느님이시라는 점에 의지하여 호소할 수 있다. (창 18:22-33; 19:18-20; 출 32:11-14; 왕둘 20:1-5; 라 8:21-23 비교) 그리스도 예수께서도 충실한 추종자들을 위하여 ‘탄원하신다.’—로 8:33, 34.

시편은 전권이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와 찬양의 노래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 내용은 기도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예시해 주고 있다. 여러 유명한 기도들 중에는 야곱이 드린 기도(창 32:9-12), 모세가 드린 기도(신 9:25-29), 욥이 드린 기도(욥 1:21), 한나가 드린 기도(삼첫 2:1-10), 다윗이 드린 기도(삼둘 7:18-29; 대첫 29:10-19), 솔로몬이 드린 기도(왕첫 3:6-9; 8:22-61), 아사가 드린 기도(대둘 14:11), 여호사밧이 드린 기도(대둘 20:5-12), 엘리야가 드린 기도(왕첫 18:36, 37), 요나가 드린 기도(욘 2:1-9), 히스기야가 드린 기도(왕둘 19:15-19), 예레미야가 드린 기도(렘 20:7-12; 애가서), 다니엘이 드린 기도(단 9:3-21), 에스라가 드린 기도(라 9:6-15), 느헤미야가 드린 기도(느 1:4-11), 몇몇 레위인들이 드린 기도(느 9:5-38), 하박국이 드린 기도(합 3:1-19), 예수께서 드린 기도(요 17:1-26; 막 14:36)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이 드린 기도(행 4:24-30) 등이 있다.—자세와 동작; (의의)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