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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사랑

(love)

친구, 부모, 자녀 등에 대해 따뜻한 개인적 애착이나 깊은 애정을 느끼는 감정. 다른 사람을 충심으로 좋아함 혹은 그에 대한 호감. 또한 하느님이 피조물에 대해 나타내시는 인자한 애정이나 피조물이 하느님에 대해 마땅히 나타내야 할 경외심 어린 애정. 또한 하느님의 피조물들이 서로에 대하여 온당하게 표현하는 친절한 애정. 이성에 대한 강한 혹은 정열적인 애정으로서, 결혼 관계에까지 이르게 하는 감정상의 동기가 되는 것. 사랑의 동의어 중 하나는 “정성”이다.

이러한 의미들 외에도 성경에서는 원칙의 인도를 받는 사랑에 관하여 이야기하는데, 예를 들자면, 이것은 의를 사랑하는 것 또는 심지어 애정이 느껴지지 않는 자신의 적까지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사랑의 이러한 면을 보인다 혹은 표현한다 함은, 의를 위해 비이기적으로 정성을 다하는 것, 다른 이들의 항구적인 복지에 진지한 관심을 갖고 그들의 유익을 위해 그 관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히브리어에서 앞에 설명된 의미의 사랑을 가리키는 데 주로 사용된 단어는 동사 아헤브 혹은 아하브(“사랑하다”)와 명사 아하바(“사랑”)인데, 어떤 의미의 사랑인지와 어느 정도의 사랑인지는 문맥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주로 사용하는 단어들은 아가페, 필리아, 그리고 스토르게에서 파생된 두 단어 등의 변화형들이다(이성 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에로스는 사용되지 않음). 다른 용어들보다도 아가페가 더 자주 나온다.

명사 아가페와 동사 아가파오에 관하여 「바인의 신구약 단어 해설 사전」(Vine’s Expository Dictionary of Old and New Testament Words)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사랑이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통해서만 알 수가 있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신의 아들을 선물로 주신 것에서 볼 수 있다. 요한 첫째 4:9, 10. 그러나 분명히 이것은 자기만족의 사랑이나 애정이 아니다. 즉 그 대상에게 어떤 뛰어난 점이 있어서 생겨난 사랑이 아니다. 로마 5:8. 그것은 의도적인 선택을 통한 하느님의 의지의 행사였는데, 하느님 자신의 본성에서나 찾을 법한 사유 외에는 이렇다 할 만한 사유 없이 행사된 것이다. 신명기 7:7, 8 비교.”—1981년, 3권, 21면.

동사 필레오에 관해서 바인은 이렇게 해설한다. “[그것은] 이러한 점에서 아가파오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즉 필레오가 부드러운 애정에 더 가까운 표현이라는 점이다. ··· 또 삶의 진정한 목적을 잊어버리고 어떻게 해서든 생명을 보존하려는 부당한 욕망으로 생명을 사랑하는(필레오) 것은 주의 책망을 받게 된다. 요한 12:25. 반면에 베드로 첫째 3:10에서 사용된 의미로 생명을 사랑한다(아가파오)는 것은 삶의 참으로 유익한 면들을 고려한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필레오라는 말이 상당히 부적합할 것이다.”—3권, 21, 22면.

제임스 스트롱의 「종합 성서 용어 색인」(Exhaustive Concordance of the Bible)의 그리스어 사전(1890년, 75, 76면)에서는 필레오 제하에 이렇게 말한다. “친구가 되다([어떤 개인이나 대상을] 좋아하다), 즉 애정을 갖다(기분이나 감정이 관련된 개인적인 애착을 가리킴. 반면에 [아가파오]는 의미가 더 광범위하여, 특히 원칙·의무·예법상의 일로서 판단한 것, 의지를 통해 의도적으로 동의한 것을 내포하는 말이다. ···).”—애정 참조.

아가페에는 대개 원칙의 인도 혹은 지배를 받는 사랑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여기에는 일반적으로 애정과 좋아하는 마음이 포함된다. 아가페에 애정이나 따뜻함이 포함될 수 있다는 점은 많은 구절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요한 3:35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신다[아가파]’라고 말씀하셨다. 요한 5:20에서는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계시다[필레이]’고 말씀하셨다.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는 많은 애정이 곁들여져 있다. 또한 예수께서는 이렇게도 설명하셨다. ‘나를 사랑하는[아가폰]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아가페테세타이].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겠습니다[아가페소].’ (요 14:21) 아버지와 아들의 이러한 사랑에는 그처럼 사랑스러운 사람들에 대한 부드러운 애정이 곁들여져 있다. 여호와의 숭배자들은 그분과 그분의 아들을, 그리고 서로를 그와 같은 방식으로 사랑해야 한다.—요 21:15-1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사랑이 원칙을 존중한다는 면에서 다르기는 하지만,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감정이 없다면 냉정한 공의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감정이나 기분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원칙을 무시하는 일이 결코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애정이나 좋아하는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올바로 나타내는데, 그 사람들의 복지를 위하여 그렇게 한다. (갈 6:10) 그들은 그런 다른 사람들에 대해, 특별히 애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해도 의로운 원칙이 허용하고 인도하는 범위까지 그것이 허용하고 인도하는 방식으로 진심에서 동정심을 느끼고 진지하게 염려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아가페가 원칙의 지배를 받는 사랑을 가리키기는 하지만, 이기심에 이끌려 나타낼 수 있는 그릇된 아가페도 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아가파테]면, 그것이 여러분에게 무슨 영예가 되겠습니까?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합니다. 또 여러분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여러분이 선을 행한다면, 그것이 여러분에게 과연 무슨 영예가 되겠습니까? 죄인들도 그와 같이 합니다. 또한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이자 없이 빌려 준다면, 그것이 여러분에게 무슨 영예가 되겠습니까? 죄인들도 그대로 되돌려 받기 위하여 죄인들에게 이자 없이 빌려 줍니다.” (누 6:32-34) 그러한 사람들의 행동의 기초가 되는 원칙은 ‘내게 선을 행하라, 그러면 나도 네게 선을 행하겠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기와 함께 일했던 한 사람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데마는 현 사물의 제도를 사랑하였기[아가페사스] 때문에 나를 버[렸습니다].” (디둘 4:10)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게 된 것은 이기적인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세상이 가져다주는 물질적 유익을 사랑했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빛보다 오히려 어둠을 사랑한[에가페산]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가 악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악한 일을 행하는 사람은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책망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 3:19, 20) 어둠이 그들의 악행을 덮어 가리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들은 어둠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여러분의 적들을 사랑하라[아가파테]’고 명령하셨다. (마 5:44) 그 원칙을 세우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신데,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한 바와 같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아가펜]을 추천하십니다. ··· 우리가 적이었을 때에 하느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한 지금은 더욱더 아들의 생명에 의해 구원받을 것입니다.” (로 5:8-10) 그러한 사랑이 표현된 두드러진 예는 하느님께서 타르수스의 사울을 대하신 경우인데, 나중에 그는 사도 바울이 되었다. (행 9:1-16; 디첫 1:15) 그러므로 적들을 사랑하는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이 세우신 원칙의 지배를 받아야 하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가운데 표현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그 사랑에 따뜻함이나 애정이 곁들여져 있는가 여부와는 무관하다.

하느님 사도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기술한다. (요첫 4:8) 그분은 바로 사랑의 구현체이신데, 사랑은 그분의 지배적인 특성이다. 그러나 역순으로 말하여 ‘사랑(추상적인 특성)은 하느님’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분은 성서에서 자신이 인격체라는 것을 나타내셔서 비유적으로 그분의 “눈”, “손”, “마음”, “영혼” 등에 관하여 언급하신다. 그분은 또한 다른 속성들도 가지고 계시는데, 그중에는 공의, 능력, 지혜가 있다. (신 32:4; 욥 36:22; 계 7:12) 뿐만 아니라 그분은 미워하실 수도 있는데, 이것은 사랑에 정반대되는 특성이다. 그분은 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악을 미워하실 수밖에 없다. (신 12:31; 잠 6:16) 사랑에는 따뜻한 개인적 애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이 포함되는데, 이것은 인격체만이 가질 수 있고 인격체에 대해서 나타낼 수 있는 특성이다. 확실히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추상적인 특성이 아니다. 그분은 자신이 아버지와 함께 있었고 함께 일하며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리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다고, 천사들이 자신의 아버지의 얼굴을 뵙는다고 말씀하셨는데, 단순히 추상적인 특성이라면 불가능한 일들이다.—마 10:32; 18:10; 요 5:17; 6:46; 8:28, 29, 40; 17:5.

그분의 사랑의 증거 우주의 창조주이며 하느님이신 여호와께서 사랑이시라는 증거는 풍부하다. 바로 물질적인 창조물에서도 그 증거를 볼 수 있다. 참으로 경탄할 만한 배려로, 인간의 건강과 즐거움과 복지를 위해 알맞게 마련되어 있다! 인간은 단순히 생존하게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을 즐기고 피조물의 다채로운 색상과 아름다움을 보고 즐거워하며, 또 동물들을 보고 이웃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즐거워하며 그 밖에 셀 수 없이 많은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시 139:14, 17, 18)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사람이 사랑과 영성에 필요한 역량을 지니도록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심으로(창 1:26, 27), 그리고 자신의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심으로 사랑을 한층 더 나타내셨다.—고첫 2:12, 13.

인류에 대한 여호와의 사랑은 자녀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다. (마 5:45) 그분은 그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면 아무것도, 그분에게 아무리 값비싼 대가가 요구되는 것이라도 아끼지 않으신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가 느끼거나 표현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능가한다. (엡 2:4-7; 사 55:8; 로 11:33) 그분은 인류를 위해서 최대의 사랑을 나타내시어 부모로서 해 줄 수 있는 가장 사랑에 넘친 일을 해 주셨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충실한 독생자의 생명을 주신 일이었다. (요 3:16) 사도 요한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기술하였다. (요첫 4:19) 따라서 그분은 사랑의 근원이시다. 요한의 동료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술한다.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거의 없고, 선한 사람을 위해서 감히 죽는 사람은 혹시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추천하십니다.”—로 5:7, 8; 요첫 4:10.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 자신의 충실한 종들에 대한 여호와의 사랑은 영원하다. 그것은 그분의 종들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든지, 그들에게 어떤 크거나 작은 일들이 닥치든지 없어지거나 사그라지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쳤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부들이나 지금 여기 있는 것이나 올 것이나 권세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창조물이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로 8:38, 39.

하느님의 주권의 기초는 사랑이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주권과 그에 대한 피조물들의 지지가 주로 사랑에 기초해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신다. 그분은 그분의 훌륭한 특성들 때문에, 그리고 그분의 주권이 의롭기 때문에 그 주권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 주권을 다른 어느 주권보다 선호하는 사람들만 원하신다. (고첫 2:9) 그들은 독립적이 되려 하지 않고 그분의 주권 아래서 섬기고자 한다. 이것은 그들이 그분과 그분의 사랑과 공의와 지혜에 대해 알기 때문이며, 그들은 그분의 그러한 속성들이 그들 자신의 속성들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시 84:10, 11) 마귀는 이 면에서 실패하였는데, 아담과 하와처럼 자기중심적으로 독립을 추구한 것이다. 사실 마귀는 하느님의 통치 방식에 도전하였는데, 그 방식이 사랑이 없고 불의하며(창 3:1-5), 하느님의 피조물들이 그분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이기심 때문에 섬긴다는 취지로 말하였다.—욥 1:8-12; 2:3-5.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마귀가 계속 살면서 자신의 종들을, 심지어 자신의 독생자까지도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 시험해 보도록 허용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충실할 것임을 예언하셨다. (사 53장) 그분이 그처럼 자신의 말씀의 진실성을 걸고 아들의 충실성을 예언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사랑 때문이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아셨고, 자신의 아들이 아버지와 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아셨다. (히 1:9) 그분은 자신의 아들을 지극히 친숙하고 철저하게 아셨다. (마 11:27) 그분은 아들의 충실성을 온전히 신뢰하고 확신하셨다. 뿐만 아니라, ‘사랑은 완전한 결합의 띠’이다. (골 3:14) 그것은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띠로서, 아들과 아버지를 끊어지지 않게 함께 결합시키는 완전한 사랑이다. 그와 비슷한 이유에서 하느님께서는 종들로 된 자신의 조직도 신뢰하시는데, 시험을 받을 때에도 그들 대부분이 사랑 때문에 그분에게 확고부동하게 고착할 것이며 피조물들로 된 그분의 조직 전체가 떨어져 나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임을 그분은 아신다.—시 110:3.

예수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 동안, 사랑의 근원이신 아버지와 지극히 친밀하게 교제하셨고 그분을 지극히 친숙하고 철저하게 아셨기 때문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도 본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요 14:9; 마 11:27) 그러므로 예수의 사랑은 온전하고 완전하다. (엡 3:19) 그분은 제자들에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영혼을 내주는 것, 이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진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셨다. (요 15:13) 그분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었다. “나는 여러분에게 새 계명을 줍니다. 곧 여러분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요 13:34) 이 계명은 새로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에 예수와 그분의 제자들이 지켜야 했던 율법에서는 사람에게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레 19:18; 마 22:39) 율법은 자신처럼 남도 사랑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남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줄 정도까지 자기희생적으로 사랑할 것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예수의 생애와 죽음은 이 새 계명이 요구하는 사랑을 보여 주는 전형적인 예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추종자라면 기회가 생길 때 선한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도 아래 다른 사람들을 영적으로나 다른 면으로 도와주려고 솔선해야 한다. 그는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일해야 한다. 적으로 지내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은 사랑의 최대의 표현 중 하나인데, 그 결과로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좋은 소식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도우며 그들을 위해 일할 때에 ‘하느님의 좋은 소식뿐 아니라 그 자신의 영혼까지도 주어야’ 한다. (데첫 2:8) 그리고 그는 그들을 위하여 자신의 영혼(생명)을 내줄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요첫 3:16.

사랑을 습득하는 방법 첫 인간 남녀는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이 지배적인 속성 곧 사랑을 상당히 지니도록 창조되었고, 그 사랑을 넓히고 확대하고 풍부하게 할 수 있는 역량도 부여받았다. 사랑은 하느님의 영의 열매이다. (갈 5:22) 경건한 사랑은 신체적인 아름다움이나 음악적 재능 혹은 그와 유사하게 유전받은 특성들 같은 특정한 신체 능력이나 정신 능력처럼, 어쩌다가 갖게 된 것인지 모르는 채 갖게 되는 그런 특성이 아니다. 경건한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나 봉사 없이는 혹은 묵상이나 인식 없이는 사람이 갖게 될 수가 없다. 사랑을 배양해야만 비로소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본받는 자가 될 수 있다. (시 77:11; 엡 5:1, 2; 로 12:2) 아담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배양하지 못하였고 사랑의 완성을 향해 발전하지 못하였다. 이 점은 그가 이 완전한 결합의 띠로 하느님과 결합하여 하느님께 고착하지 못한 것에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아담은 불완전한 죄인이면서도 ‘자기의 형상대로’ 자손에게 사랑하는 능력과 역량을 전달해 주었다. (창 5:3) 인류가 일반적으로 사랑을 표현하기는 하지만, 그 사랑은 흔히 그릇 인도되고 변질되고 왜곡된 것이다.

사랑은 그릇 인도될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을 볼 때 올바른 방향의 진정한 사랑을 갖는 것은 하느님의 영을,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서 나오는 지식을 추구하고 따를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 부모라면 자기 자녀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이 변질되거나 감상적인 생각 때문에 그릇 인도되어서 부모는 아이에게 무엇이든지 다 해 주고 거절하는 법이 없게 될 수 있다. 그는 징계를 하거나 때로는 실질적인 벌을 주어야 하는 부모의 권위를 행사하지 않게 될 수 있다. (잠 22:15) 사랑이라고 여기며 나타내는 그런 사랑이 사실은 집안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는데, 이것은 이기심이다. 성서에 의하면 그러한 부모는 사랑이 아니라 미움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녀의 생명을 구해 줄 행로를 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잠 13:24; 23:13, 14.

이것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아니다. 경건한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좋고 유익한 것을 행하게 해 준다. ‘사랑은 세워 준다.’ (고첫 8:1) 사랑은 감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굳건하고 강하고 경건한 지혜의 인도를 받는 것으로서, 무엇보다도 순결하고 올바른 것에 고착한다. (야 3:17)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러한 사랑을 나타내셨는데, 그분은 그들의 영원한 복지를 위하여 불순종에 대해서 그들에게 엄중한 벌을 내리셨다. (신 8:5; 잠 3:12; 히 12:6)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이 인내하고 있는 것은 징계를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아들처럼 대하고 계십니다.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 더욱이, 우리에게는 육신의 아버지가 있어서 우리를 징계하였으며, 우리는 그를 존경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적 생명의 아버지께는 더욱더 복종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육신의 아버지는 자기에게 좋아 보이는 것에 따라 몇 날 동안 우리를 징계하곤 하였지만,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거룩함에 참여하도록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그렇게 하십니다. 사실, 어떤 징계나 당시에는 기뻐 보이지 않고 근심스러워 보이지만,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받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이루는 열매, 곧 의를 맺게 합니다.”—히 12:7-11.

지식이 있어야 사랑이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된다 사랑은 다른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하느님께 나타내도록 인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릇 인도되어 심지어 살아 있는 피조물이나 사물을 숭배하는 지경까지 이끌려 가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목적을 아는 것이 필수적인데, 그래야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복지를 위하여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사랑을 올바로 표현하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마음과 정신과 영혼과 힘을 다한’ 것이어야 한다. (마 22:36-38; 막 12:29, 30) 그것은 단지 외부로 표현되는 것 정도가 아니라 전체적인 속사람을 반영하는 그런 사랑이어야 한다. 사랑에는 감정이 관련되어 있다. (베첫 1:22) 그러나 참 사랑이란 어떠한 것이며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지식이 정신 속에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사랑은 잘못된 방향으로 표현될 수 있다. (렘 10:23; 17:9. 빌 1:9 비교) 정신은 하느님과 그분의 특성들, 그분의 목적, 그리고 그분이 사랑을 표현하시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요첫 4:7) 이 점과 부합되게, 그리고 사랑이 가장 중요한 특성이므로,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은 바로 인격체이신 여호와(지배적인 특성이 사랑이신 분)께 하는 것이지 어떤 일이나 대의명분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영혼을 바쳐서 즉 자신의 모든 기능을 다하여 실천하는 것이어야 하며,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데 자기에게 있는 힘을 다 바쳐야 한다.

사랑은 광범위한 것이다 하느님의 영의 열매인 참 사랑은 광범위한 것이다. (고둘 6:11-13) 그것은 인색하거나 틀에 박힌 것이거나 제한적인 것이 아니다. 사랑은 함께 나누어야만 완전해진다. 사람은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고(신 6:5) 그분의 아들을 사랑하고(엡 6:24) 그다음에 전 세계의 연합된 그리스도인 형제들 전체를 사랑해야 한다(베첫 2:17; 요첫 2:10; 4:20, 21).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하고 아내는 남편을 사랑해야 한다. (잠 5:18, 19; 전 9:9; 엡 5:25, 28, 33) 사랑은 자녀들에게도 베풀어져야 한다. (딛 2:4) 전 인류 심지어 자신의 적까지도 사랑해야 하며, 그리스도인 활동은 그들에 대해서도 행해져야 한다. (마 5:44; 누 6:32-36) 성서에서는 영의 열매에 대해 말하면서 사랑을 제일 먼저 언급하고 “이런 것들을 반대할 법은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갈 5:22, 23) 이 사랑을 제한할 수 있는 법은 없다. 그것을 받기에 마땅한 사람들에게는 언제 어디서든, 어느 정도로든 나타내 줄 수 있다. 사실상, 그리스도인이 서로에게 빚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사랑이다. (로 13:8) 서로에 대한 이러한 사랑은 참 그리스도인을 구별시켜 주는 표이다.—요 13:35.

경건한 사랑의 작용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할 때 사용된 것과 같은 의미의 사랑은 매우 경탄스러운 것이어서 정의하기가 어렵다.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더 쉽다. 이 훌륭한 특성에 관한 다음의 논의에서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고려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주제에 대하여 쓰면서 먼저 그리스도인 신자에게 사랑이 참으로 필수적임을 강조하고 나서 그것이 어떻게 비이기적으로 작용하는지에 관하여 이렇게 상술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질투하지 않고, 뽐내지 않고, 우쭐대지 않고,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해를 입은 것을 유념해 두지 않습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인내합니다.”—고첫 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곤란한 상황이나 다른 사람의 잘못된 행동을 참는다. 의도적으로, 즉 잘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이나 그 상황에 관련된 다른 사람들의 궁극적인 구원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결국에는 여호와의 주권을 입증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베둘 3:15) 사랑은 아무리 화나게 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친절하다.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들을 거칠거나 무정하게 대하는 것은 아무런 선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사랑은 굳건하며 의를 위하여 공의롭게 행동한다.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범죄자를 징계할 수 있지만, 그런 때에도 그들은 친절을 나타내야 한다. 불친절은 불친절한 충고자나 불의를 행한 사람 모두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그 사람이 회개하여 옳은 일을 하게 되기가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로 2:4; 엡 4:32; 딛 3:4, 5.

‘사랑은 질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들이 좋은 것을 얻을 때 그것을 시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동료가 더 큰 책임이 있는 지위를 받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 그것은 심지어 적들이 좋은 것을 받는 것을 보고도 못마땅해하지 않는다. 사랑은 관대하다.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비가 내리게 하신다. (마 5:45) 사랑이 있는 하느님의 종은 자신의 처지나 위치에 만족하기(디첫 6:6-8) 때문에, 거기에서 벗어나거나 다른 사람이 점하고 있는 위치를 이기적으로 차지하려 하지 않는다. 사탄 마귀는 이기심과 시기하는 마음 때문에 자기 자리에서 벗어나서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숭배를 받고 싶어 하기까지 하였다.—누 4:5-8.

사랑은 ‘뽐내지 않고, 우쭐대지 않습니다.’ 사랑은 피조물의 박수갈채나 칭찬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시 75:4-7; 유 16) 사랑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끌어내려 자신이 더 큰사람으로 보이게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하느님을 드높이고 다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격려하고 세워 줄 것이다. (로 1:8; 골 1:3-5; 데첫 1:2, 3) 그는 다른 그리스도인이 발전하는 것을 보고 행복해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앞으로 할 일에 대해서도 자랑하지 않을 것이다. (잠 27:1; 누 12:19, 20; 야 4:13-16) 그는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이 여호와로부터 오는 힘 덕분임을 인식할 것이다. (시 34:2; 44:8)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뽐내는 사람은 바로 이것을 뽐내어라. 곧 통찰력을 가진 것과 나를 아는 것, 내가 여호와이고 사랑의 친절과 공의와 의를 땅에서 행하는 이임을 아는 것을 뽐내어라. 이러한 것들을 내가 좋아한다.”—렘 9:24; 고첫 1:31.

사랑은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상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는다. 사랑은 성적인 추행이나 충격적인 행위 같은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사랑은 누구에 대해서든 버릇이 없거나 저속하거나 몰상식하거나 불손하거나 천하거나 불경스럽지 않다. 사랑이 있는 사람이라면 외관으로든 행동으로든 그리스도인 형제에게 누를 끼치는 일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회중에게 “모든 일을 알맞게 마련에 따라 하십시오” 하고 교훈하였다. (고첫 14:40) 또한 사랑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인 신자가 아닌 사람들 앞에서도 존경받을 만하게 처신하려 할 것이다.—로 13:13; 데첫 4:12; 디첫 3:7.

사랑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각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이로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로움을 계속 구하라’는 원칙을 따른다. (고첫 10:24) 바로 여기에서 다른 사람들의 영원한 복지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러한 진실한 관심이야말로 사랑의 가장 강한 원동력 중 하나이고 그 결과가 가장 효과적이고 유익한 것 중의 하나이다. 사랑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엇이든지 자기의 방식대로 처리되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약한 사람들에게는 내가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얼마의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려고 좋은 소식을 위하여 모든 일을 합니다.” (고첫 9:22, 23) 사랑은 또한 자기 “권리”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영적 복지에 더 관심을 갖는다.—로 14:13, 15.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낼 만한 기회나 구실을 찾지 않는다. 사랑은 육체의 일인 화를 터뜨리는 일을 하지 않는다. (갈 5:19, 20) 사랑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 때문에 쉽게 분개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 “위엄”이 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랑은 “해를 입은 것을 유념해 두지 않습니다.” (문자적 의미는 “악한 일을 계산”하지 않는다; Int.) 사랑은 해를 입었다고 생각하여 그 해를 ‘장부’에 기재하듯 때가 되면 청산하거나 보상받아야 할 것으로 모아 두면서, 그동안에는 해를 입힌 사람과 해를 입은 사람 사이에 아무런 관계도 허용하지 않는 그런 일이 없다. 그것은 성서에 정죄되어 있는 복수의 영이 될 것이다. (레 19:18; 로 12:19) 사랑은 다른 사람의 동기를 나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정을 참작하여 다른 사람의 의문시되는 점도 선의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로 14:1, 5.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이전에 가졌던 신앙이나 이전에 발설한 말을 진리가 뒤엎는다 하더라도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그것은 진리인 하느님의 말씀에 고착한다. 사랑은 언제나 올바른 쪽에 서서, 그릇된 일이나 거짓말이나 여하한 형태의 불공정에 대해서는 그 피해자가 누구이든지, 심지어 적이 피해자인 경우에도 즐거워하는 일이 없다. 그러나 잘못된 일이나 오도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진리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나서서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갈 2:11-14) 또한 사랑은 사태를 바로잡기 위해서 또 다른 잘못을 범하기보다는 잘못된 것을 감내하는 쪽을 택한다. (로 12:17, 20) 그리고 어떤 사람이 권위를 가진 사람에게서 올바른 시정을 받을 경우, 사랑이 있는 사람은 질책받는 사람을 감상적으로 편들어서, 시정이나 시정을 베푼 권위 있는 사람을 흠잡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행동은 그 당사자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하면 시정받은 사람에게서 호의를 얻을지 모르지만 그를 돕는 것이기보다는 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될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사랑은 의를 위해서 기꺼이 인내하고 견딘다. 문자적인 번역은 “그것은 모든 것을 덮어 준다”는 것이다. (Int) 사랑이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을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그 잘못이 그다지 심각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간과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예수께서 마태 18:15-17에서 권고하신 절차가 적용되는 경우라면 그 절차를 따른다. 그러한 경우에 상대방에게 잘못을 사적으로 지적해 주었더니 그가 용서를 구하며 피해를 보상한다면 사랑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정말로 용서하였고 하느님처럼 사랑으로 그 문제를 완전히 덮어 주었다는 것을 나타낼 것이다.—잠 10:12; 17:9; 베첫 4:7, 8.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사랑은 하느님께서 진리인 자신의 말씀 가운데서 말씀하신 것들을 믿는데, 설사 표면적으로는 믿을 만해 보이지 않고 믿음 없는 세상이 조소한다 해도 믿는다. 이러한 사랑, 특히 하느님에 대한 이러한 사랑은 그분이 참되심을 인식하는 것으로서, 그분이 충실하심과 믿음직하심을 보여 주신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참되고 충실한 벗을 알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말한 어떤 것에 대한 증거가 우리에게 없더라도 의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수 23:14) 사랑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완전히 다 깨닫지 못할지라도 믿으며, 그 점이 보다 온전히 설명될 때까지 혹은 명확한 이해를 얻게 될 때까지 기꺼이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고첫 13:9-12; 베첫 1:10-13) 사랑은 또한 그리스도인 회중과 하느님의 임명받은 종들을 이끄시는 하느님의 인도를 신뢰하며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한 그들의 결정을 지지한다. (디첫 5:17; 히 13:17) 그러나 사랑은 잘 속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감받은 표현들을 시험하여 그것이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인지 알아보라’는 하느님의 말씀의 교훈을 따라서 모든 것을 성서의 측정 기준에 따라 시험해 보기 때문이다. (요첫 4:1; 행 17:11, 12) 사랑은 충실한 동료 그리스도인 형제들에 대한 확신을 갖는다. 그리스도인은 형제가 잘못되었다는 절대적인 증거가 없는 한 형제를 의심하거나 불신하지 않을 것이다.—고둘 2:3; 갈 5:10; 몬 21.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랍니다.’ 사랑은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에 희망을 둔다. (로 12:12; 히 3:6) 사랑은 여호와께서 결실을 가져오시고 자라게 하시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면서 계속 일한다. (고첫 3:7) 사랑이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어떤 상황을 겪든지, 설사 일부는 믿음이 약한 사람일지라도, 그들에게 정말 좋은 때가 오기를 바랄 것이다. 그는 여호와께서 그런 약한 사람들에 대해 참을성을 보이신다면 자신도 반드시 동일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할 것이다. (베둘 3:15) 그리고 그는 자기가 진리를 배우도록 돕고 있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영의 감동을 받아 그분을 섬기게 되기를 바라고 기다리면서 그들을 계속 도와준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인내합니다.” 사랑이 있어야만 그리스도인은 여호와 하느님에 대한 충절을 지킬 수 있다. 하느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정성과 충실성이 얼마나 건실한지를 시험하기 위하여 마귀가 그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은 사랑으로 인내하여 하느님께 성실하게 고착할 것이다.—로 5:3-5; 마 10:22.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끝에 이르거나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일이 없다. 새로운 지식과 이해로 우리가 한때 믿었던 것들은 바로잡히게 될 수 있고 바라던 것들이 실현되고 새로운 것들에 희망을 두게 되면 희망은 바뀌게 되지만, 사랑은 언제까지나 그 충만함을 유지하며 계속 축적되어 점점 더 강해진다.—고첫 13:8-13.

“사랑할 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제외되는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사랑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알려 주시는 사람들, 혹은 악한 행로를 고집하는 사람들뿐이다. 사랑은 하느님을 미워하는 자들이 되지 않는 한 누구에게나 베풀어진다. 누구든 하느님을 미워하게 되면 그에 대한 사랑의 표현은 끝나게 된다. 여호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두 분은 모두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신다. (시 45:7; 히 1:9) 참 하느님을 강렬하게 미워하는 자들은 사랑을 표현해 줄 필요가 없는 자들이다. 사실, 그런 자들에게는 계속 사랑을 베푼다 해도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다. 하느님을 미워하는 자들은 하느님의 사랑에 호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 139:21, 22; 사 26:10)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그들을 미워하시고 그들을 대적하여 행동하실 때를 정해 놓으신 것도 당연한 일이다.—시 21:8, 9; 전 3:1, 8.

사랑해서는 안 될 것들 사도 요한은 이렇게 기술한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그 사람 안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자기 살림의 과시—은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요, 세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첫 2:15, 16) 그는 나중에 “온 세상은 악한 자의 권세 안에 있다”고도 말하였다. (요첫 5:19) 따라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든 악한 길을 미워한다.—시 101:3; 119:104, 128; 잠 8:13; 13:5.

성서에서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해야 하고 이 사랑에는 부부 관계가 포함된다는 것을 알려 준다. (잠 5:18, 19; 고첫 7:3-5) 한편,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의 성적인 사랑을 하는 육적이고 세상적인 행위는 그릇된 것임을 지적한다. (잠 7:18, 19, 21-23) 세상적인 것 또 한 가지는 물질주의, 즉 온갖 해로운 일의 뿌리인 “돈을 사랑하는 것”(필라르기리아, 문자적 의미는 “은을 좋아함”; Int)이다.—디첫 6:10; 히 13: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구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셨다. 그분은 위선적인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큰길의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고 만찬에서 눈에 띄는 자리와 회당의 정면 좌석을 사랑한다고 통렬하게 비난하셨다. 그분은 그들이 자기들의 상, 자기들이 사랑하고 욕심낸 것, 즉 사람들로부터의 영예와 영광을 이미 충분히 받았다고 지적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느님에게서 받게 될 상은 전혀 없다. (마 6:5; 23:2, 5-7; 누 11:43) 기록은 이렇게 되어 있다. “실제로 지도자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게 믿음을 두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 때문에 그분을 믿는다고 고백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회당에서 추방당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보다도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던 것이다.”—요 12:42, 43; 5:44.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기 영혼을 좋아하는[필론] 사람은 그것을 멸망시키지만, 이 세상에서 자기 영혼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그것을 보호하게 될 것입니다.” (요 12:23-25) 그리스도의 추종자로서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놓기보다 지금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는 쪽을 택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잃겠지만, 현 세상에서의 생명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고 여호와와 그리스도와 그분들의 의를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거짓말쟁이들을 미워하시는데, 그들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분은 환상 가운데서 사도 요한에게 이렇게 선언하셨다. “개들과 영매술을 행하는 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을 좋아하고[필론] 행하는 모든 자들은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 밖에 있다.”—계 22:15; 데둘 2:10-12.

사랑은 식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장차 있을 일들을 알려 주시면서 하느님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아가페)이 식을 것임을 지적하셨다. (마 24:3, 12) 사도 바울은 장차 올 위급한 때의 한 가지 특징으로 사람들이 “돈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디둘 3:1, 2) 따라서 사람은 올바른 원칙들을 망각하게 될 수도 있고 한때 가지고 있던 올바른 사랑이 사그라질 수도 있음이 분명하다. 이 점은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분의 원칙들에 따라 생활을 틀 잡아 감으로 사랑을 계속 베풀고 발전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강조해 준다.—엡 4:15, 2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