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
(sovereignty)
최고의 통치권이나 권력. 주, 왕, 황제 또는 그와 같은 이의 지배나 통치. 요컨대 국가 행정을 결정하는 권력.
히브리어 성경에는 아도나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며, 아도나이 예휘라는 표현은 285회 나온다. 아도나이는 “주, 주인”을 의미하는 아돈의 복수형이다. 아도님이라는 복수형은 단순 복수로, 사람들인 “주들”, “주인들”을 가리킬 수 있다. 그러나 가외의 접미사가 붙지 않은 아도나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언제나 하느님과 관련하여 사용되며, 탁월함이나 위엄을 나타내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번역자들은 그 단어를 흔히 “주”로 옮긴다. 예로서 시편 73:28처럼, 하느님의 이름과 함께 나올 때(아도나이 예휘) 그 표현을 “주 하느님”(Lord GOD)(AT, KJ, RS), “주 하느님”(Lord God)(Dy[72:28]), “주, 나의 주인”(Kx[72:28]), “주 여호와”(Yg), “주권자인 주 여호와”(「신세」)로 번역한다. 시편 47:9과 138:5 및 150:2에서 모펏은 아도나이를 번역한 것은 아니나, “주권자”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sovereign)를 사용한다.
그리스어 데스포테스는 최고 권위 곧 절대 소유권과 무제한의 능력을 소유하신 분을 의미한다. (「바인의 신구약 단어 해설 사전」 Vine’s Expository Dictionary of Old and New Testament Words, 1981년, 3권, 18, 46면) 그 단어는 “주(lord)”, “주인”, “소유자”로 번역되며 누가 2:29, 사도행전 4:24, 계시록 6:10에서 하느님을 직접 가리키는 데 사용될 때에는 “주(Lord)”(「킹」, KJ, Yg, 그 밖의 번역판), “모두의 통치자”(Kx), “주권자인 주”(「신세」)로 번역된다. 계시록 6:10에서 「녹스」, 「신 영어 성서」(The New English Bible), 「모펏」, 「개역 표준역」(Revised Standard Version)은 “주권자인 주”로, 영의 번역판과 「왕국 행간역」(Kingdom Interlinear)은 “주인”으로 옮긴다.
이렇듯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본문에 “주권자(인)”에 해당하는 수식어가 별도로 들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에서 아도나이와 데스포테스라는 단어가 여호와 하느님을 가리키는 데 사용될 경우 그런 느낌이 담겨 있다. 그 수식어는 주이신 그분의 지위의 탁월함을 뜻한다.
여호와의 주권 여호와 하느님은 창조주이고 하느님이고, 전능자로서 지고하므로 우주의 주권자(“세계의 주권자”, 시 47:9, Mo)이시다. (창 17:1; 출 6:3; 계 16:14) 그분은 만물의 주인이자 모든 권위와 능력의 근원이며 통치 체제에서 최고 통치자이시다. (시 24:1; 사 40:21-23; 계 4:11; 11:15) 시편 필자는 그분에 대해 이렇게 노래하였다. “여호와께서 하늘에 그분의 왕좌를 굳게 세우셨으니, 그 왕권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 (시 103:19; 145:13) 예수의 제자들은 하느님을 향하여 ‘주권자인 주여, 당신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입니다’라고 기도하였다. (행 4:24, 「신세」; Mo) 이스라엘 나라의 경우, 하느님이 친히 정부의 삼권 곧 사법권·입법권·행정권을 모두 관장하셨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여호와는 우리의 재판관, 여호와는 우리의 법규 수여자,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다. 그분이 친히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사 33:22) 모세는 신명기 10:17에서 주목할 만하게 하느님을 주권자로 묘사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주권적 지위에 계시므로 다스리는 책임을 위임할 권리와 권위를 가지고 계시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성경은 마치 그 나라가 그의 왕국인 것처럼 ‘다윗의 왕국’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께서 주권을 가진 위대한 통치자이심을 인정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오 여호와여, 위대함과 위력과 아름다움과 존귀함과 위엄이 당신의 것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 여호와여, 모든 것의 머리로 스스로 높이시는 분이여, 왕국도 당신의 것입니다.”—지상의 통치자들 지상 나라의 통치자들은 주권자인 주 여호와께서 묵인하시거나 허락하신 바에 따라 제한된 통치권을 행사한다. 정부들이 하느님으로부터 권위를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 즉 그분으로부터 어떤 권위나 능력을 받아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계시록 13:1, 2에 나와 있다. 이 구절에서는 일곱 머리와 열 뿔이 달린 야수가 용 곧 사탄 마귀로부터 “그 권세와 왕좌와 큰 권위”를 얻었다고 말한다.—계 12:9. 짐승, 상징적 참조.
그러므로 하느님이 인간의 갖가지 통치권의 흥망을 허용해 오기는 하셨어도 위력 있던 한 왕은 여호와의 주권의 실상을 체험으로 실증한 뒤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의 통치권은 한정 없는 때까지 있을 통치권이며 그분의 왕국은 대대에 이를 것[이다]. 땅의 모든 주민은 그저 없는 것으로 여겨지며, 그분은 하늘의 군대와 땅의 주민들 가운데서 자신의 뜻대로 행하고 계신다. 그분의 손을 제지하거나 그분에게 ‘당신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하고 말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단 4:34, 35.
따라서 인간이 만든 정부가 다스리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허락되는 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시한 이런 명령이 유효하다. “모든 영혼은 위에 있는 권위에 복종하십시오. 하느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권위는 없기 때문입니다. 현존하는 권위는 하느님에 의하여 그들의 상대적 지위에 놓여 있습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그런 정부가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을 처벌할 때 “위에 있는 권위” 곧 통치자가(하느님의 충실한 숭배자는 아닐지라도) 간접적으로 하느님의 봉사자라는 그러한 특정한 자격으로 행동하여 악한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진노를 표현하는 것임을 지적한다.—로 13:1-6.
그런 권위가 “하느님에 의하여 그들의 상대적 지위에 놓여 있”다고 해서 하느님이 그런 정부들을 구성하셨거나 후원하신다는 의미는 아님을 성경은 알려 준다. 그와는 달리 그분은 지상에 있는 자신의 종들에 관한 뜻과 관련하여 자신의 선한 목적에 맞도록 그런 정부들을 조정해 오셨다. 모세는 이렇게 말하였다. “가장 높으신 분이 나라들에게 상속 재산을 주실 때에, 아담의 자손을 서로 떼어 놓으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를 고려하여, 뭇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네.”—신 32:8.
하느님의 아들인 왕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왕좌”에 앉아 있던 마지막 왕이 폐위된 뒤(대첫 29:23), 예언자 다니엘은 하느님의 친아들이 앞으로 왕으로 임명될 일을 묘사하는 환상을 받았다. 옛날부터 계신 분인 여호와의 지위는 그분이 아들에게 통치권을 주실 때 분명히 드러난다. 기록은 이렇게 알려 준다. “내가 밤의 환상 중에 계속 보고 있는데, 보라! 하늘의 구름과 함께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오고 있었다. 그는 ‘옛날부터 계신 분’에게 나아가게 되었으며, 그들은 그를 그분 앞으로 가까이 데리고 갔다. 그러자 그에게 통치권과 위엄과 왕국이 주어져, 백성들과 나라들과 언어들이 모두 그를 섬기게 하였다. 그의 통치권은 사라지지 않고 한정 없이 지속될 통치권이며, 그의 왕국은 파멸되지 않을 왕국이다.” (단 7:13, 14) 이 성구를 마태 26:63, 64과 비교해 보면 다니엘의 환상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는 여호와께서 계신 곳에 나아가 통치권을 받는다.—시 2:8, 9; 마 28:18 비교.
여호와의 주권이 도전을 받다 사람이 땅에 살아온 것으로 성서 연대에서 지적하는 기간 거의 전체에 걸쳐 악이 존재해 왔다. 인류는 모두 죽어 왔고 하느님에 대한 죄와 범법은 늘어만 왔다. (로 5:12, 15, 16) 하느님은 사람이 완전한 출발을 하게 하셨다고 성서에서 지적하므로 몇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즉 어떻게 죄와 불완전과 악이 시작되었는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전능한 하느님이 그런 것을 수십 세기 동안 허용해 오셨는가? 그 대답은 인류가 관련된 가장 중대한 쟁점을 초래한,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그분이 원하시는 것 지난 수십 세기에 걸쳐 여호와 하느님은 완전한 공의와 심판을 행하고 그분을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널리 나타냄으로 말과 행동으로 사랑과 과분한 친절의 하느님임을 증명해 오셨다. (출 34:6, 7; 시 89:14. 의(義); 자비 참조) 그분은 감사할 줄 모르는 악인들에게까지도 친절을 나타내 오셨다. (마 5:45; 누 6:35; 로 5:8) 그분은 자신의 주권이 사랑으로 행사되는 것을 좋아하신다.—렘 9:24.
그렇기 때문에 그분이 자신의 우주에 두고 싶어 하는 인격체는 그분과 그분의 훌륭한 특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을 섬기는 자들이다. 이들은 첫째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둘째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마 22:37-39) 그들은 여호와의 주권을 사랑하고 그 주권을 원하며 다른 어떤 것보다 그것을 좋아해야 한다. (시 84:10) 그들은 자기들이 독립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분의 통치권이 다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지혜롭고 의로우며 우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분의 주권을 택하는 자들이어야 한다. (사 55:8-11; 렘 10:23; 로 7:18) 그런 자들은 단지 하느님의 전능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혹은 이기적인 이유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의와 공의와 지혜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여호와의 위대함과 사랑의 친절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분을 섬긴다. (시 97:10; 119:104, 128, 163) 그들은 사도 바울과 일치하게 이렇게 외친다. “오, 하느님의 부와 지혜와 지식의 깊음이여! 참으로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고, 그분의 길은 더듬어 알아 낼 수 없구나! ‘누가 여호와의 생각을 알게 되었고,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되었습니까?’ 또한 ‘누가 그분에게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습니까?’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그분에 의하여, 그분을 위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에게 영원히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로 11:33-36.
그런 자들은 하느님을 알게 되는데, 실제로 그분을 아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주권에 고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쓴다. “그분과 결합하여 머물러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죄를 거듭 짓지 않습니다. 죄를 거듭 짓는 사람은 아무도 그분을 보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첫 3:6; 4:8) 예수께서는 자신의 아버지를 어느 누구보다 잘 아셨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것을 아버지께서 내게 넘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또한 아들과 또 아들이 계시해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마 11:27.
사랑과 올바른 인식을 발전시키지 못하다 그러하기에 여호와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 제기되었을 때, 이 도전은 하느님의 주권의 혜택은 누리면서도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올바로 인식하고 발전시키지 않음으로 그분에 대한 사랑을 깊게 하지 않은 자로부터 온 것이다. 그는 하느님의 영적 피조물인 천사였다. 그는 인간 부부인 아담과 하와가 땅에 있게 되었을 때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공격을 개시할 기회를 포착하였다. 그는 먼저 하와를, 그다음 아담을 하느님의 주권에 복종하는 데서 떠나게 하려고 시도하였다(결국 성공하였다). 그는 적대적인 주권을 확립하기를 바랐다.
그가 먼저 접근한 자인 하와는 자신의 창조주이자 하느님인 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없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그분을 알 기회를 활용하지 않았다. 하와는 하등 동물인 뱀의 음성에 귀 기울였지만, 그것은 뱀의 음성처럼 들렸을 뿐 실제는 반역한 천사의 음성이었다. 성서에는 뱀이 말하는 것을 듣고 하와가 놀랐다는 어떤 암시도 없다. 성서에서 지적하는 것은 뱀이 “여호와 하느님이 만드신 땅의 모든 들짐승 중에 가장 조심성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창 3:1) 그 뱀이 “선악에 대한 지식의 나무”의 금지된 열매를 먹고 지혜로워져서 말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보였는지의 여부는 지적되어 있지 않다. 반역한 천사는 그 뱀을 이용하여 하와에게 말하면서 (하와가 보기에) 독립할 기회,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악을 알게” 될 기회를 제시하고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창 2:17; 3:4, 5; 고둘 11:3.
아담 역시 자기 집안에서 일어난 반역을 대하였을 때 자신의 창조주이자 공급자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사랑을 나타내지 않았고 시험을 받게 되었을 때에 자신의 하느님을 옹호하는 충성을 나타내지 않았다. 하와의 설득에 넘어간 것이다. 필시 아담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자신의 충성스러운 종을 위해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실 수 있는 그분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잃었을 것이다. (삼둘 12:7-9에서 다윗이 밧-세바와 죄를 범한 뒤에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하신 말씀 비교) 아담은 또한 여호와께 화를 낸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자신의 그릇된 행위에 대해 질문을 받은 후에 한 대답에 그 점이 드러나 있다. “당신이 주셔서 저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의 열매를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창 3:12) 아담은 하와와는 달리 뱀의 거짓말 즉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거짓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 둘 다 스스로 결정하는 길, 하느님에 대한 반역의 길로 고의적으로 들어섰다.—디첫 2:14.
아담은 “내가 하느님에게 시련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도리어 이 원칙이 적용되었다. “각 사람은 자기 자신의 욕망에 끌려 유인당함으로써 시련을 받습니다. 그리고 욕망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이루어지면 죽음을 낳습니다.” (야 1:13-15) 그러므로 세 반역자—천사, 하와, 아담—는 하느님이 부여하신 자유 의지를 사용하여 죄 없는 상태에서 돌아서서 고의적인 죄의 길로 향하였다.—완전함, 완전성; 죄 참조.
쟁점 여기서 도전을 받은 것은 무엇인가? 나중에 사탄 마귀로 불리게 된 천사의 이 도전—아담이 반역 행위로 지원한 도전—으로 누가 모욕과 명예 훼손을 당하였는가? 여호와께서 지고하시다는, 즉 그분의 주권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도전을 받았는가? 하느님의 주권이 위험에 처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여호와께서는 최고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계시며 하늘이나 땅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분의 손에서 그것을 빼앗을 수 없기 때문이다. (로 9:19) 그러므로 그 도전은 하느님의 주권의 정당성, 타당성, 의로움에 대한 것—그분의 주권이 훌륭한 방법으로, 의롭게, 그리고 자신의 신민의 최상의 이익을 위해 행사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그 천사가 하와에게 접근한 방식에 그 점이 나타나 있다. “너희는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느님이 말씀하셨다는데 그것이 정말이냐?” 여기서 뱀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하느님이 지나치게 제한을 가하여 인간 부부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어떤 것을 주지 않고 있다는—뜻으로 넌지시 말한 것이다.—창 3:1.
“선악에 대한 지식의 나무”는 무엇이었는가?
아담과 하와는 “선악에 대한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반역을 나타냈다. 우주 주권자인 창조주가 그 나무와 관련하여 법을 만드신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권한 내에서 행동하신 것이다. 아담은 창조된 자였지 주권자가 아니었으므로 한계가 있었고 그는 이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었다. 우주의 평화와 조화는 이성 있는 모든 피조물이 창조주의 주권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것에 달려 있다. 아담은 그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음으로 그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낼 수 있었다. 온 땅에 가득 찰 사람들의 아버지가 될 자로서, 아담은 아주 작은 일에서도 순종적이고 충성스러운 사람임을 증명해야 하였다. 관련된 원칙은 이것이었다. “가장 작은 것에 충실한 사람은 큰 것에도 충실하고, 가장 작은 것에 불의한 사람은 큰 것에도 불의합니다.” (누 16:10) 아담에게는 그처럼 완전한 순종을 할 역량이 있었다. 그 나무 열매 자체에 본래 나쁜 것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금지된 것은 성행위가 아니었다. 하느님이 그 부부에게 “땅을 가득 채우”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창 1:28] 그것은 성서에서 말한 대로 실제 나무 열매였다.) 그 나무가 무엇을 상징했는지가 「예루살렘 성서」(The Jerusalem Bible, 1966년) 창세기 2:17의 각주에 이처럼 잘 표현되어 있다.
“이 지식은 하느님이 전유하시는 권리인데,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그 권리에 손댄 것이다. 3:5, 22. 그러므로 그것은 전지(全知)의 능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타락한 인간이 그런 능력을 소유하게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도덕적 판별력도 아니다. 왜냐하면 타락하기 이전의 인간도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었고 하느님은 그것을 이성을 가진 존재에게 허락하지 않으실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스스로 결정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힘, 인간이 창조된 존재라는 자신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고 완전한 도덕적 독립을 요구하는 권리 주장이다. 그 최초의 죄는 하느님의 주권을 침해한 죄, 교만의 죄였다.”
하느님의 종들이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받다 하느님의 충실한 종 욥에 관하여 사탄이 하느님께 한 말에서 그 쟁점이 더 거론되었다. 사탄은 이렇게 말하였다. “욥이 이유 없이 하느님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당신이 친히 그와 그의 집과 그가 가진 모든 것 주위에 울타리를 두르지 않으셨습니까? 그의 손으로 하는 일을 축복하셔서, 그의 가축이 땅에 널리 퍼졌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부디 당신의 손을 뻗으시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치시고, 그가 당신의 얼굴에 대고 당신을 저주하지 않나 보십시오.” 사탄은 다시금 이렇게 비난하였다. “가죽은 가죽으로. 사람은 자기 영혼을 위해서라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줍니다.” (욥 1:9-11; 2:4) 그렇게 말함으로 사탄은 욥이 오로지 이득을 얻으려는 이기적인 생각에서 하느님께 순종하여 섬기는 것이지 마음으로 하느님과 일치된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비난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탄은 하느님의 주권에 대해서는 하느님을 중상하고, 그 주권에 대한 충절과 관련해서는 하느님의 종들을 중상하였다. 사실상 사탄은 자기에게 사람을 시험하는 일이 허용되기만 한다면 땅에서 여호와의 주권에 충절을 유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여호와께서는 그 쟁점이 덧붙여지는 것을 허락하셨다. 하지만 그분은 자신의 주권의 의로움이 미심쩍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자신에 관하여 그 무엇도 증명할 필요가 없으셨다. 자신의 지성 있는 피조물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 문제를 충분히 시험할 시간을 허용하신 것이다. 그분은 사람들이 온 우주 앞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게 허락하셨다. 그리하여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마귀가 거짓말쟁이임을 증명할 특권과 하느님의 이름에서만 아니라 피조물 자신들의 이름에서도 그 중상을 씻어 버릴 특권을 주셨다. 사탄은 자기 본위적인 태도로 인해 “승인받지 못하는 정신 상태에 내”맡겨졌다. 하와에게 접근한 것을 보면 그는 스스로 모순된 추리를 한 것 같다. (로 1:28) 그는 하느님이 주권을 부당하고 불의하게 행사한다고 비난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공정성을 계산에 넣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즉 사탄은 자기가 하느님의 피조물들의 불충실에 관해 제시한 비난을 증명하기만 한다면 하느님도 자기를 계속 살려 두지 않을 수 없다고 여기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쟁점 해결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 쟁점을 해결하는 것은 살아 있는 모두에게—그들과 하느님의 주권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사실상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일단 해결된다면 그런 쟁점은 결코 다시 문제시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이 쟁점과 관련된 모든 의문에 대해 충분한 지식이 철저히 알려지고 이해되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하느님이 취하신 행동은 그분의 불변성에 대한 확신을 낳는다. 이는 그분의 주권이 드높여지고 그 주권을 택하는 모두의 정신 속에 그것이 더욱 바람직하고 확고한 것으로 자리 잡게 한다.—말 3:6 비교.
요첫 5:19; 계 12:9) 사람들은 하느님의 참으심과 친절의 이유를 올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더욱 반역적이 되어 왔다. (전 8:11; 베둘 3:9) 이 때문에 충절을 지키며 하느님을 섬기는 데는 믿음이 필요하였고 고통도 따랐다. (히 11:6, 35-38)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주권과 이름을 모두에게 알리려는 목적을 가지셨다. 이집트에서 그분은 파라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실은, 이런 이유로 내가 너를 존속시켰으니, 즉 너에게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선포되게 하려는 것이다.” (출 9:16)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이 세상과 세상의 신인 사탄 마귀가 존속하여 그들의 악이 심해져 가게 할 시간을 허용하셨고, 그들을 멸망시킬 때도 정해 놓으셨다. (고둘 4:4; 베둘 3:7) 시편 필자의 예언적 기도는 이러하였다. “그리하여 그 이름이 여호와이신 당신, 당신만이 홀로 온 땅을 다스리는 가장 높으신 분임을 사람들로 알게 하소서.” (시 83:18) 여호와께서 친히 이렇게 맹세하셨다. “나에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여 말할 것이다. ‘확실히 여호와 안에 온전한 의와 힘이 있다.’”—사 45:23, 24.
도덕적 쟁점 따라서 이것은 위력 곧 순전한 힘겨루기 문제가 아니라 주로 도덕적 쟁점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사탄이 사람의 정신을 눈멀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 왔기 때문에 때로는 여호와의 능력이나 심지어 그분의 존재마저 의문시되기도 한다. (그 쟁점이 영향을 미친 범위 그 쟁점은 어느 정도나 광범한 영향을 미쳤는가? 사람이 죄를 짓도록 유도되었고 천사도 죄를 지었으므로 그 문제에는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피조물까지 심지어 여호와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하느님의 독생자까지 결부되게 되었다. 이분은 언제나 자신의 아버지에게 기쁨이 되는 일을 하신 분으로서 여호와의 주권의 입증에 기여하기를 매우 열망하셨을 것이다. (요 8:29; 히 1:9) 하느님은 그 임무를 위해 이 아들을 택하여 땅으로 보내어, 처녀 마리아를 통하여 사내아이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다. (누 1:35) 그분은 완전하였고 생애 내내 심지어 치욕스러운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완전함과 나무랄 데 없는 상태를 유지하셨다. (히 7:26) 죽기 전에 그분은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있습니다. 이제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날 것입니다” 하셨고, 또한 “세상의 통치자가 [옵니다]. 그는 내게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요 12:31; 14:30) 사탄은 아무리 힘을 써도 그리스도의 충절을 꺾을 수 없었으므로, 실패한 것으로 심판받아 쫓겨날 처지에 있게 되었다. 예수는 ‘세상을 이기셨다.’—요 16:33.
예수 그리스도, 여호와의 주권의 의로움의 입증자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철저히 완벽한 방식으로 마귀가 거짓말쟁이임을 증명하여 ‘어떤 시험이나 시련을 당해도 하느님께 충실할 사람이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주권자인 하느님은 예수를 그분의 목적의 집행자로 즉 우주에서 마귀를 포함하여 악을 멸하는 데 사용할 자로 임명하셨다. 바로 이 권위를 예수께서 행사하실 것이며, ‘모든 무릎이 꿇게 되고,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가 주이심을 드러내어 인정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빌 2:5-11; 히 2:14; 요첫 3:8.
이 아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지배권 내에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다스리며 여호와의 주권에 대항하는 모든 정부와 모든 권위와 권세를 ‘없앨 것이다.’ 그런 다음 예수 그리스도는 여호와의 주권에 최대의 예물을 바친다고 사도 바울은 밝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모든 것이 그에게 복종하게 된 그때에는 아들 자신도 모든 것을 자기에게 복종시키신 분에게 복종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고첫 15:24-28.
계시록이 알려 주는 바대로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이 기간에 그리스도는 여호와의 주권에 맞서려는 모든 권위를 제거하신다—가 끝난 뒤에 마귀가 잠시 풀려날 것이다. 그는 그 쟁점을 다시 일으키려 하겠지만 이미 해결된 그 문제를 위해 긴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탄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온전히 멸절될 것이다.—계 20:7-10.
여호와의 편을 지지하는 다른 이들 그리스도가 충실함을 통해 그 쟁점에서 하느님이 옳으심을 철저히 증명하셨지만 다른 이들도 그 일에 참여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잠 27:11)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죽음을 포함하여, 그분이 충절을 지킨 행로의 결과를 이렇게 지적하였다. “한 의인(義認) 행동을 통하여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미친 결과는 그들을 생명을 위하여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로 5:18) 그리스도는 “몸”인 회중의 머리가 되셨고(골 1:18), 그 몸의 구성원은 충절로 맞이한 그분의 죽음에 참여한다. 그분은 자신의 왕국 통치에서 그들이 공동 상속자로, 보조 왕으로서 자신과 함께하게 된 것을 기뻐하신다. (누 22:28-30; 로 6:3-5; 8:17; 계 20:4, 6) 고대의 충실한 사람들은 몸은 불완전하여도 하느님의 마련을 고대하며 충절을 유지하였다. (히 11:13-16) 그리고 그 밖에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무릎을 꿇게 될 많은 사람들 역시 하느님의 의롭고 합당한 주권을 마음 깊이 인정하여 그와 같이 할 것이다. 시편 필자가 예언적으로 이렇게 노래한 바와 같다. “호흡하는 것은 모두—야를 찬양하여라. 너희는 야를 찬양하여라!”—시 1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