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아프리카’ 공화국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
‘우방기-샤리’. 이 말이 당신에게는 이상하게 들리는가? 한때, 이것은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의 한 지역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1958년 이래, 그 동일한 땅은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알려져 왔다.
인구가 희소하고 사방이 육지로 둘러싸여 있는 이 나라는 ‘프랑스’보다 약간 크다. 불과 1세기 전만 하더라도 이곳의 주민들은 극소수였다. 그들 대부분은 남방 밀림 지대에 흩어져 살던 ‘피그미’족이었으며, 그들은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다. 지난 100여년 동안 많은 수의 다른 ‘아프리카’인들이
이주해 왔는데, 상당 수는 어떤 부족들에게 예속되어 노예 생활을 하던 상태로부터 도망하여 북방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피난처를 찾아왔지만, 결국은 1911년에 ‘프랑스’ 군대에 의하여 패전하였을 뿐이다. 수년 동안 ‘프랑스’는 이 땅을 해외 식민지의 하나로 통치하였다. 그러나, 1960년 ‘프랑스’인들이 이 나라의 행정을 ‘아프리카’인들에게 이양하므로써 이 나라는 독립하게 되었다.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에는 현재 1,215명의 왕국 선포자들이 주로 흑인들인 2,000,000명 이상의 주민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곳의 생활은 아직도 단순하며 원시적이다. 보통 농민들은 진흙 벽돌과 풀로 집을 짓고 산다. 생계 수단으로서는 농업에의 의존도가 차차로 늘어가고 있는 반면, 수렵에의 의존도는 줄어들고 있다.
이곳은 여러 가지가 매우 다양하다. 멀리 동북부에는 건조한 준사막지대가 펼쳐져 있다. 서남부에는 울창한 열대성 밀림이 있다. 그리고, 거대한 녹색의 초원이 이 나라의 대부분을 뒤덮고 있다. 이 나라의 심장부에서는 코끼리, ‘고릴라’, 사자 및 다른 동물들이 아직도 자유롭게 배회하고 있다.
종교적 배경
이 나라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며 성서 토론을 듣기를 좋아한다. 많은 사람들은 ‘가톨릭’교인이거나 ‘프로테스탄트’교인이라고 자처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령(精靈)신앙자들이다. 그리고, 또한, 일부다처 제도가 수세대 동안 시행되어 왔으며,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이것은 정상 생활 방식이다. 때로는 매우 고액의 관습적인 신부값을 지불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결혼의 유익없이 단순히 동거하면서 가족을 이룬다. 법률에 의하여 한 남자가 합법적으로 거느릴 수 있는 아내의 수의 한계가 규정되어 있으며, ‘가톨릭’ 및 ‘프로테스탄트’ 교직자들은 이것을 용인하여 일부다처자들마져 훌륭한 그리스인들로 간주되고 있다. 사실상, 이곳의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은 ‘아프리카’인은 단지 한 아내와만 생활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물론, 여호와의 증인들은 결혼에 대한 성서의 표준에 엄격하게 고착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모슬렘’, ‘프로테스탄트’ 혹은 ‘가톨릭’교인이라고 공언하는 한편, 그들은 하나님보다는 물신(物神)과 영에 더 많은 믿음을 두고 있다. 이전에 ‘프로테스탄트’교인이었던 한 사람은 자기가 교회에서 전도하는 생활을 하던 여러 해 동안에도 자기 집에다 ‘단지 행운을 위하여’ 얼마의 물신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어떤 다른 사람들은 대안이 없다고 느낀다.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사제가 학교에 오면, 나와 다른 학생들은 강제로 ‘가톨릭’교인이 되라는 압력을 받지 않기 위하여 수풀 속으로 도망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은 추적당하였고, 끌려와서 설교를 듣고, ‘가톨릭’교인이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1947년, ‘카메룬’ 출신 ‘아프리카’인인 ‘조주웨 디오’가 모 회사에 고용되어 수도인 ‘방기’로부터 얼마쯤 떨어진 ‘우방기-샤리’ 남부 밀림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이 아니었지만, 고국에 있었을 때 그들의 집회의 얼마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그는 자기가 들었던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였다. 그는 한 친구를 통하여 ‘방기’에 소재한 어떤 ‘에띠엔 응코우응코우’ 곧 정부 부처의 제도실장으로 있는 사람이 성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칸다 디아 킨진가’(영원한 생명을 위한 백성)라는 한 ‘아프리카’의 분파 종교의 창설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성서 진리는 매우 강력하며 신속히 오류를 제압하고 승리하게 마련인데, 이 사람의 경우에 바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 ‘디오’는 ‘응코우응코우’의 이름과 주소를 알게 되었으며, ‘스위스’의 협회 사무소는 그에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책을 보내 주었다. 미쳐 여러 면을 읽기도 전에 ‘응코우응코우’는 그 책의 건전한 영적 양식에 크게 기뻐하게 되었고, 자기가 읽은 바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야기해 주었다. 수년 후 그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우리는 생전 처음 하나님의 첫 창조물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말씀이라는 것과 멀지 않아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기간 중에 이곳 지상에서 부활된다는 것, 그리고 곧 사망마저도 영원히 멸망될 것이라는 것을 배우고 깊은 즐거움과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제, 일단의 관심자들이 ‘응코우응코우’가 그 책의 내용을 읽어 주는 것을 듣기 위하여 매 일요일에 모이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을 낭독하는 동안 다른 한 사람이 성귀를 읽어 주곤 하였다. 그러한 낭독을 듣기 위하여 모였던 최초의 사람들 가운데에는 공무원인, ‘쟌 랑칸도’, 세관 관리인 ‘오구스텡 바요네’, 그리고 ‘프랑스’ 정부에 고용된 또 다른 사람인 ‘앙드레 욤보트’가 끼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수는 곧 10명에 달하게 되었으며 얼마 후에는 20명으로 증가하였다.
하나의 기초가 놓인 것이다. ‘프랑스’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과의 그리고 그 후에는 ‘뉴욕’, ‘브루클린’(미국)의 ‘왙취 타워 협회’ 본부와의 접촉이 이루어졌다. 더 많은 서적이 도착하였으며, 그것으로써 성서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조건에 대하여 더 나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방기’의 그 집단은 오랫 동안 단순히 하나의 연구하는 집단으로만 일관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동시에 전파하는 집단으로도 발전하였다. 이 집단과 연합하는 사람들은 열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방법에 관한 지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성서에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처음에는 여러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사람들과 토론을 벌였다. 그들은 목사에게 질문을 하였으며, 그가 그들의 질문에 대답을 못하자, 관심자들은 더 많은 지식을 찾아 이들 새로운 진리의 전파자들에게로 몰려들었다. 곧 약 80명의 사람들이 그들의 모임에 참석하기에 이르렀다.
서적의 금지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교직자들은 재빨리 당국의 관심을 이들 성서 연구생들에게로 이끌었다. 그 결과, 정부 당국은 ‘브라자빌’로부터 ‘방기’로 한 백인을 파견하여 그 집단과 그 집단의 활동을 조사하게 하였다. 그는 자신을 성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하였다. 그러나 그 성서 연구생들은 그가 참으로 성서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님을 곧 알게 되었으며, 그와의 교제를 피하였다. 잠시 후, 1950년 7월,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에 의하여 발행되는 모든 서적의 수입 및 배포에 제한이 가해졌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이 금지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집회와 전파 사업은 계속되었다. 연구를 위하여 그리고 야외 봉사에서 성서만이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정부 당국이 여호와의 증인들에 관하여 어느 정도 혼동하는 것같았다. 교직자들이 당국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증인들이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믿도록 오도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들은 ‘키타왈라’, 즉 ‘벨기에’령 ‘콩코’에서 결성된 한 집단이라고 하였다. 또 다른 운동—‘콜링가’—도 여호와의 이름을 사용하였으며 여호와의 증인의 이름 하에 얼마의 집회를 보고 있었다. 이제 당국자들과 함께 여러 시간을 보내면서, 여호와의 증인은 파괴적인 집단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들의 정신으로부터 모든 의심을 제거해 준 것은 시간이 지나 협회가 ‘프랑스’로부터 ‘프랑스’의 특별 ‘파이오니아’들을 ‘방기’로 파견한 사실이다. ‘키타왈라’ 운동은 반백인(反白人), 반 ‘유럽’인 운동이다. 그 백인 특별 ‘파이오니아’ 전도인들은 그들의 ‘아프리카’인 형제들과 자유롭게 어울리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키타왈라’와 ‘콜링가’는 이 나라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러나, 협회의 출판물에 대한 제한령이 철폐되지 않았으며, ‘방기’에서는 얼마의 형제들이 불법 서적을 배부한 혐의로 체포되어 기소당하였다. 비록 하급 법원에서는 그들을 방면하였지만, 검찰 총장은 동 건을 상소하였다. 그러나 공소원에서도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하였다. 그리하여, 사업은 과거보다도 더욱 힘차게 계속되었다. ‘프랑스’ 정부 당국의 한 대표자는 여호와의 증인들도 모든 다른 공인된 종교들과 동일한 입장에서 다루어질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들이 반대하는 유일한 것은 미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서적이었다.
신권적 증가가 분명하여짐
1955년에 이르러 ‘방기’에는 200명 이상의 하나님의 왕국의 선포자가 있게 되었다. 신권적 증가가 분명해졌다. 그리하여 더욱 효과적인 봉사를 수행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훈련하기 위하여, 회중을 셋으로 나누었다. 확장은 계속되었으며, 현재 ‘방기’에는 13개의 회중이 있다. 수도에서 이러한 모든 활동이 진행되는 한편, 농촌 지역도 증거가 행하여지지 않고 버려지지는 않았다. 수백 ‘마일’ 떨어진 마을에서도 사람들은 그 종교의 성원들이 ‘피를 먹는 일을 거부’하는 종교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사도 15:28, 29.
요한 8:32) ‘삼바’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진리와 접촉하게 된 젊은이인 ‘베르나드 가오우아랑가’는 마침내 원주민 출신으로서는 최초의 전 시간 ‘파이오니아’ 전도인이 되었다.
‘데코아’ 출신인 한 교사는 ‘방기’에서 휴가하는 동안 여호와의 증인들의 말을 듣게 되었으며, 그 후에는 편지로 성서 연구를 계속하였다. 이 선생, ‘시몽 코타디사’는 ‘프로테스탄트’ 목사인 ‘쟉크 삼바’와 이야기를 하였으며, 그는 ‘코타디사’로 하여금 여러 차례 자기 교회 집단에게 연설을 하도록 초대하였다. ‘삼바’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죽을 때에 천당으로 가는 것이 아니며, 지옥 속에는 불이 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자, 이것을 자기의 교회에서 가르쳤다. 그의 청중들은 자기들이 들은 내용은 마치 꿀처럼 달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원하였다. ‘삼바’의 상급자들인 미국인 선교사들은 이러한 진전에 관하여 알게 되었으며, 교회 회원들 모두를 모아놓고 ‘삼바’로 하여금 여호와의 증인들은 거짓 예언자들이라고 믿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분개한 나머지 그 ‘프로테스탄트’ 선교단의 우두머리는 모든 여호와의 증인들은 교회에서 나가라고 소리쳤다. 아직 아무도 여호와의 증인은 아니었지만, ‘삼바’ 목사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일어나 걸어나왔다. 그는 24년 동안 거짓을 믿고 전파하였지만, 마침내 자유롭게 된 것이다. (‘방기’ 밖에서의 최초의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은 1950년 4월 ‘데코아’에서 조직되었다. 잠시 후, 주변 마을에서도 왕국 증거가 행하여졌다. 교직자들의 절규는 굉장하였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여러 교회에서 견책당하였으며, 그들에 대한 비난은 믿을 수도 없을 정도였다.
한편 ‘가오우아랑가’ 형제가 순회 감독자로서 같은 경내의 다른 마을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작은 집단의 영적 필요를 돌보고 있는 동안, 한 ‘프로테스탄트’ 전도사와 지방 촌장이 집회 도중에 왕국회관에 불을 질렀다. 그 사건은 헌병대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곧 한 전도사와 한 촌장이 투옥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왕국 소식은 내륙 지방으로 더욱 깊숙이 전파되었다.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부터 사람들이 ‘방기’와 ‘데코아’로 와서 성서 진리를 배웠다. 그들은 그런 다음에 그 좋은 소식을 자기들의 고장으로 가지고 돌아갔다. 모종의 방법에 의해서 서적이 이 나라 안으로 들어왔으며, 사람들은 그것을 읽었다. ‘방기’로부터 동북쪽으로 500‘킬로미터’ 떨어진 ‘이피’에서 ‘가브리엘 엘리마치’는 한 학교 친구로부터 ‘왙취 타워 협회’의 잡지 한 부를 얻었다. 그것을 읽어본 다음, 그는 다시는 ‘가톨릭 미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지방 사제는 교회에서 이름을 발표하면서 그를 추방하였다. 그에 관한 보고가 ‘방기’에 소재하는 식민 정부 당국에 제출되었으나, 그로부터 아무런 결과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침내 ‘이피’에서 하나의 회중이 조직되었다.
‘엘리마치’ 형제는 기상학 시험을 통과하여, 그 당시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의 일부였던 ‘차드’의 ‘포드 라미’로 파견되었다. 단지 성서만을
손에 들고 ‘엘리마치’는 가능한 한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였으나 성공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그 광대한 나라에서의 증거 사업의 시작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도시에서 일하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얼마의 관심이 발견되었다. 집 한 채를 정하여 왕국회관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이 나라에서는 이러한 유로서는 최초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우방기-샤리’에서 계속된 발전
1954년도에 여호와의 말씀은 ‘보우아르’ 시로부터 시작하여 ‘방기’ 서쪽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수도 출신 ‘엑스’선 기사인 ‘필립 오우아코우도우’가 그곳으로 파견되어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때까지 아무도 ‘보우아르’에서 하나님의 왕국의 소식을 전파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오우아코우도우’는 호별 방문 봉사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그 도시를 돌기 시작하였다. 수개월만에 상당 수의 사람들이 마을 촌장의 집뜰에서 모이게 되었다. 그 중 다섯 사람이 매우 훌륭하게 발전하였으며, 1956년에 침례를 받았다.
그러자 문제거리가 시작되었다. 교직자들이 들고 일어나 자기네 양무리에게 ‘거짓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그들은 당국자들에게 증인들은 치안 방해적인 정치적 선동자들의 집단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연례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이 열렸을 때, 4명의 헌병이 “선동적인” 연설을 듣기 위하여 이웃 집에 숨어들었다. 4명의 헌병을 포함한 80명 이상의 겸손한 사람들이 ‘오우아코우도우’ 형제의 믿음을 세워 주는 연설을 들었다. 그 헌병들은 자기들의 상관들에게 매우 유리한 보고를 하였음이 분명하다. 왜냐 하면, 그 지역의 ‘프랑스’인 지사는 ‘가톨릭’ 사제를 불러서 그에게 여호와의 증인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정치적인 색채가 없을 뿐 아니라, 참된 성서의 종교를 실천하고 있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불과 짧은 기간 안에 읍 전체에서 지사가 사제에게 말한 이야기가 알려졌으며, 이것은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유리한 광고를 해 주는 결과가 되었다. 수년 동안 여호와께서는 증가시켜 주셨다. 오늘날 ‘보우아르’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두 회중이 모이고 있다.
1956년에 ‘왙취 타워 협회’의 지부가 ‘브라자빌’에 설립되어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 전역에서의 왕국 사업을 돌보게 되었다. ‘쟌 세이그노보스’가 ‘브라자빌’로부터 사업을 지휘하였으며, 또한 그곳과 이 나라 두 곳에서 얼마 동안 지역 감독자로서 봉사하였다. ‘세이그노보스’ 형제와 그의 아내가, 그리고 그 후에 ‘프랑스’로부터 다른 두 부부가 도착하게 되자, 당국은 더욱 친절해졌다. 대부분의 문제들이 점차적으로 명확히 해결되었다. 1957년 7월 27일자, 공고 제 2675호에 의하여 협회의 서적의 일부에 대한 금지령이 제거되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차 더 많은 서적이 이 나라의 백성들 간에 배부할 수 있는 승인을 받게 되었다.
1961년 3월 28일 협회는 새로 독립한 공화국에 의하여 합법적인 인가를 받았으며 국가의 관공 일지에 그러한 취지의 글이 삽입되었다. 그러던 차
1962년에 중앙 ‘아프리카’로 파견되는 최초의 ‘길르앗’ 졸업생—‘리처드 레이너’와 ‘알렉산더 아트킨슨’—이 ‘방기’에 도착하였다. 그 다음 해 4월 2일 이 나라를 방문하는 최초이자 유일한 ‘펜실베이니아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이사인, ‘밀튼 지. 헨첼’이 도착하였다. 공항에서 그를 환영한 형제들은 얼마나 행복하였던가! 잠시 후 같은 날에 ‘헨첼’ 형제는 612명의 청중에게 연설하면서, 성서 예언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형제들은 ‘헨첼’ 형제의 방문에 맞추어 완공하기 위하여 ‘응고우바가라’ 왕국회관 공사에서 매우 열심히 일하였다. 그것은 이 나라에서는 ‘시멘트 불록’으로 건축된 최초의 왕국회관이다. 그들은 그 왕국회관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그 후 같은 해인 1963년 9월 1일 ‘방기’에서 협회의 지부가 개설되어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 내에서의 왕국 권익을 돌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직과 야외 봉사에 있어서의 점진적인 발전과 함께 더욱 긴밀한 감독이라는 결과가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왕국의 전도인의 평균 수는 1962 봉사년도의 387명에서 1971년 5월에 이르러서는 1,243명이라는 최고수로 증가하였다.
얼마의 기간 동안은 자신이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관습적 결혼”을 할 수 있으며, 비록 법적인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도 하나의 형제로서 간주될 수 있는 상황이 존재했었다. 결혼에 관한 성서의 표준을 세워놓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사실과 사람이 자기의 창조주를 기쁘시게 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를 원한다면, 자기의 행동의 표준을 깨끗이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으며, 그 반대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끈기있게 설명하곤 하였다. 이 문제는 ‘아프리카’의 지방생활의 근간을 정면으로 공격하였다. 관습적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법적 결혼을 할 시간이 주어졌지만, 얼마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일임을 알고는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정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여호와의 뜻과 일치하는 것이며 곧 이러한 믿음이 없는 자들은 새로운 사람들로 대치되었다.
문맹이 발전에 큰 장애물이었다. 그러므로 협회는 모든 왕국회관에서 문맹 퇴치반을 시작하였다. 1963년 초에 이 활동에 특히 역점을 두었다. 오늘날 이곳의 여호와의 증인들의 74‘퍼센트’는 글을 읽을 줄 아는데, 이것은 전국민의 나머지와 비교한다면 매우 높은 비율이다.
또 하나의 전진적 조치는 「파수대」지, 몇 가지 소책자 및 다른 출판물을 주민의 대다수가 사용하는 ‘상고’어로 번역하려는 협회의 결정이다. 이제 매 회중에서 ‘프랑스’어를 아는 두 세 사람만이 아니라, 모두가 집회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으며, 특히 일요일 성서 연구에서 그러하였다.
그 후, 1965년에 협회는 ‘방기’의 조용한 주택지에 지부겸 선교인 집을 건축하기로 결정하였다. 현재는 그곳으로부터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과 ‘차드’에서의 사업을 관리하고 있다. 협회는 1969년 4월 24일자로 ‘차드’ 정부에 등록되었다. 잠시 후 4명의 선교인이 ‘포트 아르캄바울트’ 시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서는 두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 전도인이 이미 1년 이상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있었다. 그 때까지 여호와의 증인들은 수도인 ‘포트 라미’에서만 활동해 왔다. 1970년에 ‘포트 아르캄바울트’에서 하나의 회중이 조직되었다. 1971년에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다른 두 도시로 파견되었다. 마침내 ‘차드’ 출신 원주민들도 여호와의 증인이 되기에 이르렀다.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은 1966년 1월에 정권의 변화를 겪었다. 하나님의 왕국의 반대자들은 즉각적으로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행동을 개시하였다. 복음주의파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새로운 대통령에게 여호와의 증인을 금지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들에 따르면, 증인들은 정부를 대항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들의 계략을 간파하고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1970년에 4명의 새로운 선교인들이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에 도착하여 ‘차드’에 있는 4명을 제외하고도 이 나라에 있는 선교인의 총수는 10명이 되었다. 이제 대부분의 주요 도시와 읍에 왕국 소식이 미쳤다. 이 나라의 어려운 여행 조건에도 불구하고, 증인들은 작은 촌락에까지도 찾아간다. 순회 감독자들은 정기적으로 회중들을 방문하며, 순회 대회도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열리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이곳에 있는 자기 백성 위에 풍부한 축복을 내리셨으며, 그들은 주민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듣도록 하기 위하여 커다란 문제들을 극복해 왔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여호와의 인도를 구하면서, 확신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 본다. ‘차드’의 5회중과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의 43회중은 이 위태로운 “마지막 날”에 증거 사업에 참여하는 일을 매우 행복하게 여기고 있다.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의 1,215명의 왕국 전도인들과 1973년도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 참석한 3,397명의 참석자를 감안하여 우리는 짧은 남아 있는 기간 동안에 이곳에서 성취해야 할 굉장한 일이 놓여져 있음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