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제1부)
미합중국 (제1부)
우리의 이야기는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된다. 때는 아직도 포장마차가 흔들거리면서 광활한 평야를 횡단하며 외딴 지역인 서부로 개척자들을 실어나르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애팔래치아’ 산맥과 ‘로키’ 산맥 사이에는 수많은 들소의 무리—1850년에 약 2,000만마리—가 유유히 노닐고 있었다.
1861년부터 1865년에 걸쳐 일어났던 치열한 남북전쟁으로 인해 그 땅은 황폐되고 상당한 희생을 치르게 되었으며 뒤이어 산업화의 시대로 돌입하게 되었다. 1869년에는 처음으로 대륙 횡단 철도가 완성되었다. 1870년대에는 전등과 전화가 첫선을 보였다. 1880년대에 이르러는 전차로 인해 도시 교통이 편리하게 되었고 19세기 말에는 몇 대의 자동차가 나타나 수선을 떨었다.
이 시대의 종교적 풍토가 어떠할 것인가는 조금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1859년에 ‘차알스 다아윈’은 그의 저서 「종의 기원」에서 인간이 진화하였다는 이론을 옹호하였다. 진화론, 고등 성서 비평, 무신론, 영매술, 무신앙 등으로 인하여 조직된 종교가 심한 공격을 받게 되자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제1회 ‘바티칸’ 공의회(1869-1870)를 개최하여 약화되고 있는 지위를 강화하고자 노력하였다. 다른 여러 집단은 그리스도께서 육으로 재림(再臨)하실 때가 임박하였다고 그것을 열렬히 기대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렇지만 “사물의 제도의 결말”은 다가오고 있었다. 경작되고 있는 전세계적인 하나님의 밭 어딘가에 “밀” 즉 참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여야 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어디에?
“작은 일의 날”
때는 1870년, 장소는 ‘펜실베이니아’ 주 ‘알레게니’ 시이다. 후에 ‘피츠버어그’의 일부가 된 ‘알레게니’에는 교회가 많이 있었다. 어느날 저녁 18세 된 젊은이가 ‘알레게니’ 시가지를 걷고 있었다. 후에 그 자신이 술회한 바에 의하면 그는 “오랫 동안 용인되어 온 많은 교리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으며 “불신논리(不信論理)의 희생물이 되려는 찰나”에 있었다. 그러나 오늘 밤 그는 어느 노래 소리에 마음이 끌리고 있다. 그는 어둠침침하고 먼지투성이의 집회 장소를 들어 가고 있다. 그 목적은? 그 자신의 말에 의하면 “거기 모인 소수의 사람들에게서 큰 교회의 가르침보다 더 지각있는 어떤 점을 구할 수 있을까 알아 보기 위해서”이다.
그 젊은이는 앉아서 주의깊게 들었다. 재림론자인 ‘요나스 웬델’이라는 사람이 설교하고 있었다. 이 설교를 들은 그 젊은이는 “그의 성경 설명이 전적으로 명확한 것이 아니었다”고 후에 말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전연 무가치한 것이 아니었음을 그는 시인하였다. “그 설교는 성서의 하나님의 영감성에 대한 나의 흔들리는 믿음을 다시 회복시켜 주고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록이 분리할 수 없이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해 주기에 충분하였다. 내가 들은 내용은 나로 성서로 돌아가서 이전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그리고 주의깊게 그것을 연구하게 하였다.”
호기심이 강한 이 젊은이가 바로 ‘차알스 테이즈 러셀’이었다. 그는
1852년 2월 16일에 ‘알레게니’에서 ‘스코트-에이레’ 태생인 양친 ‘조셉 엘.’과 ‘앤 엘리사(버어니) 러셀’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차알스’의 모친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그를 주의 사업에 바쳤으며 그가 9세 되던 해에 사망하였다. ‘차알스’는 아주 어려서부터 장로교인인 양친에게서 종교적인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 후에 그는 좀더 진보적인 견해를 가진 근처에 있는 조합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11세의 소년에 불과하였지만 ‘차알스’는 자기 부친과 공동으로 사업 경영을 시작하였으며 기업 경영에 관한 합의조항을 그 자신이 작성하였다. 15세가 되어서는 부친과 함께 늘어나는 남자 의류 연쇄점에 손을 대었다.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피츠버어그’, ‘필라델피아’ 및 다른 여러 곳에 상점을 두게 되었다.
이 기간에도 줄곧 이 어린 ‘차알스’는 진실한 성경 연구생이었다. 그는 자기 힘이 닿는 데까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였다. 사실상 12세 되었을 때, 그가 자기 집 상점에서 새벽 2시가 되었는데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성서 ‘콘코던스’를 자세히 살피고 있는 것을 부친이 발견한 적도 있다.
나이가 들면서 ‘러셀’은 영적인 혼란을 겪게 되었다. 그는 특히 영원한 형벌과 예정론 교리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영원한 고초를 받을 것을 미리 예정해 놓고서 인간을 창조하는 데 자기 능력을 사용하는 그런 하나님이라면 현명한 것도 사랑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의 표준은 많은 인간들의 표준보다도 낮은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요한 1서 4:8) 그렇지만 그 젊은 ‘러셀’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변함이 없었다. 그의 머리는 교리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차 있어 그리스도교국의 여러 가지 가르침을 조사해 보고 동양의 주요 종교도 연구해 보았다. 그러나 크게 실망을 느꼈을 뿐이다. 어디에서 진리를 발견할 것인가?
후에 그의 동료가 된 한 사람에 의하면 ‘러셀’이 17세 되었을 때 그는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어떠한 교리나 심지어 성서에서도, 미래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치적인 것을 찾아내려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사업에만 모든 정성을 다하려고 한다. 내가 돈을 좀 벌게 되면 영적으로는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유익을 줄 수 없을지라도 그 돈을 고통받는 인간들을 돕기 위해서 사용하겠다.”
그가 ‘알레게니’에 있는 어둠침침한 방에 들어가서 설교를 듣고 ‘성서의 하나님의 영감성에 대한 그의 흔들리는 믿음을 회복’하게 되었던 것은 젊은 ‘러셀’이 바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알고 있는 몇몇 젊은이들에게 가서 그는 성서를 연구하고 싶다는 자신의 의향을 말하였다. 얼마있지 않아 이 조그마한 집단—6명 정도—이 조직적인 성서 연구를 위해 매주 모이기 시작했다. 1870년부터 1875년까지 정기적으로 모이는 가운데 이 사람들의 종교적인 사상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여호와께서는 증가된 영적 빛과 진리로 그들을 축복하셨다.—시 43:3; 잠언 4:18.
‘러셀’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바친 인간’으로서의 우리 주와 영체로서 다시 오실 주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영체는 우리 옆에 있어도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실 것을 기대하고 있는 재림론자들의 오류를 매우 슬퍼하였다. 그들은 재림론자들을 제외한 세상과 그 중에 있는 모든 것이 1873년 혹은 1874년에 불타 없어질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목적과 방법에 대한 그들의 시간 설정과 어긋난 기대 및 조잡한 생각은 그분의 도래할 왕국을 열렬히 바라보고 선포하는 우리와 다른 모두에게 다소 수치를 느끼게 하였다.”그러한 잘못된 가르침을 저지하기 위한 간절한 노력으로 1873년에 21세의 ‘시이. 티이. 러셀’은 자비로 “주의 재림의 목적과 방법”이라는 소책자를 저술하여 출판하였다. 약 50,000부가 출판되어 널리 배부되었다.
1876년 1월경에 ‘러셀’은 「아침의 전령」이라는 종교적 정기 간행물을 한부 받아보게 되었다. 표지에서 재림론자들의 간행물임을 즉시 알 수 있었으나 그 내용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뉴우요오크’ 주 ‘로체스터’에 살고 있는 편집자 ‘엔. 에이치. 바아버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목적이 멸망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민족들을 축복하는 것이며 그분의 재림은 육체로가 아니라 영으로 도둑과 같이 오실 것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사실상 성서의 때에 관한 예언으로부터 ‘바아버어’는 그리스도가 그 당시 임재(臨在)하시며 “밀”과 “가라지”를 모으는 추수 사업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였다. ‘러셀’은 ‘바아버어’와의 회담을 마련하였고 그 결과 약 30명의 ‘피츠버어그’ 성서 연구생들의 ‘그룹’은 조금 더 큰 ‘바아버어’의 ‘로체스터’ ‘그룹’과 합치게 되었다. ‘러셀’은 자기의 재원에서 돈을 기부하여 그 당시 거의 정간되다시피한 「전령」지를 인쇄하도록 하였으며 그 간행물의 공동 편집자가 되었다.
25세의 나이로 ‘러셀’은 1877년에 자기 사업을 정리하기 시작하여 전 시간 전파 사업에 들어갔다. 그 당시 그는 각 도시로 여행하면서 모인 군중에게나, 거리,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성서 강연을 하였다. 그러한 활동으로 인하여 그는 ‘러셀’ “목사”(Pastor)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포교하는 데 자기 재산을 바치고 그 일에 자기 생애를 바치며, 자기 재산을 다 사용한 후에는 모든 집회에서 헌금을 받지 않고 자발적인 헌금에 의존하여 그 사업을 계속하리라는 결심을 하였다.
1877년에 ‘바아버어’와 ‘러셀’은 공동으로 「삼 세계와 이 세계의 추수」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196면에 달하는 이 책은 회복에 관한 내용을 성서 연대에 관한 예언과 함께 수록하였다.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이지 않는 임재와 3년 반의 추수로 전개되는 40년 기간이 1874년 가을에 시작된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그 책이 이방인의 때 즉 “열국의 지정된 때”의 끝을 놀랄 만치 정확하게 지적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누가 21:24) 그 책에 보면 (83면과 189면) 이방인 즉 비‘유대’ 민족이 어떠한 하나님의 왕국의 간섭도 없이 지구를 다스리게 되는 2,520년 기간은 기원전 7세기 말에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된 때부터 시작되어 기원 1914년에 끝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시이. 티이. 러셀’은 그 이전에 이미 “이방인의 때: 언제 끝나는가?”라는 기사를 쓴 바 있다. 그것은 1876년 10월호 「사경」(査經)지에 발표되었는데 거기에서 ‘러셀’은 “일곱 때가 주후 1914년에 끝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이방인의 때를 정확하게도 「다니엘」에 언급된 “일곱 때”와 연관시켰다. (다니엘 4:16, 23, 25, 32) 그러한 계산에 일치하게 1914년에 이방인의 때가 끝나고 하늘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왕으로 하는 하나님의 왕국이 탄생하였음이 분명해졌다. 좀 생각해 보라! 여호와께서는 그 기간이 끝나기 거의 40년 전에 자기 백성에게 그 지식을 주셨던 것이다.
얼마 동안 모든 일은 순조로왔다. 그러자 1878년 봄이 되었다. ‘바아버어’는 지상에 살고 있는 성도들이 그때 육체로 끌어 올려져 하늘에서 주와 함께 영원히 있게 될 것을 기대하였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러셀’에 의하면 ‘바아버어’는 “살아있는 성도들 전체가 끌어 올려지지 않은 것에서 주의를 돌리기 위해 반드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착수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얼마있지 않아서 그는 그렇게 하였다. ‘러셀’은 이렇게 알려 준다. “가슴 아프게도, 그후 얼마 있지 않아서 ‘바아버어’ 씨는 「전령」지에 대속의 교리를 부정하는 기사를 실었다. 거기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아담’과 그 후손의 대속의 값이 될 수 없다고 말하면서 ‘핀’으로 파리의 몸을 꿰뚫어 고통을 주어 죽게 한다고 해서 자기 아이의 범죄에 대한 정당한 해결이라고 생각할 부모가 없듯이 그리스도의 죽음이 인류의 죄에 대한 형벌을 해결한 것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전령」지 9월호에는 대속을 지지하고 ‘바아버어’의 잘못을 지적하는 “속죄”라는 ‘러셀’의 기사가 나왔다. 1878년 12월까지 그 간행물의 지면을 통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러셀’은 “우리의 거룩한 종교의 기본적 원칙에 위배되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재정적으로 도움을 베풀거나 어느 면에서든 동일시되는 것을 주께서 원하시지 않음을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시이. 티이. 러셀’은 어떻게 하였는가? 그의 말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그러므로 잘못된 점을 개선하려고 매우 용이주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소용이 없게 되자 나는 「아침의 전령」지 및 ‘바아버어’ 씨와의 더 이상의 관계를 전적으로 끊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주와 대속주에 대한 계속적인 충성심”을 보이는 데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또 다른 조처가 취해졌다. ‘러셀’은 이렇게 기술한다. “그러므로 다른 간행물의 출판을 시작해야 하며 그 간행물에서는 십자가의 가치가 높여지고 대속의 교리가 옹호되며 커다란 즐거움을 주는 좋은 소식이 가능한 한 널리 선포되는 것이 주의 뜻임을 나는 이해하게 되었다.”
‘시이. 티이. 러셀’은 여행을 중지하고 간행물의 출판을 서두르는 일이 주의 인도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1879년 7월에는 「‘시온’의 파수대와 그리스도의 임재의 전령」지 첫 호가 나오게 되었다.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파수대」라고 알려진 이 잡지는 항상 성서적인 대속의 교리를 옹호해 왔다. ‘러셀’이 언젠가 “그 잡지는 처음부터 대속의 특별한 대변자의 역할을 해 왔으며 하나님의 은총으로 끝까지 그렇게 되기를 우리는 바란다”라고 말한 바와 같다.
그 간행물의 창간은 과연 “작은 일의 날”이었다. 그 첫 호의 발행부수는 단지 6,000부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가랴 4:10) ‘피츠버어그’ 성서 연구반의 회장인 ‘시이. 티이. 러셀’이 편집자이며 발행자가 되었다. 다른 다섯 명의 장성한 성서 연구생들은 처음부터 그 잡지의 정기적인 기고가로 일하였다. 그 잡지는 여호와와 하나님의 왕국 관심사에 바쳐졌다. 온전히 하나님께 의뢰하였다. 예를 들면 둘째 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그 점이 잘 나타나 있다. “「‘시온’의 파수대」를 여호와가 후원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는다. 실정이 그러하다 해도 「‘시온’의 파수대」는 결코 인간에게 지원을 간청하거나 청원하지 않을 것이다. ‘천산의 금과 은이 다 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분이 필요한 자금을 충당해 주시지 않는다면 그때야말로 발행을 중지할 때라고 우리는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결코 발행이 중지된 적이 없었다. 오히려 1875년 말에 가서는 매호 당 평균 인쇄부수가 9,950,000부로 증가하였다.
성서적인 진리를 지지하고 알리려는 단호한 결의로 1870년대의 성서 연구생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 전세계적인 밭에 많은 종교적인 “잡초”가 자라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밀” 즉 참 그리스도인들을 밝히기 위한 행동을 취하셨다. (마태 13:25, 37-39)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셨음이 분명하다. (베드로 전 2:9) 1879년과 1880년에 ‘시이. 티이. 러셀’과 그의 동료들은 ‘펜실베이니아’, ‘뉴우저어지’, ‘뉴우요오크’, ‘마사추우세츠’, ‘델라웨어’, ‘오하이오’, ‘미시간’ 등의 주에 약 30여 회중을 설립하였다. ‘러셀’ 자신은 각 회중을 직접 방문하는 마련을 하였다. 매 집단과 함께 한 번 혹은 몇번의 성서 집회를 가질 계획이 들어 있었다.
초기의 그러한 회중을 “에클레시아”(“회중”을 의미하는 희랍어 ‘에클레시아’에서 유래함)라 불렀고 때때로 “반”이라고도 불렀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회중적으로 모든 회중 성원들이 투표를 하여 결정하였고 또한 회중 문제를 지도할 책임을 맡는 장로들을 선거로 뽑았다. ‘에클레시아’들은 ‘시이. 티이. 러셀’과 다른 「파수대」 집필자들이 장로로 있는 ‘피츠버어그’ 회중의 활동 방식을 받아들임으로 연관을 가졌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포로되어 갇힌 자에게 자유를 전파하셨다.’ (누가 4:16-21; 이사야 61:1, 2) 19세기에 사는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를 얻게 되려면 종교적인 오류가 폭로되어야 한다. 「‘시온’의 파수대」지는 그러한 목적을 위해 일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것 역시 그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것은 1880년과 그 이후에 ‘러셀’과 그의 동료들에 의해 집필된 “성경 연구생의 전도지”(“구신학 계간지”라고도 불리웠음)들이다. 이러한 전도지는 「파수대」 독자들에 의해 무료로 배부되었다.
‘시이. 티이. 러셀’과 그 동료들은 자기들이 추수 때에 살고 있다고 믿었으며 그들은 극소수로서 1881년에는 단지 100명이 약간 넘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는 진리가 필요하였으며 하나님의 과분하신 친절로 인하여 그들은 그것을 받게 될 것이다. 1881년 4월호 「‘시온’의 파수대」 기사의 “1,000명의 전파자를 구함”이라는 제목은 인상적이었다. 자기 시간의 절반 혹은 그 이상을 주의 사업에 전적으로 바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이 제안되었다. “당신이 자기 능력에 따라 ‘콜포처’
즉 복음 전파자로 대소 도시로 나아가 어느 곳에서나 열렬한 그리스도인들을 발견하도록 하라. 당신은 그중 많은 사람들이 지식은 없지만 하나님께 대한 열심으로 가득차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주어 우리 아버지의 은혜의 풍성함과 그분의 말씀의 아름다움을 알게 하라.” 이러한 ‘콜포처’(오늘날 ‘파이오니아’ 전도인의 전신)는 특히 「파수대」 예약을 맡았다. 물론 모든 「파수대」 독자가 다 전 시간 전파자가 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 시간을 바칠 수 없는 사람들이 제외된 것은 아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반 시간이나 한 시간, 혹은 두 시간이나 세 시간 정도 시간이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사용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을 추수하시는 주께서 받아들이실 것이다. 하나님의 지도 아래서 한 시간의 봉사를 할 때 주어지는 축복을 아무도 알 수 없다”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그 당시 일하라는 부름에, 바라던 1,000명의 전파자들이 응답한 것은 아니었다. (1885년 중 약 300명의 ‘콜포처’가 있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종들은 자기들이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적절하게도 1881년 7월과 8월호 「‘시온’의 파수대」에는 이러한 말이 있었다. “당신은 전파하고 있는가? 적은 무리에 속한 어느 누구도 전파자가 되지 않을 사람이 없으리라고 우리는 믿는다. ··· 그렇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고통을 받고 지금 좋은 소식을 선포하도록 불리움을 받았다. 때가 되면 우리가 영광스럽게 되고 현재 전파하고 있는 일이 성취될 것이다. 우리는 명예를 얻거나 재물을 쌓기 위해 부르심을 받거나 기름부음받은 것이 아니라 재물을 사용하고 몸을 바치기 위해 그리고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 동일한 해인 1881년에 ‘시이. 티이. 러셀’은 커다란 ‘팜플렛’ 두 가지를 완성시켰다. 하나는 “성막 가르침”이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다른 하나는 「생각있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양식」이라는 것으로 교리적인 오류를 폭로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설명하였다.
처음에는 전도지와 「‘시온’의 파수대」가 거의 모두 상업적 인쇄소를 통해 인쇄되었다. 그러나 서적 배부를 더 확장하고 ‘성경 연구생’(여호와의 증인들이 그때는 그렇게 알려져 있었다)이 그 일을 계속하기 위해 기부를 받으려면 어떤 종류의 협회가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1881년 초에 ‘시이. 티이. 러셀’을 대표로 하는 법인체 아닌 ‘시온의 왙취 타워 책자 협회’가 설립되었다. 그와 다른 사람들은 이 인쇄 단체의 운영을 위해 약 35,000‘달러’를 선뜻 기부하였다. 1884년에는 이 법인체 아닌 협회를 ‘시온의 왙취 타워 책자 협회’라는 법인체로 만들어 ‘러셀’이 그 회장이 되었다. 현재는 이 종교 법인이 ‘펜실베이니아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로 알려져 있다.
그 정관(定款)에는 이러한 말이 명시되어 있었다. “법인을 형성하는 목적은 전도지, ‘팜플렛’, 문서, 종교적인 다른 서적 등의 출판이나 (정당하게 구성된) 이사회가 이상 언급된 목적을 추진하는 데 편리하다고 생각하는 합법적인 모든 다른 방법을 다 사용하여 여러 언어로 성서 진리를 선포하는
데 있다.”“천년기 새벽”(후에는 “성경 연구”)이라고 이름한 여러 권의 서적들로 “성서 진리를 선포하는 데” 주목할 만한 발전을 하게 되었다. ‘시이. 티이. 러셀’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저술한 제 1권이 1886년에 출판되었다. 처음에는 “시대에 관한 경륜”으로 나중에는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으로 불리웠는데 그것은 “지극히 높으시고 지혜가 많으신 조물주가 계심을 증거함” “주의 재림—재림의 목적 곧 만물을 회복시키심”, “심판 날”,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여호와의 날” 등과 같은 제목들을 다루었다. 40년 동안 이 출판물은 600만부나 배부되어 수많은 성실한 진리 탐구자들이 거짓 종교의 속박으로부터 나와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로 들어오도록 도왔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시이. 티이. 러셀’은 “천년기 새벽”의 속편인 다른 다섯 권을 잇따라 저술하였다. 제 2권은 「때는 가까왔다」(1889) 제 3권은 「당신의 왕국이 임하옵소서」(1891) 제 4권은 「아마겟돈 전쟁」(1897, 원래는 “신원의 날”이라 불리웠음) 제 5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속죄」(1899) 제 6권은 「새로운 창조」(1904)였다. ‘러셀’은 제 7권을 저술하려 하였으나 그 때까지 생존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그리스도인 출판물에 대한 반응은 참으로 훌륭하였다. 하나님의 영은 개개인을 자극하여 행동하게 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재빨리 거짓 종교를 탈퇴하는 일이 있었다. 1889년에 「천년기 새벽」 가운데 한 권을 읽고 어느 한 부인은 이렇게 기술하였다. “거기에 담긴 진리는 즉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암흑 가운데서 그렇게 오랫 동안 진리를 찾으려고 하였으나 결국 발견하지 못한 장로 교회를 즉시 탈퇴하였다.” 1891년에 교직자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썼다. “감리(감독) 교회에서 3년간 전파한 후—그동안 항상 나는 진리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이제 하나님의 도움으로 ‘거기서 나오’게 되었다.”—계시 18:4.
다른 사람들이 협회에 편지로 자기 생각을 말한 것을 보면 좋은 소식을 전하려는 열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1891년에 어떤 부부는 이렇게 편지하였다. “모든 것을 우리는 주와 그의 봉사에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도록 바치기로 했읍니다. 그리고 주의 뜻이라면 나는 일이 정리되는 대로 ‘콜포처’ 사업을 하려고 합니다. 주께서 저의 봉사를 받아들이시고 그의 사업을 하는 것을 축복하신다면 저의 부부는 살림을 청산하고 추수 사업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1894년에 ‘콜포처’인 두 부인에게서 몇권의 「천년기 새벽」을 구하게 된 한 남자로부터 협회가 받은 편지는 매우 흥미있다. 그 서적들을 읽고, 더 주문하였으며, 「‘시온’의 파수대」를 예약하고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와 나는 예리한 관심을 가지고 이 책들을 읽었읍니다. 우리는 이 서적들을 접하게 된 것을 하나님의 선물이며 커다란 축복으로 생각합니다. 그 서적들은 성서 연구에 참으로 ‘도움이 되는 손길’입니다. 이 여러 권의 출판물을 연구하여 알게 된 보배로운 진리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우리의 소망은 완전히 뒤바꿔졌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커다란 기회가 있다는 것을 적어도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가장 가까운 친척과 친지들에게 이 서적을 배부하고 그 다음에는, 읽고는 싶지만 구입할 능력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배부하는 데 그 기회를 사용하고자 합니다.” 이 편지에는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라는 서명이 있었다. 그는 12년 후에 여호와께 헌신하였고 마침내 ‘왙취 타워’ 협회장으로 ‘시이. 티이. 러셀’의 뒤를 이었다.‘성서관’
‘성경 연구생’의 본부는 처음에는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어그’ 5번가 101번지에 있었고 후에는 ‘알레게니’ ‘페드럴’ 가 44번지에 있었다. 그러나 1880년대 후반에 와서 좋은 소식을 널리 알리고 양같은 사람들을 모아들이는 사업이 가속화됨에 따라 확장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래서 여호와의 백성은 그들의 건물을 건축하였다. 34,000‘달러’를 들여 1889년에 완성된, 이 4층 벽돌 건물은 ‘알레게니’ ‘아크’ 가 56-60(후에 610-614번지로 고쳐졌음)에 소재하였고 “성서관”(聖書館)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타워 출판사’라는 이름을 가진 ‘시이. 티이. 러셀’의 자영 회사로서 몇년 동안은 계약에 따라 ‘왙취 타워 협회’ 서적을 출판하였다. 1898년 4월에 이 공장과 부동산은 기부에 의해 소유권이 ‘왙취 타워 협회’로 이전되었고, 이사회는 그 건물과 시설의 가치를 164,033.65‘달러’로 평가하였다.
‘성서관’은 약 20년간 협회 본부로 사용되었다.
‘오러 설리반 웨이크필드’는 “1907년에 ‘성서관’은 어떠하였었는가?”라고 물은 다음 이렇게 대답한다. “‘가족’은 단지 30명밖에 되지 않았으며 그 규모가 작아 참으로 한 가족이었다. ··· 우리 모두는 그 한 건물에서 먹고 자고 일하고 숭배하였다. 예배보는 곳에는 연단 아래에 침례받는 장소도 있었다.”
잠간 생각해 보라! 1890년에 ‘왙취 타워 협회’와 활동적으로 연합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는 단지 400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여호와의 성령은 역사하여 훌륭한 결과를 내고 있었다. (스가랴 4:6, 10) 따라서 1890년대는 증가의 시기였다. 사실상 1899년 3월 26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불완전한 보고에 의하면 339개의 집단으로 2,501명이 참석하였음을 알려 준다. 참으로 양같은 사람들이 ‘우리 안으로’ 모여들고 있었다.—미가 2:12.
1891년에는 ‘시이. 티이. 러셀’의 해외 여행으로 전파사업의 성장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와 그 일행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로 17,000‘마일’을 여행하였다. 그후 ‘런던’에 출판물 보관소가 설치되었다. 또한 협회 출판물을 독일어, 불어, ‘스웨덴’어, ‘덴마크’어 및 ‘노르웨이’어, ‘폴란드’어, 희랍어, 후에 ‘이태리’어 등으로 출판할 마련을 하게 되었다.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는 말을 들었을 때 기뻐하였다. (시 122:1) 그와 일치하게 초기 ‘성경 연구생’들은 집회와 대회에 모이는 것을 기뻐하였다. (히브리 10:23-25) 영적인 상이 많았으나 항상 없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연보채였다.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의 집회나 대회에는 언제나 “청강 무료, 연보 걷지 않음”이란 표어가 적용된다. “너희가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보더라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 여호와의 백성의 집회 장소와 관련된 경비는 자진적 헌금으로 충당되어 왔다.—마태 10:8; 고린도 후 9:7.
매주 집회에 참석하던 초기의 동료 신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랠프. 에이치. 레플러’는 이렇게 말한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우리가 집회에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때는 자동차가 없었다. 읍에서 5‘마일’ 떨어진 시골에 살고 있던 우리가 집회에 가려면 걷든지 ··· 마차를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집회 참석을 하기 위해 일요일마다 왕복 10‘마일’을 두번씩이나 다녔고 이륜마차나 사륜마차를 자주 사용하였다. 추우나 더우나 날씨가 좋거나 궂거나 해가 가면 갈수록 성서 진리를 더 많이 배워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특권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는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조금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해이즐’과 ‘헬렌 크룰’은 “눈이 땅을 덮으면 말이 끄는 썰매를 타고 가서 집회 도중에는 담요로 말을 덮어 놓았다. 말이 참을성있게 기다려 주는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참지 못해 앞 발로 땅을 차기도 했다.”
초기의 집회는 어떠하였는가? 한 가지 집회는 1881년에 협회가 처음 발행한 「더 좋은 희생의 그림자인 성막」이란 책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 서적에서는 ‘이스라엘’ 성막의 예언적 의미와 거기서 바친 희생에 관해 고려하였다. 이러한 연구에서 어린이들도 크게 유익을 받았다. 한 가정에서 열린 이러한 집회를 회상하면서 ‘사라 시이. 캘린’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집단이 커져 어떤 때는 아이들이 윗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앉아야 했지만 모두가 배우고 질문에 대답하였다. 소는 무엇을 상징하였는가? 뜰은? 성소는? 지성소는? 속죄일은? 대제사장은? 제사장보는? 그것은 매우 인상적이어서 대제사장이 그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우리가 머리 속으로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었고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가내 집회”가 수요일 저녁에 열렸다. 이 집회는 또한 기도 집회, 찬양 집회, 그리고 증거 집회라고도 알려지게 되었다. 이 집회에 관해서 ‘에디스 알. 브레니슨’은 이렇게 기술한다. “찬송과 기도를 한 후에 인도자는 적절한 성귀를 읽고 몇가지 해설을 한 뒤 원하는 대로 해설하도록 벗들에게 집회가 인계되었다. 때때로 그것은 개인이 봉사에서 얻은 즐거운 경험담이거나 여호와께서 특별히 인도하거나 보호하신다는 증거에 대한 것이었다. 개개인은 자유로이 기도하거나 어떤 찬송을 부르도록 요청할 수 있었고 그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자기 능력 이상으로 잘 표현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 저녁은 여호와의 인자하신 돌보심을 묵상해 보고 우리 형제 자매들과의 긴밀한 교제를 가지는 시간이었다. 그들의 경험담을 들을 때 우리는 그들을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들의 충실성을 관찰하고 그들이 자기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처한 곤경을 해결하도록 도움을 받게 되는 때가 자주 있었다.” 이 집회는 그 후에 봉사회로 발전하게 되어 오늘날에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매주 가지는 집회로서 그들의 전파 사업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그 당시 초기에 “새벽회”라는 것이 매주 금요일 저녁에 열렸다. 이 성서 연구 모임은 「천년기 새벽」 책들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랠프 에이치. 레플러’는 일요일 저녁에 보통 성서 연구나 성서에 대한 강연이 있었던 일을 회상한다. “도형 강의”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어떠한 것인가?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성경 연구」 제 1권 앞표지 안에는 긴 도형이 있었다. ··· 기 크기 만큼 확대시킨 그 도형을 ··· ‘펜실베이니아’ 주 ‘알레게니’에 있는 ‘성서관’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 그 도형을 청중이 모두 볼 수 있도록 앞벽에 걸어 놓고 때때로 연사는 그 도형에 있는 여러 ‘아아치’와 ‘피라밋’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그 도형은 인간 창조로부터 천년기 끝까지의 주요 성서 사건과 ‘오는 시대’의 시작을 설명한 도식이었다. ··· 우리는 이러한 ‘도형’ 강의에서 성서 역사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 강의는 자주 있었다.”
“도형 강의”는 여호와의 백성의 정기적인 집회 장소나 다른 곳에서 있었다. 이러한 강연은 효과적이었는가? ‘시이. 이이. 실러웨이’는 이렇게 말한다. “그 강연이 결실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6명의 어른이 모이던 작은 집단이 2년도 못되어 약 15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윌리암 피이. 모크리지’가 ‘뉴우요오크’ ‘롱 아일랜드’에 있는 한 침례교회에서 도형 강의를 하였는데 “그 결과로 [침례] 교회 성원 여러 명이 진리에 들어왔고 교역자 ··· ‘시이. 에이. 에릭슨’도 진리에 들어와 협회의 여행하는 ··· 연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연례적 행사는 초기 ‘성경 연구생’에게 대회를 가질 기회가 되었다. (고린도 전 11:23-26) 그러한 모임이 1892년 4월 7-14일까지 ‘펜실베이니아’ 주 ‘알레게니’에서 있었다. 약 20개 주와 ‘캐나다’의 ‘마니토바’ 등지에서 온 여호와의 종 400명과 관심자들이 참석하였다. 물론 그 이래로 영적인 상이 풍부한 하나님의 백성의 대회가 미합중국 및 전세계 여러 도시에서 개최되어 왔다. 여호와께서는 참으로 자라게 하는 일을 해 오셨다! 1958 ‘뉴우요오크’ 시 ‘양키스타디움’과 ‘폴로 그라운드’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의 ‘성의’ 국제 대회에는 123개국에서 253,922명의 청중이 함께 모인 일이 있었다!
하나님의 봉사에서 강하고 담대함
“자진 봉사자들을 구함!” 이것은 1899년 4월 15일호 「‘시온’의 파수대」지의 한 기사의 인상적인 제목이었다. 거기에는 성서 진리를 선포하는 새로운 방법이 제안되었는데 틀림없이 그것은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에게 시 31:24) 그 당시의 여호와의 백성에게는 “성서 대 진화론”이라는 새로운 소책자 30만부를 무료 배부하는 데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 소책자를 일요일에 교인들이 교회를 나올 때 나누어 주는 것이다. 수천명의 그리스도인 자진 봉사자들이 진정한 반응을 나타내어 미국, ‘캐나다’, ‘유럽’에서 거대한 활동이 수행되었다.
타격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려는 사람은 강하고 담대해야 하였다. (이 자진적인 사업은 수년 동안 계속 되었는데 특히 일요일에 행해졌으며, 마침내 호별 방문을 해서 전도지를 배부하는 일로 확대되었다. 일 년에 적어도 두 번씩 새로운 전도지가 발행되어 수백만이나 되는 교회 참석자들에게 전해졌다. ‘왙취 타워 협회’는 1909년부터 계속 “만인의 설교단”(나중에 “만인보”(萬人報), 그후에 “월간 성경 연구생”)이라는 일련의 새로운 전도지를 발행하였다. 이러한 월간 전도지를 통해 종교적인 오류를 폭로하고 성서 진리를 설명하며 의미심장한 해인 1914년에 관해 나라들에게 경고하였다. 만화와 삽화가 이러한 전도지의 효과를 더하였다. 그러한 전도지 배부로 인하여 대중이 하나님의 종들을 더욱 잘 알게 되었고 ‘성경 연구생’과 ‘만국 성경 연구생’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에디스 알. 브레니슨’은 “각 반에는 활동을 계획하는 자진 봉사 지휘자가 있었다”고 말하면서 계속 이렇게 설명한다. “활동에 참가하는 자들은 자진 봉사자들이라고 불렀다. ··· 일요일 아침은 이 자진적인 사업에 바쳤다. 우리는 교회문으로 갔다. 사람들이 교회에서 나올 때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다. ··· 12시에 사람들이 나오면 그 인쇄물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고 주일학교를 위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기 위하여 1시까지 기다렸다. 거의 모두가 전도지를 받았다. 어떤 사람은 받아서 땅에 던져 버렸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다시 모았다. 전도지에 들어있는 소식은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는 것이었다.”
배부하기 위한 전도지를 준비하기 위해 즐겁게 보내는 저녁이 많았다. 그러기 위해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집에 모였던 저녁들을 회상하며 ‘마가레트 듀스’는 이렇게 기술한다. “우리집 식당에 있는 식탁을 활짝 펴놓고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은 전도지를 분리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접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일요일 오후의 강연 시간과 장소를 알리는 도장을 찍었다.”
그 다음에 할 일은 배부하는 일이다. ‘새뮤얼 밴 시프마’에 의하면 그것은 “거의 누구나가 참여하는 ‘성경 연구생’의 활동이었다.” 그는 이렇게 부언한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일요일 아침 일찍[5시경] 일어나서 보통 두 사람이나 네 사람이 한 조가 되어 맡은 구역에 있는 집 현관이나 문 아래에 전도지를 놓아두곤 했다. 전도지를 다른 때에도 배부하였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전도지를 전하는 활동을 아침 이슬과 같은 보석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진리를 고취하는 이러한 인쇄물을 읽어본 결과로 참으로 상쾌하게 된 사람이 많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인 자녀들도 전도지 배부 사업에 참여하였다. ‘그레이스 에이.
이스테프’는 자기와 두 오빠가 “일요일 아침 일찌기 살그머니 현관으로 걸어가 문밑으로 전도지를 밀어 넣기 위해” 어떻게 하였는지 상기하고 있다. 반대를 직면할 수도 있었다. ‘이스테프’ 자매는 계속하여 이렇게 얘기한다. “어떤 때는 문이 홱 열리고 꼭 거인같은 어른이 나타나서 고함을 치며 욕설을 퍼붓고 어떤 때는 빗자루나 막대기 혹은 주먹을 휘두르면서 우리를 쫓아내고 다시 오기만 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위협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 그러나 전도지를 받거나 우리를 보고 미소짓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그때는 집으로 달려가서 부모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전도지 사용의 결과는 훌륭하였다. 예를 들면 ‘빅터 비이. 블랙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집에 왕국 진리를 가져다 준 것은 전도지였다. 이 전도지로 우리의 부모, 나 자신 및 자녀들에게 성서 진리의 굳건한 기초를 갖게한 실마리가 되었다. 우리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온 인류를 위한 왕국 정부에 관하여 희망과 믿음을 고취시키는 이 지식을 인정하고 기꺼이 받아들였다.”
신문을 사용함
‘조오지 이이. 해넌’은 이렇게 말한다. “가볍게 생각해 버릴 수 없는 [그 활동의] 또 다른 특징은 ‘패스터 러셀’의 설교를 신문에 실리는 것이었다.” ‘시이. 티이. 러셀’의 설교를 특별히 취급하는 한 국제 신문 연맹이 생겨났다. ‘러셀’이 여행 중이라도 그는 협회 본부 요원 네 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연맹에 매주 신문 2단 길이의 설교문을 보냈다. 그러면 그들은 그 내용을 미국, ‘캐나다’, ‘유럽’에 있는 각 신문사로 타전하였다. 협회는 전신료를 부담하였으나 신문난은 무료로 제공되었다.
“대륙”이라는 한 출판물은 ‘시이. 티이. 러셀’에 관해서 이렇게 평한 일이 있다. “그의 글은 매주 현재 생존하고 있는 어떤 사람의 글보다도 더 많은 신문 부수를 통해 배포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북미에 있는 모든 사제 및 설교자들의 글의 배포를 다 합친 것보다도 틀림없이 더 많을 것이다. ‘아더 브리스베인’, ‘노어먼 해프긋’, ‘조오지 호레이스 로리머’, ‘프랭크 크레인’ 박사, ‘프레드릭 해스킨스’ 및 10여명의 가장 유명한 다른 주필 및 신문 연맹 집필자들의 글을 모두 합한 것 보다도 더 많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간으로서의 ‘러셀’이 아니었다. 좋은 소식의 광범위한 선포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1916년 12월 1일호 「파수대」는 “총 1,500만의 독자를 가진 2,000여 가지 신문이 그의 연설을 동시에 실었다. 전부 합해서 4,000여 가지 신문이 이러한 설교를 실었다”고 알려 준다. 그런데 성서 진리를 널리 알리는 또 다른 방법이 있었다.
“반(班) 확장 사업”
1911년에 여호와의 종의 활동에 또 다른 특징이 생겨남으로써 그들의 활동이 강화되었다. “반 확장 사업”으로 알려진 이것은 대규모의 공개 강연 운동이었다. 공개 연사로서 파견된 48명의 여행하는 봉사자들이 지정된
노정에 따라 이러한 새로운 활동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반 확장 사업”에는 그 이상의 것이 관련되어 있었다. 강연에 참석한 관심자의 이름과 주소를 알아서 이 사람들 개개인을 ‘성경 연구생’들이 가정으로 방문하였다. 모든 노력은 그러한 사람들을 함께 모아 새로운 회중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콜포처’들은 이러한 회중을 조직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많은 새로운 회중이 형성되었다. 사실상 1914년까지는 지구 전역에 1,200개의 회중이 ‘왙취 타워 협회’와 관련해서 일하고 있었다.‘해이즐’과 ‘헬렌 크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공개 강연을 하기 위해 사용할 장소를 구한 후에는 주간 신문에 광고를 내고 개인적으로 초대를 하기 위해 방문을 하였다. 게시판에 집회 광고문을 분필로 써서 강연장 입구에 비스듬히 세워놓았다. 이러한 장소들 중에는 단지 등불 밖에 없는 곳이 많았다. 처음 집회에 관심이 보여지면 강연이 더 마련되었다. 우리는 모인 작은 집단의 각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인사하고 대화하며 (보통 작은 집단이었다) 관심을 더 갖도록 하기 위해 관심자의 집을 방문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순례자와 함께 여행해 봄
1894년에 공개적인 집회를 갖고 영적으로 ‘성경 연구생’들의 회중을 세워 주기 위해 파견된 ‘왙취 타워 협회’의 여행하는 대표자들이 21명 있었다. 그때 그들을 순례자들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정해진 노정에 따라 여행하였고 회중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더 많은 순례자들이 임명되었다. 순례자들은 1890년대에서 1920년대 후반까지 하나님의 백성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였다. 그들의 태도는 ‘로마’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바울’의 태도와 같았다. “내가 여러분을 안타깝게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영적인 어떤 선물을 나누어드려 여러분을 굳세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여러분과 같이 지내면서 여러분과 내가 피차의 믿음을 통하여 서로 격려를 받으려는 것입니다.”—로마 1:11, 12, 새번역.
여행하는 순례자의 성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성품이 다양했던 것처럼 다양하였다. (누가 9:54; 요한 20:24, 25; 21:7, 8) “‘도온’ 형제는 아주 온후한 태도를 가지고 아주 단정한 몸차림을 하고 턱밑에 수염을 가진 작은 사람이었다”고 ‘그랜트 수터’는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 “순례자들은 단정하여 인상적이었다. ··· 더 중요한 점은 그들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강화하도록 도왔다는 사실이다.” ‘해롤드 비이. 던칸’ 형제가 ‘도온’ 형제를 처음 만났을 때 “인자하고 기억에 남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한다. “그가 연설할 때면 그는 마치 어떤 아버지가 자기 아들이나 딸 그리고 손자에게 인자하고 애정어린 충고를 하는 것 같았으며 옛날 족장이 하던 바와 같은 그런 식이었다.”
‘그레이스 에이. 이스테프’는 이와 같이 얘기한다. “‘허어시’ 형님은 음악을 좋아하였으며 우리 어린이들이 잠자리에 들게 되면 엄마는 ‘피아노’를 치고 아빠는 ‘바이올린’을 켜고 ‘허어시’ 형님은 ‘찬송가’를 부르곤 하였다.
··· 우리가 알고 참으로 사랑했던 다른 사람들 중에서—[‘클레이튼 제이.’] ‘우드워드’ 형님과 ‘맥밀란’ 형님 및 다른 분들의 생애는 인내의 훌륭한 본이었고—‘밴 앰버어’ 형님에게 특별히 정을 느꼈다. 그는 ‘극진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온화하고 상냥하여 나는 사랑으로 가득찬 사도 ‘요한’이 틀림없이 그와 같았을 것이라고 가끔 생각하곤 하였다.”‘에델 지이. 로오너’는 자기가 어린 소녀였을 때, 순례자 형제들이 자기 집에 머무르던 때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어린이들 즉 나의 동생이나 오빠에게도 언제나 관심을 보였다. 우리는 항상 그들의 방문을 즐거워하였다. 모든 것을 여호와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그들의 조용한 확신과 믿음은 어린 소녀인 나에게 얼마의 외경감까지 느끼게 하였다. 참으로 그들은 어린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꿋꿋함과 믿음의 훌륭한 본을 남겨 주었다.”
많은 순례자들은 방문해서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기 때문에 동료 신자들에게 사랑을 받았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의 방문이 그렇게 즐거웠던 이유는 무엇인가?” 하고 ‘메어리 엔. 힌즈’는 질문하고 나서 이렇게 대답한다. “인사를 나누고 나서 순례자는 아빠에게 공개 집회에 대한 것 「파수대」 기사에 대한 어떤 질문이 있는지, 조그만 고을에서 일들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이전에 방문한 후 관심을 보이고 있는 다른 사람이 있는지, 그리고 다른 일반적인 문제들에 대해 물어본다. 자기 방으로 가기 전에 잠시 어린이들인 우리(그때 우리 모두 셋)에게 관심을 기울인다. ‘그분은 멋있다! 우리에게 말을 다 했어!’ 우리는 감격하고 보통 하루나 이틀간의 방문 기간을 최대한으로 즐길 수 있도록 훌륭한 출발을 하는 것이다. 1910년 ‘채터쿠아’ 호 대회의 그림엽서 뒤에 자기의 사진을 붙여서 나에게 준 분이 ‘벤자민 바아튼’ 형님이었다. 그리고 ‘제이. 에이. 보오네트’ 형님은 오빠에게 연을 만들어 주고 그것을 날리도록 도와 주었다. ··· ‘에이. 에이치. 맥밀란’ 형님은 잠시 시간을 내어 우리와 함께 옥수수 밭에 가서 저녁 식사를 위해 잘 여문 옥수수 여섯 자루를 땃다.”
‘해롤드 피이. 우드워드’는 “어떤 순례자에게는 까다로운 성품이 있었으며 물론 그러한 점이 눈에 잘 띈” 것을 시인한다. “그러나 탁월한 특성이 있었다. 즉 깊고도 오래 오래 영향을 받게 한 성령의 선물들이 그것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어얼 이이. 뉴얼’ 자매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까지 나에게 도움이 되어온 ‘도온’ 형님의 말씀을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분은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내가 내 자신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생각할 때면 나는 “조그만 먼지와 같은 너다. 자랑할 것이 무엇이냐?” 하고 몰아 세운다.’” 참으로 훌륭한 성품이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기 때문이다.—잠언 22:4.
이들 여행하는 순례자들이 여기 저기 다닌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젠가 그런 자격으로 봉사한 바 있는 자기 남편 ‘에드워드’의 여행에 관해서 ‘에디스 알. 브레니슨’은 이렇게 기술하였다. “외따로 떨어진 어떤 곳에 가려면 종종 기차, 역마차, 각종 짐마차 그리고 말을 탈 필요가 있었다. 그런 여행 가운데는 아주 흥미있는 것도 있었다. ··· 한번은
‘오리건’ 주 ‘클러매드 폴스’나 그 근처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 가려면 일부는 기차로 가고 그 다음에 역마차로 밤새 여행해야 하였다. 그 다음날 그는 조그만 읍에서 4륜 짐마차를 준비하고 기다리는 한 형제를 만났다. (이 짐마차를 한번도 구경하거나 타 본 적이 없는 분을 위하여 설명하자면, 그 짐마차는 ‘스프링’ 장치도 없이 네 바퀴가 차축에 고정되어 있는 나무로 된 마차이다. 그것을 타고 나면 허리가 아프지 않던 사람이라도 틀림없이 허리를 앓게 될 것이다) 그것을 타고 산지를 지나 한참만에 형제의 집에 도착하였다. 그 집은 옆에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계곡에 있었다.”이 순례자의 방문 자체는 어떠했는가? ‘브레니슨’ 자매는 이렇게 부언한다. “얼마 안되어 순례자의 말을 듣기 위해 멀리있는 친구들까지 데려와서 마당은 온갖 종류의 사람들로 가득찼다. 3시에 집회가 시작되어 2시간 강연하고 그 후에 질문을 하게 하자 많은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그후에 자매들이 마련한 훌륭한 저녁 식사를 위하여 충분한 시간을 가졌으며, 그 후에 또 다른 2시간의 강연이 있었고 그 다음에 더 많은 질문을 받았다.” 그날 밤 자매들은 집안에서 자고 형제들은 헛간 건초 위에서 잤다. 순례자를 위해서 방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브레니슨’ 형제는 헛간에서 형제들과 함께 자기로 하였다. ‘브레니슨’ 자매의 말은 이렇게 계속한다. “아침이 되자 정성어린 식사를 하고 형제는 세 필의 말에 안장을 지웠다. 한 필에는 짐을 싣고 다른 두 필에는 그들이 각각 탈 말들이다. 그 다음 예정지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가장 가까운 역까지 가려 해도 황야를 가로질러 60‘마일’이나 여행해야 하였다. 얼마 후에 ‘에드워드’는, 그곳 자매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그 자매는 헛간으로 베개를 가질러 갔더니 그 베개에는 그의 머리 자국이 그대로 있었다는 것이다. 베개를 집어드니 바로 그 밑에는 큰 방울뱀이 칭칭 감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 뱀은 그의 머리의 온기를 만끽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뱀은 방해를 받게 된 것에 제법 화를 내더라고 그 자매는 편지에서 말하였다. 모르는 게 약일 경우가 흔히 있는 일이다!”
순례자들의 강연은 어떠했는가? 순례자의 한 사람인 ‘타우티안’ 형제에 관해서 ‘레이 시이. 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형제는 강사와 같았다. 그는 도해를 사용해 가르쳤다. ··· [그가 가지고 있는] 광야에 있던 장막의 칫수를 따라 만든 모형을 책상 위에 놓았다. ··· 성소, 지성소, 번제단과 그릇이 있는 뜰 등이 조그만 금속 막대에서 포장처럼 내려뜨리운 4‘인치’ 높이의 천으로 된 울로 둘러싸여 있었다. 예복을 갖춘 제사장 모양을 한 것이 적당한 곳에 놓여져 있었는데, 「그림자인 성막」 책을 근거하여 각 의식과 그 예언적 의미를 [‘타우티안’ 형제가] 설명하는데 따라 ··· 제사장들이 임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옮겨졌다.”
‘메어리 엠. 힌즈’는 이렇게 말한다. “공개 강연은 언제나 계획되어 있고 종종 순례자들은 도형으로 강연을 하면서 도형에 표시된 ‘섭리’와 ‘시대’에 대해 설명하였다. 적어도 ‘엠. 엘. 헤어’ 형제는 그림으로 설명하는 강연을 하였다. 그는 환등을 사용해서 강연 가운데 나오는 체구가 작은 ‘루디’라는
사람이 부활로 나오는 장면을 보여 주었다. 그렇다. 그 당시에 성장하는 조직의 본부와 고립된 「파수대」 예약자들 및 조직되고 있는 ‘에클레시아’들을 연결하는 이 형제들은 일생 동안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겨 놓았다.” ‘올리에 스테이플튼’은 자기의 감정을 이렇게 표시한다. “그러한 방문은 영적인 격려와 교훈을 주는 기회였고 여호와의 조직과 더 긴밀히 일하도록 우리를 도와 주었다.”이방인의 때의 끝이 다가오면서 확장되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처음 십년이 지나는 동안, ‘성경 연구생’들은 열국에게 허락된 때가 다 되어가고 있음을 지각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오랫 동안 1914년을 이방인의 때인 2,520년의 끝으로 바라왔던 것이다. (누가 21:24) 이제 그 해가 단지 몇년밖에 남지 않았으며 ‘시이. 티이. 러셀’은 나라들에게 증거하기 위하여 전세계적인 대대적 운동을 벌일 준비를 해놓았다. 그러나 ‘알레게니’에 있는 ‘성서관’은 그러한 광범위한 국제적인 사업을 위하여는 너무나도 협소하였다.
그래서 1908년에는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그 당시 협회의 법률 고문)을 포함하여 ‘왙취 타워 협회’를 대표한 몇 사람이 ‘뉴우요오크’ 시에 파견되었다. 그 이유는? 더 적절한 건물을 구하기 위해서인데, 그 건물은 ‘러셀’이 그 전에 여행하면서 물색해 놓은 곳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뉴우요오크’ ‘브루클린’ ‘힉스’ 가 13-17에 소재한 낡은 “플리머스 벧엘”이라는 건물을 매입하였다. 그 건물은 그 근처에 있는 ‘플리머스’ 조합 교회의 선교 건물로서 1868년에 완공되었는데 그곳에서 ‘헨리 워드 비처’가 한 때 교역자로 일한 바 있다. 거기서 몇 구획만 더 가면 ‘콜롬비아 하이츠’ 124번지에 ‘비처’의 사택이 있었는데 협회의 대표자들은 그 갈색 4층 집인 낡은 석조 건물 역시 함께 매입하였다.
이전에 ‘비처’의 거처였던 그곳이 이제는 30여명이나 되는 협회 본부 직원들을 위한 새로운 집이 되어 “벧엘”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그 말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개조된 ‘힉스’ 가의 건물은 ‘브루클린 성막’이라고 알려졌다. 거기에는 협회 사무실과 훌륭한 강당이 있었다. 1909년 1월 31일에 있었던 새로운 협회 본부의 봉헌식에는 350명이 참석하였다.
‘벧엘’에는 ‘시이. 티이. 러셀’의 서재가 있었다. 아랫층에는 44명이 사용할 수 있는 긴 식탁을 갖춘 식당이 있었다. ‘벧엘’ 가족은 이곳에 모여 찬송을 부르고 “서약문”을 낭독하고 아침 식사 전에 함께 기도하였다. 식사를 시작할 때 「믿음의 가족을 위한 일용할 천적 만나」라는 것으로부터 성귀를 낭독하고 아침 식사 중 그 내용을 토론하였다.
매일 매일 그들의 정신에 깊은 인상을 새겨 주는 “서약문”의 내용을 들어 보겠는가? “하나님께 대한 나의 엄숙한 서약”이라는 서약문은 다음과 같았다.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시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당신의 다스림이 저의 마음 가운데 더욱 임하시옵시며 당신의 뜻이 저의 몸 가운데 이루어지이다. 필요한 때는 언제나 도우신다는 당신의
은혜로운 약속에 의지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서약을 드리나이다.“하늘의 은총의 보좌에서 저는 추수 사업에 대한 전반적 관심사와 특히 제가 그 사업에 참여할 특권을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브루클린 벧엘’과 다른 모든 곳에 있는 사랑하는 동료 역군들을 기억하겠나이다.
“저는 당신과 당신의 사랑하는 양떼를 더 잘 섬기기 위하여 가능하다면 생각과 말과 행동을 더 주의깊이 살펴볼 것을 서약하나이다.
“저는 경계하여 영매술과 신비술에 관련된 모든 것을 저항하며 더우기 주인은 단지 둘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그러한 유혹은 대적으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온갖 합당한 방법으로 저항할 것을 당신께 서약하나이다.
“더 나아가 저는 아래와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언제 어디서 사적으로 이성을 대하더라도 공중 앞에서 즉 주의 백성의 회중 앞에서 대하는 것과 똑같이 할 것이며, 합리적으로 가능한 한, 방문을 활짝 열어놓지 않고서는, 어떠한 이성과도 단둘이 한 방에 있지 않도록 노력할 것을 서약하나이다. 형제의 경우에 있어서는 아내와 자녀 모친 및 친자매는 예외이고 자매의 경우에 있어서는 남편, 자녀, 부친 및 친형제들은 예외로 하겠나이다.”
그후에 ‘벧엘’과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이러한 서약을 하는 일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말 가운데 나타나 있는 높은 원칙은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
‘벧엘’에서 세 구획쯤 떨어진 곳에 2층과 지하층으로 되어 있는 고색 창연한 붉은 벽돌건물로서 ‘브루클린 성막’이 있었다. 거기에는 협회의 일반 사무실, 「파수대」지를 위한 식자실, 창고, 그리고 발송실이 있었다. 2층에는 800개의 좌석을 갖춘 강당이 있었다. 이곳에서 ‘러셀’ 형제는 정기적으로 강연하였다.
얼마 동안 협회 본부 요인들은 주로 ‘콜롬비아 하이츠’ 124번지에서 생활하였다. 그 후에 인접한 ‘콜롬비아 하이츠’ 122번지의 건물을 매입하여 ‘벧엘’을 확장시켰다. 1911년에 그 건물 뒤에 9층에 달하는 건물이 증축되어 ‘풀만’ 가에 우뚝 서 있게 되었다. 그 건물로 인해 새로운 식당을 비롯하여 숙소와 다른 시설을 위한 더 넓은 장소를 갖게 되었다. 1909년에 여호와의 종들은 그러한 재산의 소유권을 보유할 수 있도록 ‘만인의 선교단회’를 구성하였다. 이것이 현재는 사단법인 ‘뉴우요오크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이다. 이 법인과 여러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조직한 다른 사단법인은 모두 상호간에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와 협조하고 있다.
‘회중에서 여호와를 송축함’
‘성경 연구생’들의 정기적인 대회와 다른 공개적인 모임은 과거의 하나님의 종들과 마찬가지로 ‘회중에서 여호와를 송축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가 되었다. (시 26:12) 이러한 대회들은 어떠한 성격을 띤 것이었는가? 살펴보기로 하자.
‘‘시카고 그랜드 오페라’의 본거지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디토리엄’ 극장의 맨 윗층의 이곳에서 봐도 빈 좌석은 하나도 없다. 7층에서 반 구획이나 떨어져 있는 무대를 내려다 보면서 나는 귀담아 듣기 위해 신경을 쓸 필요가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본다. 사회자의 소개에 뒤이어 ‘차알스 테이즈 러셀’이 일어서서 왼편 집게손가락을 자기 오른편 손바닥에 대고 보통 음조로 연설하기 시작한다. 그는 원고를 갖고 있지 않다. 연대도 없다. 그는 연단 위를 이리저리 자유로이 움직인다. 그가 이방인의 때의 예언적인 종말과 천년기의 시작에 대해 말할 때 그 낱말 하나 하나를 분별할 수 있을 만큼 명료하다.’
이것은 ‘레이 시이. 봅’의 회고담이다. 그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시이. 티이. 러셀’이 1910년 5월에 수많은 청중에게 연설한 바 있는 ‘런던’의 ‘로오열 앨버트 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장소는 또한 ‘뉴우요오크’ 시에 있는 유명한 ‘히포드로움’ 극장일 수도 있다. 그곳에서 ‘러셀’은 1910년 10월 9일 일요일에 많은 ‘유대’인 청중에게 연설하였다. 그 강연에 관해서 1910년 10월 10일자 ‘뉴우요오크’ 「아메리칸」지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는데, 그 일부는 이러하다. “어제 오후 ‘히포드로움’ 극장에서는 4,000명의 ‘히브리’인들이 자기들의 종교에 관하여, 한 이방 전도자의 설교를 듣고 나서 그를 열렬히 환영하는 희귀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브루클린 성막’의 유명한 지도자인 ‘패스터 러셀’은 매우 특이한 예배를 진행하였다.” 많은 ‘랍비’와 선생들이 참석하였다. 그 신문은 이렇게 보도하였다. “예비적으로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키가 크고 곧으며 흰 수염을 가진 ‘패스터 러셀’은 소개의 말도 없이 연단으로 걸어나가 손을 들자 ‘브루클린 성막’에서 그와 함께 온 두 ‘그룹’의 사중창단이 ‘시온의 기쁜 날’이라는 찬송을 불렀다.” 보도된 바와 같이 마침내 청중이 연사에게 ‘열중하게’ 되었다. 다음에는 박수갈채가 쏟아졌으며 끝에 가서는 열광적인 반응이 있었다. 강연이 끝나고 ‘러셀’이 다시 신호를 하자 그 합창단은 “독특한 동방 시인 ‘임버’의 걸작품 가운데 하나로서 ‘우리의 소망’이란 ‘시온’을 찬양하는 기묘하고 이국적인 노래를 소리높이 불렀다.” 그 영향은? 그 신문 기사에 의하면 이러하다.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 찬송가를 부르는 일은 전례 없는 일이라 아주 놀랄 만한 것이었다. 한 동안 ‘히브리’인 청중들은 그들의 귀를 의심하였다. 그리고는 그것이 그들의 찬송가임을 확실히 알게 되자 처음에는 노래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박수갈채를 보내고 그 다음 2절부터는 수백 명이 같이 불렀다. 그러한 놀라우면서도 극적인 감격이 극도에 달했을 때 ‘패스터 러셀’은 연단을 걸어 나갔고 찬송이 끝나면서 그 모임도 끝났다.”
시대는 변천하였고, 또한 한 때 우리 시대에 사는 육적 ‘유대’인에게 적용된다고 생각되던 성서 예언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견해도 바뀌었다. 하나님의 빛이 증가함에 따라 그분의 백성은 그러한 예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기름부음 받은 추종자들인 영적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위해서 예언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로마 9:6-8, 30-33; 11:17-32; )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것은 20세기 초반기이며, 이것이 그 당시 상황이었다. 갈라디아 6:16
‘러셀’ 형제가 그렇게 널리 알려졌고 많은 청중에게 자주 연설했기 때문에 그의 연설이 어떠했는지 궁금할 것이다. ‘시이. 비이. 트베트’는 “보통 전도자들과는 아주 달랐다.”고 힘주어 말하면서 이렇게 부언한다. “웅변식도 아니요 감정에 호소하는 일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을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효과적이고 강한 힘이 있었다. 그것은 한 성귀가 다른 성귀를 풀어 나아가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쉽고 차분하고도 확신있게 설명하여, 성경을 마치 강력한 자석이 되게 하는 것 같았다. ‘러셀’ 형제가 그렇게 할 때 그의 청중은 거기에 몰두해 넋을 잃게 되었다.” ‘랠프 에이치. 레플러’는 강연하기 전에 ‘러셀’ 형제가 청중에게 몇번 정중한 인사를 하였다고 말한다. 그가 연설할 때는 보통 아무 것도 없는 연단에서 걸어다니며 팔을 자유로이 사용하여 몸짓을 하였다고 한다. ‘레플러’ 형제에 의하면 “그는 결코 원고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 항상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자유로이 연설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의 목소리는 크지는 않았으나 특별히 청중을 끄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확성 장치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그때는 그러한 것이 없었다.) 많은 청중들은 그의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었으며 마치 홀리기나 한듯이 그들은 한 번에 한 시간 두 시간 혹은 세 시간 동안 계속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 소식이 중요하였으며 성서 진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선포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였다. 그 당시에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자격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었으며 감사함으로 그들의 말을 듣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반대자도 많았으며 때때로 그들은 여호와의 종들과의 공개적인 토론에서 비성서적인 견해를 지지하려고 하였다.
‘시이. 티이. 러셀’의 학식과 성서적인 견해에 창피를 주려고 ‘피츠버어그’ 교역자들이 연합하여 시도한 후에 나타난 것으로서, 1903년 3월 10일 ‘노오드 아베뉴’ 감독 교회의 교역자 ‘이이. 엘. 이튼’ 박사가 6일간의 토론을 하자고 ‘러셀’에게 도전하였다. 그 해 가을 ‘알레게니’ ‘카네기 홀’에서 열린 각 토론에서 ‘러셀’이 온전히 승리하였다. 그중에서도 그는 성경적으로 죽은 자의 몸이 무덤에 있는 동안 그의 영혼은 무의식이라는 점과,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 통치 기간의 목적은 두가지 다 지상의 모든 인류를 축복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주장하였다. ‘러셀’은 지옥불 교리에 대해서도 아주 강력히 성서적으로 부정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마지막 토론이 끝난 뒤 교직자 한 사람이 그에게 와서 “나는 당신이 지옥에 ‘호스’를 대고 불을 꺼버린 것을 기뻐한다”고 말했다 한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토론이 있은 후에 ‘이튼’의 회중 성원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 연구생’이 되었다.
1908년 2월 23-28일에는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서 ‘시이. 티이. 러셀’과 “제자”라는 교파의 ‘엘. 에스. 화이트’ 사이에 또 다른 중대한 토론이 디모데 후 2:15], 그 결과로 조화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크룰’ 자매들은 여호와께서 그의 영으로 ‘러셀’ 형제를 축복하여 진리를 능력있게 제시하게 하였다고 말하면서 그 일을 “오류에 대한 진리의 승리”라고 부르고 있다.
있었다. 수천 명이 참석하였다. ‘러셀’은 죽어 부활할 때까지 죽은 자가 무의식 상태에 있다는 성서적인 가르침을 담대하게 지지하였고, 그리스도의 재림은 천년 통치 이전에 있을 것이며 그 두 가지 사실이 다 지구상의 모든 인류를 축복하기 위한 것임을 성서적으로 주장하였다. ‘해이즐’과 ‘헬렌 크룰’도 참석하였었는데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진리의 아름다움과 조화 및 토론의 각 제목에 대한 훌륭한 성서적인 주장은 혼란한 인간의 가르침과 크게 대조되었다. 한 번은 반대되는 견해의 대변인이자 토론자인 ‘화이트 장로’가 자포자기한 가운데서, 그는 대장간 위에 써 붙인 ‘어떤 형태로든 꾸부리고 휘게 할 수 있음’이란 간판을 생각나게 한다고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정직한 진리 탐구자들에게 있어서 ‘러셀’의 주장이야말로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분변하여’[‘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는 ‘왙취 타워 협회’를 대표하여 침례교인인 ‘제이. 에이. 트로이’가 도전한 토론을 받아들였다. 1915년 4월, ‘캘리포오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트리니티’ 강당에서 12,000명 (그 외에도 장소의 부족으로 10,000명으로 추산되는 사람이 돌아갔다.) 앞에서 나흘밤 토론이 행해졌다. ‘러더포오드’는 성서 진리를 담대히 옹호하는 데 승리하였다.
‘이튼’-‘러셀’의 토론에 잇따른 12년 동안에 토론하자는 다른 도전을 하나님의 종들은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마도 두려움에서 반대자들은 보통 약속을 취소하였다. ‘시이. 티이. 러셀’ 자신이 토론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토론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익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5년 5월 1일호 「파수대」에서 ‘진리에 속한 사람들은 황금률을 지킬 의무를 가지고 있고 그들의 제공은 절대적으로 공정해야 한다. 반면에 반대자들은 제한이나 구속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라는 점을 그는 특별히 지적하였다. “그들은 문맥을 개의치 않는, 황금률을 개의치 않는, 어느 것도 개의치 않는, 어떠한 종류의 논쟁도 무방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라고 ‘러셀’은 기술하였다. 그는 또한 이런 말도 하였다. “‘편집자’에 관한 한, 그는 더 이상의 토론을 바라지 않는다. 그는 그러한 것이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들 양편에 유익이 되는 일이 드물고, 분노, 적의, 비통함 등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가 흔하다고 믿기 때문에 토론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듣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주의 말씀의 소식을 연설과 책자로 전해 주며, 반대자들이 그러한 오류의 폭로를 받아들이든 말든 그것은 그들의 자의에 맡겨 버린다.—히브리 4:12.”
성서 강연이 성경 진리를 제시하는데 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며 ‘시이. 티이. 러셀’이 많은 청중에게 연설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예를 들면, 1905년에서 1907년까지 그는 특별 열차나 자동차로 미합중국과 ‘캐나다’로 여행하여 일련의 1일간의 대회들을 주재하였다. 그 때 그의 공개 강연은 “지옥에 갔다가 돌아옴”이었다. 이 두 나라의 거의 모든 대도시의, 집이 빽빽히 들어선 곳에서 행한 그의 강연은 지옥에 갔다 돌아오는 익살스럽고
상상적인 여행으로 특색을 이루었다. ‘루이스 코스비’는 ‘러셀’이 ‘버지니아’ 주 ‘린치버어그’에서 그 강연을 하겠다고 동의하였던 일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의 아버지는 그 강연을 광고하는 큰 ‘포스터’들을 만들어 그것들을 전차에 붙이도록 허가를 받았다. 그것은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었고 사람들은 ‘이 차가 우리들을 지옥으로 데려갔다가 다시 데려올 것인가?’ 하고 물었다.”‘시이. 티이. 러셀’의 해외 여행 중에도 성서 강연이 역시 특색을 이루었다. 1903년에 ‘유럽’에 두 번째로 여행하여 여러 도시에서 청중에게 연설하였다. 그리고 1911년 12월에서 1912년 3월까지 ‘러셀’은 7명으로 된 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 ‘하와이’, ‘일본’, ‘중국’, 그리고 남부 ‘아시아’를 거쳐 ‘아프리카’를 지나 ‘유럽’으로 갔다가 ‘뉴우요오크’로 돌아오는 세계 일주 여행을 하였다. 그리스도교국의 외국 선교 단체에 대한 연구와 아울러 많은 강연을 하였고 그렇게 하여 진리의 씨를 널리 퍼지게 함으로써 때가 되어 지구상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열매맺는 활동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세계적인 여행 말고도 ‘시이. 티이. 러셀’은 ‘유럽’에 정기적으로 여행하였고 많은 동료 일군들을 동반하여 “대회 여행” 특별 열차로 북미 전역을 광범위하게 여행하였다.
“대회 열차”를 타고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시이. 티이. 러셀’에게 친히 와 달라는 요청이 많아졌다. 강연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 그는 때때로 철도를 이용한 특별 “대회 객차”를 타고 여행하였는데 그때 소수가 함께 동반하였다. 그러나 한 번은 24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러셀’과 함께 여행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로 “대회 열차”를 조직하였다. 몇 칸의 철도용 객차를 함께 연결하여 그 일행은 미리 계획된 대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여행하였다. 특정한 도시에 도착하면 ‘러셀’을 보조하는 사람들이 강연 쪽지를 배부하여 공개 집회를 광고하였다. 그들은 집회에서 개개인에게 인사하고 관심자의 주소와 성명을 알아 보아 가능하면 그들을 방문하여 회중을 세웠다. 미합중국과 ‘캐나다’의 대도시를 방문하는 데 그러한 “대회 열차”를 사용하는 것은 희귀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행복한 일단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대회 열차”를 타고 함께 가 보자. 1913년 6월에 200여명의 ‘성경 연구생’을 위해 특별 열차가 예약되어 그들은 ‘시이. 티이. 러셀’과 동반하였다. 그 영향은 ‘일리노이’ 주 ‘시카고’로부터 시작하여 ‘택사스’ 주, ‘캘리포오니아’, ‘캐나다’로 가서, 그 다음에 ‘위스컨신’ 주 ‘매디슨’ 대회로 갔다가 ‘일리노이’ 주 ‘록포오드’에 잠깐 들리는 여행이었다. ‘매린더 지이. 키이퍼’는 자세한 내용을 이렇게 알려준다. “우리가 탈 기차는 6월 2일 정오에 ‘와바시’ 철도국 관할인 ‘디어본’ 역에서 출발하게 되어 있었다. 벗들은 10시 경부터 도착하기 시작하였고, 그때는 그동안 만나지 못한 오랜 벗들을 만나고 새로운 벗을 사귀는 즐겁고 재미있는 때였다. 얼마있지 않아 우리가 하나의 대가족을 이루고 ··· 열차는 한 달 동안 우리의 집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다. ‘키이퍼’ 자매는 이렇게 계속한다. “8,000‘마일’의 여행을 위해서 열차가 역을 빠져 나갈 때 전송나온 벗들은 ‘매는 띠는 복되도다’와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하소서’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우리가 정말로 잊을 수 없는 여정에 올라 자기들의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줄곧 모자와 손수건을 흔들어 주었다. 우리는 ‘미주리’ 주 ‘센트루이스’에서 친구들을 사귀고 다른 몇 곳에서도 그랬는데 결국 그 수를 세어보니 240명이나 되었다. ‘러셀’ 형제도 ‘아칸사스’ 주 ‘하트스프링’에서 우리와 함께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8일간의 대회를 가졌다.”
참으로 그것은 영적으로 세워 주는 여행이었다. ‘키이퍼’ 자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행 중에 멈추는 곳마다 대회가 개최되고 있었는데 대부분은 3일간이었고 우리는 각 대회마다 하루씩 머물렀다. 이렇게 머무르는 동안 ‘럿셀’ 형제는 두 가지 강연을 하였는데 하나는 오후에 벗들에게, 다른 하나는 저녁에 ‘무덤의 저쪽’이라는 제목으로 대중에게 하였다.” 여행에 관한 자기의 느낌을 ‘커이퍼’ 자매는 이렇게 말한다. “처음부터 계속된 벗들과의 교제에 대한 감사와 그 여행 중에 내가 듣게 되었던 영적으로 세워주는 강연과 교훈에 대한 감사함은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나는 그러한 특권을 가진 데 대해 여호와께 감사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초기에 가졌던 그런 대회에서는 오늘날의 대회와는 몇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애찬”을 예로 들어보자. 그것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초기 대회의 이러한 특징을 회고하면서 ‘제이. 더불류. 아쉘만’은 이렇게 말한다. “필요치 않거나 계속되지 않은 어떤 습관이 그 당시에는 일종의 축복이라고 생각되었는데 그 중에 이와 같은 것이 있었다. 즉 연단 앞에 연사들이 주사위 모양으로 자른 빵을 담은 접시를 들고 줄을 서 있고, 청중은 줄을 지어 서서 빵을 먹으면서 각 연사와 악수하고 ‘그리스도인 사랑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매는 띠는 복되도다.’라는 노래를 함께 불렀다.” 그것이 “애찬”이었다. 그것은 감동을 주는 경험이었다. ‘에디스 알. 브레니슨’은 서슴치 않고 다음과 같은 점을 시인한다. “우리의 마음은 서로 사랑으로 가득차서 흘러 넘치게 되었고 기쁨의 눈물이 우리의 볼을 흘러내리는 때가 흔히 있었다. 우리는 눈물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것을 일부러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애찬”을 가졌으나 성서는 그 내용을 설명해 주지 않고 있다. (유다 12) 그것이 물질적으로 부유한 그리스도인이 가난한 동료 숭배자들을 초대하려고 베푼 잔치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초기에 그것의 성격이 어떠하였든지 간에 성서에서는 “애찬”을 의무화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그것이 유행하고 있지 않다.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새로운 방법
‘성경 연구생’들은 “이 천국의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을 마태 24:14) 그러므로 그 의미심장한 해인 1914년이 다가옴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은 세계적인 범위의 대대적인 운동 즉 그때로서는 전례 없었던 교육 사업과 경고 사업을 하였다. 그들은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데 담대하고도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였다.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지금이 1914년이라고 가정하자. 어두운 강당에 앉아 있는 수백명 가운데 당신이 끼어있다고 상상해 보라. 앞에는 커다란 활동사진 화면이 있다. 놀랍게도 신사복을 입은 흰 머리의 한 사람이 화면에 나타나서 속에 원고도 없이 연설을 하기 시작한다. 당신은 전에 영화를 본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그런 영화들과 다르다. 그 사람은 열설을 하고 있고 당신은 그 연설을 듣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흔히 있는 무성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기술적인 면이나 전달되는 소식에 있어서 특별한 것이므로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 사람은 누구인가? 그가 바로 ‘차알스 테이즈 러셀’이다. 그 영화는? “창조 사진극”이다.
‘시이. 티이. 러셀’은 활동사진이 많은 사람에게 미칠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1912년에 그는 ‘창조 사진극’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색채와 음향을 완전히 갖춘 8시간 길이의 환등사진과 활동사진으로 이루어진 작품이었다. 4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게 된 ‘사진극’은 보는 사람들에게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인간 역사를 거쳐 예수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끝에 지구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최절정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보여 주었다. 환등사진 및 활동사진과 동시에 강연과 음악을 실은 축음기판이 같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하였다. 색채와 음향을 갖춘 영화에 대한 시도가 여러 번 있었지만 여러 해가 지나서야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1922년에 가서 비로소 총천연색 장편 영화가 나왔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영화에 있어서, 일반 영화 관객이 대사와 음악을 함께 들을 수 있게 된 것은 1927년에 가서였다. 그러나 ‘창조 사진극’은 색채, 대사, 음악이 함께 나오는 것이었다. 그런 것들이 본격적이 되기 여러 해 전에 수백 만명이 무료로 그러한 것을 구경하였다!
사진극을 제작하는 데 협회는 그 당시 돈으로 약 30만 ‘달러’를 사용하였다. 관련된 작업에 관해서 ‘러셀’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친절하시게도 ‘극’과 관련된 노고의 정도를 우리에게 미리 알려 주시지 않았다. 처음부터 필요한 시간과 금전과 참을성을 미리 알았더라면 우리는 결코 그 일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극’이 가져다 준 커다란 성공 역시 미리 알지 못했던 일이다.” 엄선된 음악판과 축음기판에 실린 96개의 연설이 준비되었다. 예술사진으로 세계 역사를 설명하는 입체 환등을 만들었으며, 수백 장의 새로운 그림과 ‘스케치’화를 그려야 하였다. 모든 색채 환등사진과 ‘필름’은 손으로 색칠하였는데 이러한 작업중의 어떤 것은 협회의 미술실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그러한 일을 반복해서 해야 하였다. 적어도 24‘세트’를 만들어야 지정된 날에 80개의 다른 도시에서 ‘극’의 일부를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창조 사진극’을 보여 주는 동안 배경은 어떠하였는가? ‘앨리스 호우프만’은 이렇게 말한다. “‘러셀’ 형제의 모습으로 ‘극’이 시작되었다. 화면에 그가 나타나고 그의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 축음기도 그에 맞춰 정확한 순간에 돌아가서 우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기뻐하였다.”
그 ‘사진극’ 영화의 잊을 수 없는 특징 가운데는 꽃봉오리가 열리는 것이나 병아리를 까는 것이 들어 있었다. 시간의 흐름을 묘사하는 이러한 사진들은 보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카알 에프. 클레인’은 “그런 사진들과 동시에 진귀한 ‘나르시서스’나 ‘유모레스크’와 같은 아주 훌륭한 음악이 흘러 나왔다”고 말한다.
기억할 만한 다른 것들도 역시 많이 있었다. ‘마아사 메리디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제 막 ‘노아’와 그의 가족이 동물과 함께 방주로 들어가는 장면을 보고, ‘아브라함’과 ‘이삭’이 ‘모리아’ 산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 산에서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희생으로 바치려 한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그렇게도 끔찍이 사랑하던 그 아들을 제단 위에 올려 놓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자기 벗이라 칭하신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분은 ‘아브라함’이 언제나 자기의 말에 순종할 것임을 알게 되셨다.”—야고보 2:23.
‘창조 사진극’ 외에도 ‘유리커 극’이란게 있었다. 한 가지는 음악판과 함께 판에 실린 96개의 강연으로 되어 있었다. 다른 하나는 축음기판과 환등사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후자의 ‘유리커 극’은 활동사진이 아니었으나 인구가 덜 조밀한 지역에서 상연할 때 아주 성공적이었다.
1914년에 ‘창조 사진극’을 미합중국 전역에서 무료로 상연하였다. 그것을 위해 협회와 지방 ‘성경 연구생’들은 아주 많은 비용을 들여야 했다. 그들은 상연할 적당한 장소를 빌리는 데 필요한 돈을 헌금했던 것이다. 그래서 얼마 후에 큰 관중에게 보이는 일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창조 사진극’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목적을 알게 하는 데 큰 일을 수행하였다.
실례를 들자면 어떤 사람은 ‘시이. 티이. 러셀’에게 이러한 편지를 보냈다. “저의 아내와 저는 당신의 도움으로 우리가 얻게 된 크고도 참으로 귀중한 축복에 대해 하늘의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진리를 우리의 것으로 알고 받아들이게 한 것이 바로 당신의 아름다운 사진극이었읍니다.” 그리고 ‘릴리 알. 파아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류를 위한 여호와의 목적을 이러한 사진으로 보여줌으로써 많은 생각있는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에 [‘마사추우세츠’ 주 ‘그린피일드’에 있는] 회중이 점점 불어나게 되었다. 그 사진들이 성서를 살아 있는 책이 되게 하고 생각깊은 사람들에게 우리 하나님의 마련으로부터 혜택을 얻고자 하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기 위해서 얼마나 고귀한 지식을 준비해 놓으셨는가를 증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랫 동안 협회 본부 요원이었던 ‘디미트리우스 파퍼조오지’가 이렇게 말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성경 연구생의 수가 적은 것과 그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재원이 얼마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사진극 계획은 정말 걸작품이었다. 참으로 그 배후에 여호와의 영이 있었다.”‘콜포처’들이 “열심을 품”다
열정적인 ‘콜포처’ 즉 “열심을 품”은 그리스도인 남녀들은 1914년이 되기 여러 해 전부터 좋은 소식을 널리 선포해 왔다. (로마 12:11) ‘콜포처’ 봉사는 1881년에 시작되었는데, 그 해에 「‘시온’의 파수대」에는 “1,000명의 전파자를 구함”이라는 기사가 실렸었다. 부양가족이 딸리지 않고 자기 시간의 절반 혹은 그 이상을 주의 사업에 바칠 수 있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제안이 있었다. 그것은 ‘콜포처’ 즉 복음 전파자로서 대소 도시로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무슨 일을 위해서? 「파수대」지는 이렇게 말하였다. “어느 곳에서나 열렬한 그리스도인들을 발견하도록 하자. ··· 이 사람들에게 우리 아버지의 은혜의 풍성함과 그분의 말씀의 아름다움을 알게 하자.” 성서 출판물을 그러한 사람들에게 전하였으며, ‘콜포처’들이 인쇄물을 전하거나 「파수대」 예약에서 받은 금액을 자기 경비로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1887년 5월호 「‘시온’의 파수대」에는 호별 방문할 때 어떤 점을 말할 것인지 ‘콜포처’들을 위한 몇 가지 훌륭한 제안이 들어 있었다. 거기에 이런 말도 있었다. “마음을 크게 가져 하나님과 당신이 빛 가운데로 인도할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채우고, 하나님과 그의 확실한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채우며,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광을 위해 현재와 그리고 앞으로도 당신을 사용하는 것을 기뻐하실 것이라는 희망으로 가득 채우라.”
여호와의 봉사에서 열심히 일하려는 자진성 때문에 ‘콜포처’들은 유명하였다. 그들이 도시나 소도시 혹은 마을 어디를 가든지 눈에 띄었다. 1890년대 후반에 발행된 「복음의 사자」라는 책의 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알라바마’ 주] ‘버밍함’ 시에는 현재 자기들을 ‘비종파적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몇명의 사람들이 일하고 있다. ··· 그들은 이 도시에서 호별 방문을 하여 「천년기 새벽」이라는 책을 판매하고 간단한 다른 인쇄물을 배부하고 있다. 어느 기회에나 자기 종교에 관해 말하며, 일요일에도 전파한다. 그들은 자기들을 ‘콜포처’라고 부른다. 그들은 이 도시에서 2,000부 이상의 서적을 전하였다. ···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런 ‘콜포처’들처럼 우리의 인쇄물이나 우리가 알고 있는 성서 교리를 전할 수 없는가? 우리가 그러한 일에 침체되어 있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며 앞으로도 발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호의를 받지 못할 것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그렇다. 초기 그 시절에 우리 ‘콜포처’들은 마을과 시골을 다 돌았다”라고 ‘헨리 파아닉’은 기술한다. 그는 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점을 잘 기억하고 있다. “때때로 그들은 농산물, 병아리, 비누 혹은 다른 여러 가지와 교환하기도 했다. 그것을 자기들이 사용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팔았다. 사람들이 드문드문 사는 곳에서는 농부들이나 목장 일 보는 사람들과 함께 하루밤을 지내기도 하고 어떤 때는 건초 더미 위에서 자기도 하였다.
··· 그러한 충실한 분들은 나이로 인하여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까지 참으로 오랫 동안 그 일을 계속하였다.”그 동안 여호와께서는 충실한 ‘콜포처’들을 위하여 풍부한 마련을 해 주셨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결코 필수품이 부족한 일은 없었다. (시 23:1) ‘클래런스 에스. 하지이’는 이렇게 말한다. “인쇄물을 전하여 받게 되는 기부금으로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그렇게 하려면 여호와의 인자하신 마련을 믿어야 하였고 정직하게 말해서 우리가 결코 굶주린 일이 없었으며 전 시간 봉사를 하는 여러 해 동안 우리에게 필요한 거처와 옷이 있었다. (시 37:25) 여호와께서는 필요한 것을 참으로 놀랍게 공급해 주신 것이다!”
그때에는 생활비가 그렇게 많이 들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콜포처’들이 분수에 넘치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1910년을 예로 들어보자. ‘매린더 지이. 키이퍼’는 ‘아이오아’ 주 ‘카운슬 클럽’이란 곳에서 ‘콜포처’로 일하였는데 그때를 회상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카운슬 클럽’이란 곳은 상당히 힘든 구역이었지만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면 그런 대로 해 나아갈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생활비가 아주 적게 들었다. 우리가 다니는 방법(도보)에는 별로 돈이 들지 않았고 식품비도 그랬다. 빵 한덩이에 5‘센트’, 설탕 한 ‘파운드’에 5‘센트’, ‘비프 스테이크’ 한 ‘파운드’에 25‘센트’였다. 어떤 것을 구입하여도 그것은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 방세는 쌌으며 전차 운임은 5‘센트’였다. 1970년대와 비교하면 얼마나 다른 세상이었는가!”
‘조오지 이이. 해넌’은 1921년 후반에 ‘콜포처’ 봉사에 들어갔다. 그는 생활비에 대해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식품비는 한 주일에 4‘달러’가 들었다. 하루에 한 끼니는 따뜻한 식사를 하였고 나머지 두끼는 인쇄물과 바꾼 말린 과일과 약간의 채소로 하였다. 돈이 떨어지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시는지 좀 기다려 봅시다’라고 말하곤 했다. 어떤 사람은 총재산으로 50‘달러’밖에 남지 않게 되자 중단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어떤 사람에게 50‘달러’ 심지어 10‘달러’나 1‘달러’라도 있다면 아직 그 때는 여호와께서 개입하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고급 생활비가 아니라 고가 생활비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그분이 도우실 것을 나는 확신하였다.”
다니는 방법은 어떠했는가? ‘찰알스 에이치. 케이픈’은 ‘펜실베이니아’ 주의 몇 군에서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가용(도보)’으로 봉사하였다고 말한다. 다른 ‘콜포처’들에게는 자전거가 아주 도움이 되었다. ‘라루 위치’는 “1911년부터 1914년까지 ‘콜포처’들이 우리가 사는 ‘오하이오’ 주의 군에서 일하였다”고 얘기하면서 그들은 봉사를 열심히 하였으며, 「성경 연구」를 가득 싣고 여러 ‘마일’을 자전거로 다녔다.”고 하였다. 물론 ‘콜포처’로서 처음 자전거를 탄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일 수 있었다.
아마 말이 더 나았을지 모른다. ‘매린더 지이. 키이퍼’는 정든 ‘도우빈’을 그리워하고 있다. “‘도우빈’은 온순한 말이어서 매놓을 필요가 전혀 없었다. 내가 호별 방문 할 때는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따라 다른 곳으로 걸어가곤 하였다.”
그러나 ‘콜포처’인 ‘애너 이이. 지머맨’이나 ‘에스더 스나이더’의 경험에 의하면 모든 말이 다 정다운 ‘도우빈’ 같지는 않았다. 이제 막 서부에서 들여온 말이 끄는 이륜마차를 세 내어 타고 있는 두 자매를 생각해 보라. ‘지머맨’ 자매는 이렇게 말한다. 그 말은 “아무 것도 심지어 기차까지도 자기를 따라 놓는 것을 허락지 않아서 마굿간에 도착하기까지 몇 ‘마일’을 기차와 나란히 경주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기관사에게 소리 질러 ‘제발 이 말이 제 마굿간으로 들어갈 때까지 기차를 역에 좀 세워주세요’ 하고 애걸하였다. 그는 ‘좋습니다. 서둘지 말고 천천히 가세요.’라고 대답하였다. 그 말은 계속하여 다른 때보다 4배나 빠른 속도로 미친듯이 달렸다. 우리가 무사히 마굿간에 도착했더니 그 주인은 우리가 말을 세 내어 갈 때 자기는 점심 먹으러 갔었고 마부 소년은 길들이는 것이 자기 일인데도 그 말이 무서우니까 나에게 말 훈련을 맡겨버린 것이라고 사과하였다.”
후에 가서 어떤 ‘콜포처’들은 자동차를 사용하였다. 물론 지금은 미합중국 대부분의 지역은 길이 일반적으로 잘 포장돼 있다. 그러나 몇 십 년 전만 해도 그렇지가 않았다. 그래서 자동차 여행 역시 문제가 있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해이즐’과 ‘헬렌 크룰’은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덮여있는 구덩이가 있었는데 그것이 너무 크고 그 안에 있는 흙은 질기 때문에 갑자기 차가 차축까지 구덩이로 빠져버렸다.” 우리가 가끔 사용하던 삽도 이 경우에는 별 소용이 없었다. 어느 친절한 이웃 사람이 자기 노새를 사용해 보라고 제안했다. 그 이외에도 지렛대를 이용하여 깊이 빠진 차체 뒷면을 올리기 위해서 통나무나, 나무 둥치 혹은 가지를 찾으려고 길주변을 뒤졌다. 이렇게 해서 앞에는 노새, 가운데는 ‘엔진’의 힘 그리고 뒤에는 기를 쓰고 밀어 여러 번 시도한 끝에 결국 차를 구덩이에서 나오게 하였다. 그것은 모두에게 즐거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그날 대로 즐거움이 있었다. 그 일이 있기 전 길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을 걸어서 매우 흥미있는 방문을 몇 군데 하였다. 그래서 그 어려움과 즐거움은 서로 상쇄되었다. ‘다윗’과 같이 우리의 마음도 자주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라고 호소하였다.—시 61:1.”
‘콜포처’들이 직면한 어떤한 문제들보다도 훨씬 더 의미심장한 것은 그들의 전파 활동이었다. 우리가 그들과 함께 사람들의 가정을 방문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윌리암 피이. 모크리지’는 1906년 ‘뉴우요오크’ 주 ‘쉬넥터디’에서 ‘빈센트 시이. 라이스’와 함께 ‘콜포처’ 봉사를 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그 당시를 상상해 볼 수 있게 도와 준다. “첫날은 온 종일 봉사하였으나 책 한권 못전했다. 사실 나는 훌륭한 판매원이 될 소질이 있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날 밤 나는 여호와께 ‘교만함’과 물질적인 생각을 없앨 수 있도록 도와 주시고 또 누가 문간에 나오든지 언제나 유쾌하게 얘기하는 ‘라이스’ 형제의 겸손하고 친절한 접근 방법을 배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얼마 있지 않아 협회가 제공한 ‘안내문’을 사용하여 대책을 많이 전하기 시작했다. ··· 우리는 [성경 연구의] 처음 세 권을 98‘센트’에, 혹은 전 6권을 1‘달러’ 98‘센트’에
‘주문을 맡’곤 하였다. 그러한 주문은 ‘봉급날’인, 대개 그달 1일과 15일에 배달하였다.”‘모크리지’ 형제가 ‘안내문’을 사용했다는 말을 기억하는가? 그것은 여러 해 동안 호별 방문 전파 사업에 참여하는 ‘콜포처’들과 다른 ‘성경 연구생’들에 의해서 사용되었다. 그것은 「천년기 새벽」(「성경 연구」) 6권의 겉표지를 나열해 놓은 것으로 ‘아코디언’식으로 접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문간에서 ‘콜포처’는 자기 팔 위에 이것을 펼쳐 놓고 각 권의 제목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는 주문을 맡은 다음 출판물은 그 후에 배달해 주었다.
“책으로 가득찬 상자는 무거워서 배달하는 날은 힘들었다.”고 ‘펄 라이트’는 말한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콜포처’ 한 사람이 「성경 연구」 50부를 주문 맡았다고 하자. 그만한 수량이면 40‘파운드’로 여자에게는 무거운 짐이며 심지어 많은 남자들에게도 무거운 짐이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콜포처’인 ‘제임스 에이치. 코울’이 두 개의 바퀴가 달렸고 ‘닉켈’을 입힌 것으로 상자에 붙일 수 있는 부착물을 만들어 냈다.
‘애너 이이. 지머맨’은 그것이 “눈길을 끄는 것”이었다고 하면서 이런 말을 들려준다. “‘펜실베이니아’ 주 ‘홀리데이스버그’라는 곳에서 ‘콜포처’로 일하던 때인데 한번은 점심 시간에 바퀴달린 상자를 밀고 번화가를 지나가야 했다. 좀 내키지는 않았지만 옆으로 상자를 밀면서 곧바로 나아갔다. 그 때 옷을 잘 차려 입은 신사가 뒤에서 정중히 다가와 손잡이를 잡으면서 이렇게 물었다. ‘제가 잠시 동안 그것을 밀고 가 봐도 좋을까요? 저는 그게 어떻게 가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당신은 정말 힘들이지 않고 그것을 밀고 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것을 밀고 번화가를 전부 지나갔기 때문에 나는 전혀 손댈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가 그 지방 신문편집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 날 자세한 기사가 그 지방 신문에 나왔다.
충실한 ‘콜포처’들은 여호와를 의뢰하고, 비이기적인 동기로 부지런히 일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노력은 상을 받았다. ‘콜포처’ 활동의 결과로 회중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 깊은 만족감과 훌륭한 영적 상이 있었다. ‘에디스 케슬러’와 친 자매인 ‘클라라’는 1907년에 기꺼이 ‘콜포처’ 봉사로 들어갔다. 그들은 걷기도 많이 했고, “배달 일”에 책도 많이 운반하였다. 그들이 피곤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에디스’가 “우리는 젊었으며 봉사에서 즐거웠고 야를 섬기는 데 우리의 힘을 사용하는 것을 기뻐했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대체로 옛날의 충실한 ‘콜포처’들의 얘기로 생각된다.
‘무릇 너를 치려고 제조된 무기가 날카롭지 못하리라’
충실한 ‘콜포처’들과 다른 ‘성경 연구생’들이 열심히 좋은 소식을 선포하고 있는 동안에 그들을 무너뜨리고 멸망시키기 위해서 ‘사단’ 마귀는 한시라도 자기 손을 늦추거나 노력을 중단한 적이 없다. 만약 그들에게 하나님의 보호가 없었던들 ‘사단’ 마귀가 그 일에 성공하였을 것이다. (베드로 전 5:8, 9; 히브리 2:14) 그들은 고대에 자기 백성에게 하신 하나님의 이러한 약속이 진실함을 알게 되었다. “무릇 너를 치려고 제조된 기계가 날카롭지 못할 것이다. 무릇 일어나 너를 대적하여 송사하는 혀는 네게 정죄를 당하리[라].”—이사야 54:17.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박해를 받으셨으며 그의 추종자들 역시 거짓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과 전반적인 세상으로부터 같은 대우를 기대할 수 있다. (요한 15:20) 하지만 어떤 때는 ‘사단’의 공격이 내부적인 것으로서 그리스도인 조직 내에 있는 악한 사람들로 인하여 시작되거나 사실상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한 사람들이 개입된 사건에서 발생되는 경우도 있었다.—요한 1서 2:19.
1870년대에 ‘시이. 티이. 러셀’이 「아침의 전령」지의 발행자인 ‘엔. 에이치. 바아버어’와의 관계를 끊은 일을 기억할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러셀’이 대속을 충실히 옹호한 데 반해, ‘바아버어’는 성서적인 대속의 교리를 부인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1890연대 초기에는 조직에서 탁월하였던 어떤 사람들이 파렴치하게도 ‘왙취 타워 협회’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한 일이 있었다. 공모자들은 ‘러셀’의 인기를 꺾고 협회장의 지위에서 몰아내기 위해 “치명타”를 가할 계획을 세웠다. 약 2년 간에 걸친 모의 끝에 1894년에 가서 그 음모가 폭발하였다. 불평과 거짓 비난은 주로 ‘시이. 티이. 러셀’이 사업에 있어서 부정직하다는 주장으로 집약되었다. 정말 어떤 비난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것이어서 비난자들이 ‘시이. 티이. 러셀’을 중상하려고 한 저의가 드러났다. 중립적인 동료 신자들이 사실을 조사하였고 ‘러셀’이 정당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러셀’과 그의 활동을 파괴”하려던 공모자들의 계획은 완전히 좌절되고 말았다. 사도 ‘바울’과 같이 ‘러셀’ 형제도 “거짓 형제”로 인하여 고난을 겪었지만 이러한 시련은 ‘사단’의 음모로 인정되었으며 그 후로는 공모자들은 그리스도인 교제를 즐기기에 합당치 않은 자들로 간주되었다.—고린도 후 11:26.
물론 그러한 것으로 ‘시이. 티이. 러셀’의 시련과 어려움이 끝난 것은 아니다. 자기 가족 내에서 일어난 일로 인하여 개인적으로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1894년에 있었던 고난 중에 ‘시이. 티이. 러셀’의 부인(결혼 전 이름은 ‘마리아 프란시스 애클리’로 1879년에 ‘러셀’과 결혼하였음)은 ‘뉴우요오크’에서 ‘시카코’로 여행하여 그 동안 ‘성경 연구생’들을 만나 남편을 대신해서 연설하였다. 교육을 받은 지식있는 여성이었으므로 그 당시 회중을 방문하였을 때 크게 환영을 받았다.
‘러셀’ 부인은 ‘왙취 타워 협회’ 이사였으며 몇 년 동안 협회의 총무겸 재무로 일하였다. 그 부인은 「‘시온’의 파수대」의 정기적인 기고자이기도 하였으며 얼마 동안 그 잡지의 부편집자였다. 결국에는 「파수대」지에 어떤 내용을 실을 것인지에 대해 아주 강한 발언권을 행사하려 하였다. 그러한 야심은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이스라엘’의 인도자이며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자기의 동생에 대항하여 자기를 탁월하게 하고자 했으나 하나님의 승인을 얻지 못한 그런 행위에 견줄 수 있다.—민수 12:1-15.
왜 ‘러셀’ 부인은 이러한 태도를 갖게 되었는가? 1906년에 ‘시이. 티이. 러셀’은 이렇게 기술하였다. “내가 그 당시에는 깨닫지 못하였지만 공모자들이 감언으로 아내의 마음 속에 ‘여성의 권리’에 대한 주장 같은 불화의 씨를 심어 놓으려고 했음을 후에 알게 되었다. 하지만 동요가 일어났을 때에는[1894년] 주의 섭리로 그 공모자들 가운데 나의 아내가 끼어 있게 되는 그러한 수치스러운 일은 면하였다. ··· 문제가 잠잠해지기 시작하자 ‘여성의 권리’에 대한 생각과 개인적 야심이 다시 아내에게서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나를 변호하기 위한 아내의 적극적인 활동과 그 당시의 여행에서 사랑하는 벗들이 아내에게 베풀어 준 극진한 대우로 인해 ··· 교만하게 되어 자신에게 해가 되었음을 나는 알게 되었다. ··· 점차적으로 자기가 쓴 것 외에는 「파수대」지에 실을 적절한 내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으며 내가 쓴 내용도 고치라고 귀찮을 정도로 계속 제안하였다. 나는 처음 13년간 행복하던 시절의 아내의 특징이었던 겸손한 정신과는 아주 다른 경향이 점차 생겨나는 것을 보고 괴로와 했다.”
‘러셀’ 부인은 아주 비협조적이 되었으며 그런 긴장된 관계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1897년 초에 부인이 병들게 되어 ‘러셀’은 아내를 정성껏 간호하였다. 그는 기꺼이 그렇게 하였으며 자기의 친절한 간호로 아내의 마음이 감동되어 이전의 정답고 부드러운 상태로 회복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러셀’ 부인은 회복되자 위원회를 소집하여 자기 남편과 충돌했는데, ‘러셀’이 기록한 바에 의하면 “「파수대」지에 대해 자기가 나와 동등한 권리를 가졌다는 점과 자기가 바라는 대로 내가 응해 주지 않는 것은 나의 잘못이라는 점을 형제들로 하여금 지적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특히” 그랬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전모가 밝혀지자 위원회는 그들이나 다른 누구도 그의 남편이 「파수대」지를 관리하는 것을 방해할 권리가 없다고 그에게 말해 주었다. ‘러셀’ 부인은 사실상 위원회의 견해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견해로 사물을 보려고 노력하겠다고 말하였다. 더 나아가 ‘러셀’은 이러한 점을 알려 주었다. “그 때 나는 그들이 있는데서 악수하겠는가 물었다. 아내는 망설이더니 결국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다음에 나는 ‘자, 여보, 당신이 암시한 바와 같이 생각을 바꾸겠다는 표시로 나에게 ‘키스’해 주겠오?’ 아내는 다시 망설이더니 결국에는 나에게 ‘키스’하고 애정을 다시 회복하겠다는 것을 다른 면으로도 위원들 앞에서 표시하였다.”
그리하여 ‘러셀’ 부부는 ‘‘키스’로 화해하였다.’ 그 후에 ‘러셀’ 부인의 요청으로 그 남편은 부인을 인도자로 하는 “‘알레게니’ 교회의 자매들”이라는 일주일에 한번씩 가지는 모임을 마련하였다. 이로 인해 다른 어려움 즉 ‘시이. 티이. 러셀’에 대하여 비방하는 말이 돌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도 해결되었다.
그렇지만 ‘러셀’ 부인은 더욱 유감을 느끼게 되어 결국에는 ‘왙취 타워 협회’ 및 자기 남편과의 관계를 끊게 되었다. 1897년 거의 18년이라는 결혼 생활 후에 통고도 없이 남편을 떠난 것이다. 거의 7년간 별거하였는데 그동안 ‘시이. 티이. 러셀’은 아내를 위해 별거할 집을 마련해 주었고, 생계를
위한 재정적 마련도 해 주었다. 1903년 6월에 ‘러셀’ 부인은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어그’에 있는 법원에 법적 별거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였다. 1906년 4월 그 사건은 ‘콜리어’ 판사와 배심원 앞에서 심리되었다. 거의 2년 후인 1908년 3월 4일 “이혼건”이라고 칭하는 판결이 내려졌다. 판결문은 이와 같다. “본 민사 사건에 있어서 원고 ‘매어리 에프. 러셀’과 피고 ‘차알스 티이. 러셀’에게 숙식에 있어서의 별거를 명하는 바이다.” “숙식에 있어서의 별거”란 말은 판결문이자 법원 서기가 기록한 판결문 기재 사항이다. 이것은 법적 별거였으며 어떤 사람들이 잘못 주장한 바와 같이 전적인 이혼이 결코 아니었다. 「‘부비어’의 법률 사전」(‘뱅크스 볼드윈’ 법률 출판사, 1940년판)은 그러한 판결을 “부분적 혹은 제한된 이혼으로서 결혼 자체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도 쌍방이 분리되어 동거를 금하는 것”(314면)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312면에서 그 책은 그것을 “법적 별거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고 말하였다.‘시이. 티이. 러셀’ 자신은 법원이 전적인 이혼을 허락한 것이 아니라 법적 별거를 승인하였음을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다. 1911년 ‘아이레’ 여행중 ‘더블린’에서 “당신이 아내와 이혼하였다는 것이 사실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 대답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다. “‘나는 아내와 이혼하지 않았다. 법원 판결은 이혼이 아니라 별거였다. 그것은 동정심을 가진 배심원들이 승인한 것으로서 그들은 별거하는 것이 우리 두 사람에게 더 나을 것이라 선언하였다. 나의 아내의 주장은 학대했다는 것이었으나 증거로서 제시된 유일한 학대 행위는 어느 땐가 한번 아내가 ‘키스’를 요청했을 때 내가 그것을 거절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학대했다는 고소 내용을 반박하고 어떤 여인이든지 남편에 의해 그보다 더 잘 대우를 받을 수는 없으리라는 점을 듣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말하였다. 그때 있었던 박수갈채는 듣고 있는 사람들이 나의 진술을 믿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1916년 ‘피츠버어그’에서 행한 ‘시이. 티이. 러셀’의 장례식에서 있었던 일도 중요한 것으로써 이상의 사실과 일치한다. ‘애너 케이. 가드너’는 이러한 점을 말하고 있는데 그 회고담은 다른 참석자들의 말과 비슷하다. “‘카네기 홀’에서 식이 시작되기 직전에, 신문에 게재된 ‘러셀’ 형제에 대한 기사가 거짓이라는 것을 논박해 주는 일이 일어났다. 식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식장이 가득찼으며 아주 조용하였는데, 그 때 어떤 ‘베일’을 쓴 부인이 복도로 해서 관 있는데로 오더니 그 위에 무엇인가를 놓았다. 앞에 있는 사람은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다. 바로 그것은 ‘러셀’ 형제가 가장 좋아하던 꽃 즉 은방울꽃다발이었다. ‘리본’이 달려 있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남편에게’라고 씌어 있었다. 그 부인은 ‘러셀’ 부인이었다. 그들은 이혼한 것이 결코 아니었으며, 그 ‘리본’에 쓴 말은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알려 준 것이 되었다.”
‘시이. 티이. 러셀’의 가정적인 시련이 그에게 가져다 준 고민과 감정적인 갈등을 다른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결혼 생활이 어려움에 처해 있던 시점에서 ‘러셀’ 부인에게 보낸 한 날짜가 없는 자필 서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 글이 당신에게 도착했을 때는
하나님과 인간 앞에서 ‘좋건 궂건 어떠한 입장에 처하더라도 생명이 다하도록’ 당신이 사랑하고 순종하고 섬기기로 약속했던 나에게서 떠난지 바로 일 주일쯤 될 것이요. ‘경험은 훌륭한 선생’이라는 말은 확실히 참된 말이요. 오직 그러한 말은 당신에 대해서도 그렇게 내가 확신을 갖게 할 수 있었을 것이요. 한 때는 당신이 더 할 수 없이 정답고 헌신적인 내조자였다고 진심에서 나는 말할 수 있기 때문이요. 그렇지 않았다면 주께서 당신을 나에게 주시지 않으셨으리라고 나는 확신하오. 그분은 모든 일을 합당하게 처리하오. 그 점에 있어서는 나에 대한 그분의 섭리에 대해 지금도 나는 감사드리며 당신이 자주 나에게 애정을 표시하고 나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하거나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날까 두렵다고 반복하여 얘기하던 때를 즐거운 마음으로 회고하고 있오. ··· 내가 생각해 보건대 단지 1년 반 전만 해도 그러한 사랑의 증거를 나에게 나타냈었오. 당신에 대한 나의 열렬한 사랑을 수없이 확인하였고 지금도 그 사랑에는 변함이 없는데도 시기와 억측으로 인하여 1년 전부터 당신의 사랑은 식어져 왔오.”‘러셀’은 그 때에 대적 ‘사단’ 마귀가 자기 아내를 아주 “단단히 붙들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내가 당신을 위하여 주께 간절히 기도하였소”라고 말하였으며 역시 아내를 돕기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이런 말도 하였다. “내가 어쩌다 당신의 옷이나 다른 물품을 가끔 보게 되고 그것들이 당신의 이전 모습 즉 사랑과 인정과 협조—그리스도의 영—로 가득찬 당신을 생생하게 기억나게 할 때의 느끼는 나의 슬픔을 얘기하여 당신에게 괴로움을 주고 싶지는 않소. 그렇다고 그 심정을 묘사하여 당신의 동정심에 호소하지도 않겠소. 나의 마음은 ‘아! 그러한 행복한 시절에 우리가 사별하였더라면’ 하고 부르짖었소. 그러나 분명히 말해서 시련과 시험이 온전히 다 지나간 것은 아니오. ···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숙고해 보시오. 무엇보다 나를 슬프게 하고 가슴에 맺히게 하는 것은 여생에 대한 내 자신의 고독감이 아니라 내가 아는 바로는 사랑하는 당신의 패망과 영원한 실패라는 점을 확실히 알기 바라오.”
부도덕한 것이 아님
‘러셀’의 부부 관계 악화로는 충분치 않았던지 비굴하게도 그의 반대자들은 그가 부도덕하다는 야비한 비난을 하였다. 그러한 지능적인 거짓말은 소위 “해파리”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것이다. 1906년 4월의 공판 중에 ‘럿셀’ 부인은 ‘볼’이라는 소녀가 언젠가 ‘시이. 티이. 러셀’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나의 생활은 해파리와 같다. 나는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며 이 여자 저 여자를 건드려 보다가 그가 응하면 그를 취하고 응하지 않으면 다른 여자에게로 간다.” 증인석에서 ‘시이. 티이. 러셀’은 “해파리” 이야기를 단호히 부인하였으며 그에 대한 모든 것은 법정 기록에서 삭제되었다. 판사는 그의 혐의에 대해서 배심원들에게 “그 집에 살았던 소녀와 관련된 이 사소한 사건은 신빙성이 없으며 본 건과는 관련이
없다.”라고 말하였다.문제의 소녀는 1888년에 10살쯤 된 고아로서 ‘러셀’가에 오게 되었다. 그들은 그 아이를 친자식처럼 대하였으며 그 아이는 매일 저녁 자러 갈 때 저녁 인사로서 ‘러셀’ 부부에게 ‘키스’하였다. (법정 기록 90, 91면) ‘러셀’ 부인은 전술한 일이 1894년에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그 때는 이 소녀가 기껏해야 15세 밖에 되지 않았을 때이다. (법정 기록 15면) 그 후에도 ‘러셀’ 부인은 자기 남편과 함께 3년을 살았고 별거한지 7년 이상이 지난 다음 별거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 소장에는 이 문제가 언급되지도 않았다. 그 때 ‘볼’ 양이 살아 있었으며 ‘러셀’ 부인은 그 사는 곳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를 증인으로 채택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로부터의 어떤 진술도 제출하지 않았다. ‘시이. 티이. 러셀’ 자신은 자기 아내가 그러한 것을 법정 문제로 제기하리라는 것을 통고받거나 암시받지도 않았기 때문에 ‘볼’ 양이 증언하도록 출석할 수 없었다. 더우기 그 사건이 있었다는 때로부터 3년이 지난 후 ‘러셀’ 부인이 위원회를 소집하여 그 앞에서 자기와 남편과의 불화에 대해 토론했을 때에도 “해파리”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별거 수당에 대한 소송에서 ‘러셀’ 부인의 대리인은 “우리는 그가 간음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러셀’ 부인도 사실상은 자기 남편이 부도덕한 행위를 범했다고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록으로(10면) 알 수 있다. 자기 변호인이 ‘러셀’ 부인에게 “당신의 말은 남편이 간음을 범했다는 의미는 아니겠죠?”라고 물었다. 그 부인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차알스 테이즈 러셀’의 가정적인 어려움과 그와 관련된 난관이 있었던 전 시련기를 통해 여호와께서 성령으로 그를 지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이 있는 가운데서도 ‘러셀’을 계속 사용하여 「‘시온’의 파수대」를 위한 자료를 쓰게 하였을 뿐 만 아니라 다른 중책들을 수행하고 「천년기 새벽」(혹은 「성경 연구」) 3권을 저술하게 하셨다. 그러한 사실은 여러 가지 시련으로 괴로움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계속 행하는 데 있어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참으로 격려가 되는 것이다. ‘야고보’의 다음과 같은 말은 특히 충실한 기름부음받은 예수의 추종자들에게 고무적인 내용이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야고보 1:12.
기적의 밀
‘시이. 티이. 러셀’의 반대자들은 그의 가정사 이외에도 그에 대항하여 다른 “무기”를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반대자들은 그가 보통 밀을 “기적의 밀”이라고 해서 ‘파운드’당 1‘달러’ 즉 ‘부셸’당 60‘달러’를 받고 대량으로 팔아 먹었다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이로 인해서 ‘러셀’이 엄청난 개인 이득을 보았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비난은 전적으로 거짓된 것이다. 사실은 어떠한가?
1904년 ‘케이. 비이. 스토우너’라는 사람은 ‘버지니아’ 주 ‘핀 캐슬’에 있는 이사야 35:1, 난외주; 에스겔 34:27) 1907년 11월 23일에 미국 정부의 농무성 차관 ‘에이치. 에이. 밀러’는 ‘스토우너’ 씨가 기른 이 밀을 추천하는 보고서를 농무성에 제출하였다. 신문들은 그 보고서를 전국에 걸쳐 대서특필하였다. ‘시이. 티이. 러셀’은 그것에 관심을 갖고 1908년 3월 15일호 「‘시온’의 파수대」지 86면에 그에 관한 약간의 신문 논평과 정부 보고서에서 발췌한 내용을 실었다. 그리고 결론에서 그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이러한 이야기가 반 정도만 사실이라 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의 회복하실 때’를 위하여 필요한 것을 공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새로운 증거를 제시해 주는 것이다.”—사도 3:19-21.
자기 정원에서 잘 보지 못하던 식물이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흔히 있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밀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 식물에는 142개의 줄기가 있고 각 줄기에는 온전히 익은 밀이 달려 있었다. 1906년에 그는 그 이름을 “기적의 밀”이라고 하였다. 결국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구해다 기르게 되었고 특별히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사실상 몇몇 품평회에서 ‘기적의 밀’은 상을 받았다. ‘시이. 티이. 러셀’은 “사막이 장미 같이 피어 즐거워하[리라]”든지 “땅이 그 소산을 내[리라]”는 성서 예언과 관련된 것에 아주 관심이 많았다. (‘스토우너’ 씨는 ‘성경 연구생’의 한 사람도 아니었고 ‘시이. 티이. 러셀’과 친분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기적의 밀’을 시험해 본 다른 여러 사람들도 역시 그러하였다. 그런데 1911년에 「파수대」 독자였던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어그’에 사는 ‘제이. 에이. 보네트’와 ‘인디애나’ 주 ‘와바시’에 사는 ‘새뮤얼 제이. 플레밍’이 총계 약 30‘부셸’이 되는 그 밀을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에 기증하였으며 그것을 ‘파운드’당 1‘달러’에 팔아 그 모든 소득은 협회가 자기들로부터 기증한 것으로 받아들여 종교 활동에 써달라고 제안하였다. 협회는 그 밀을 받아서 방출하였고 거기에서 얻은 총액은 약 1,800‘달러’였다. ‘러셀’ 자신은 이 돈에서 한 푼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는 그 밀을 기부받았으며 ‘파운드’당 1‘달러’에 구할 수 있다는 요지의 내용을 「파수대」지에 발표하였을 뿐이다. 밀에 대해 협회가 그 나름으로 주장한 것은 없었으며 받은 돈은 기부금으로써 그리스도인 선교 활동에 사용되었다. 그러한 판매를 다른 사람들이 비난하였을 때 기부한 모든 사람들에게 만일 불만이 있다면 그들의 돈을 돌려 주겠다고 통지하였다. 사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밀 판매에서 얻은 돈을 1년 동안 보관해두고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도 환불을 요구하지 않았다. ‘기적의 밀’과 관련해서 ‘러셀’ 형제와 협회가 취한 행동은 조금도 숨김없는 정당한 것이었다.
‘차알스 테이즈 러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가르쳤기 때문에 미움과 중상을 받았으며 종교 교직자들에게 자주 그런 일을 당하였다. 그러나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일을 기대하고 있다. 예수와 그의 사도들도 종교적인 반대자들에게 비슷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라].”
여호와는 충실한 하나님이시다. 예언자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라고 권하면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 하실 것이[라].”—사무엘 상 12:20-25.
‘성경 연구생’들은 그들의 경우에 있어서 그 말이 참되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1914년부터 1916년까지 그들이 경험한 어떤 것은 실망과 슬픔을 주는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지원하여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셨다.—고린도 전 10:13.
큰 기대
그 당시에 즐거워할 이유도 있었다.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의 백성은 1914년이 이방인의 때의 끝이라는 것을 미리 지적해 왔다. 그들의 예상은 실망으로 끝나지 않았다. 1914년 7월 28일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졌고 10월 1일로 다가감에 따라 더욱 많은 민족과 나라들이 참전하였다.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이 성서 연구를 통해 알게 된 바와 같이 1914년에 방해받지 않은 이방인이 세계 통치 기간이 끝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하는 하나님의 천적 왕국이 탄생되었다. (계시 12:1-5) 그러나 1914년에 대해서 다른 기대도 있었다. 그에 관하여 ‘에이. 에이치. 맥밀란’ 형제는 그의 저서 「믿음의 행진」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내 기억에 생생한 것으로서, ‘패스터 러셀’은 1914년 8월 23일에 북서부로 여행을 시작하여 태평양 해안을 끼고 내려가 남부에 있는 주들을 거쳐 ‘뉴우요오크’ 주 ‘사라토가 스프링’에서 여행을 끝냈다. 우리는 그곳에서 9월 27-30일에 대회를 개최하였다. 우리 몇 사람은 그해 10월 첫 주간에 하늘로 가게 될 것이라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그 때는 아주 흥미있는 때였다.”
어떤 ‘성경 연구생’들 사이에는 1914년에 하늘로 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드위트 티이. 케년’ 자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전쟁이 혁명과 무정부 상태로 진행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 당시의 기름부음받은 자들 즉 헌신한 자들이 죽어 영광스럽게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어느날 밤 내가 꿈을 꾸었는데 전체 ‘에클레시아’(회중)가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번개와 천둥이 나기 시작하고 갑자기 내 주위에 있는 모든 벗들이 죽기 시작하였다. 나는 아!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고 죽으려고 했으나 죽지를 않았다. 그건 정말 당황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내가 죽게 되었고 안도감과 민족감을 느끼게 되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단지 이 낡은 세상이 관련되어 있는 한, 모든 것이 곧 끝나고 ‘적은 무리’의 남은 자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확실하게 믿고 있었는지 알려 주기 위해서이다.—누가 12:32.”
1914년에는 ‘벧엘’의 식사 시간 중에 이방인의 때의 끝을 중심으로 하는 토론이 자주 있었다고 ‘해이즐’과 ‘헬렌 크룰’은 말하고 있다.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때때로 ‘러셀’ 형제는 말을 부가하여 충실성을 강조하고 연대의 주요점을 다시 살펴보았지만 그래도 그것이 정확한 것 같다고 설명했으며
그 외에도 “성서가 명확히 말하고 있는 것 이상을 우리가 기대하고 있다면 우리는 여호와의 뜻에 복종하고 믿음으로써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그분의 뜻에 따라 조정해야 하며 관련된 사건들의 성취를 계속 충실히 살피고 기다려야만 한다”고 설명했다고 한다.그 해에 하늘의 “집으로 갈” 것이라는 ‘맥밀란’ 형제의 견해가 1914년 ‘사라토가 스프링’ 대회에서 있었던 일을 통해 더욱 잘 나타난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수요일(9월 30일)에 나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자’라는 제목으로 연설하게 되었다. 사실, 어떤 사람이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바로 나의 생활 행로였다. 나는 10월에 교회가 ‘집으로 갈’ 것을 진정으로 믿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연설하면서 나는 이러한 말을 하였다. “우리가 곧 집으로 가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아마도 나의 마지막 공개 연설이 될 것이다.”
다음 날인 1914년 10월 1일 아침에 약 500명의 ‘성경 연구생’들이 기선을 타고 ‘허드슨’ 강을 따라 ‘알바니’에서 ‘뉴우요오크’로 가는 멋진 여행을 하였다. 일요일에는 대회 참석자들이 ‘브루클린’에서 회기를 갖고 그곳에서 대회를 끝내려는 예정이었다. 상당히 많은 대표자들이 ‘벧엘’에 머물렀고 10월 2일 금요일 아침에 본부 성원들이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함께 모인 것은 물론이다. 모두가 앉아 있는데 ‘러셀’ 형제가 들어 왔다. 그는 평상시와 같이 유쾌하게 “모두들 안녕하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특히 이 날 아침은 다른 때와 달랐다. 곧바로 자기 자리로 가지 않고 그는 손뼉을 치며 유쾌하게 “이방인의 때는 끝났다. 그들의 왕들은 그 날이 다하였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도 얼마나 박수를 쳤던가!” 하고 ‘코라 메릴’은 강조한다. ‘맥밀란’ 형제는 이러한 점을 시인하였다. “우리는 아주 흥분하였으며 바로 그 순간에 위로 올라간다 해도 그것은 승천하기 시작한다는 신호이기 때문에 나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물론 그와 같은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메릴’ 자매는 이렇게 부언한다. “잠깐 멈추었다가 그[‘러셀’]는 ‘실망한 사람이 있읍니까? 나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읍니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다시 박수를 쳤다.”
‘시이. 티이. 러셀’이 몇 마디 말을 하였으나 곧 이어 ‘에이. 에이치. 맥밀란’이 주의를 끌게 되었다. ‘러셀’은 온후한 태도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일요일 ‘프로그램’을 약간 변경시킬까 합니다. 일요일 오전 10시 30분에 ‘맥밀란’ 형제가 우리에게 연설할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모두에게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무엇보다도 바로 지난 수요일에 ‘맥밀란’ 형제 자신이 아마도 “마지막 공개 연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연설을 하였기 때문이다. 여러 해 후에 ‘에이. 에이치. 맥밀란’은 이렇게 기술하였다. “정말, 그 때는 연설할 내용을 찾기에 바빴다. 나는 시편 74:9에 나오는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 ···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는 말을 발견하였다. 이제 그 점이 달랐다. 그 연설에서 나는 벗들에게 아마도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우리가 곧 하늘로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약간 너무 성급하였을지 모른다는 점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께서 자기가 승인한 종들 가운데 어떤 사람을 하늘로 데려가실 때까지 주의 봉사에서 계속 바쁘게 일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려 주려고 노력하였다.”
‘시이. 티이. 러셀’ 자신은 개인적으로 추측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였다. 예를 들면 1912년 12월 1일호 「파수대」에서 이방인의 때의 끝에 관해 토론을 하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결국 우리가 1914년 10월이나 1915년 10월 혹은 어떤 다른 날짜까지만 바친 것[즉 헌신한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그렇게 하였다는 것을 기억하자. 어떠한 이유로 주께서 우리가 예언에 대해 잘못 추측하도록 허락하셨다 할지라도 시대의 징조를 볼 때 크게 잘못 추측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분의 약속대로 전과 같이 주의 은총과 평강이 미래에도 우리와 함께 있다면 우리는 항상 동일하게 행하며 장막의 이 쪽이나 저 쪽에서나[지구상에서나 하늘에서나], 주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대로 그분의 봉사를 하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특별한 해인 1914년이 시작되었을 때에도 ‘러셀’은 1월 1일호 「파수대」에서 이렇게 썼다. “연대적인 내용을 교리적인 것과 똑같이 절대적으로 볼 수는 없다. 왜냐 하면 연대는 기본적인 교리처럼 확정적으로 성서에 언급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믿음으로 행하고 있는 것이며 보는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이 없거나 불신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성실성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후에 1914년 10월에 가서 교회가 영광스럽게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주의 뜻이 무엇이든지 간에 만족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성경 연구생’들은 1914년에 대하여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파수대」 지면을 통해 건전한 교훈도 역시 받고 있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그해 가을에 하늘의 ‘집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914년 10월 1일은 지나갔으며—그 후에 여러 해가 지나갔다—기름부음받은 자들은 아직도 이 지상에 있었다. 어떤 사람은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진리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여호와께 신뢰를 둔 사람들은 1914년을 참으로 획기적인 때 즉 ‘종말의 시작’으로 보았지만 언급된 것처럼 ‘성도들이 거룩하게 되는 것’에 대하여 이전의 견해가 잘못이라는 것도 분명히 이해하였다. 이제 그들은 충실한 기름부음받은 사람들에게 아직도 많은 일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나의 아버지[‘클레이튼 제이. 우드워드’]도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한 분이었다”고 ‘시이. 제이. 우드워드’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1914년에 대한 우리의 큰 기대가 이루어진 것에 비해 볼 때 하늘로 가지 못한 것은 별로 실망할 것이 못되었다. ‘성경 연구생’들은 이방인의 때가 그 해에 끝날 것을 오랫 동안 지적해 왔지만 1914년의 처음 6개월 동안에는 이방 나라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종교 지도자들과 다른 사람들은 ‘시이. 티이. 러셀’과 ‘왙취 타워 협회’를 조롱하였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시거나 그들이 잘못 인도되도록 하지 않으신 것은 확실하다. 이방인의 때가 끝나는 그 해 가을까지 기다리고만
있게 하지 않고 그분의 성령은 그들을 움직여 증거 사업을 수행하게 하였다. 몇 달이 지나가면서 ‘유럽’ 전역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지만 왕국 소식에 대한 조롱은 점증하였다. 하지만 여러 나라들이 속속들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사태는 달라졌다.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의 활동이 뚜렷이 눈에 띄게 되었다.‘뉴우요오크’ 시의 유력한 신문이었던 「세계」지의 보도는 그 당시 전형적인 신문의 반응이었다. 1914년 8월 30일 일요일 판에 “모든 왕국의 종말은 1914년에”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 보도된 내용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유럽’에서 무시무시한 전쟁이 발발한 것은 특이한 예언을 성취시켰다. 지난 4반 세기 동안 ‘천년기 새벽파’로 가장 잘 알려진 ‘만국 성경 연구생’들은 전파자들과 신문을 통해 성서에 예언된 ‘분노의 날’이 1914년에 시작될 것이라고 세상에 선포해 왔다. 수백명의 여행하는 복음 전파자들은 ‘1914년을 주의하라’고 외쳐왔다. 이 색다른 신조를 대표하는 그 복음 전파자들은 전국을 누비면서 ‘하나님의 왕국은 가까왔다’는 주장을 선포해 왔다. ···
“‘차알스 티이. 러셀’ 목사는 1874년 이래로 그러한 성서 해석을 제시해 왔다. ··· 1889년에 ‘러셀’ 목사는 이렇게 기술한 바 있다. ‘이러한 강력한 성서적인 증거를 통해서 볼 때, 1914년 끝에 이 세상 왕국들의 종말과 하나님의 왕국의 온전한 설립이 이루어질 것은 확고한 진리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
“그러나 고난이 최절정에 달하는 해가 1914년이어야 한다는 점이 특이했다. 어떤 이상한 이유 때문에 아마도 ‘러셀’ 목사가 선동적인 요란한 방식이 아니라 조용하고 고등수학적인 저술 형식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은 그의 말을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의 ‘브루클린 장막’에 있는 연구생들은 그러한 것을 기대하였으며 고난의 날이 지나갈 때까지 세상은 하나님의 경고를 결코 듣지 않고, 결코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
“그리고 1914년에 전쟁이 발발하였는데 그것은 누구나 두려워하기는 하였지만 실제로 일어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한 전쟁이었다. ‘러셀’ 목사는 ‘보라, 내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라고 하지 않았으며 현대 역사에 맞추기 위해 예언을 수정하지도 않았다. 그와 그의 연구생들은 기다림 즉 그들이 실질적인 끝이라고 여기는 1914년 10월까지 기다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성경 연구생’들이 1914년 10월에 하늘로 ‘가게 되’지 않았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방인의 때인 2,520년의 기간이 그 때에 끝났다. 나중에 더 확실히 알게 된 바와 같이 그 해가 지난 후에도 여호와의 종들은 바로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설립된 왕국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데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성서 진리에 호의적인 반응을 나타낼 사람이 아직도 많다는 것이 분명했다. 이 점에 대해서 ‘러셀’은 1915년 2월 15일호 「파수대」지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주께서 현재 자기의 모든 백성, 그의 깨어있는 성도들이
해야 할 거대한 사업을 가지고 계심이 분명하다. 주의 자녀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문이 이제 닫혔다’는 생각이나 더 이상 봉사할 기회가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의 사업에 게으름을 피운다. 우리는 문이 닫혔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한 시라도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된다! 진리를 찾고 있는 사람 즉 암흑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많다. 결코 지금과 같은 때가 없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좋은 소식을 듣고자 한 일도 없었다. 추수기의 전체 40년 가운데서 지금처럼 진리를 선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없었다. 대전과 시대의 심상치 않은 징조들은 사람들을 일깨우고 있으며 이제는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므로 주의 백성은 손이 닿는 대로 전력을 다해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앞에 거대한 사업이 놓여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계속 견고하며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라’는 권고를 받은 것은 실질적인 것이다. (고린도 전 15:58) ‘러셀’ 형제가 여호와의 종들 앞에 거대한 사업이 놓여 있다고 확신하였음은 여러 해 후에 ‘에이. 에이치. 맥밀란’이 말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시이. 티이. 러셀’은 매일 오전 8시부터 정오까지는 「파수대」 기사를 마련하거나 다른 집필과 성서 연구하는 데 바쳤다. ‘맥밀란’은 이렇게 기술하였다. “특별히 부른다거나 아주 중요한 일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아무도 그 시간에는 서재에 가까이 가지 않았다. 8시 5분쯤 되어서 속기사가 층계를 뛰어 내려와 나에게 “‘러셀’ 형님이 서재에서 형님을 좀 뵙겠다고 하시는데요.”라고 말하였다. 나는 ‘무슨 일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오전에 서재에서 만나자고 할 때는 뭔가 중대한 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맥밀란’ 형제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내가 서재로 갔더니 그는 ‘형님, 들어오십시오. 응접실로 들어가시지요’라고 말했다. 그곳은 서재와 붙어있는 곳이었다. 그는 ‘형님은 진리에 처음 들어 오실 때와 똑같이 지금도 진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놀라지 마십시오. 그것은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자기의 건강 상태를 설명하였다. 나에게는 어느 정도 의학지식이 있었으므로 어떤 구제책이 없다면 그가 여러 달을 넘기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자, 이제, 제가 형님께 말씀드리고자 한 것은 이러한 점입니다. 저는 더 이상 이 일을 계속 수행해 나아갈 수가 없읍니다. 그렇지만 해야 할 거대한 일이 있읍니다. ···’
“‘나는 ‘러셀’ 형님이 말씀하신 점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이치적인 것 같지도 않습니다’ 하고 말했다.
“‘형님, 무슨 말씀이시지요?’ 하고 그는 물었다.
“‘형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이 일이 계속 될까요? 사실 형님이 돌아가시면 우리는 팔짱이나 끼고 흡족한 마음으로, 형님과 함께 하늘로 가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때에는 우리의 일은 끝날 것입니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는 말하기를 ‘형님, 형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중요한 점을 잊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사업이 아닙니다. 이 사업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제가 아닙니다. 빛은 점점 더 밝아지고 있읍니다. 앞에는 거대한 사업이 놓여 있읍니다.’ ···
“앞에 놓인 사업을 대략 설명한 후 ‘러셀’ 형제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제가 바라는 것은 내 뒤를 이어 그 책임을 맡을 사람이 있으면 하는 것입니다. 아직은 제가 그 사업을 감독하겠읍니다. 그러나 제가 전과 같이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사람에 대해 토론하였다. 결국은 내가 그곳을 나와, 미는 문을 지나서 복도로 향하고 있을 때 그는 ‘잠간만, 방에 가셔서 이 문제를 주께 말하고 ‘맥밀란’ 형님 자신이 그 임무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다시 와서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내가 아무 말도 할 사이가 없이 그는 문을 닫았다. 나는 얼마 동안 정신을 잃고 서 있었다. 이 사업에 있어서 ‘러셀’ 형제를 돕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한 일에는 사업적인 능력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곤 종교를 전도하는 방법밖엔 없다. 그러나 나는 몇 번이고 생각해 보다가 결국에는 되돌아 가서 ‘형님,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읍니다. 형님이 저에게 무슨 일을 시키시든지 저는 상관하지 않겠읍니다’라고 그에게 말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참으로 할 일이 많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시이. 티이. 러셀’은 자기의 가까운 동료들에게 수의 증가에 대처할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 그는 조직이 더 긴밀해지도록 어떠한 변경을 하였고 개인적으로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에 있어서는 장차 변경할 것을 제안하였다. ‘에이. 에이치. 맥밀란’은 사무실과 ‘벧엘’ 가정을 돌보도록 임명되었다. 그런데 1916년 가을에 가서 ‘러셀’은 급속한 건강의 쇠퇴와 심한 신체적인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계획된 강연을 위해 여행을 시작하였다.
마지막 여행
1916년 10월 16일 ‘러셀’ 형제와 그의 비서 ‘멘타 스투르지온’은 ‘뉴우요오크’을 떠나 ‘캐나다’를 거쳐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로 여행하였다. 그 다음에 그 두 사람은 ‘일리노이’ 주 ‘시카고’로 갔다가 ‘캔사스’ 시를 지나 ‘텍사스’ 주로 갔다. 그의 건강 상태는 아주 좋지 않아서 몇 번의 연설을 그의 비서가 대신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다. 10월 24일 화요일 저녁 ‘텍사스’ 주 ‘산 안토니오’에서 ‘러셀’은 “불타고 있는 세상”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마지막 공개 연설을 하였다. 그 연설 도중에 3번이나 연단을 떠나야 하였고 그 동안은 그의 비서가 대신 메꾸었다.
화요일 저녁, ‘러셀’ 형제와 함께 그의 수행원인 비서는 ‘캘리포오니아’ 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환자인 ‘러셀’은 수요일 하루 종일 침상에 있었다. 그 때 병든 ‘러셀’의 손을 잡고 그의 수행원은 “내가 보기에 이 손이야말로 신조를 타파하는 가장 위대한 손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러셀’은 그 손이 더 이상 신조를 타파할 것 같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스가랴 13:7-9에 대해 연설하였다. 그가 사용한 마지막 성귀는 민수기 6:24-26로서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 두 사람은 ‘텍사스’ 주 ‘델 리오’에서 하루를 기다렸다. 교량이 불타버려서 다른 다리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목요일 아침에 ‘델 리오’를 떠났다. 그리고 금요일 밤에 ‘캘리포오니아’에서 기차를 바꿔탔다. 토요일 온 종일 ‘러셀’은 심히 고통하였고 몹시 쇠약해졌다. 그들은 10월 29일 일요일에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하였고 ‘시이. 티이. 러셀’은 그날 저녁 거기서 회중에게 마지막 연설을 하였다. 그 때는 그가 너무 약해져서 연설하려고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제가 강력하게 혹은 힘있게 연설할 수 없어 유감입니다”고 ‘러셀’은 말하였다. 그리고는 사회자에게 연대를 치우고 의자를 가져다 달라고 몸짓하면서 “죄송하지만 앉아서 말씀드리겠읍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약 45분간 연설을 하고 나서 짧은 시간 동안 질문에 대답하였다. ‘드와이트 티이. 케년’은 그 때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1916년 10월 29일 ‘로스앤젤레스’에서 행한 ‘러셀’ 형제의 마지막 연설을 들을 특권을 가졌었다. 그는 몸이 심히 좋지 않았기 때문에 앉아서위독한 상태 때문에 강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러셀’은 나머지 연설 약속을 취소하고 급히 ‘브루클린’ ‘벧엘’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10월 31일 화요일에는 ‘시이. 티이. 러셀’의 임종이 가까왔다. ‘텍사스’ 주 ‘팬핸들’에서는 미리 전보로 부른 의사가 임시 방편으로 기차에 올라와서 ‘러셀’의 상태를 살피고 위독하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나서 기차는 다시 운행하였다. 그로부터 조금 있다 ‘텍사스’ 주 ‘팜파’에서 ‘차알스 테이즈 러셀’은 6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는데 그 때는 1916년 10월 31일 화요일 이른 오후였다.
‘여전히 하나님께서 지도하심’
‘차알스 테이즈 러셀’이 겪은 수많은 고난, 전파 활동, 저술하는 책임 및 다른 임무는 그의 체력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약 32년간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 협회장으로 일했다. 보고에 의하면 그는 공개 연사로서 백만 ‘마일’ 이상을 여행하였으며 30,000번 이상의 설교를 하였다. 그는 총 50,000면 이상에 달하는 출판물을 저술하였고 한달에 수천통의 편지를 받아쓰게 하는 일이 종종 있었으며 그 외에도 동시에 700명 이상의 연사를 사용하여 세계를 휩쓰는 복음 전파 운동을 진행하였다. 더 나아가 ‘러셀’은 ‘창조 사진극’이라는 그 당시로서 가장 교육적인 성서 사진극을 친히 제작하였다.
‘러셀’ 형제가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활동에 있어서 그러한 탁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많은 ‘성경 연구생’들은 그의 죽음을 참으로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그 다음날 아침 식사 때에 그의 사망에 대한 전문을 ‘벧엘’ 식구들에게 읽어 주자 식당 전체는 흐느끼는 오열 속에 파묻혔다”고 ‘에이. 에이치. 맥밀란’은 말하였다. 전체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는 반응이 가지각색이었다. ‘시이. 티이. 러셀’이 그의 마지막 공개 연설을 한 ‘산 안토니오’의 ‘머제스틱’ 극장에 우연히 참석하게 되었던 ‘아아든 페이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다 끝나 버렸다’고 말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여호와가 자기 백성을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한 인간을 너무 중요하게 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1916년 11월 5일 일요일에 ‘뉴우요오크’ 시 ‘템플’에서 ‘러셀’의 장례식이 있었는데 그의 가까운 많은 동료들은 참으로 큰 손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계속 충실하라는 격려도 있었다. 11월 6일 오후 2시에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어그’(‘알레게니’)에 있는 ‘카네기 뮤직 홀’에서는 별개의 식이 거행되었고, 그 날 해질 무렵에 ‘알레게니’에 있는 ‘로오즈몬트 유나이티드 세미터리’ ‘벧엘’ 가족 묘지에 안장하였다.‘뉴우요오크’ 시에서 오전에 거행된 장례식에서 ‘에이. 에이치. 맥밀란’은 ‘러셀’ 형제가 사망하기 얼마 전에 자기에게 한 말을 얘기하면서 협회 본부 활동에 관하여 ‘러셀’이 취한 조처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리고 나서 ‘맥밀란’은 특히 이렇게 선언하였다. “우리 앞에 있는 사업은 거대하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것을 행할 수 있도록 필요한 은혜와 힘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 어떤 마음 약한 일군은 우리의 추수하는 도구를 버리고 주께서 우리를 집으로 부르실 때까지 기다려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지금은 게으름 피우는 사람의 말을 들을 때가 아니다. 지금은 활동할 때 즉 이전 어느 때보다 더 확고한 결의를 가지고 활동할 때이다.”
저녁에 있은 식에서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는 자기의 연설 결론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 즉 이곳에 있는 우리와 지구상에 있는 모두는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 주와 왕을 위한 우리의 열심을 늦출 것인가? 아니다! 그의 은총으로 우리는 열심과 힘을 더 내어 우리의 행로를 기쁨으로 마칠 것이다.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주춤하지 않고 협력하여 굳게 서서 믿음을 위하여 싸우고 그의 왕국 소식을 선포하는 우리의 특권을 즐거워할 것이다.”
협회의 총무 겸 재무였던 ‘더불류. 이이. 밴 앰버어’의 말도 역시 주목할 만하다. ‘러셀’의 장례식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거대한 세계적인 사업은 한 개인의 사업이 아니다. 그러기에는 그것이 너무나 거대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업이며 변하지 않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도 많은 종들을 사용해 왔고 미래에도 많은 사람을 사용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인간이나 인간의 사업에 헌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의 말씀과 인도를 통해 우리에게 밝히시는 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헌신한 것이다.”
그 때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께 도움을 기대하였다. (시 121:1-3)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일으켜 그 조직의 주요한 책임들을 수행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전파 활동은 계속될 것이다.
여호와의 종들은 시련기를 지나왔으나 위기의 때가 그들 앞에 놓여 있었다. 1916년 10월 31일 ‘시이. 티이. 러셀’의 사망으로 ‘왙취 타워 협회’에는 회장이 없게 되었다. 1917년 1월 6일 정기총회 때까지 집행 위원회가 협회의 일을 처리하였다. 물론 그 기간 중 누가 차기 협회장이 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어느날 ‘밴 앰버어’ 형제는 ‘에이. 에이치. 맥밀란’에게 이렇게 물었다. “형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맥밀란’은 “형님이 좋아할지 싫어할지 모르지만 지금 이 사업을 책임맡을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 있는데 그는 바로 ‘러더포오드’ 형제입니다.” ‘맥밀란’의 손을 잡으면서 ‘밴 앰버어’ 형제는 “저도 형님과 같은 생각입니다”고 말했다.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는 이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으며 표를 얻으려고 선거 운동을 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1917년 1월 6일 협회의 정기총회에서 그는 지명되어 ‘왙취 타워 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새로운 책임을 맡게 되자, 겸손하게도 ‘러더포오드’ 형제는 그에 대한 간단한 연설로 동료 신자들에게 “연합된 기도와 깊은 동정심과 절대적인 협조”를 요청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그분이 계속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담대한 마음과 자진적인 정신과 기꺼이 일하는 손을 가지고 언제나 주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인도를 위하여 그분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우리를 인도하여 확실히 성공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사랑의 거룩한 띠로 연합하여 그분께 대한 우리의 서약을 새롭게 함으로써 ‘하늘의 왕국이 가까왔다’고 세상에 선포해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러더포오드’의 배경
‘러더포오드’는 진리를 위한 담대한 투사였다. 그는 1869년 11월 8일 ‘미주리’ 주 ‘모어건’ 군에서 침례교인인 양친 사이에 태어났다. ‘조셉 프랭클린 러더포오드’의 친 누나였던 ‘로스’ 자매를 통해 ‘에이. 디이. 쉬로오더’는 이러한 점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그 가족이 사는 ‘미주리’ 주의 충실한 침례교인이었다. 그 자매의 남동생 ‘조셉’은 침례교에서 가르치는 ‘지옥불’ 교리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로 인해 그들이 진리를 알기 전에도 가족 내에서 종종 열띤 논쟁이 벌어지곤 했다. 그 자매의 동생은 항상 깊은 정의감과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젊어서부터 그는 법률가나 판사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들의 아버지는 그가 법률 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에 가는 것보다 농장에 있어 주기를 더 바랐다. ‘조셉’은 자기 대신 아버지의 농장을 돌볼 사람을 고용할 비용과 법률 공부하는 데 드는 비용을 빌려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만 했다.”
‘조셉 러더포오드’는 고학을 하였다. 특히 그는 속기사가 되었는데, 그러한 기술은 후일에 성서적인 기사와 다른 자료에 대하여 자기의 생각을 빨리 기록하는 데 아주 유용하게 되었다. 아직 재학 중에 ‘조셉 러더포오드’는 법원의 속기사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재학시의 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으며 이것은 그에게 산 경험이 되었다. 전문 교육을 마친 후 ‘러더포오드’는 ‘이이. 엘. 에드워드’ 판사의 지도 아래서 2년을 보냈다. ‘조셉 러더포오드’는 20세에 ‘미주리’ 주 제14순회 재판구 법원 서기가 되었다. 22세가 되었을 때는 ‘미주리’ 주에서 변호사 자격을 얻게 되었다. ‘쿠퍼’ 순회 재판소의 기록에 의하면 1892년 5월 5일에 ‘미주리’ 주에서 변호사 개업 인가를 받았다. ‘드래픈’과 ‘라이트’의 법률사무소의 심리 변호사로 ‘미주리’주
‘부운빌’에서 변호사 일을 시작하였다.후에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는 ‘미주리’ 주 ‘부운빌’에서 4년 동안 검사로 일하였다. 그 후에 동일한 ‘미주리’ 주 제 14 재판지구에서 임시 판사가 되었다. 그 자격은 정식 판사가 개정할 수 없을 때, ‘러더포오드’가 대리 판사로 일하는 것이었다. 법정 기록에 의하면 누차 임시 판사로서 임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가 ‘러더포오드’ “판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해이즐’과 ‘헬렌 크룰’은 어떻게 처음에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가 여호와의 종들이 선포하는 진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가 하는 그 자신의 얘기를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이런 이야기를 해 준다. “‘러더포오드’ 형제가 방문을 했을 때 한 번은 달이 밝은데 정원으로 산보나 가자고 제의했다. 우리는 걸으면서 그 자신의 어린 시절과 다음에 어떻게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에 관해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농장에서 자랐으나 법률 공부를 하고 싶었다. 아버지는 농장을 돌보는데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으나 결국에는 돈을 벌어 학교에 다니고 또 자기 대신 농장 일을 도울 사람에게 드는 비용을 댈 수 있다면 그렇게 하라고 승락하였다. 여름 방학 때 그는 자신이 동의한 조건을 지키기 위해 서적 판매를 하였다. ··· 그는 자기가 변호사 개업을 했을 때 누구든지 서적을 판매하려고 사무실에 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책을 사주리라고 자신에게 다짐하였다. [1894년에] 그러한 날이 왔다. 그러나 방문한 부인과 얘기하고 있는 사람은 동료 변호사였다. 그 부인은 ‘콜포처’였는데—‘엘리자베드 헤덴바우’—세권의 「천년기 새벽」을 제시하였다. 그의 동료는 관심이 없어 그 부인[과 그의 동료 ‘콜포처’인 ‘비일러’ 자매]을 내보냈다. 자기 개인 사무실에서 나오다가 책에 대해 무심코 듣게 된 그는 자기가 옛적에 결심했던 바를 기억하고 그 부인을 불러 책을 사서 그 책들을 자기 집 서재에 두게 되었고, 한 동안 보지 않았다. 병에서 몸이 좀 회복되어 가고 있던 어느날 그는 그 책들 가운데 한 권을 펴서 읽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일생 동안 지속된 관심과 하나님께 대한 끊임없는 헌신과 봉사의 시작이 되었다.”
‘성경 연구생’들의 집회가 ‘러더포오드’ 집 근처에서는 열리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클래런스 비이. 비이티’는 이렇게 말한다. “1904년부터는 우리집에서 집회가 열렸다. ‘러더포오드’ 자매와 ‘러더포오드’ 판사는 ‘미주리’ 주 ‘부운빌’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왔다. ··· 그는 처음으로 기념식에 참여하였고 우리 집에 모인 벗들에게 처음 순례 연설을 하였다. ··· 그들 외에는 ‘부운빌’에서 진리 안에 들어온 사람이 없었다.”
그러면 어떻게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가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시작했는가? 그 점에 있어서는 ‘에이. 에이치. 맥밀란’이 큰 역할을 하였다. ‘맥밀란’은 1905년 ‘러셀’ 형제와 미합중국 전역을 다니던 중 ‘캔사스’ 시에서 ‘러더포오드’를 만났다. 얼마 후에 ‘맥밀란’ 형제는 하루 이틀 ‘러더포오드’ 판사를 방문하기 위해 시간을 내었다. 그들 사이에 있던 대화의 한 장면은 이러하였다.
“판사님, 당신은 이곳에서 진리를 전파해야만 합니다.”
“저는 전파자가 아닙니다. 저는 법률가입니다.”
“그렇지요 판사님, 이제 저는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알려 드리겠읍니다. 당신은 가셔서 성서 한 권을 구하고, 조그만 집단의 사람을 모아 그들에게 생명, 죽음, 그리고 내세에 관하여 가르치십시오. 그들에게 우리가 생명을 어디에서 얻었으며 왜 우리가 죽게 되었는지, 죽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 주십시오. 성귀를 증인으로 생각하고 당신이 법정 심문에서 배심원에게 하는 것처럼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것이 그렇게된 것입니다.’라는 말로써 납득하도록 끝맺으십시오.”
“그럴듯 하군요.”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러더포오드’는 그 충고와 관련해서 어떻게 하였는가? ‘맥밀란’ 형제는 이렇게 보고하였다. “그 도시 변두리 근방에 있는 그의 집 가까이에 작은 농장에서 일하는 흑인이 있었다. 15명 내지 20명 가량의 흑인이 거기 있었는데 그들에게 가서 ‘생명, 사망 및 내세’에 관한 설교를 하였다. 그가 말하고 있는 동안에 그들은 계속 ‘판사님이 주를 찬양하다니! 어디서 그 모든 것을 배우셨읍니까?’라고 말하였다. 그에게는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그것은 그가 해 본 최초의 성서 강연이었다.”
그후 얼마 있지 않아 1906년에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헌신을 상징하였다. ‘맥밀란’ 형제는 이렇게 기술한 바 있다. “나는 ‘미네소타’ 주 ‘세인트 폴’에서 그에게 침례를 베풀 특권을 가졌었다. 그는 그날 내가 물의 침례를 준 144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협회장이 되었을 때 나는 특히 기뻐했다.”
1907년에 ‘러더포오드’는 ‘왙취 타워 협회’의 법률 고문이 되어 ‘피츠버어그’ 본부에서 일하였다. 그는 1909년 협회를 ‘뉴우요오크’ ‘브루클린’으로 이전할 때 일을 처리할 특권을 받았다. 그 일을 위하여 그는 ‘뉴우요오크’ 변호사회에 가입 신청을 내었고 마침내 그 주에서 승인하는 변호사가 되었다. 같은 해 5월 24일 ‘러더포오드’는 미합중국 대법원 변호사로 개업할 수 있는 승인을 받았다.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는 ‘왙취 타워 협회’의 여행하는 대표자인 ‘순례자’로서 자주 연설하였다. 그는 성서 강연자로서 미합중국을 널리 여행하였으며 요청을 받고 많은 대학교에서 연설하였으며, ‘유럽’ 전역에 걸쳐서도 많은 청중에게 연설하였다. ‘러더포오드’는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을 방문하고, 1913년에는 부인을 동반하고 독일에 여행하여 총 18,000명의 청중에게 연설하였다.
그의 특성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추종자들은 다 “형제”고 ‘그들 중에 큰 자는 그들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마태 23:8-12) 그러므로 참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동료 신자일지라도 과도하게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의 여러 종들의 특성을 알려 주고 있다. 예를 들어 ‘모세’는 온유하기로 유명하였고 ‘세베데’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불같은 열성으로 유명하였다. (민수 12:3; 마가 3:17; 누가 ) 하나님의 지적 조직에 대한 큰 책임이 ‘조셉 에프. 러더포오드’에게 맡겨졌기 때문에 그의 특성을 살펴보는 것은 상당히 흥미있는 일이다. 9:54
‘에이. 에이치. 맥밀란’은 이렇게 얘기한 바 있다. “‘러더포오드’는 항시 동료들에 대한 깊은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타내었으며 또한 아주 다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천성적으로 ‘러셀’과 같이 점잖고 조용한 기질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직접적이고 솔직하며 자기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친절하게 얘기할 때도 그의 무뚝뚝함 때문에 때때로 오해를 받았다. 그러나 그 일에 적합한 사람으로 주께서 선택하셨음이 분명해지자 얼마 있지 않아 협회장이 되었다.”
1924년 4월 18일에 ‘러더포오드’가 ‘성경 연구생’들의 낯익은 ‘런던’ 장막에서 기념식 연설을 했을 때 일어난 일을 보면 그의 성품을 더 잘 알 수 있다. 그에 관하여 ‘윌리암 피이. 히드’ 자매는 이렇게 기술한다. “그 장막은 협회가 싼 값으로 구입한 낡은 감독 교회 건물이었으며 오늘날 우리가 왕국회관을 사용하는 것처럼 일요일 집회를 위하여 그곳을 사용하였다. ... 연사가 설 장소는 바닥에서 6‘미터’ 이상 높이 솟아 있었다. 청중에게 연설하려면 청중은 다만 그의 머리만 볼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러더포오드’ 형제가 그것을 ‘말 여물통’이라고 부른 것 같다. 그는 거기서 연설하기를 원치 않았다. 사실상 그는 내려와 형제들이 있는 바닥에서 연설함으로써 형제들을 놀라게 하였다.”
‘러더포오드’ 형제는 처음 ‘왙취 타워 협회’의 회장직을 맡을 때는 담대함, 성실성, 그리고 확고한 결의가 필요하였다. 그는 그러한 특성을 나타내었다. 예를 들어 ‘에스더 아이. 모리스’는 그 당시 ‘아이다호’ ‘보이스’의 가장 큰 극장에서 ‘순례자’로서 많은 청중에게 행한 ‘러더포오드’의 연설을 회상하고 있다. 그 자매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거짓 종교를 폭로하기 때문에 그 지방의 몇몇 교직자들이 분노를 나타내게 되었다. 그들은 그의 연설을 못하게 방해하고 이의를 제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강력하게 ‘앉으십시오. 법적인 보호를 요청하겠읍니다.’고 말함으로써 연설을 계속할 수 있었다. ‘성경 연구생’들이 인접한 소도시들에서 왔었고 우리는 장소를 빌려 조그만 대회를 열었다. 그는 이 소식과 봉사가 작은 일이 아님을 역력히 강조하였다.”
‘애너 엘스돈’의 말을 들어 보면, 다소 사람을 감동시키는 ‘러더포오드’ 형제의 기질을 알아볼 수 있다. 그 자매는 자기가 어렸을 때를 회고하면서 이렇게 기술한다. “우리는 여러 번 ‘러더포오드’ 형제를 만나 얘기했다. 한번은 우리 어린이들 몇이 함께 모였는데 ‘러더포오드’ 형제가 우리에게 왔다. 우리는 학교나 국기 경례 등에 관해 많은 질문을 하였고 그는 오랫 동안 우리에게 얘기하였다. 작별 인사를 해야 할 때 자기의 큰 손으로 우리 다섯 사람 모두의 손을 인자하게 잡았고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아주 어렸지만 진리의 깊은 것들에 관해 얘기하는 우리를 보고 그는 참으로 즐거워하였으며 감동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것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러셀’ 형제가 인자했던 것과 같이 우리는 그 거구의 ‘러더포드’ 형제에게서 사랑을 느꼈다.”
사업이 계속되다!
‘러더포오드’ 형제는 왕국 전파 사업을 강력히 밀고 나아갈 결심을 하였다. 여호와의 성령의 인도 아래 ‘성경 연구생’들은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기 위해 대대적인 운동을 전개해 왔다. 사실 1870년부터 1913년까지 그들은 228,255,719매의 전도지와 ‘팜플렛’ 그리고 6,950,292부의 서책을 전하였다. 특기할 만한 해인 1914년 한 해에 여호와의 종들은 71,285,037매의 전도지와 ‘팜플렛’ 그리고 992,845부의 서책을 전하였다. 그러나 1915년과 1916년에는 제 1차 세계 대전의 확전과 더불어 교통 및 통신이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파 활동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지만 1917년에 그 사업은 다시 증가 추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새로운 협회장은 ‘브루클린’에 있는 본부를 신속히 재조직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야외 활동에 활기를 다시 불어 넣도록 조처를 취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와 그가 촉진시킨 계획은 ‘시이. 티이. 러셀’이 이미 시작하였던 것들이다. 협회의 대표자들인 순례자들의 수가 69명에서 93명으로 증가하였다. 가끔 일요일에 교회 앞에서 그리고 정기적으로 호별 방문에서 행하였던 무료 전도지 배부가 가속화되었다. 4면으로 된 새로운 전도지 「월간 성경 연구생」이 발행되어 1917년 한 해에 28,665,000매가 무료로 배부되었다.
‘시이. 티이. 러셀’의 사망 전에 시작되었던 새로운 활동 역시 촉진되었다. “양치는 일”이라고 불리운 그 활동은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이 지금 하고 있는 재방문의 전신이었다. 이 활동이 ‘러셀’ 당시에는 자진해서 그를 자기들의 인도자로 선출한 약 500개의 회중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 회중들에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러셀’은 그 일을 “공개 집회나 ‘극’ 상연에서 그리고 ‘콜포처’의 기록 등에서 얻을 수 있는—종교 문제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어 보이거나 다소 진리에 순응할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의—주소를 통해 다시 찾아가 보는 중요한 일”이라고 묘사하였다.
그러한 일에 관심을 가진 회중 내의 여자들은 자기들 중의 한 사람을 지휘자로 다른 한 사람을 총무로 선출하였다. 한 도시를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 각 자매들에게 배당해 주게 되고 그들은 자기가 받은 명단대로 모든 관심자를 방문하였다. 방문해서 책을 빌려 주었으며 빌린 사람들은 그것을 읽고 연구하였다. ‘에스더 아이. 모리스’는 “그것은 무료 대부였으므로 아무도 ‘돈이 없다’고 핑계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방문을 마치게 될 때 집주인에게 그 지역에서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도형 강의가 곧 있을 것을 알려 주고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참석하라고 권고했다. 참석한 개개인을 그 후에 잇따라 방문하여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제목을 가진 「성경 연구」 제 1권으로 연구를 시작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그 계획의 목표는 사람들을 “반”으로 모으는 것이었는데, 먼저 도형 강의를 듣고 나중에 “‘베뢰아’ 반”이라고 불리운 정규적인 모임을 형성하게 되었다.—사도 17:10, 11.
새로운 협회장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는 전파사업을 강화하기 위해
다른 조처를 취하였다. ‘콜포처’ 봉사가 확장되었다. 그래서 총계 373명이었던 ‘콜포처’가 461명으로 증가되었다.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협회는 「게시판」이란 인쇄물을 1917년 초에 발행하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본부에서 나오는 정기적 봉사 지시가 들어 있었다. 나중에 1922년 10월 이후로는 ‘성경 연구생’들 전체가 「게시판」지를 매달 사용하게 되었다. (나중에 그 명칭을 “지휘자”로, 그 다음에 “통보”로, 그 후에 “왕국 봉사”로 불리우게 되었다.) ‘에이치. 갬빌’ 자매는 때가 되자 “「게시판」지에 ‘권고’라는 증거 재료가 마련되어 야외 봉사에서 그것을 사용하도록 암기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나의 시누이는 ··· 그 한 마디, 한 마디를 정확하게 외우려고 이방 저방으로 나를 따라 다니면서 외웠다. 시누이는 그렇게도 그것을 그대로 외우려고 했다”고 말한다. 「게시판」지에 준비된 증거 재료가 실려 있던 사실을 회고하면서 ‘엘리자베드 엘로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것을 매우 고맙게 여겼다. 왜냐 하면 그 때는 지금처럼 효과적인 전도인이 되도록 훈련시키고 돕기 위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같이 가는 그런 마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소식이 꼭 같이 전파되게 되었다.”활동을 재정상화하기 위한 운동이 계속되어 가면서 1917년에 새로운 협회 집행부는 또 다른 조처를 취하였다. 예를 들어 상당수의 지방적인 대회를 열었다. 그런 대회들은 ‘성경 연구생’들이 열심히 활동하고 선을 행하다 피곤하지 않도록 격려하기 위해 계획되었다.
1914년이 되기 직전에 ‘시이. 티이. 러셀’은 공개적인 연설 계획에 역점을 두었다. 이제 더 자격을 갖춘 연사들이 공개적인 연단에서 ‘왙취 타워 협회’를 대표할 수 있도록 마련할 때가 되었다. 어떻게 그러한가? ‘브이. 디이. 엠’(V. D. M)이란 마련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라틴’어 (Verbi Dei Minister)의 약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봉사자”라는 의미이다. 이 계획은 ‘성경 연구생’들의 회중과 연합한 남녀들에게 설문용지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여기에 ‘브이. 디이. 엠’ 설문용지에 나온 몇가지 질문을 뽑아 보자. 당신은 이 질문들에 얼마나 잘 대답할 수 있는가? (1) 하나님께서 첫째로 창조하신 것은 무엇이었는가? (4)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내리시는 형벌은 무엇인가? 그리고 누가 죄인인가? (6) 유년기로부터 죽기까지 인간 그리스도 예수는 어떠한 존재였는가? (7) 부활하신 후 예수는 어떠한 분이신가? 그리고 여호와와 관련된 그의 직책은 무엇인가? (13) 메시야 왕국에 순종할 때 인류 세상에 오게 되는 상과 축복은 어떠한 것인가? (16) 당신은 죄에서 돌아서서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가? (17) 당신은 생명과 모든 능력과 재능을 주와 그의 봉사에 온전히 바쳤는가? (18) 그러한 헌신을 물의 침례로 상징하였는가? (22) 남은 여생을 계속 더 효과적인 주의 종이 되기 위해 당신에게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성서 지식이 있다고 믿는가?
협회의 ‘브이. 디이. 엠’부에 대답을 제출한 사람들은 그 대답에 관련해서 “상당히 친절한 제안과 ‘힌트’”를 포함한 회답을 받았다. 특히 개개인이 질문에 대하여 자기 말로 대답하는 것이 바람직하였다.
그 문제를 좀 더 설명하면서 ‘조오지 이이. 해넌’은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한 질문들은 개개인이 성서의 기본 교리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지를 알려주는 지표가 되었다. 85점을 맞은 헌신한 사람은 누구나 가르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형제들은 모두가 공개 강연과 도형 강의를 할 자격이 있었다. 그런 질문은 협회와 연합한 모두가 「성경 연구」 6권을 읽고 모든 참조 성귀를 찾아 보도록 격려하였다.”
이처럼 ‘왙취 타워 협회’의 새로운 회장으로서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는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사업을 가속화하기 위해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였던 것이다. 축복이 뒤따랐다. 1917년에 야외 활동이 증가되어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을 돌렸다.
‘너희 가운데 있는 불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하지만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가 협회장으로 선출된 것을 조직 내에 있는 모두가 기뻐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1917년 초를 기점으로 해서 협회의 집행권을 쟁취하려고 한 야심에 찬 몇몇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아주 비협조적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불같은 시험 기간이 시작되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적인 반대자들로부터의 박해와 반대를 기대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조직 내에서 비롯된 시련은 예기치 않은 것이며 참기가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러한 모든 곤란을 견디어 낼 수 있다. ‘베드로’는 동료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너희 가운데 있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베드로 전 4:12, 13.
여호와와 그의 “언약의 사자”인 예수 그리스도는 1918년에 영적 성전을 검열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 때 “하나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되었고, 연단하고 정결케 하는 기간이 시작되었다. (말라기 3:1-3; 베드로 전 4:17) 다른 일도 역시 일어났다. “악한 종”의 특성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나와서 그들의 동료 종들을 상징적으로 ‘때리기’ 시작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자들을 어떻게 다루실 것인지 예언해 놓으셨다. 동시에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 반열이 영적 양식을 나눠 주는 것도 눈에 띄게 될 것이라고 알려 주셨다.—마태 24:45-51.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누구인가 하는 점은 그 당시 상당히 관심을 끄는 문제였다. 그보다 훨씬 전인 1881년에 ‘시이. 티이. 러셀’은 이렇게 기술하였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각 지체는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간에 믿음의 가족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공급하는 복된 사업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 주로부터 그 집 사람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줄 자는 누구인가? 그 종은 충실하게 헌신의 서약을 지키고 있는 하나님의 종들로 이루어진 ‘적은 무리’ 즉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가? 그리고 그 종은 믿음의 식구에게 때를 따라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양식을 공급하고 있는 전체적 그리스도의 몸 즉 여러 신자들의 집합체가 아닌가?”
그러므로 영적 양식을 나눠 주도록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종”은 한 집단이라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시이. 티이. 러셀’ 개인이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로 인해 어떤 사람들은 피조물 숭배의 올무에 빠지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밝히시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 모든 진리가 ‘러셀’ 형제를 통하여 제시되었으므로 더 이상 발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애니 포건시’는 이와 같이 쓰고 있다. “그러한 일로 인하여 ‘러셀’의 업적에 고착하여 있으려는 사람을 대규모로 골라내게 하였다.” ‘러셀’ 개인이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라는 잘못된 생각은 1927년 2월에 완전히 사라졌다.
‘러더포오드’ 형제가 ‘왙취 타워’ 협회장이 된지 얼마 안되어 곧 실질적인 음모가 나타났다. 아래의 설명과 같이 반역의 씨앗이 심어지고 그후에 고난이 더해지게 되었다.
‘시이. 티이. 러셀’은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에 있는 ‘성경 연구생’을 강화시키기 위해 본부에서 누군가를 파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의 진리를 받기 전에 유대교를 버리고 ‘루터’교 교역자가 되었던 유대인 ‘폴 에스. 엘. 존슨’을 파견하고자 했다. ‘존슨’은 협회의 여행하는 연사로 일하였고 그의 재능으로도 잘 알려진 사람이었다. ‘러더포오드’가 회장으로 선출되기 전에 짧은 기간 동안 일한 바 있는 집행 위원회는 ‘러셀’의 의견을 존중해서 ‘존슨’을 영국에 파견하였으며 그 나라에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확실한 신분증명서를 해 주었다. 영국에서 사업에 관해 모든 사실을 알아보고 협회에 온전한 보고를 하는 것이 그의 임무이고 영국 본부의 인사 문제에는 변경을 가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16년 11월 중 영국에서 받은 환영으로 인하여 결국 그의 판단과 그의 생각이 비뚤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에이. 에이치. 맥밀란’이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자기가 예수의 ‘므나’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청지기’라는 우스꽝스러운 결론에 도달할 지경이 되었다. 후에는 자기가 세상의 대제사장이라고 생각하였다.” 영국 전역에서 ‘성경 연구생’들에게 행한 연설 가운데 ‘존슨’은 자기를 ‘러셀’의 후계자로 자처하였다. ‘엘리야’의 외투(“정복”)가 ‘엘리사’에게 주어졌던 것처럼 ‘패스터 러셀’의 외투가 자기에게 주어졌노라고 주장하였다.—열왕 하 2:11-14.
‘존슨’의 야망은 그 전에 이미 생겨났었음이 분명하다. ‘에디스 케슬러’는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1915년 나는 ‘벧엘’을 떠나 ‘애리조나’로 출발하기 전에 오랫 동안 사귀어온 정다운 한 부부를 방문하였다. 내가 거기 있을 때 그들은 순례자인 ‘피이. 에스. 엘. 존슨’을 개인적으로 대접하고 있었다. ‘사단’은 이미 어떤 방법으로든지 주도권을 쟁취코자 추하고도 음흉한 태도를 나타내고 있었다. ‘존슨’은 “여러분과 같이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거실로 가실까요?”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그렇게 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을 시작하였다. “자매님, ‘러셀’ 형제가 언젠가는 사망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읍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을 때 벗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읍니다. 제가 그 대신 나서서 사업을 결코 중단하지
않고 곧 바로 떠 맡을 수 있읍니다.”영국에 있는 동안 ‘존슨’은 영국이라는 활동무대를 완전히 자기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였으며 심지어는 ‘런던’ 본부의 어떤 성원들을 쫓아내려는 권한 밖의 일을 하려고 하였다. 너무나 큰 혼란이 생겨났으므로 지부 감독자는 ‘러더포오드’ 형제에게 불만을 호소하였다. 이번에는 ‘러더포오드’가 본부 성원이 아닌 ‘런던’에 있는 몇 형제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임명하였다. 그들은 만나서 청취하였으며 사실을 잘 살피고 ‘존슨’의 소환을 추천하였다. ‘러더포오드’는 ‘존슨’에게 돌아올 것을 지시하였다. ‘존슨’은 그에 응하는 대신 위원회가 편파적이라고 비난하고 또한 자기 행로를 정당화하는 편지와 해외 전보들을 보냈다. 그는 영국에서 자기 위치를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굳히기 위해 협회가 자기에게 공급해 준 서류를 부당하게 사용하여 협회 자금을 ‘런던’ 은행에 억류시켰다. 후에 그 돈을 찾기 위해서 법정 소송을 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존슨’은 ‘뉴우요오크’로 돌아 왔는데 그곳에서도 그는 자기를 영국으로 도로 보내 달라고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를 계속 설득하려고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존슨’은 ‘러더포오드’가 그 직책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협회장이 되어야만 한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이사회에 영향을 주려고 하였다. ‘러더포오드’ 형제가 회장으로 부적합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존슨’은 7명의 이사들 중 4명을 설득하여 자기를 편들게 하였다. 그 의견을 달리하는 네 명의 이사들은 협회장, 부협회장, 총무겸 재무에 대항하였고 회장에게서 집행권을 빼앗으려고 하였다.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는 반대자들과 회합하여 그들에게 이치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였다. ‘에이. 에이치. 맥밀란’은 ‘러더포오드’가 “우리들 몇 사람에게 와서 ‘내가 회장직을 사임하고 반대자들이 책임을 맡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묻기까지 하였다”고 알려 준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모두는 ‘형님, 형님을 현 위치에 두신 분은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사임하거나 물러나는 것은 주께 대한 불충성이 될 것입니다.’고 대답하였다. 더 나아가 사무 요원들은 그 반대자들이 관리하게 된다면 자기들은 물러나겠다고 하였다.”
1917년 장시간에 걸친 협회의 정기총회에서 의견을 달리하는 4명의 이사는 협회의 내부 규정을 수정하자는 결의안을 제출하려 하였다. 그것은 집행권을 이사회의 권한에 두려는 속셈이었다. 그것은 ‘러셀’ 형제가 회장이었을 당시 행해진 조직적인 마련 및 회원들이 원하는 것과는 상치되는 것이었으므로 ‘러더포오드’는 그 동의안을 파기하였고 그러한 계략은 좌절되었다. 그후 반대가 더 심해졌으나 반대자들이 예기치 못한 몇 가지 사태 발전이 있었다.
“종말을 고한 비밀”
협회장으로서의 집행기간 전체를 통해 ‘러셀’ 형제는 부협회장과 총무겸 재무이사와 함께 새로운 출판물에 관한 결정을 내렸었다. 이사회 전체와
상의하는 일이 없었다. ‘러더포오드’는 같은 방침을 따랐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협회의 그 세 임원은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차알스 테이즈 러셀’은 「천년기 새벽」 즉 「성경 연구」 6권을 저술하였고 제 7권의 저술에 관하여 종종 언급하였었다. “내가 해결의 열쇠를 발견하면 제 7권을 쓰겠다. 그리고 주께서 그 해결의 열쇠를 다른 어떤 사람에게 주신다면 그가 그것을 저술할 것이다”고 그는 말하였었다. 협회의 그 임원들은 두 명의 ‘성경 연구생’ 즉 ‘클레이튼 제이. 우드워드’와 ‘조오지 에이치. 피셔’로 하여금 「계시록」, 「아가」, 「에스겔」에 관하여 해설한 책을 편집하도록 마련하였다. 공동 편집인들은 ‘러셀’ 형제의 기록에서 자료를 모아 “종말을 고한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성경 연구」 제 7권을 출판하였다. 주로 ‘시이. 티이. 러셀’의 생각과 해설을 싣고 있었으므로 그것은 “‘패스터 러셀’의 사후 작품”이라고 일컬어졌다.
1917년 중간쯤이 그 새 책을 발표할 때였다. 그 의미심장한 날은 7월 17일이었다. ‘마아틴 오우. 보우윈’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브루클린’ ‘벧엘’] 식당에서 당번으로 일하고 있었을 때 전화가 울렸다. 우리는 점심 식사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전화기에서 가장 가까이 있었으므로 전화를 받았다. 상대는 ‘러더포오드’ 형제였다. ‘누가 거기 형님과 같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루이스’가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자기 서재로 빨리 와 달라고 하면서 ‘‘노크’는 안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우리에게 책 한 더미를 주면서 한 권씩 각 자리에 놓되 점심 식사를 위해 가족들이 도착하기 전에 그렇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곧 이어 식당은 ‘벧엘’ 가족으로 가득찼다.
‘보우윈’ 형제는 이렇게 계속한다. “평상시와 같이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가 끝났다. 바로 그 때 일이 시작되었다! ··· ‘피이. 에스. 엘. 존슨’을 선두로 하여 ··· 친애하는 ‘러더포오드’ 형제를 반대하는 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큰 소리로 악의적인 비난을 퍼부으면서 그들은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더니 ‘러더포오드’ 형제의 식탁에 멈추어 그를 향해 주먹을 휘드르면서 계속 비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모든 일이 약 5시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래서 모두가 손도 대지 않은 많은 음식과 모든 접시를 그냥 식탁에 둔 채 일어나서 힘이 없는 형제들이 식탁을 치웠다.”
이 사건으로 ‘벧엘’ 가족 중 어떤 성원들은 반대자들에게 동조하였음이 밝혀졌다. 그러한 반대가 계속 되었다면 결국 ‘벧엘’의 전체적인 운영이 붕괴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는 그 상태를 바로잡기 위해 조처를 취하였다. 협회의 법적 구조를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러더포오드’는 협회 이사회의 지위에 관하여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의 저명한 법인 전문 변호사와 상의하였다. 서면으로 전문가의 의견서를 받게 되었는데 그에 의하면 의견을 달리하는 그 네 사람은 이사회의 법적 성원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시이. 티이. 러셀’은 그 사람들을 이사로 임명하였으나 협회의 정관은 이사들이 회원들의 투표로 선출되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러더포오드’는 ‘러셀’에게, 피임 이사들은 다음 정기 총회에서 투표로 인준을 받아야
된다는 것을 말한 바 있으나 ‘러셀’은 그 단계를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피츠버어그’ 정기 총회에서 피선된 임원들만이 정당한 이사회 성원이었던 것이었다. 피임된 네 사람은 법적 이사회 성원이 아니었다. ‘러더포오드’는 고난 기간 전체를 통해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그 이사회 성원들이 반대를 중단할 것을 바라고 그것을 문제삼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들의 태도는 이사로서의 자격이 없음을 나타내었다. 정당하게 ‘러더포오드’는 그들을 해임시켰으며 4명의 새로운 이사회 성원을 임명하여 1918년 초에 있을 차기 법인 총회에서 인준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러더포오드’ 형제는 이 이사들을 그리스도인 조직에서 당장 쫓아낸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들에게 순례자의 직책을 제공하였다. 그들은 그것을 거절하였고 자진적으로 ‘벧엘’을 떠나 미합중국, ‘캐나다’, ‘유럽’ 전역에 광범위하게 연설과 편지쓰기 운동을 벌여 반대를 펴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1917년 여름 후에 ‘성경 연구생’의 많은 회중은 두 무리 즉 여호와의 조직에 충성스러운 사람들과 영적으로 졸고 반대자들의 그럴듯한 소리에 희생된 다른 사람들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후자는 비협조적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게 되었다.
주도권을 잡으려는 헛된 노력
그 당시 ‘벧엘’을 떠난 반대자들은 1917년 8월 ‘마사추우세츠’ 주 ‘보스턴’에서 개최된 ‘성경 연구생’들의 대회를 지배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 대회에 참석하였던 ‘메어리 해넌’은 이렇게 보고한다. “‘러더포오드’ 형제는 그 사람들이 이러한 노력에 대해 방심하지 않았으며 회기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어느 때고 그들이 등단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대회 기간 전체를 대회 의장으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 대회는 여호와를 찬양하는 데 완전히 성공하였으며 반대자들은 그것을 막지 못하였다.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는 반대자들이 1918년 1월 5일 법인 정기총회에서도 기회를 엿보아 주도권을 잡으려고 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사리를 따져 볼 때 전반적인 ‘성경 연구생’들이 그러한 행동을 좋아하지 않으리라는 점을 그는 확신하였다. 그렇지만 ‘성경 연구생’들이 투표로 그들의 의사를 표시할 기회를 가질 수는 없었다. 투표는 다만 법인체인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회원들만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러더포오드’는 어떻게 할 수 있었는가? 그는 여호와의 헌신한 종들 모두에게 그들의 의사를 표시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었다. 그래서 1917년 11월 1일호 「파수대」는 각 회중이 일반 투표에 참여하도록 제안하였다. 12월 15일까지 813개 회중이 투표 결과를 보고하였으며 그 결과는 투표자 11,421명 가운데 10,869명이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를 협회장으로서 지지함을 나타냈다. 또한 이 일반 투표는 1917년 7월에 조정된 충실한 이사회 전원을 지지하고 이사회 성원이라고 자칭하는 반항적인 자들이 아님을 증명해 주었다.
1918년 1월 5일 토요일 정기 총회에서 최고 득표자 7명은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 ‘시이. 에이치. 앤더슨’, ‘더불류. 이이. 밴 앰버어’, ‘에이. 에이치.
맥밀란’, ‘더불류. 이이. 스필’, ‘제이. 에이. 보네트’ 및 ‘조오지 에이치. 피셔’였다. 반대자들 중 어느 한 사람도 이사진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없었다. 협회 역원은 정당하게 선출된 이사회 성원 가운데서 선출되었는데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 ‘차알스. 에이치. 앤더슨’, ‘더불류. 이이. 밴 앰버어’가 각각 협회장, 부협회장, 총무겸 재무로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그리하여 이상 세 사람이 협회 역원으로 정당하게 선출되었다. 주도권을 잡으려는 반대자들의 시도는 완전히 실패하였다.이제 충실한 자들과 반대자들이 화해할 단계는 지나버렸다. 반대자들은 “7인 위원회”가 이끄는 완전히 별개의 조직을 구성하였다. 1918년 3월 26일에 가서 그것은 완전히 분열되었다. 그 때에 반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충실한 회중과 따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반대자들의 연합은 얼마가지 못했다. 1918년 여름 그들이 개최한 대회에서 불화가 생겨 분열이 있게 되었다. ‘피이. 에스. 엘. 존슨’은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에 본부를 둔 집단을 조직하여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한 오늘의 진리와 전령」이라는 책을 발행하였다. 그는 “지상의 위대한 대제사장”으로 자처하면서 사망시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1918년 이후 더욱 알력이 심해져 분열되어 원래 ‘왙취 타워 협회’로부터 떨어져 나간 이 집단은 결국 사분오열되어 몇몇 소소한 종파에 흡수되어 버렸다.
‘시이. 티이. 러셀’의 사망 후 몇 년 동안에 떠나간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이전 그리스도인 동료들에게 적극적인 반대를 펴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은 돌아와서 그들의 행동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다시 연합하였다. 그 때는 심한 시험의 때였다. ‘메이블 피이. 엠. 필브릭’이 다음과 같이 말한 바와 같다. “천적 상의 대열에 있었던 나의 아버지와 사랑하는 계모님이 떨어져 나간 것을 알고 나는 참으로 슬퍼하였다. 내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가를 깨닫게 되기까지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눈물도 많이 흘렸다. 왜냐 하면 면류관을 잃어버린 사람은 어느 곳에서도 생명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둘째 사망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느날 내가 기도 중에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간구했을 때 여호와께서는 나에게 큰 위안을 주셨다. 나는 갑자기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나의 그것보다 훨씬 크며 만일 그분이 그들을 생명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지 않는다면 나도 그렇게 생각할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나의 부모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의 부모와 다를 수가 없다. 그 순간부터 나는 정신의 평안을 가지게 되었다.”
그 당시 여호와의 충실한 종들로부터 이탈한 자들은 해체되어 여러 종파로 나뉘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수가 차차 감소되어 활동이 미미하게 되거나 완전히 중단되어 버렸다. 전 지구상에 좋은 소식을 전하고 제자를 삼으라고 예수께서 추종자들에게 명하신 것을 그들이 성취시키지 않았음은 분명하다.—마태 24:14; 28:19, 20.
1917년과 1918년의, 그 고난기에 참 그리스도교를 버린 사람들은 얼마나 되는가? 불완전한 세계적인 보고에 의하면 1917년 4월 5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의식에 21,274명이 참석하였다. (1918년에는 조직
내부와 외부의 어려운 사정 때문에 참석수가 집계되지 않았다.) 1919년 4월 13일의 기념식에는 부분적인 보고이지만 17,961명이 참석하였다. 불확실하긴 하지만 이 수자를 통해 볼 때 이전의 동료들과 함께 하나님의 봉사를 계속하지 않은 수는 4,000명도 채 못되었음이 분명하다.어려움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
1917년부터 1919년까지 ‘성경 연구생’들은 특히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이 선동하는 국제적 음모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성경 연구」 제 7권인 「종말을 고한 비밀」이 교직자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그 출판물이 처음 출판된지 7개월도 못되어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많은 수가 배부되었다. 협회 외부의 인쇄소들은 850,000부를 인쇄해 내는 데 바빴다. 1917년 말에 가서 그 책은 ‘스웨덴’어와 ‘프랑스’어로 나왔으며 다른 언어로도 번역이 진행되었다.
1917년 12월 30일에 새로 발행된 ‘타블로이드’판 신문지 크기의 4면 전도지 「월간 성경 연구생」 10,000,000부를 대량으로 배부하기 시작했다. “‘바벨론’의 무너짐”이라는 제목과 “하나의 전영인 고대 ‘바벨론’—그 실체인 비밀에 쌓인 ‘바벨론’—지금 그리스도교국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최종 결과” 등의 소제목이 붙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성경 연구」 제7권에서 인용한 내용과 교직자들과 관련한 아주 신랄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뒷 면에는 무너지는 벽을 그린 삽화가 있었다. 그 무너지는 벽의 돌에는 “프로테스탄트”, “영원한 고초의 교리”, “삼위일체 교리”, “사도 계승”, “연옥” 등과 같은 말이 쓰여 있었다. 그 전도지는 성경을 근거로 하여 대다수의 교직자들이 “불충실하고 충성스럽지 못하며 불의한 사람들”로서 그 당시의 치열한 전쟁과 그에 따른 큰 고난에 대해 지구상에 있는 다른 어느 집단보다 책임이 더 크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전도지 배부 운동의 일환으로써, 전도지 배부를 통해 널리 광고된 공개 강연이 바로 그날 같은 제목으로 있었다.
당신은 그와 같은 전도지를 배부하는 것을 얼마나 좋아할 것인가? ‘시이. 비이. 트베트’는 “자기가 그 특별한 날을 결코 잊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날은 매우 추운 날이었다. 그러나 내가 전하고 있는 소식은 아주 뜨거운 것이었다. ··· 나는 ‘아파트’ 문 아래로 넣어두거나 때때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직접 전해 주기 위해 그 전도지 1,000매를 가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문 밑에다 넣는 것이 확실히 더 좋았다. 그 소식은 불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반발이 터져나올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7년 후반과 1918년 초기까지는 「종말을 고한 비밀」의 배부수가 증가하고 있었다. 교직자들은 분노하여 그 책의 일부 내용은 선동적인 것이라고 허위주장을 하였다. 그들은 ‘왙취 타워 협회’를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발벗고 나섰으며 예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한 바와 같이 그들도 국가가 자기들의 손발이 되어 주기를 바랐다. (마태 27:1, 2, 20 비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교직자들은 ‘성경 연구생’들이 독일 정부의 앞잡이라고 허위 주장을 하였다. 예를 들어 ‘시카고’ 대학교 신학부의 ‘케이스’ 박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법적 대행 기관인 ‘만국 성경 연구회’가 하는 사업에 대해 이러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들은 교리를 선포하는 데 한 주에 2,000‘달러’를 사용하고 있다. 그 자금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없다. 그 출처가 독일이 아닌지 심히 의심스럽다. 그 자금의 출처를 정부가 조사해 볼 만하다고 나는 믿는다.”
“이러한 성명은 다른 몇몇 교직자들의 비슷한 비난에 자극받은 것으로서 군 정보 기관원들이 협회의 서적들을 몰수한 것과 모종의 관련이 있음이 분명하다.”고 1918년 4월 15일호 「파수대」지는 지적하였다. 그 잡지는 이렇게 계속하였다. “당국자들은 우리 협회가 독일 정부의 유익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혐의를 확정할 수 있는 어떤 증거를 발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음이 분명하다. 물론 그 책들에서 그러한 점을 하나도 볼 수 없었다. 우리 협회가 사용하는 모든 돈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왕국의 복음을 전파하는 데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기부한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협회 서적이 압수당했다는 전국적인 신문 보도는 의심을 자극시켰다.
1918년 2월 12일은 ‘캐나다’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심히 가슴 아픈 날이었다. 그때 ‘왙취 타워 협회’의 활동이 그 나라에서 금지된 것이다. 신문 발신 기사는 이러하였다. “국무장관은 출판물 검열 규칙에 의거하여 ‘캐나다’에서 몇 가지 출판물의 소유 금지령을 발하였다. 그 중에는 ‘만국 성경 연구회’ 발행, 일반적으로 ‘패스터 러셀’의 사후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성경 연구—종말을 고한 비밀」이란 책이 들어 있다. 이 협회가 ‘뉴우요오크’ ‘브루클린’ 사무실에서 발행하는 「월간 성경 연구생」 역시 ‘캐나다’에서 배부 금지되었다. 어느 것이나 금지된 서적을 소유한 자는 5,000‘달러’ 이하의 벌금과 5년 형에 처하게 된다.”
금지된 이유는 무엇인가? ‘매니토바’ ‘위니팩’에서 발행되는 「트리뷴」지는 그 점을 어느 정도 밝혀 주는데 그 보도는 이러하였다. “금지된 출판물에는 선동적이고 반전적인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주장되었다. 몇 주 전에 ‘성 스테반 교회’ 교역자 ‘차알스 지이. 패터슨’은 설교단에서 최근호 「월간 성경 연구생」의 내용에 대해 비난하였다. 그후 ‘존슨’ 검찰총장은 그 출판물을 구하기 위해 교역자 ‘패터슨’에게 사람을 파견하였다. 검열에 관한 명령은 그것의 직접적인 결과로 보여진다.”
‘캐나다’에서 교직자들이 선동한 금지가 있은지 얼마 있지 않아 국제적인 음모의 성격이 명백히 드러났다. 1918년 2월 ‘뉴우요오크’ 시에 있는 미육군 정보국은 ‘왙취 타워 협회’를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거짓 주장은 협회가 적국인 독일과 관련을 갖고 있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브루클린’에 있는 협회 본부가 독일 정부에 타전하는 곳이란 허위 보고도 있었다. 결국 신문은 정부기관이 ‘벧엘’ 집에서 사용하려고 설치한 무선 장치를 압수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진상은 어떠하였는가?
1915년 ‘시이. 티이. 러셀’은 조그만 무선 수신기를 기증받은 일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그리 관심이 없었으나, ‘벧엘’ 지붕 위에 조그만 ‘안테나’를 세워 어떤 젊은 형제들이 그 설비를 조작하는 방법을 배울 기회를 갖게 하였다. 그러나 무선 전신을 포착하는 데는 별로 성공적이 못되었다.
미합중국이 참전하게 되자 모든 무선 시설을 철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래서 ‘안테나’를 제거하고 대는 톱으로 잘라 다른 목적에 사용하였다. 기계 자체는 포장하여 협회 미술실에 보관해 두었다. 한 ‘벧엘’ 가족 성원이 두명의 육군 정보기관원과 대화 때에 그 장비에 관하여 이야기했을 때는 이미 그것은 2년 이상이나 사용하지 않은 때였다. 그들은 지붕으로 안내되어 이전에 그것이 있었던 곳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보관되어 있는 완전히 포장된 기계도 보여 주었다. 그것이 ‘벧엘’에서는 소용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양해를 얻어 그것을 가져 갔다. 기계는 송신기가 아니라 수신기 뿐이었다. ‘벧엘’에는 송신장치가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어느 곳이고 간에 송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여호와의 백성에 대한 반대와 압력은 계속 증가하였다. 1918년 2월 24일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는 ‘캘리포오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서 3,500명의 청중에게 공개 연설을 하였다. 그 다음날 아침 ‘로스앤젤레스’의 「트리뷴」지는 그 연설을 전면에 보도하였다. 그것은 지방 교직자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교역자 연합회는 월요일 오전에 회합을 갖고 자기네 회장을 신문 경영자 측에 보내서 왜 그 강연을 그렇게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는지 해명을 하라고 요청하였다. 그 다음 목요일에 육군 정보국은 ‘성경 연구생’의 ‘로스앤젤레스’ 본부를 점거하여 많은 협회 출판물을 압수하였다.
1918년 3월 4일 월요일 ‘펜실베이니아’ 주 ‘스크랜튼’에서 ‘클레이튼 제이. 우드워드’(「종말을 고한 비밀」의 집필자 한 사람)와 다른 몇몇 형제들이 체포되었다. 그들은 불법적인 모의를 했다는 거짓 혐의를 받았으며 5월에 있을 심문을 위하여 구금되었다. 더우기 협회에 대한 외부적 압력이 급증해 가면서 징집 면제가 거절되어 20명 이상의 ‘성경 연구생’들이 군수용소와 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으며 장기간의 형을 받게 되었다. 1918년 3월 14일 미 법무성은 「종말을 고한 비밀」의 배부를 방첩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규정하였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에 대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성경 연구생’들이 그리스도인 활동에 대한 반대를 교직자들이 조장하였음을 폭로해야 했다. 그리하여 1918년 3월 15일에 ‘왙취 타워 협회’는 2면으로 된 신문지 크기의 「왕국 소식」 1호를 내놓았다. 거기에는 “종교적인 편협—사람들에게 진리를 말하므로 ‘패스터 러셀’의 추종자들이 박해를 받다—‘성경 연구생’에 대한 학대는 ‘암흑시대’를 연상케 한다”는 등의 담대한 제목들이 들어 있었다. 이 전도지는 독일, ‘캐나다’ 그리고 미합중국에서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을 박해하는 것이 교직자들의 선동에 의한 것임을 낱낱이 폭로하였다. 수백만 매가 배부되었다.
흥미있게도 이 전도지에는 이러한 말이 있었다. “미합중국 정부는 정치 및 경제 조직이기 때문에 기본법에 의거하여 선전포고를 하고 시민들을 군복무에 징집할 능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인정한다.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징집이나 전쟁을 간섭하고자 하지 않는다. 몇몇 우리 성원들이 법의 보호를 받으려고 한 것이 오히려 새로운 박해의 구실이 되었다.”
「왕국 소식」 2호가 1918년 4월 15일에 나왔다. 인상적인 그 제목은 “‘종말을 고한 비밀’과 그것이 억압을 받는 이유”였다. “교직자들이 관련되어 있다”란 소제목 아래 이 전도지는 정부기관으로 하여금 협회를 괴롭히게 하고 성원들을 체포하도록 하며 「종말을 고한 비밀」을 반대하게 하고 ‘성경 연구생’들이 일부 지면(247-253)을 그 책에서 없애도록 선동한 것이 교직자들임을 밝혔다. 또한 그 전도지는 교직자들이 여호와의 종을 반대하는 이유를 설명하였으며 아울러 참 교회에 대한 여호와의 종들의 믿음과 전쟁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이 「왕국 소식」 배부와 관련해서 청원서에 대한 서명을 받았다. 미합중국 대통령 ‘윌슨’에게 보내는 청원서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아래 서명한 우리 미국 국민은 독립적 성서 연구에 대한 교직자들의 어떠한 반대도 편협적이고 비미국적인 것이며 비그리스도인적이라고 생각하며, 교회와 국가를 결합시키려는 어떠한 시도도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권리와 종교적 자유에 유익을 위하여 「종말을 고한 비밀」에 대한 억압에 대해 엄숙히 항의하는 바이며 사람들이 방해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이러한 성서 연구 보조 서적을 사고 팔고 소유하고 읽을 수 있도록 그 책의 사용에 관한 모든 제한을 철회하도록 정부 당국에 청원하는 바입니다.”
「왕국 소식」 첫 호가 나온지 약 6주 되는 날인 1918년 5월 1일에 「왕국 소식」 제 3호가 발표되었는데 거기에는 “치열한 두 개의 큰 전쟁—독재정치의 패망이 확실함”이라는 제목과 “‘사단’의 술책은 실패하게 되어 있음”이라는 소제목이 들어 있었다. 그 전도지는 약속의 씨와 ‘사단’ 마귀의 씨가 서로 대적하는 점을 다루었다. (창세 3:15) 그것은 적그리스도의 처음 탄생부터 그 당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교직자의 행동에 이르기까지 적그리스도의 발전상을 추적하여 설명하였다. 그 전도지는 마귀가 지상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름부음받은 추종자들의 남은 자를 멸망시키려고 어떻게 그러한 대항자들을 사용하는지를 담대하게 밝혔다.
그 당시 출판된 「왕국 소식」을 배부하는 데는 담대함이 필요하였다. 어떤 ‘성경 연구생’들은 체포당하였다. 「왕국 소식」 전도자들이 임시적으로 몰수되는 일이 가끔 있었다. 여호와의 종들은 자신들이 반대와 박해의 시련 가운데 처하게 되었지만 하나님께 대한 충실을 계속 유지하였으며 그리스도인 활동을 계속하였다.
잔악한 일들이 자행되다
교직자와 평신도들의 반대가 점증해 가면서 여호와의 종들에 대한 잔악 무도한 일들이 자행되었다. 후에 ‘왙취 타워 협회’가 발행한 출판물에는 ‘성경 연구생’들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박해를 받은 데 대한 부분적인 보고가 게재되었는데 그 일부는 이러하다.
1918년 4월 12일 ‘오리곤’ 주 ‘메드포오드’에서 ‘이이. 피이. 탤리어페로’는 복음을 전하였다는 이유로 폭도들을 만나 마을 밖으로 쫓겨났으며 ‘조오지 알. 메이나아드’는 자기 집에서 성서 연구를 하게 했다는 이유로 옷을
벗기고 ‘페인트’칠을 당하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1918년 4월 17일 ‘오클라호마’ 주 ‘쇼오니’에서는 ‘지이. 엔. 펜’, ‘조오지 엠. 브라운’, ‘엘. 에스. 로저스’, ‘더불류. 에프. 글래스’, ‘이이. 티이. 그라이어’ 및 ‘제이. 티이. 툴’이 투옥되었다. 심문 중에 검찰관은 ‘성경을 집어쳐! 지옥에나 가서 고생할 놈들, 네 놈들은 교수형에 처해야 마땅해!’라고 욕하였다. ‘오클라호마’ 시에 사는 ‘지이. 에프. 윌슨’이 피고들을 위해 변호하려 했다가 그도 역시 체포되었다. 각자는 55‘달러’의 벌금과 소송 비용을 지불해야 하였다. 죄명은? ‘프로테스탄트’ 인쇄물을 배부했다는 것이다. 심리 판사는 심리에 잇따라 폭도들의 난동을 격려했으나 폭도들은 실패하였다.
1918년 4월 22일 ‘텍사스’ 주 ‘킹스빌’에서 ‘엘. 엘. 데이비스’와 ‘대니얼 투울’은 시장과 판사를 선두로 하는 폭도들에 쫓겨 영장도 없이 구속 감금되었다. ‘데이비스’는 강제로 실직당하였다. 1918년 5월 ‘오클라호마’ 주 ‘테쿰세’에서 ‘제이. 제이. 메이’는 체포되어 위협과 학대를 받은 후 판사의 명령에 따라 13개월 동안 정신 병원에 감금되었다. 그의 가족에게는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 주지도 않았다. ···
“1918년 3월 17일 ‘콜로라도’ 주 ‘그랜드 정크션’에서는 성서 연구를 위한 모임이 시장, 유력한 신문 기자들 및 다른 저명한 사업가들로 이루어진 폭도들로 인하여 해산되었다. ···
“1918년 4월 22일 ‘오클라호마’ 주 ‘위니우드’에서 ‘클라우드 와슨’이 맨 처음 투옥되었는데 그 후에 고의적으로 교직자들과 사업가들 및 다른 몇 사람으로 이루어진 폭도들에게 맡겨져 매맞게 하였으며, 흑인을 시켜 채찍질하고 그가 조금 회복되면 다시 채찍질하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전신에 ‘타르’를 부어 새털로 덮었으며 ‘타르’를 문질러 머리와 머리털에 스며들게 하였다. 1918년 4월 29일 ‘아칸사스’ 주 ‘월너트 리지’에서 61세된 ‘더불류. 비이. 던칸’, ‘에드워드 프렌치’, ‘차알스 프랑케’, ‘그리핀’이라는 사람과 ‘디이. 밴 호우슨’ 부인이 투옥되었다. 폭도들은 감옥을 부수고 들어와 가장 상스럽고 나쁜 욕을 퍼부었고 채찍질하였으며 ‘타르’를 바르고 새털을 덮어 그들을 마을에서 쫓아냈다. ‘던칸’은 26‘마일’이나 걸어서 집으로 가야 했으며 가까스로 회복되었다. ‘그리핀’은 거의 실명되었으며 그 폭행으로 인하여 몇달 후에 사망하였다.”
‘디이. 에이치. 시벤리스트’는 ‘오클라호마’ 주 ‘샤툭’에서 자기 아버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지금까지도 잘 기억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17년 9월 나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3월경까지는 별일이 없었다. 그 때에 모든 학생들은 적십자 ‘핀’을 사도록 요구되었다. 나는 정오에 그 쪽지를 가지고 집에 갔다. 아버지는 일하고 계셨고 그 당시에 어머니는 독일어 밖에 읽을줄 몰랐다. 그러나 순례자인 ‘하울릿’ 형제가 ‘집단’을 방문하고 있었으며 그가 문제를 처리하였다. ‘핀’을 사지 않았다!
“그 후 얼마 있지 않아 관리들이 일하고 있는 아버지를 체포하여 「종말을 고한 비밀」를 밟고 서서 국기에 경배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것도 ‘샤툭’의
중심가에서 그렇게 하였다. 아버지는 투옥되었다. ···“그 후 얼마 있지 않아 아버지는 또 다시 체포되어 3일간 억류되었다. 이번에는 먹을 것을 거의 주지 않았다. 이번의 석방은 얘기가 좀 다르다. 자정쯤 되어 세 사람이 감옥에 ‘침입자’처럼 가장하고 들어왔다. 그들은 아버지의 머리에 자루를 씌우고 그 도시의 서쪽 끝까지 맨발로 걸어가게 하였다. 그곳은 황무지였으며 가마중이라는 독초가 많은 곳이었다. 거기서 허리까지 옷을 벗기고 끝에 철사가 달린 말 채찍으로 때렸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뜨거운 ‘타르’를 바르고 새털을 붙여 놓고 죽도록 그를 버려두었다. 그는 가까스로 일어나서 걷고 또 기면서 그 도시 주변을 헤매다 남동쪽을 향해 갔다. 그 다음에 북쪽을 향해 집으로 가려고 하였다. 그때 마침 친구 한 분이 아버지를 발견하고 집에 데려다 주었다. 나는 그 날 밤에 아버지를 보지 못했으나 어머니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아주 조그만 갓난아이와 함께 집에 있었기 때문에 특히 그러하였다. 할머니 ‘시벤리스트’는 아버지를 보고 기절하셨다. 내 동생 ‘존’은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단지 며칠 전에 태어났다. 그러나 어머니는 모든 어려움을 잘 견디어 내셨으며 여호와의 보호의 능력을 결코 잊지 않으셨다. ···
“할머니와 아버지의 이복 누이인 ‘캐티’ 고모가 아버지를 간호하여 소생시켰다. ‘타르’와 새털은 살속에 깊이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상처가 아물도록 거위 기름을 사용했으며 점차 ‘타르’가 벗겨졌다. ··· 아버지는 폭도들의 얼굴은 보지 못하였으나 그들의 목소리는 분별할 수 있어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들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사실 아버지가 그 일에 관하여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한 아픈 상처를 돌아가실 때까지 간직하고 계셨다.”
“뱀같이 지혜”로움
「종말을 고한 비밀」과 다른 그리스도인 출판물의 금지로 여호와의 종들은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사업이 있었으며 그것을 계속 수행하여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함을 입증하였다. (마태 10:16) 그와 일치하게 성서 연구 보조 서적을 경우에 따라서는 다락방이나 석탄통, 마루 밑이나 가구 속 같은 여러 장소에 숨겨 두었다.
‘시이. 더불류. 밀러’ 형제는 이렇게 알려 준다. “그 당시에 우리 집이 지방 ‘성경 연구생’의 본부였으므로 형제들이 밤중에 ‘트럭’을 타고 출판물을 가져왔으며 우리는 책상자들을 병아리 둥지에다 감추고 닭들과 나무 잎사귀들로 가려놓곤 했다.”
‘디이. 디이. 로쉬’ 형제는 그 당시에 일어났던 일을 회상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집 뒷편 밖의 보이지 않는 곳에 서적들을 보관하였다. 경찰들이 와서 책을 숨겨 놓은 곳으로 가까이 오고 있을 때 ‘리드’ 가족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눈 뭉치가 지붕에서 쏟아져 그곳을 완전히 덮어 버렸다.”
“율례를 빙자하고 잔해를 도모”함
여러 세기 전에 시편 필자는 “율례를 빙자하고 잔해를 도모하는 악한 재판장이 어찌 주와 교제하리이까?” 하고 물었다. (시 94:20) 여호와의 종들은 하나님의 법에 위배되지 않는 국가의 법은 어느 것이나 항상 순종한다. 그러나 기대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단순한 인간의 명령과 하나님의 법이 서로 충돌할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이 취한 입장과 같이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한다. (사도 5:29) 법 자체는 좋은데 그들의 활동을 중지시키려고 잘못 적용되는 때도 있다. 다른 경우로서는 반대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해로운 법안을 통과시키도록 하는 데 성공한 경우도 있다.
1917년 6월 15일 ‘선발징병법’이 미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그 법은 징집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신앙 때문에 전쟁에 참가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면제도 규정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많은 젊은이들은 ‘왙취 타워 협회’에 편지를 내어 ‘저지 러더포오드’에게 그들이 취해야 할 행로에 관하여 질문하였다. 그는 후에 그 점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전국에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그 점에 관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나에게 물었다.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조언을 요청하는 젊은이들에게 나는 이러한 요지의 조언을 하였다. 즉 ‘귀하가 양심적인 이유로 전쟁에 참여할 수 없다면 ‘선발징병법’ 3항은 면제를 신청할 수 있게 되어 있읍니다. 귀하는 등록하고 면제에 대한 신청서를 제출하여 이유를 명시해야 하며 징모위원회는 귀하의 신청서에 대한 판정을 내릴 것입니다.’ 나는 의회가 통과시킨 법령에 근거하여 행동하라고 조언한 일 밖에 없다. 법이 하나님의 법과 충돌하지 않는 한 모든 시민은 국법을 따라야 한다는 점을 나는 항시 강조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여호와의 종들에 대한 음모가 명백히 드러났다. 그것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1917년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에서 많은 교직자들이 회합을 가졌다. 거기에서 그들은 위원회를 임명하여 그 위원회로 하여금 수도 ‘와싱턴’을 방문하여 ‘선발징병법’ 및 방첩법 개정을 역설하게 하였다. 그 위원회는 법무성을 방문하였다. 교직자들의 제의를 받고 법무성 관리 ‘존 로드 오브라이언’을 선임하여 방첩법 개정안을 마련하게 하고 미합중국 상원에 제출하게 하였다. 그 개정안은 간첩죄의 혐의를 받은 자들은 모두 군법회의에서 다루고 그 죄를 범한 사람은 극형에 처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그 법안은 통과되지 않았다.
의회가 방첩법 수정에 착수하였을 때 “불란서 수정안”이라는 규정이 소개되었다. 이 수정안은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목적을 위하여 좋은 동기로써 진실한 것을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법으로부터 제외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18년 5월 4일 ‘오우버맨’ 상원의원은 검찰총장이 보내온 각서를 「의회기록」(1918년 5월 4일 6052, 6053면)에 포함시키도록 하였다. 그 내용의 일부는 이러하였다.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목적을 위하여 좋은 동기로써 진실한 것’을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제 3조 1항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요지의 방첩법 수정안은 군 정보부의 견해와 전혀 다른 것입니다.“경험에 의하면 그러한 수정안은 대체적으로 그 법을 무용지물이 되게 하며 모든 심리를 진실한 것이 무엇이냐 하는 해결할 수 없는 학술적 논쟁거리로 만들어 버린다는 점을 잘 알 수 있읍니다. 인간의 동기는 너무나 복잡하여 토론될 수도 없으며 ‘정당하다고 인정되는’이란 말은 실제 적용하기에는 너무나 애매모호한 것입니다.
“그러한 예로써 가장 위험한 주장을 하나 들자면 완전히 종교적 언어로 기록되었고 엄청난 수가 배부된 「종말을 고한 비밀」이란 책이 있읍니다. 그 책은 군인들로 하여금 우리들의 명분에 회의를 품고 징집에 저항하는 평안감을 느끼게 할 뿐입니다.
“‘브루클린’에서 발행된 「왕국 소식」은 「종말을 고한 비밀」과 그와 비슷한 출판물에 대한 제한을 철회함으로써 사람들이 방해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이러한 성서 연구 보조 서적을 사고 팔고 소유하고 읽을 수 있도록 하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청원서를 게재하고 있읍니다. 그러한 수정안이 통과되면 우리편에 유해한 영향력을 주게 될 것입니다.
“‘만국 성경 연구회’는 단지 종교적 목적만을 위해 일하는 체합니다. 그러나 그 본부가 오랫 동안 독일의 첩보 기관이었다고 보고되었음을 우리는 알게 되었읍니다. ···
“그러한 수정안의 통과는 미국의 힘을 크게 약화시킬 것이며 적에게 도움을 줄 뿐입니다. 전쟁에 있어 중요한 것은 동기가 아니라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법률과 그 집행자들은 바람직한 결과를 얻고 위험한 결과를 방지하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하며 동기의 문제는 재판관의 재량이나 사가들의 평가에 맡겨야 할 것입니다.”
법무성의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방첩법 수정안이 “불란서 수정안” 없이 1918년 5월 16일 승인되었다.
“우리는 당신네를 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할 것이다!”
그때쯤 해서 ‘성경 연구생’들과 연합하고 있는 일부 젊은이들이 군복무 명령을 받았으며 양심적인 거부자로서 ‘뉴우요오크’, ‘롱 아일랜드’에 있는 ‘업튼’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이 수용소는 ‘제임스 프랭클린 벨’ 장군의 감독 하에 있었다. ‘벨’ 장군은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를 사무실로 방문하여 해외이건 어디이건 자기가 어떠한 복무를 명하든지 그 젊은이들이 이행하도록 지시해 달라고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를 권유하였다. ‘러더포오드’는 거절하였다. 장군은 끈질기게 요구하였으며 ‘러더포오드’는 마침내 한 장의 편지를 쓰게 되었는데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여러분 각자는 자기가 군복무에 참여할 것인지 아닌지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자기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도록 하십시오.” ‘벨’은 이 서신으로 전혀 만족하지 않았다.
며칠 후에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와 ‘더불류. 이이. 밴 앰버어’는 ‘업튼’
수용소로 ‘벨’ 장군을 방문하였다. ‘벨’은 자기 부관과 ‘밴 앰버어’가 있는데서 ‘러더포오드’에게 교직자들의 ‘필라델피아’ 회의에 대해 얘기하였다. 그는 그들이 ‘존 로드 오브라이언’을 선임하여 이 문제를 상원에 제출하였으며 방첩법 위반자는 모두 군법 회의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하도록하는 법안을 상정하게 되었다는 점을 말하였다. ‘러더포오드’에 의하면 ‘벨’ 장군은 “상당히 격분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보고하였다. “‘벨’의 책상 위에는 서류 뭉치가 놓여 있었으며 그것을 집게손가락으로 톡톡치더니 정색을 하고 나서 그는 나를 향해 이렇게 말하였다. ‘‘윌슨’이 그것을 막았기 때문에 그 법안은 통과되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네를 치는 방법을 알고 있읍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 말에 나는 ‘장군, 당신은 내가 어디 있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고 대답하였다.”“두 증인”에 대한 치명타
1914년 10월 초 이후에 그리스도의 기름부음받은 추종자들은 이방인의 때가 끝났으며 열국이 ‘아마겟돈’에서 멸망할 때가 가까왔음을 선포하였다. (누가 21:24; 계시 16:14-16) 이 상징적 “두 증인”은 열국에 대하여 슬픈 소식을 1,260일 즉 3년 반 동안 선포하였다. (1914년 10월 4/5일부터 1918년 3월 26/27일까지) 그때 마귀의 짐승같은 정치 조직은 하나님의 “두 증인”에 대해 전쟁을 일으켜 결국 “베옷을 입고” 고초를 주는 예언 활동에 대해 그들을 죽임으로써 종교적, 정치적, 군사적, 사법적 적들은 큰 안도감을 느끼게 되었다. (계시 11:3-7; 13:1) 그것은 예언의 성취였다. 그러면 어떻게?
1918년 5월 7일 미합중국 ‘뉴우요오크’ 동부 지방 법원은 ‘왙취 타워 협회’의 몇몇 주된 종들을 체포하도록 영장을 발부하였다. 거기에 포함된 사람들은 회장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 총무 겸 재무 ‘더불류. 이이. 밴 앰버어’, ‘클레이튼 제이. 우드워드’와 ‘조오지 에이치. 피셔’(「종말을 고한 비밀」의 두 공동 집필자들), ‘에프. 에이치. 로빈슨’(「파수대」 편집위원 중 한 사람), ‘에이. 에이치. 맥밀란’, ‘알. 제이. 마아틴’, 및 ‘지오바니드체카’였다.
바로 그 다음날인 1918년 5월 8일 그들은 ‘브루클린’ ‘벧엘’에서 체포되었다. 결국 모두 감금되었다. 그 후 얼마 있지 않아 그들은 연방 재판소에 소환되어 ‘가아빈’ 판사 주재로 심리를 받았다. 모두는 대배심원이 미리 답신한 바 있는 내용으로 기소되었다. 그 기소장에 있는 그들의 혐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3) 불법적이고, 범의를 가지고, 고의적으로 개인적인 교사, 서신, 공개 연설을 통해서 또한 ‘제 7권—「성경 연구」—「종말을 고한 비밀」’ 및 「월간 성경 연구생」, 「파수대」, 「왕국 소식」 그리고 다른 ‘팜플렛’ 등을 미합중국 전역에 배부하거나 공중적 유포를 통하여 미합중국 육, 해군과 관련된 의무 이행에 반항하고 불충하고 거부하도록 영향력을 주거나 시도하려고 한 죄.
“(2, 4) 미합중국의 전쟁 중 불법적이고 범의를 가지고 고의적으로 신병 모집 및 입대를 방해한 죄.”
그 기소장은 주로 「종말을 고한 비밀」의 한 항목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그 항목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신약 어디를 보아도 애국심(편협한 생각으로 다른 민족을 증오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는 곳은 없다.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형태의 살인도 금지되어 있다. 그렇지만 애국심이라는 미명아래 지상의 정부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신 및 사랑하는 사람들의 희생과 자기 동료들의 학살을 요구하며 그것을 하늘의 법이 요구하는 의무인 것처럼 말한다.”
‘쮜리히’에 있는 ‘스위스’ 지부 관리자에게 협회 역원들이 500‘달러’를 보냈다는 주장을 근거로 해서, ‘러더포오드’, ‘밴 앰버어’, ‘맥밀란’ 및 ‘마아틴’ 등 네 형제는 적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두번째로 기소되었다. 법정 심리를 받게 된 각 형제들은 각 기소 내용에 대해 2,500‘달러’씩의 보석금을 내는 조건으로 불구속 기소되었다. 그들은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어 1918년 5월 15일에 법정에 출두하였다. 재판은 1918년 6월 3일 미합중국 ‘뉴우요오크’ 동부 지방법원에서 있게 되었다. 형제들은 두 가지 기소에 대해 “무죄”를 주장하였으며 모든 혐의에 대해 완전히 무죄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예심에서 나타난 분위기로 인해 피고들은 ‘가아빈’ 판사가 자기들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구술서를 제출하였다. 마침내 미국 지역 판사 ‘해롤드 비이. 하우’가 재판을 주재하게 되었다. ‘에이. 에이치. 맥밀란’에 의하면 피고들은 ‘하우’의 견해를 몰랐으나 정부는 그가 “원고측에 호의를 가지고 있는 반면 법을 어겼다는 혐의를 받은 피고들에 대해 특별히 편견을 가지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맥밀란’은 이러한 점도 말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있지 않아 그 점을 잘 알게 되었다. 재판 전 판사실에서 변호인들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악의를 나타냈으며 ‘나는 이 피고들에게 가할 수 있는 최고형을 내리겠다’는 의도를 표시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때가 늦어 우리 변호인들이 판사가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구술서를 지출할 수 없었다.”
‘맥밀란’의 말에 의하면 처음 답신을 받은 기소 내용에는 미합중국이 선전포고를 한 1917년 4월 6일과 1918년 5월 6일 사이에 피고들이 불법 모의를 하였다는 혐의가 들어있었다. 정부는 재정 신청을 하여 처음 주장과는 달리 범죄 날짜가 1917년 6월 15일과 1918년 5월 6일 사이에 있었다고 하였다.
법정 광경
미합중국은 전쟁 중이었다. 그러므로 선동했다는 혐의를 받은 ‘성경 연구생’들에 대한 재판은 많은 관심을 끌었다. 사람들의 경향은 어떠했는가? 전쟁에 도움이 되는 것은 어느 것이나 환영했다. 법정 바깥에서는 악대들이 연주를 하고 군인들은 근처 ‘브루클린 버러우 홀’ 주변을 행진하였다. 법정 내부에서는 재판이 15일간씩이나 진행되었고 진술서는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 안으로 들어가서 재판 진행을 구경해 보자.피고의 한 사람이었던 ‘에이. 에이치. 맥밀란’은 그 분위기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도와 준다. 그는 후에 이렇게 기술하였다. “재판 중에 정부 당국은 어떤 사람이 길 모퉁이에 서서, 사람들의 사기를 꺾어 군대에 가지 않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주기도문을 암송한다면 그 사람을 형무소로 보낼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의 의향을 해석하는 일이 얼마나 간단하였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징집에 영향을 주기 위해 어떠한 모의도 한 일이 없으며 징집에 저항하도록 아무에게도 권고한 일이 없다는 점을 증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을 근거로 하여 우리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그러한 증언은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리스도교국의 어떤 종교 지도자들과 그들의 정치적 벗들은 우리를 궁지에 몰아 넣으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재판은 ‘하우’ 판사의 동의 아래 유죄판결을 향하여 진행되었으며 우리의 동기는 부당하며 의도는 우리의 행동으로 추정해야 한다고 주장되었다. 무엇에 사용할 것인지 판정할 수 없는 수표에 부서하고, 이사회에서 ‘러더포오드’ 형제가 낭독한 사실 보고서에 서명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유죄가 되었다. 심지어 그 때 그것이 나의 서명인지 아닌지 증명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불공평한 점은 나중에 상소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한 번은 그 전에 협회 요원으로 있던 한 사람이 증인으로 선서하였다. 두 사람의 서명이 있는 서류를 보고 나서 하나는 ‘더불류. 이이. 밴 앰버어’의 서명인 것을 알겠다고 말하였다. 여기 기록 사본이 있으니 읽어보자.
“질문. 본관은 감정을 하기 위해 귀하에게 증거 서류 31호를 인도하며 ‘맥밀란’과 ‘배[ㄴ] 앰버어’의 서명이라고 인정되는 그 두 서명을 자세히 보도록 요청하는 바이다. 그럼 귀하에게 ‘밴 앰버어’에 관해 먼저 묻겠는데 그것이 ‘밴 앰버어’의 서명을 복사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답. 그렇다. 나는 그렇다고 인정한다.
“질문. ‘맥밀란’ 씨의 것은 어떠한가? 답. ‘맥밀란’ 씨의 것은 확실히 알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그의 서명이라고 생각한다.”
재판받는 사람들이 제시한 답변서에 대해 ‘맥밀란’ 형제는 후에 이렇게 기술하였다.
“정부가 그 주장을 마치자 우리는 우리측의 답변서를 제시하였다. 요점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점들을 설명한 것이다. 협회는 전적으로 종교적인 조직이다; 성원들은 ‘차알스 티이. 러셀’이 설명한 바와 같이 성서를 믿음의 기초로 받아들인다; ‘시이. 티이. 러셀’이 그의 생존시에 「성경 연구」 6권을 저술하여 출판하였으며 1896년에 「에스겔」과 「계시록」을 다루는 제 7권에 대해서 약속하였다; 그의 임종시에 다른 사람이 제 7권을 저술할 것을 말하였다; 그가 사망한지 얼마있지 않아 협회의 집행 위원회는 ‘시이. 제이. 우드워드’와 ‘조오지 에이치. 피셔’로 하여금 저술하도록 권한을 부여하였으며 출판물에 관해 어떠한 약속도 없이 단지 참작하기 위해 원고를 제출하도록 하였다; 「계시록」에 관한 원고는 미합중국이 참전하기 전에
완성되었으며 (성전에 대한 한 장을 제외하고는) 책 전체의 원고가 방첩법 제정 전에 인쇄인의 손에 넘겨졌다; 그러므로 혐의 사실과 같이 그 법을 범하도록 하는 어떤 음모도 있을 수 없었다;“우리는 이런 점을 증언하였다. 즉 어느 때고 우리가 함께 모여 징집에 영향을 주거나 전쟁 수행에 있어서 정부를 방해하도록 무엇을 하고자 동의하거나 음모한 일이 전혀 없으며 그런 생각조차 한 일이 없다;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전쟁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우리의 사업은 전적으로 종교적이며 결코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성원들을 권유하거나 어떠한 사람에게든지 조언이나 격려를 통하여 징집을 저항하게 한 일은 없다; 우리의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조언을 받을 수 있도록 법에 의해 권리가 인정된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우리는 국가가 참전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으나 다만 헌신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륙하는 전투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재판에서 있었던 모든 증언과 절차가 공개적이고 공정한 것이 아니었다. ‘맥밀란’은 후에 이렇게 보고하였다. “그 재판에 참석했던 우리측 몇 사람은 한 검사가 낭하로 가더니 낮은 목소리로 협회 내부에서 반대를 주도해 온 몇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더라고 나중에 나에게 말해 주었다. 그들은 ‘저자[‘맥밀란’]를 그대로 놔둬서는 안됩니다. 저자는 그 패들 중에서 가장 악질분자입니다. 그를 다른 자들과 함께 처치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 일을 계속 진행시킬 것입니다.’” 그 당시 야심적인 자들이 ‘왙취 타워 협회’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노력해 왔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후에 ‘러더포오드’가 ‘벧엘’에 남아 책임을 맡고 있는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 것이 당연하다. “지난 해에 협회와 그 활동을 반대한 7명이 재판하는데 와서 검찰관들을 거들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 몇이 협회를 지배하기 위해 이제 여러분에게 아첨하려는 교묘한 노력에 저항하도록 경고하는 바이다.”
오랜 심리 끝에 결국 기다리던 판결의 날이 이르렀다. 1918년 6월 20일 오후 5시쯤 그 사건은 배심원으로 넘어갔다.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는 후에 이렇게 회고하였다. “배심원은 판결을 내리기 전에 오랫 동안 지체하였다. 배심원 한 사람이 후에 우리에게 말한 바와 같이 ‘하우’ 판사는 결국 배심원들에게 ‘유죄’ 판정을 내려야 한다는 말을 전하게 했다.” 약 4시간반의 숙의 끝에 오후 9시 40분에 가서 배심원은 “유죄”라고 답신하였다.
선고는 6월 21일에 있었다. 법정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피고들에게 할 말이 있는가 물었을 때 그들은 응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하우’ 판사는 선고를 내렸다. 노한 어조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피고들이 행하고 있는 종교적 선전은 독일군 일 개 사단보다 더 해롭다. 그들은 정부와 육군 정보국의 관리들에게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을 뿐 아니라 모든 교회의 교역자들을 비난하였다. 그들의 형벌은 무거워야 한다.”
과연 무거운 형이었다. 7명의 피고들에게 80년형이 선고되었다. (4가지 기소 요인에 대해 각각 20년형으로 동시에 집행됨) ‘지오바니 드체카’에 대한 선고는 유예되었으나 결국 40년형 즉 동일한 각 기소 요인에 대해 10년형을
받았다. 피고인들은 ‘조오지아’ 주 ‘아틀란타’에 있는 미합중국 교도소에서 그 형기를 복역해야 하였다.그 재판은 15일이 걸렸다. 기록된 증언들은 여러 권이 되었으며 절차도 부당한 경우가 많았다. 사실상 그 재판에 125가지 이상의 하자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결국 항소 법원이 전 재판 과정이 불공평하였다고 판결하는 데는 그중 단지 몇 가지만으로도 충분하였다.
“그 형제들이 그런 불공평한 재판을 겪어야 하는 동안 나도 그들과 함께 그 모든 고통을 느꼈다”고 방청인으로 참석했던 ‘제임스 그윈 지이’는 말한다. 그는 이렇게 계속한다. “재판관이 ‘러더포오드’ 형제에게 답변의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 법정에서는 성서가 필요없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그날밤 나는 ‘엠. 에이. 하울릿’ 형제와 함께 ‘벧엘’에 머물렀는데 10시쯤 되어서 그들이 유죄로 되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다음날 그들은 선고를 받았다.”
부당하게 유죄판결을 받고 중형에 처해졌지만 ‘러더포오드’ 형제와 그 동료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1918년 6월 22일자 ‘뉴우요오크’ 「트리뷴」지가 이렇게 보도한 것이 흥미있는 일이다. “‘조셉 에프. 러더포오드’와 다른 ‘러셀파’ 6명은 방첩법 위반으로 어제 ‘하우’ 판사에 의해 ‘아틀란타’ 교도소에서 20년을 복역하도록 선고받았다. ‘러더포오드’ 씨는 법정에서 감옥으로 가는 도중 ‘자기의 종교적 신앙을 위해 현세에서 형벌을 받는다는 것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이기 때문에 오늘은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다’라고 말하였다. 수감자들이 대배심원실로 끌려간 뒤 곧이어 ‘브루클린’ 연방 재판소의 집행관 사무실에서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가장 이색적인 광경을 수감자들의 가족과 친지들이 보여 주었다. 그들 전체가 부르는 ‘매는 띠는 복되어라’는 곡조가 그 낡은 건물에 울려퍼졌다. 그들은 거의 즐거운 낯으로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 모든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언젠가는 세상이 다 알게 될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시련을 통하여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드리며 오게 될 큰 날을 고대하자.’라고 서로들 이야기하고 있었다.”
형제들은 그 사건을 상소하는 한편 두 번이나 보석을 신청했으나 처음엔 ‘하우’ 판사에 의해 두번째는 ‘마아틴 티이. 맨튼’ 판사에 의해 기각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처음에 ‘에이. 에이치. 맥밀란’이 “자기가 들어가 본 가장 더러운 곳”이라고 말한 ‘브루클린’ ‘레이몬드’ ‘스트리트’ 감옥에 수감되었다. ‘클레이튼 제이. 우드워드’는 그곳을 익살스럽게도 “레이몬드 호텔”이라고 불렀다. 그러한 불쾌한 곳에 일주일간 머무른 뒤 다른 일주일간은 ‘롱 아일랜드’ 형무소에 보냈다. 결국 부당하게 형을 받은 그들은 미합중국 독립 기념일인 7월 4일에 기차에 실려 ‘조오지아’ 주 ‘아틀란타’ 교도소로 이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