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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3부)

미합중국 (제3부)

미합중국 (제3부)

‘리치필드’에서 발생한 폭력

왕국 농장이 공격과 방화의 위협을 받고 있었던 것과 때를 같이 하여 ‘일리노이’ 주 ‘리치필드’에서는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난동이 터졌다. ‘클래런스 에스. 하지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떻게 해서 ‘리치필드’의 난동자들은 우리의 계획을 눈치채고선 우리가 봉사하러 시내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의 사제가 교회 종을 치자 그것을 신호로 그들은 형제들을 둘러싸기 시작하였다. 형제들은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어떤 형제들은 심한 구타를 당하였고 심지어 폭도들은 유치장을 불태워 버리겠다고 위협하였다. 어떤 폭도들은 형제들의 차를 점거하여 부수기 시작하여 고물로 만들어 버렸다.”

‘월터 알. 위스만’은 이렇게 말한다. “폭도들에게 구타를 당한 뒤 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도로 순찰대는 형제들을 유치장으로 몰아 넣었다. ‘차알스 체르벤카’라는 형제는 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자 실신하도록 맞았으며 그들은 기를 얼굴에 덮어 씌워놓고 그의 머리와 몸을 마구 발길로 차고 구타하였다. 형제들 중에서 그가 가장 심한 상처를 입었으며 그는 결코 그 상처로부터 완쾌되지 못하고 몇 년 후 그는 사망하였다. 나중에 그는 자기가 구타당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는 그것을 견딜 수 있음을 알고 있지만 새로운 사람은 아마 약해져서 타협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새로운 형제들에게가 아니라 자기에게 있게 된 것을 속으로 매우 기쁘게 생각하였다고 말하였다.”

‘위스만’ 형제는 이렇게 회상한다. “‘리치필드’ 시는 그 사건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사실상 여러 해 후인 1950년 대에 ‘리치필드’에서는 그 시의 100년 역사 중 두드러진 사건들을 묘사하기 위하여 풍선을 띄워 백년제를 기념하였다. 그러한 풍선들 중 하나는 1940년에 있었던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습격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시의 관리들은 그것을 그들의 역사에서 기념할 만한 사건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보응하실 것이다!”

무시된 호소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폭력적인 공격이 심하였고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에 미합중국 법무차관 ‘프란시스 비들’과 ‘엘리너 루즈벨트’ 여사(‘프랭클린 디이.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인)는 그러한 행위를 중단하도록 공식적으로 호소하였다. 사실상 1940년 6월 16일 ‘리치필드’ 사건이 있던 바로 그날 ‘내셔널’ 방송회사의 방송망을 통한 전국적인 ‘라디오’ 방송에서 ‘비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여러 차례 심한 공격을 받고 구타당하는 일이 있었다. 그들은 죄를 범한 일이 없다. 그러나 폭도들은 그들을 범죄인으로 판단하고 폭력적인 벌을 가하였다. 법무 장관은 이러한 불법적인 처사에 대하여 즉각적인 조사를 명하였다.

“사람들은 조심하고 경계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침착하고 건전하게 생각해야 한다. 폭도들의 난동은 정부의 과업을 한없이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나치스’적인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나치스’를 능가하는 악을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호소는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적의를 막지 못하였다.

그리스도인 모임이 방해를 받다

그러한 혼란기에는 미합중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성서 교훈을 받기 위하여 평화스럽게 모여 있을 때, 때때로 공격을 받았다. 예를 들어 ‘메인’ 주 ‘사코’에서 1940년에 그런 일이 발생하였다. ‘해롤드 비이. 던칸’에 의하면 한번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2층 왕국회관에서 녹음된 성서 강연을 제공하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1,500명 내지 1,700명의 폭도들이 몰려 들었다. ‘던칸’은 한 사제가 그들과 함께 하였는데 회관 앞에 있는 차에 타고 있었다고 말한다. ‘던칸’ 형제는 “(인접한) ‘라디오’ 수리 가계에서는 강연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려고 틀 수 있는 모든 ‘라디오’를 최고의 ‘볼륨’으로 올려 놓았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부언한다. “그때 폭도들은 창문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사복을 입은 경찰관이 돌을 던지도록 회중 전지를 창문에 비치고 있었다. 경찰서가 한 구획 반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나는 그곳에 두 번이나 가서 사건 발생을 통고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들이 국기에 경배한다면 도와 주겠오!’ 폭도들은 돌로 회관의 (작은 창유리) 70장을 깨뜨렸으며 내 주먹만한 돌이 ‘개르트루드’ 자매의 머리 바로 옆을 지나 석회벽 모퉁이를 때렸다.”

폭도들의 난동은 1942년 ‘오리곤’ 주 ‘클라마스 폴스’ 대회에서도 일어났다. ‘돈 밀포오드’에 의하면 폭도들은 다른 대회 도시로부터 연설을 전달해 주는 전화선을 끊어버렸으나 연설의 사본을 가지고 있는 한 형제가 즉각 대신하여 그 프로는 계속 진행되었다. 결국 폭도들이 대회장으로 난입하였다. 증인들은 방어하였으며 문이 다시 닫히자 한 공격자—“크고 힘센 한 남자”—는 건물 안에서 의식을 잃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 그는 경찰관이었으며 얼굴 옆에 있는 그의 ‘뱃지’와 함께 그 사진을 찍었다. ‘밀포오드’ 형제는 “우리는 적십자사를 불렀고 그들은 들것을 가진 여자 두 사람을 보내서 그를 데려 갔다. 그는 후에 ‘나는 그들이 싸우리라고 생각은 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한다.” 경찰은 증인들을 돕기를 거절하였으며 네 시간이 지나서 주 방위군에 의해 폭도들은 해산되었다.

가두 잡지 봉사 중의 공격

어떤 곳에서는 경찰관들이 여호와의 증인을 보호하지 않았지만 일률적으로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여러 해 전 ‘오클라호마’ 주 ‘툴사’에서 가두 잡지 봉사를 할 때 ‘엘. 아이. 페인’은 경찰관이 항상 보이는 곳에 있음을 알았다. ‘페인’ 형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어느날 나는 그에게 항상 그렇게 가까이에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물었다. 그의 말인즉 자기가 살펴야 할 구역이 넓지만 아무라도 나를 쫓거나 기습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그는 소도시들에서 증인들이 당하는 일들에 관해서 신문을 읽었으며 왜 사람들이 그 활동을 방해하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여호와의 종들이 「파수대」와 「위안」지로 가두 증거를 하는 중에 폭도들의 공격을 자주 받았다. 예를 들어 ‘조오지 엘. 맥키이’에 의하면 ‘오클라호마’ 주의 한 지방에서는 매주 100명에서 1,000명 이상에 이르는 격분한 사람들이 가두 잡지 봉사에 참여하는 증인들을 공격하였다고 한다. 시장이나 경찰서장 혹은 다른 관리들은 아무런 보호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맥키이’ 형제에 의하면 폭도들은 보통 악명높은 여자 깡패 ‘벨레스타’의 사촌으로서 저명한 의사이며 미국 재향군인회 지도자를 선두로 하고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술취한 측근자들이 난동을 시작하였다. 그 다음에 당구봉, 곤봉, 칼, 고기 베는 큰 칼, 총 등으로 무장한 폭도들이 왔다. 그들의 목적은? 증인들을 그 고장에서 몰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매주 토요일에 왕국 선포자들은 얼마나 오랫 동안 가두 봉사를 할 것인지 미리 정하였으며, 폭도들이 신속히 모여들지라도 그들은 성공적으로 지정한 시간을 온전히 바칠 수 있었다. 물건 사는 사람들에게 많은 잡지를 전하였다.

어느 토요일에는 약 15명의 증인들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맥키이’ 형제는 “우리가 목숨을 부지하고 피하려면 여호와 하나님과 좋은 판단력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계속한다. “이렇다할 경고도 없이 그들은 우리 형제들 중 세 사람에게 칼과 곤봉을 가지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 우리는 팔이 부러지고 머리가 깨지고 다른 상처를 입고서 그 지방의 의사 4명에게 찾아 갔으나 그들 모두는 우리에게 필요한 치료를 거부하였다. 동정심을 가진 의사의 치료를 받기 위해서 50‘마일’이나 떨어진 곳까지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상처와 기분은 곧 회복되었으며 다음 토요일에 왕국의 좋은 소식을 가지고 가두로 다시 돌아갔다. 박해가 극심하였던 말썽많은 기간 전체에 걸쳐 그러한 영이 가득하였다.”

‘코너스빌’의 포악한 행위

폭도들의 폭력적인 행위들 중에서 1940년 ‘인디아나’ 주 ‘코너스빌’에서 일어난 사건은 유명하였다. 그곳에서 심리를 받은 어떤 그리스도인 여자는 “폭동 음모”라는 거짓 혐의를 받았다. 처음 재판이 있던 날 지구의 종이었던 ‘레인보우’ 형제와 ‘빅토르’와 ‘밀드래드 슈미트’가 법원을 떠나려고 할 때 약 20명의 남자들이 그들의 차로 우루루 몰려와서 죽이겠다고 위협하면서 차를 전복시키려 하였다.

마지막 재판이 있던 날 검사는 자기 논고 시간을 주로 폭동을 선동하는 데 사용하였으며, 때때로 건물 내에 있는 무장한 사람들에게 직접 말하기도 하였다. 오후 9:00경에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그러자 폭력적인 소동이 터졌다. ‘슈미트’ 자매의 말에 의하면 자기와 그 사건을 다룬 변호사 중의 한 사람이었던 자기 남편 ‘빅토르’는 두 형제와 함께 다른 증인들과 따로 떨어지게 되었으며 200 내지 300명이 되는 폭도들이 시비를 걸어왔다고 한다. 그 자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어서 곧 온갖 과일, 채소, 달걀 등이 우리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폭도들은 그런 물건 한 ‘트럭’ 분을 우리에게 쏟아 놓았다고 한다.

“우리는 차로 달려 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가로막고 시외로 가는 도로로 우리를 몰아냈다. 그리고 나서 폭도들은 우리에게 와락 달겨들어 형제들을 치고 내 등을 때렸는데 마치 채찍 끝으로 맞는 것 같았다. 그때쯤 해서 폭풍우가 아주 무섭게 휘몰아 치게 되었는데 비는 억수로 쏟아지고 바람도 매우 세차게 불어 왔다. 하지만 자연의 위력은 악귀같이 날뛰는 폭도들의 위세와 비교하면 별게 아니었다. 폭풍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 차로 가서 우리 옆으로 운전해 왔으며 우리에게 고함을 치고 욕을 하였는데 항상 여호와의 이름을 사용하여 욕을 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였던가!

“그런데 폭풍우에도 불구하고 그냥 서서 우리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적어도 100명은 되는 것 같았다. ‘오하이오’ 주 ‘스프링필드’로부터 ‘재코비’ 자매(지금은 ‘크레인’ 자매)가 운전하여 데려온 많은 형제들이 우리를 구하려 했으나 폭도들은 차를 거의 뒤집어 엎으려 했으며 차를 발로 차고 그 문을 잡아 뜯어 놓았다. 그로 인해 폭도들은 그 차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우리를 끌고 갔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더 타격이 되었다. 벗들이 우리를 놔두고 그냥 강제로 차를 몰고 가게 하였다. 그칠줄 모르는 폭풍우 속을 우리가 쫓겨갈 때 폭도들은 고함을 치면서 ‘저것들을 강에 처넣어라! 저것들을 강에 처넣어라!’고 소리질렀다. 그치지 않고 반복하는 그러한 구호로 인해 내 마음에 공포가 생겼는데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에 가까와지자 그러한 구호가 갑자기 중단되었다. 곧 이어 우리는 실제로 다리를 건너갔다. 여호와의 천사가 폭도들의 눈을 멀게 하여 우리가 어디에 와 있는지 모르게 한 것 같았다. 나는 ‘오, 여호와여 감사합니다!’라고 속으로 말했다.

“그때 몸집이 크고 억센 폭도들이 형제들을 다시 치기 시작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맞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란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것인지! 그들이 ‘빅토르’를 칠 때마다 그는 비틀거리긴 하였으나 넘어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나에게는 공포의 채찍이었다. ···

“그들은 여러 차례 뒤에서 나에게 다가와 빠른 채찍질과 같은 공격을 가하곤 하였다. 결국 우리는 두 형제들과 분리되었고 팔을 부등켜 안고 걸어가면서 ‘빅토르’는 ‘우리가 ‘바울’만큼 고통받은 것은 아니오. 피를 흘리기까지 대항하지는 않았소.’라고 말하였다. [히브리 12:4 참조]

“밤은 깊었고 칠흑같이 캄캄하였다. (후에 저녁 11시쯤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시 경계를 벗어나 있었고 지칠대로 지쳐 있었는데 갑자기 차 한대가 우리 바로 옆에 와 섰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빨리! 타세요!’라고 말했다. 아! 그 젊은 파이오니아 ‘레이 프렌즈’가 그 폭도들에게서 우리를 구출하려고 거기에 와 있었다! ···

“우리가 차에 타는 것을 보지 못하도록 여호와의 천사들이 적의 눈을 멀게 하였다는 것을 여기서 또 한번 우리 모두가 느꼈다. 친애하는 ‘레인보우’ 형제와 그의 아내 그리고 다른 세명이 폭도들로부터 구출되어 그 차에 타고 있었다. 그 조그만 차에 그럭저럭 우리 8명 모두가 탈 수 있었다. 여호와의 천사들이 적들로 하여금 우리가 차에 타는 것을 보지 못하도록 하였음을 우리 모두가 느꼈다. 폭도들은 그때까지도 우리에 대해 심히 노하고 있었으므로 우리를 풀어 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사랑에 찬 손을 내밀어 우리를 구출하신 것 같았다! 우리와 떨어진 두 형제들은 아침 일찌기 형제들이 그들을 발견할 때까지 건초더미에 피신하고 있었음을 후에 알게 되었다. 형제들 중 한 사람은 그를 향해 던진 물건에 맞아 심한 상처를 입었다.

“폭풍우가 더위를 몰아내고 한냉한 공기를 몰고 왔기 때문에 흠뻑 젖은 채 추위에 떨면서 집에 도착하니 새벽 2시였다. 형제 자매들이 우리들을 보살폈는데 ‘빅토르’의 얼굴에 난 다섯 군데의 터진 상처를 아물게 했다. 친애하는 우리 형제들의 사랑에 찬 돌봄 가운데 있게 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매정스런 경험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자기 종들을 지원하시고 강화하신다. ‘슈미트’ 자매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가 견디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도록’ 여호와께서 자비롭게 도와주신 또 하나의 시험을 경험하였다.”—야고보 1:4.

폭도들의 다른 만행

여호와의 증인들을 목표로 한 폭도들의 난동이 많았다. 1942년 12월 ‘텍사스’ 주 ‘윈스보로’에서 가두 잡지 봉사를 하고 있던 여러 명의 증인들에게 폭도들이 시비를 걸어왔다. 그 증인들 중에 형제들의 종(순회 감독자) ‘오우. 엘. 필라스’가 있었다. 폭도들이 가까이 오자 증인들은 그러한 환경하에서는 가두 봉사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차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필라스’ 형제는 이렇게 회고한다. “중심가 한 복판에서 침례교 교역자 ‘시이. 시이. 필립’이 확성 장치를 한 차에 타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설교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를 보자 그는 곧 자기 설교를 바꾸었다. 그는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기에 경배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자기는 성조기를 위해 기꺼이 죽겠다고 하면서 기에 경배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고장 밖으로 쫓아 내야 한다고 말하였다. 우리가 그의 ‘트럭’을 지나갈 때 앞을 보니 다른 폭도들이 우리를 향해 오고 있었다. 이내 그들은 우리에게 다가왔으며 경찰서장이 와서 우리를 체포할 때까지 우리를 붙잡아 두었다.”

그후 폭도들이 서장 사무실로 들어 왔으나 서장은 증인들을 보호하려고 하지 않았다. 폭도들이 강제로 증인들을 끌고 간 것이다. ‘필라스’ 형제에 대해 말하자면 거리에서 그는 주먹으로 연신 구타당하였다. ‘필라스’ 형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때 나는 참으로 이상한 도움을 경험하였다. 나는 극심한 구타를 당하고 있었다. 내 코와 얼굴, 입에서 피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별로 아니 조금도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 그 당시에도 나는 그 사실에 놀랐으며 그것이 천사의 도움이라고 생각하였다. ··· 그 사실을 통해 독일에 있는 우리의 형제들이 어떻게 흔들리지 않고 충실하게 극심한 ‘나치스’의 박해를 견딜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필라스’ 형제는 여러 차례 구타를 당하여 의식을 잃었고 그 다음에 다시 소생되면 또 다시 구타당하였다. 결국 의식을 되찾게 할 수 없게 되자 폭도들은 그에게 찬물을 끼얹고 넓이와 길이가 2.4‘인치’인 국기, 그의 말에 의하면 “그 위대한 ‘애국자’들이 발견할 수 있었던 유일한 국기”에 대해 그가 경례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그 기를 쳐들어 올리면서 그의 팔도 역시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는 자기 손을 아래로 숙여 경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였다. 잠시 후 그들은 그의 목에다 줄을 둘러 그를 땅에 쓰러지게 해서 질질 끌고 유치장으로 데려갔다. 그들의 말하는 소리가 그에게 희미하게 들렸다. “가서 저놈 목을 매달자. 그렇게 해서 여호와의 증인들을 우리에게서 영원히 없애버리자.” 그후 얼마 있지 않아 그들은 바로 그렇게 했다. ‘필라스’ 형제는 이렇게 기술한다. “그들은 1.5‘인치’ 두께의 새로운 대마 줄을 내 목에 둘렀으며 귀 뒤로 해서 교수형 집행하는 식으로 매서 나를 질질 끌고 거리로 나아 갔다. 그 다음에 그 줄은 건물 밖으로 나와 있는 철관 위로 던져졌다. 4명 내지 5명의 폭도들이 줄을 끌어 당기기 시작했다. 나는 지면에서 들려 올렸고 줄은 팽팽해졌으며 나는 의식을 잃었다.”

‘필라스’ 형제가 그 다음으로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차가운 유치장으로 돌아와 있다는 것이었다. 그를 진찰한 의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피를 많이 흘렸고 눈이 팽창해 있으므로 이 사람을 살리려면 병원으로 데려가는 것이 좋겠읍니다.” 그 말에 서장의 대꾸는 이러하였다. “저 녀석은 내가 이전에 본 일이 없는 가장 고집센 악마요.” ‘필라스’ 형제는 이렇게 말한다. “그의 말은 나에게 참으로 격려가 되었다. 그들은 내가 타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의사가 떠난 뒤 폭도들은 차겁고 불도 없는 유치장으로 줄지어 들어 왔다. 그들은 ‘필라스’ 형제의 얼굴을 보려고 성냥불을 켰는데, 그들이 “그 녀석 아직도 안죽었어?”라고 묻는 소리가 그에게 들렸다. 어떤 사람이 “응, 그러나 곧 죽을 거야”라고 대답하였다. 푹 젖어 있고 뼛속까지 한기가 느껴졌지만 그들이 죽었다고 생각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필라스’ 형제는 떨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드디어 그들은 떠났고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결국 문이 열리고 ‘텍사스’ 주립 경찰이 들어왔으며 ‘필라스’ 형제는 ‘앰블런스’에 실려 ‘텍사스’ 주 ‘피츠버어그’ 병원으로 옮겨졌다. 폭도들은 6시간 동안 그를 마음대로 하였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를 목매달았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가 아직 살아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그 대답을 다음날 늦게서야 알게 되었다”고 ‘필라스’ 형제는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

“‘톰 윌리암스’ 형제가 ‘피츠버어그’ 병원의 병동감옥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곳에서 나는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설퍼스프링’의 변호사로서 의를 위한 진정한 투사였다. 그는 내가 있는 곳을 알아보려고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그 고장을 상대로 고소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내가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형제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었다. 그때 그는 나에 관한 소문이 그 고장에 파다하게 알려져 있다고 말하였다. 즉 내가 목 매달렸으나 줄이 끊어졌다는 사실이!”

“후에 연방 수사국이 공식적으로 수사를 하고 그로 인해 대배심원의 심리가 있었을 때 여러 명의 오순절 교인들이 자진해서 증언하였다. 그들은 ‘오늘은 여호와의 증인들이요 내일은 우리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목 매달리는 것을 묘사하면서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그가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줄이 끊어졌다. 그 줄이 끊어진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그렇게 하신 분이 주이심을 알았다.’”

서장과 다른 관리들은 주 경계 밖으로 도망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다. ‘필라스’ 형제는 회복되었고 그 지역에서 형제들의 종으로서의 그의 활동을 재개하였다.

무자비한 박해를 견딤

“나라면 그런 무자비한 박해를 결코 견딜 수 없을 것이다!”라고 당신은 말할지 모른다. 그렇다. 당신의 힘만으로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신이 영적으로 세워 주는 그분의 마련을 받아들인다면 여호와께서 당신을 강하게 하실 수 있다. 박해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주 주권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사실상 마귀의 시험 아래서 여호와께 계속 충성을 지킬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사단’은 하나님에게 도전하였다. 하나님께 계속 충성하여, ‘사단’이 거짓말장이임을 증명하고 그 쟁점에 있어서 여호와를 지지한다는 것은 참으로 큰 특권이다.—욥 1:1-2:10; 잠언 27:11.

미합중국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폭도들의 많은 공격이 발생하였던 그러한 혼란스러운 때로부터 여러 해가 지나가면서 하나님의 백성은 여호와께 온전히 의뢰할 필요성을 점점 더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 원칙과 일치하게 자신과 사랑하는 자들을 방어하는 반면 공격하기 위해서 살륙적인 무기로 무장하지 않는다. (마태 26:51, 52; 디모데 후 2:24)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의 싸우는 병기가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님’을 인정한다.—고린도 후 10:4; 1968년 9월 1일호 국문 「파수대」 403-407면 참조.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신권 대회

2차 세계 대전 중에 인도주의는 고통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박해는 심하였다. 그러나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셨다.’ (시 46:1, 7)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영적인 면으로 좋은 것들이 풍부하게 공급되도록 하셨다. 그러한 마련과 관련하여 아주 주목할 만한 것은 1941년 8월 6-10일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의 신권 대회’였다.

여호와의 종들은 그 대회에 참석하기를 열망하였다. 그래서 많은 여호와의 종들이 ‘세인트루이스’를 향하여 여행 중에 있었다. ‘에이. 엘. 맥크리리’ 자매는 이렇게 말한다. “이내 우리는 모든 증인들이 자기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잡지(「파수대」나 「위안」지)를 차창에 놓아 두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도 그렇게 하였다. 전체 여행 중 우리를 스쳐 가는 전혀 낯선 사람들에게 우리는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미소와 손을 흔드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우리의 형제들임을 알 수 있었다.”

‘가톨릭’ 행동대와 외국 참전 재향군인회에서 압력을 가하였지만 경기장 경영자측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곳을 사용하기로 한 계약을 취소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들은 악선전을 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빌려 주기로 한 방 계약을 많은 집 주인들로 하여금 취소하게 하였다. “수녀들이 집집으로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방을 빌려주지 말라고 이야기하였다”고 ‘로버어트 이이. 레이너’는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세인트루이스’에 도착하자 “많은 증인들에게 숙박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경기장 구내에서 잘 수 있도록 요를 만들고 그 속을 집어 넣는 일을 해야 하였다”고 ‘마가레트 제이. 로저스’는 알려 준다.

숙박 시설 문제에 대하여 ‘지이. 제이. 잭슨’ 부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회 기간 중에 한 증인 어머니와 그 어린이가 밤에 대회장 구내 잔디 위에서 자고 있는 사진이 신문에 났다. 그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의 거짓 선생들보다 더 동정심을 가지고 있는 주민들은 숙박부에 전화하여 여분의 방을 증인들이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전보, 전화, 편지, 개인적인 방문과 다른 방법을 통해 방이 제공되었다. 길에서 왕국 전도인들을 붙들고 그들에게 숙박 시설을 제공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어떤 증인들은 ‘신권 트레일러 도시’로 향하였다. 점점 불어나서 그곳은 마침내 677대의 ‘트레일러’, 1,824개의 천막, 숙박 설비를 갖춘 100대의 승용차, 99대의 ‘트럭’, 3대의 ‘버스’ 그리고 15,526명의 사람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에드나 고라’는 “굉장하였다”고 말하면서 역시 이런 말도 하고 있다. “거리의 이름이 붙여지고 세탁 시설, 알맞은 목욕 시설 등이 있었다. 여러 주에서 온 사람들이 ‘트레일러’와 천막과 ‘버스’에서 모두가 조화를 이루어 사는 광경은 놀라운 것이었다.”

주요 ‘프로그램’ 몇 가지

대회 ‘프로그램’은 진정으로 영적인 보상을 주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지금 ‘파나마’에서 선교인으로 일하고 있는 ‘해이즐 버포오드’는 이렇게 말한다. “그 대회에서 최고 주권자이신 여호와의 우주 통치라는 쟁점과 그것이 여호와의 종들의 충성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하는 점이 밝혀졌는데 그것은 참으로 감격적이었다. ··· 여호와께서 전세계적으로 자기 백성에게 그러한 심한 박해를 허용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이전 어느 때보다 더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충성”이란 제목의 연설에서 ‘러더포오드’ 형제는 ‘욥’ 시대에 ‘사단’이 제기한 문제는 “여호와는 가장 심한 시험 아래서도 하나님께 충성과 순종을 입증할 사람들을 지상에서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렇지만 주요 쟁점은 우주 지배 문제임을 밝혔다. 특히 연사는 청중에게 그리스도 예수에 의한 신권 정부가 여호와의 이름을 입증할 것이며, 의를 사랑하고 여호와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구출할 것임을 이해하고, 온전히 전적으로 그 신권정부에 충성을 하도록 격려하였다.

대회에 참석한 대표자들의 마음을 특별히 감동시킨 ‘프로그램’이 있었다. 1941년 8월 10일 일요일은 ‘세인트루이스’ 대회에서 “어린이들의 날”이었다. 그날 오전 일찍 침례 연설이 있었고 3,903명이 침례를 받았는데 그 중에 1,357명이 어린이들이었다. 그러나 어린이들에게 있어서—그리고 어른들에게 있어서도—그날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인쇄된 대회 ‘프로그램’에 “부모가 헌신하였고 지정된 좌석권을 가진 5세에서 18세 사이의 모든 어린이들은 연단 바로 앞 주 경기장에 모일 것이다”라는 광고가 들어 있었다. “왕의 어린이”들이라는 ‘러더포오드’ 형제의 연설이 오전 11:00에 계획되어 있었다.

그때까지 대회장에 모인 청중은 115,000명으로서 엄청난 수였다. 연사가 서게 될 연단 바로 앞과 그 주변의 모든 특별석에는 특별한 청중들이 있었는데 모두가 5세에서 18세 사이의 어린이들이었다. ‘러더포오드’ 형제가 연단으로 걸어 나오자 그 어린이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박수로 맞이하였다. 그는 손수건을 흔들었고, 수많은 어린이들도 그 답으로 손을 흔들었다. 곧 이어 그는 연단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앞을 바라보며 문자 그대로 밝은 표정을 지었다.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는 그 모든 어린이들과 많은 청중 가운데 있는 다른 수천명에게 할 말이 많았다. 예를 들어 ‘도로시 윌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요컨대 ‘러더포오드’ 형제가 ‘여러분이 대회에 오면서 도중에 구경한 것들은 여러분이 갖게 될 것과 비교할 때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는 말을 했을 때 지상에 있을 낙원 상태에 대한 소망이 우리에게 더욱 확실한 것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날, 어린이 청중 가운데 있었던 ‘닐 엘. 캘러웨이’는 언젠가 다음과 같이 기술한 바 있다. “··· 연설을 마치자 협회장은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여러분 각자에게 한가지 문제를 제시하겠읍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로 결정하였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신권 정부의 편에 섰으며, 하나님과 그의 왕에게 순종하기로 결심하신 분은 모두 일어서 보십시오!’

“우리 모두가 함께 일어섰다. 협회장은 이처럼 외쳤다. ‘보십시오. 15,000명 이상이나 되는 새로운 왕국 증인들입니다!’ 긴 박수가 있은 후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나님의 왕국과 그것이 가져올 축복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 위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는 사람은 모두 “예”라고 대답해 보십시오!’ 그러자 서 있는 15,000명의 어린이들로부터 “예”라는 소리가 우뢰와 같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나서 협회장은 이렇게 말하였다. ‘여호와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도구가 여러분에게 있다면 그것을 부지런히 사용하겠읍니까?’ 우리는 ‘예’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앉으십시오. 그리고 나는 그 도구에 대해 여러분에게 말할 것입니다. 주께서는 여러분을 위한 소식으로서 이 책을 준비할 수 있게 허락하셨읍니다. 이 책의 이름은 「어린이들」입니다.’ 아주 굉장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경기장의 특별석과 ‘이동 주택 주차지’에 자리잡은 어린이들에게 ‘러더포오드’ 형제가 쓴 「어린이들」이란 새 책이 한 부씩 무료로 주어졌다.

이 훌륭한 행사에 참석했을 당시는 어린이에 불과했던 형제들로서 그후 계속 발전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조오지 디이. 캐론’은 말한다. “그들은 ‘파이오니아’가 되었고, ‘길르앗’ 학교에 입학하여 선교인으로서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벧엘’에 들어갔고 다른 면으로도 조직과 함께 전진하였다. 오늘날 그들은 전세계적으로 많은 회중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힘이 되고 있다.”

1941년 8월 10일 일요일 오후 병으로 쇠약한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는 대회 청중에게 마지막 연설을 하였다. 그는 원고도 없이 약 45분간 즉흥 연설로 그렇게 하였다.

그는 여호와의 백성의 지도자에 대해 몇가지 매우 의미 깊은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는 이곳에 참석해 계실 외부 인사들에게 여러분이 한 인간을 지도자로 생각하는지에 관하여 알게 하므로 그들이 잊는 일이 없게 하기를 원합니다. 어떤 운동이 발생하여 성장하기 시작하면 언제나 어떤 중요한 인물 곧 많은 추종자들을 가진 한 지도자가 있다고 합니다. 이 청중 가운데 여기 서 있는 이 사람인 내가 여호와의 증인들의 지도자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예’라고 말씀하십시오. [이구동성으로 ‘아니요.’]

“여기 계시는 여러분이, 나도 주의 종들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며, 우리가 연합된 가운데 함께 일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스도를 섬긴다고 믿으신다면 ‘예’라고 말씀하십시오. [이구동성으로 ‘예’]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한 단체로서 일하기 위하여 나를 지적 지도자로 삼아야 할 필요가 없읍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미주리’ 주의 느릅나무 곤봉으로 마귀와 싸우곤 하겠지만 그들은 이제 더 효과적인 영의 검으로 싸웁니다.”

이 마지막 연설에서 ‘러더포오드’ 형제는 청중에게 왕국 소식의 전파 활동을 계속 수행할 것을 거듭 촉구하였다.

‘벳-사림’에서의 마지막 날들

11월에 가서 ‘러더포오드’ 형제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인디아나’ 주 ‘엘크하트’에서 수술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후 그는 ‘캘리포니아’ 주로 가고 싶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벳-사림”이라고 알려진 ‘샌디에고’ 집으로 오게 되었다. 이미 얼마 동안 그의 동료들과 가장 우수한 의사들은 그의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러더포오드’ 형제는 여호와께 대한 충성 때문에 1918-1919년의 부당한 수감 생활에서 풀려난 후 심한 폐렴을 앓았다. 그후 그의 한쪽 폐만 성하였다. 그가 겨울에 ‘뉴우요오크’ ‘브루클린’에 남아서 협회장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1920년대에는 의사의 치료를 받으면서 ‘샌디에고’로 갔다. 그곳의 기후는 특별히 좋았기 때문에 의사는 가능하면 오래 ‘샌디에고’에서 지내도록 그에게 권고하였다. ‘러더포오드’는 결국 그렇게 했다.

시간이 흘러 가면서 ‘러더포오드’ 형제가 사용할 집을 짓도록 직접적인 기부가 있었다. 그 집은 ‘왙취 타워 협회’가 경비를 지출하여 세운 것이 아니다. 그것에 관하여 1939년에 나온 「구원」이라는 책은 이렇게 말하였다.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고’에 자그마한 땅이 있다. 1929년 그곳에 집 한 채를 세웠는데 그것을 ‘벳-사림’이라고 부르고 있고 그렇게 알려져 있다.”

‘해이즐 버포오드’ 자매는 1941년 11월 ‘러더포오드’ 형제가 가서 있게 된 ‘벳-사림’에서 마지막 병환중에 있는 ‘러더포오드’ 형제를 돌보았던 간호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 자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는 낮에는 온종일 침소에 있다가 그 다음 밤새 협회일로 바빴고 우리를 계속 활동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12월 중순경 어느날 아침 ‘노워’ 형제를 포함한 세 형제가 ‘브루클린’으로부터 도착하였다. ‘버포오드’ 자매는 이렇게 회고한다. “그들은 「연감」과 다른 조직적인 문제에 대한 연례보고를 검토하기 위해 그와 함께 며칠을 보냈다. 그들이 출발한 후 ‘러더포오드’ 형제는 계속 약화되어 약 3주일 후인 1942년 1월 8일 목요일에 그는 자기의 충성스러운 지적 행로를 마쳤으며, 그의 천적 아버지의 궁정에서의 더 흐뭇한 봉사의 특권을 즐길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날 늦게 오후 5:15 장거리 전화로 그 소식이 ‘브루클린’ 본부에 전해졌다.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브루클린’ ‘벧엘’은 어떠했는가? ‘윌리암 에이. 엘로드’는 이렇게 말한다. “‘러더포오드’ 형제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 날을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발표는 간단했다. 아무 말들이 없었다.”

조용한 변천

‘조오셉 프랭클린 러더포오드’는 1942년 1월 8일 목요일 72세를 일기로 지적인 생애를 마쳤다. 그는 ‘왙취 타워 협회’장으로 25년 동안 일하였다. 초대 협회장 ‘차알스 테이즈 러셀’이 1916년에 사망하였을 때 ‘성경 연구생’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그들이 하나님의 봉사를 어떻게 수행해 나아갈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더우기 이기적인 사람들은 협회를 지배하려고 하였으며, 그들의 반대와 술책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완전히 극복 되었지만 그로 인해 얼마 동안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의 사망은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의 적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활동이 약화되어 중지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오판이었다. “신권 조직은 조금도 정체되거나 흔들리지 않고 계속 전진하였다”고 ‘그랜트 수우터’는 말한다.

1942년 1월 13일 ‘브루클린 벧엘’에서 하나님의 백성에 의해 사용되는 ‘펜실베이니아’ 및 ‘뉴우요오크’ 법인의 모든 이사들이 합동으로 회합을 가졌다. 며칠전에 부협회장 ‘나단 에이치. 노워’는 기도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간절히 구할 것을 요청한 바 있었으며 그들은 그렇게 하였다. 그들의 합동회의는 여호와의 지도를 구하는 기도로 시작되었고 주의 깊이 고려한 후 협회장으로서 ‘노워’ 형제가 지명되었고 전원 일치로 선출되었다. ‘시이. 더불류. 바아버’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노워’ 형제의 임명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그를 지원하고 여호와의 조직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증명하는 데 모두가 함께 협조할 것을 굳게 결심하였다. 협회의 모든 이사들도 역시 온전히 연합되어 있었다.” 여호와의 종들이 전세계적으로 연합되어 있고 전파 사업을 계속 수행할 굳은 결의가 되어 있음을 알리는 많은 전보와 서신을 받게 되었다.

‘나단 호머 노워’는 1905년 ‘펜실베이니아’ 주 ‘베들레헴’에서 미국 태생인 부모 사이에 태어났다. 16세 때 그는 ‘성경 연구’생들의 ‘알렌타운’ 회중과 연합하게 되었고 1922년 ‘시다포인트’ 대회에 참석하였었는데 그 대회에서 그는 개혁 교회를 탈퇴할 것을 결심하였다. 자기 생명을 여호와 하나님게 바치는 헌신의 상징으로 물에서 침례를 받게 된 것은 1923년 7월 4일이었는데 그때는 ‘프레드릭 더불류. 프랜즈’가 ‘브루클린 벧엘’로부터 ‘알렌타운’ 회중을 방문할 때였다. ‘프레드 프렌즈’ 형제가 침례 연설을 하였고 그날 ‘리틀 르하이’ 강에서 침례받은 사람들 중에 18세의 ‘나단 에이치. 노워’가 끼어 있었다. 그날은 생각할수록 즐거운 날이며 지금까지 51년 이상을 ‘프레드 프랜즈’ 형제와 함께 나란히 일할 특권을 가지게 된 것은 ‘노워’ 형제에게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약 두 달 후인 1923년 9월 6일 ‘노워’ 형제는 ‘브루클린 벧엘’ 가족 성원이 되었다. ‘시이. 더불류. 바아버’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도착한 정오에 우리가 점심을 들기 위해 집에 돌아오니 A-9번 방 옷장에 어떤 젊은 형제가 부지런히 옷과 물건을 넣고 있었다. 그는 ‘스테이튼 아일런드’의 WBBR로 가게 된 한 형제를 대신해서 들어온 것인데 변경이 있는 줄 모르는 우리로부터 몇 마디 항의조의 말을 듣게 되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이 방에는 사람이 더 들어올 자리가 없는데.’ 우리는 방에 한 사람이 더 들어오면 좁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곧 조용해졌으며 그 젊은 형제는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엔. 에이치. 노워’ 형제였다. 적절한 환영은 아니었지만 그러한 점에 대해 여러 해 후에 종종 이야기하고 마음껏 웃었다. 바로 시초부터 그는 무엇이든 필요한 일에 자기를 바치려고 ‘벧엘’에 온 것이 분명했다. 그는 발송부에서 열심히 일하였고, 책임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도록 신속히 발전하였다.”

후에 그는 협회 인쇄 공장 발송 사무를 맡아 보았으며 1928년 2월 8일에 ‘러더포오드’ 형제는 그를 「황금 시대」 잡지 발행에 참여하도록 임명하였다. ‘클레이튼 제이. 우드워드’가 편집인이었고, ‘로버어트 제이. 마아틴’이 업무 책임자였고, ‘나단 에이치. 노워’가 총무겸 재무가 된 것이다. 공장 관리자인 ‘로버어트 제이. 마아틴’이 1932년 9월 23일 사망하자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는 ‘엔. 에이치. 노워’를 그 자리에 임명하였다. 1934년 1월 11일 ‘노워’ 형제는 ‘만민의 설교단회’(현 사단법인 ‘뉴우요오크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이사로 선출되었다. ‘이이. 제이. 코워드’의 사망으로 1935년 1월 10일에 그 회의 부회장이 되었다. 1940년 6월 10일 ‘노워’ 형제는 사단법인 ‘펜실베이니아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이사이자 부협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두 협회의 협회장직에 선출된 것은 1942년 1월 13일의 일이었다. 그는 또한 ‘만국 성경 연구회’의 회장직도 겸임하였다. 사업에 대한 ‘노워’ 형제의 태도를 ‘제이. 엘. 캔트웰’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1940년에 많은 박해가 계속되었고 지부들은 폐쇄되고 있었고 폭도들의 난동은 계속 발생하고 있었다. 어느날 밤 우리는 공장에서 밤일을 하고 있었다. ‘소방 훈련’이 있었고 그후 ‘노워’ 형제는 그가 사회한 보고모임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의 일을 위한 여건이 좋지 않다는 점을 나도 알고 있읍니다. 그러나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꼭 기억해야 할 일은 ‘아마겟돈’이 내일 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오늘밤 밤새도록 공장을 돌리기를 원한다는 점입니다!’”

생명을 위해 사람들을 교육함

여호와의 백성은 야외 봉사에서 ‘증거 카아드’와 축음기를 사용해 왔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백성들은 성서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들은 소망에 관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새로운 협회장 ‘엔. 에이치. 노워’의 견해였다. ‘시이. 제임스 우드워드’는 과거를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러더포오드’ 형제의 시대에는 ‘종교는 올무이며 술책이다’는 점이 강조된 반면, 이제는 전세계적인 확장의 시대가 밝아오고 있었으며 여호와의 백성이 여태까지 알지 못하던 범위로 교육—성서적인 그리고 조직적인—이 시작되었다.”

계속되는 여러 해 동안 성서 교육에 대한 강조가 더욱 뚜렸해지게 되었다. 참으로 여호와의 증인들은 생명을 위한 교육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신권 전도 ‘코오스’

‘헨리 에이. 캔트웰’은 이렇게 말한다. “‘노워’ 형제가 협회장이 되어 바로 한 달이 조금 넘었을 그 당시 ‘신권 전도 상급 코오스’라고 불리운 마련이 생겨났다.” 그러면 그것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일종의 학교로서 1942년 2월 ‘브루클린 벧엘’에서 시작되었다.

‘시이. 더불류. 바아버’는 이렇게 설명한다. “‘브루클린’ ‘벧엘’ 가족 가운데 남자 성원들은 모두 등록하도록 초대되었다. ··· 그 ‘코오스’에는 먼저 학생들 전체에게 하는 연설이 있었다. 자매들도 참석하도록 초대되었으나 그 당시 그들은 학교에 등록하지는 않았다. 연설 후에 자리를 더 작은 방들로 옮겨 등록된 모두가 훈련된 충고자의 지도 아래 학생 연설을 하곤 하였다.” ‘엘. 이이. 로이쉬’는 “매달 우리는 우리 학교 강사인 ‘티이. 제이. 설리반’ 형제가 준비한 복습을 하였다”고 덧붙인다.

알듯한가? 당신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면 30여년 전에 ‘브루클린’ ‘벧엘’에서 시작된 것이 무엇인지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신권 전도 학교이다. 얼마 있지 않아 다른 여호와의 찬양자들도 역시 그러한 교육으로부터 유익을 얻게 되었다. 1943년 4월 17일과 18일에 미합중국 전역 247개 도시에서 열린 “행동하도록 부름”이라는 대회에서 “신권 전도 ‘코오스’”가 발표되었고 실연으로 보여 주었다. 뜻밖의 선물로서 동일한 명칭을 가진 96면의 소책자가 발표되었는데 그것은 각 회중에서 새로운 학교를 사회하는 방법을 설명하였고 또한 매주 교훈 연설을 위한 자료를 제시하였다. 임명된 학교 강사가 사회자가 되며, 등록한 남자들이 여러 가지 성서적인 제목으로 6분간 연설하면 그 학생 연설에 대해 그 강사가 건설적인 충고를 하게 되어 있었다.

지금 당신이 신권 전도 학교에 등록되어 있는 분이라면 맨 처음의 학생 연설에 대해서 염려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1940년대 초와 같이 학교 전체가 다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해 보라. 그렇다면 어떻겠는가? 그 학교에서 형제들이 처음으로 연설한다는 것은 굉장한 경험일 수 있었다. ‘줄리오 에스. 라뮤’는 이런 점을 시인하고 있다. “나의 무릎은 서로 마주 치고 손은 떨리고 이빨은 덜덜거렸다. 나는 6분간 계속하지 못했다. 3분간에 전체 연설을 마쳐버렸다. 그것이 연단에서의 처음 연설이었으나 나는 도중에 그만두지는 않았다.” “영원한 왕”이 ‘엔젤로 카탄자로’의 처음 학생 연설 제목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며칠 동안 매일 밤마다 잠꼬대로 그 연설을 하더라고 이야기하셨다.” 그러나 여호와께 기도하고 의뢰하는 것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루이사 에이. 와링턴’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자발적이었으며 노력하였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이 어떻게 그들을 도와서 ··· 유능하고 확신있는 연사가 되게 하는지 살펴보면 참으로 놀라웠다.”

1959년부터는 하나님의 백성의 회중 내에 있는 자매들도 신권 전도 학교에 등록할 특권을 받았다. 사람들의 가정을 방문하여 사람들에게 6분간 연설하는 방법을 실연으로 보여 주는 것은 자매들에게 상당한 도전이었다. 이제 자매들이 신경을 쓸 차례가 되었다! ‘그레이스 에이. 이스테프’는 자매들이 회중 신권 전도 학교에 참여하게 된 바로 그 첫날 저녁에 연설하게 되었다. 그 자매는 이렇게 시인한다. “정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 연설은 쉬운 제목이었고 상당히 익숙한 내용이어서 그럭저럭 해낼 수 있었다. 그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긴 하였으나 그 후로는 그러한 부가적인 여호와의 축복에 대해서 나는 참으로 즐거워하였다.” 당신도 그렇게 느끼는가?

그렇다, 그 모든 일이 1942년 2월 ‘브루클린’ ‘벧엘’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신권 전도 학교는 전세계 38,256개 여호와의 백성의 회중에서 제공되는 정기적인 그리스도인 훈련 과정이다. 그것이 시작된 이래 신권 전도 학교는 여호와의 백성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해 왔다. 그 초기에 있어서도 연설 능력이 훌륭해지고 개선되는 점이 뚜렷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1944년 이후에는 10여년에 걸친 축음기 사용이, 호별 방문하여 사람들의 가정에서 행하는 신권적인 전파자의 구두 증거로 대치되었다.

신권 전도 학교의 두드러진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다. 그것은 이 ‘프로그램’의 정규적인 부분이 되어 왔다. 신권 전도 학교에서 사용하도록 계획된 초기의 출판물 중에는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준비함」이란 1946년에 발행된 책이 있다. ‘메이블 피이. 엠. 필브릭’은 그 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책은 “위경이 어떻게 더해지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그리고 성서의 기록 및 보존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는 ‘탈무드’가 무엇인지 그리고 ‘마소렛’ 교본이나 다른 여러 가지 특별한 점에 대해서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성서의 각 부분을 분석해 놓은 것이 모든 것 가운데서도 가장 훌륭한 점이었다.”

계속되는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 많은 출판물이 신권 전도 학교를 위해서 마련되었다. 그 중에는 1963년에 나온 것으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유익하다」라는 「파수대」 크기의 서적이 있다. ‘앨리스 밥코크’는 그 책을 “진실로 영적인 보배들의 창고”라고 했는데 그것은 다른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대변한 것이 확실하다. 그 책도 역시 성서 66권을 각각 자세히 토론한 것으로 성서 각 권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익하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현재 신권 전도 학교에서나 개인 연구에서 사용되고 있는 책은 6년간의 연구 조사한 내용이다. 90여 나라에 있는 약 250명의 형제들이 그 책을 위해 일하였으며 또 협회 ‘브루클린’ 본부의 특별 연구진이 재료를 검토하였다. 그 결과가 “아론”부터 “수스 족속(Zuzim)”에 이르는 성경적 제목을 다룬 1,700면의 서적이다. 그 책 이름은? 「성서 이해를 위한 보조서」로서 1970년에 완성되었다. 그것은 참으로 여호와의 마련이었다.

공개 강연 운동

1940년대에 신권 전도 학교는 이내 공개 강연을 할 자격을 갖춘 많은 형제들을 배출하였다. 그리하여 1945년 1월에는 전세계적으로 공개 강연 운동이 시작되었다. 각 연사들은 자신이 연설을 준비하나 ‘왙취 타워 협회’는 제목을 선정하고 이들 한 시간 강연을 위해 각각 일 면의 골자를 마련해 줌으로써 제공이 일률적이 되게 하였다. 이 공개 연설 운동은 8회에 걸친 일련의 강연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첫 번 강연 제목은 “인간이 세계 건축자로서 성공할 것인가?”였다.

연사 외에 다른 왕국 선포자들도 그 운동에 한 몫을 담당하였다. 어떻게? 거리에서 그리고 각 집에서 강연 쪽지를 배부하여 강연을 광고함으로써였다. 때때로 인쇄된 초대장 배부와 강연을 광고하는 ‘플래카드’를 메고 다니는 일도 병행되었다. 종종 왕국회관에서 강연이 행해졌으나 일련의 강연은 다른 시설을 빌리거나 회중 구역 가운데서 약간 외딴 곳에서 계획되기도 하였다. 당신이 정기적으로 그리스도인 집회에 참석 한다면 바로 오늘날에도 그러한 공개 집회로부터 유익을 얻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초기에 공개 강연을 한다는 것은 상당한 도전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일이었다. ‘더불류. 엘. 펠레’는 이렇게 말한다. “참으로 여러 해 동안, 공개 강연을 하도록 되어 있는 전날 밤에는 침대 옆에서 무릎을 꿇고 여호와께 그분을 기쁘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연설을 할 수 있도록 능력과 힘을 달라고 기도하곤 했다. 여호와께서는 나의 호소를 항상 들어 주셨으며 신권 전도 학교의 젊은 형제들에게도 그들의 호소도 역시 들어 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와 같이 하라고 나는 권유하였다.”—시 65:2.

여호와께서 세계적인 증거를 위해 마련하시다

약 30년전 인류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와중에 있었다. 그 당시 어떤 사람들에게는 왕국 전파 활동의 국제적인 확장을 위한 계획이 비실용적인 것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호와의 영은 여호와의 종들을 강화하여 전진하게 하였다. 생명을 위한 교육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1942년 9월 ‘노워’ 형제와 ‘왙취 타워 협회’의 다른 이사들은 전세계 여러 나라에서 봉사 활동을 하게 될 선교인 훈련을 위하여 학교를 설립할 것을 전원일치로 승인하였다. 그 학교는 어디에서 운영될 것인가? ‘뉴우요오크’ 주 북부 ‘핑거’ 호 지역에 있는 협회 소유지 즉 ‘사우드 랜싱’ 근처의 왕국 농장에서였다.

그곳에는 1941년 ‘왙취 타워 협회’가 완성시킨 3층의 커다란 벽돌 건물이 있었다. 그 건물은 심한 박해로 말미암아 그곳으로 이전해야 할 경우 ‘브루클린’ ‘벧엘’ 가족들의 피난처로서 건축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건물은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실제로 사용되지 않았다. 아마 그 건물에 대해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시고 여호와께서 문제를 전체적으로 지도하신 것으로 보였다. 이제는 새로운 신권적 교육 기관을 위한 계획이 세워졌다. 그 학교의 명칭은 ‘길르앗 왙취 타워 성서 대학’이었다. 후에 그 학교는 ‘길르앗 왙취 타워 성서 학교’라 불리웠다.

한바탕 바쁜 일을 치르게 되었다. 1942년 10월로부터 시작하여 ‘에이. 디이. 쉬로이더’, ‘맥스웰 지이. 프렌드’, ‘에콰르도 에프. 켈러’는 강의 내용을 마련하고 교과서를 구하고 도서를 모으는 일을 하여 통치체가 개요를 밝힌 과정들을 준비하였다. 동시에 도서실, 강당, 교실, 숙소 및 다른 시설을 마련하기 위해 왕국 농장에 있는 건물들을 알맞게 고쳤다. 그 여러 달 동안은 감동적인 때였다!

어떤 ‘파이오니아’들이 새로운 학교에 대한 신청서를 받게 되었을 때 그 놀라움을 상상해 보라. 그 원서가 수락되었을 때는 더욱 감격적이었다. ‘차알스 아이젠하워’ 부부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정말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였지만 그 특권에는 감사하였다. 우리의 신청서는 수락되었다. 우리는 우리 차와 ‘트레일러’를 팔고 학교로 향하였다. 그것이 ‘길르앗’ 제1일기였다. 새로운 학교에 새로운 수업에, 강사와 학생도 새로운 사람들이었다.”

열렬히 기대하였던 개학날—1943년 2월 1일 월요일—이 왔다. 왕국 농장의 벌판은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날은 상당히 추운 날이었다. 그러나 집행부 건물에는 49명의 남자와 51명의 여자—기혼인 사람도 있었고, 미혼인 사람도 있었다—가 크게 즐거워하며 모여 있었다. 학교의 봉헌식을 위하여 협회 이사들, 교직원, 벗들과 친척이 그들과 함께 하였다.—모두 합쳐 161명이었다.

‘에프. 더불류. 프랜즈’와 ‘더불류. 이이. 밴 앰버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연설하였다. ‘노워’ 형제는 환영사와 봉헌식 연설을 하였다. 거기에 참석하였던 모두는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였음이 분명하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 목적을 위해 이 땅과 ‘길르앗’이라고 불리우는 건물을 마련하셨읍니다. 그분께 우리는 모든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바입니다.” 거기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이 학교의 설립은 신권적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었다.

성서 연구, 신권적 야외 봉사, 성서 공개 강연, 최고법, 성서 주제—이상은 5개월의 과정 가운데 학생들이 부지런히 공부하면서 주의를 기울인 몇가지 주제들이다. 외국어 교육도 들어 있었는데 1기생들은 서반아어를 배웠다. 참으로 배워야 할 것이 많았다. 그러나 ‘길르앗’ 학생들은 매 수업일에 얼마의 시간을 농장일이나 가사 일을 돌보는 데도 바쳤다. 한가지 유익을 들자면 그렇게 함으로써 정신적인 긴장 해소에 도움이 되었다. 주간의 저녁에는 개인 연구를 하였다. 주말에는 생명을 구하는 왕국 전파 활동을 위한 훌륭한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학생들과 강사들이 다같이 야외 봉사에 참여하였다.

‘길르앗’ 학교 초창기의 학생들이 졸업하였을 때는 아직도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일 때였다. 그 당시 ‘유럽’이나 서부의 해양에 있는 섬들 그리고 ‘아시아’로 선교인을 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으므로 그들은 먼저 ‘쿠바’, ‘멕시코’, ‘코스타리카’, ‘푸에르토리코’, ‘캐나다’, ‘알래스카’ 등지로 보내졌다. 그 이래로 그들은 “증거되기 위하여” 왕국의 좋은 소식이 선포되도록 지구 방방곡곡으로 가게 되었다.—마태 24:14.

‘길르앗’ 학교 제 35기 졸업식이 1960년 7월 24일 왕국 농장에서 있었다. 제 36기는 1961년 2월 6일 월요일 ‘뉴우요오크’ ‘브루클린’ ‘콜럼비아’ ‘하이츠’ 107에 있는 ‘왙취 타워 협회’의 시설에서 시작되었다. 그 학교를 협회 본부에 두는 것은 참으로 유익하였다. 이제 학생들은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 성원들을 포함하여 협회에 있는 더 많은 형제들의 연설을 즐길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길르앗 왙취 타워 성서 학교’가 시작된지 30년이 흘렀다. 그동안 이 신권적 교육 기관은 5,500명 이상을 배출하였다. 그 가운데 2,500명 이상이 아직도 전 시간 봉사에 활동적이며 전세계에서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있다.

천국 전도 학교

여러 해를 두고 생명을 위한 신권적 교육이 계속 강조되어 왔다. 1958년에는 새로운 학교를 위한 연구 과정이 착수되었다. 그것은 감독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천국 전도 학교라고 불리웠는데 원래 그 과정은 24일간의 수업일로 이루어진 것으로 96회의 반수업과 20회의 교훈 연설 혹은 강의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과목에는 천국 교리, 야외 봉사, 연설, 감독자가 포함되었다. 천국 전도 학교에 입학한 첫 집단은 25명의 학생들로서 ‘길르앗’ 학교 졸업생들이 아닌 미국의 순회의 종(감독자)과 그 부인들이었다. 그 첫 과정은 1959년 3월 9일부터 4월 3일까지 ‘뉴우요오크’ 주 ‘사우드 랜싱’ 근처의 협회 소유 시설에서 진행되었다. 1967년 4월 9일에 그 학교도 ‘브루클린’ 본부로 이전하였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2주 연구과정으로 시행되는 등 천국 전도 학교에 조정이 있었다. 천국 전도 학교는 전세계 여러 나라에서 열리게 되어 여호와의 백성에게 큰 유익이 되었다. 여러 나라에서는 강사들이 이곳 저곳으로 여행하고 지방 왕국회관을 사용함으로써 더 많은 장로들이 그들에게 더 편리한 장소에서 학교를 갖게 되어 유익을 얻을 수 있었다. 여호와의 백성은 이러한 훌륭한 훈련 과정이 마련된 것에 참으로 감사할 수 있다. 천국 전도 학교는 그리스도인 감독자들이 그들의 의무와 특권에 대해 자격을 구비하도록 큰 역할을 해 왔다.

생명을 위한 신권적 교육에 있어서 간과해서는 안될 흥미있는 한 가지 부면이 여기 있다. 성서 지식을 갈구하는 어떤 사람은 여러 해 동안 문맹자였다. 그렇지만 그들의 문제가 무시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루어진 조직은 여러 나라에서 문맹퇴치반을 마련하였다. 어떤 곳에서는 정부관리들로부터 많은 치하를 받았다. 남녀들이 읽고 쓰기를 배웠으며 그들 중에 여호와의 영예와 영광을 위해서 귀중한 봉사의 특권을 즐기게 된 사람이 많다.

“전진”의 신호가 울리다

1942년 ‘노워’ 형제와 동료 집행자들은 앞에 많은 일이 놓여 있음을 인식하였다. 사실상 1942년 9월 18-20일에 ‘여호와의 증인의 신세계 신권 대회’에서 “전진”의 신호가 울렸다. ‘오하이오’ 주 ‘클리블런드’가 중심 도시로서 미합중국 전역에 걸쳐 51개 도시와 연결되었다.

1942년 9월 18일 금요일 저녁 ‘에프. 더불류. 프랜즈’가 대회 기조 연설을 하였다. “유일한 빛”이란 제목의 그 연설은 이사야 49장과 60장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 연설은 “전진”의 신호를 분명히 울렸다. ‘줄리아 윌콕스’는 이렇게 기술한다. “기조 연설인 ‘유일한 빛’의 결론에서 손을 늦추고 긴장을 풀 때가 왔다고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그때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 낡은 세상의 어두움 가운데서 유일한 빛을 계속 반영하도록 ‘일어나 빛을 발할’ 때였다.”

‘에프. 더불류. 프랜즈’에 이어 ‘노워’ 형제가 “‘성령의 검’을 제시함”이란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그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있읍니다. 많은 일이 있읍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말로 연설을 시작하였다.

9월 20일 일요일 오후의 공개 강연 내용은 앞에 일이 있음을 더욱 밝혀 주었다. 그 제목은? 참으로 색다른 것이었다. 사실 그 당시에 여러 나라들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그러하였다. 그것은 “평화—그것은 지속될 수 있는가?”였다.

‘노워’ 형제는 그 연설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여호와의 도움으로 그는 그 연설에 ‘전력’을 다 쏟을 결심을 하고 있었다. ‘엘. 이이. 로이쉬’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 달 전부터 그가 ‘평화—그것이 지속될 수 있는가?’라는 공개 강연을 문자 그대로 수십번씩 되풀이해 큰소리로 연습하는 것을 나는 들을 수 있었다. ‘벧엘’에 있는 나의 방은 협회장이 있는 바로 아래층이었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나는 그가 얼마나 오랫 동안 그리고 열심히 연설을 연습하였는지 알 수 있다.”

아주 감동적이었던 그 한시간의 강연은 국제 연맹이 계시록 17장에 나오는 정치적인 붉은 빛 짐승이라고 담대하게 밝혔다. 그 당시에는 무활동인 무저갱에 있었으므로 연맹이 ‘없었으’나 그것이 계속 무저갱에 있지 않을 것임을 지적하였다. (계시 17:8) 그것은 다시 일어날 것이다. ‘노워’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 점을 유의하십시오. 이 예언은 전면 전쟁이 끝나고 그 ‘짐승’이 무저갱에서 나오게 될 때 ‘바벨론’이라는 여자를 등에 업고 나오거나 그것이 나오자마자 그 여자가 그 등에 기어 올라 탈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가져온 평화나 붉은 빛 짐승이 지속적인 것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얼마 있지 않아 그 짐승은 완전히 멸망되어 버릴 것이다.

그 연설을 회상하면서 ‘마리이 기바아드’는 이렇게 말한다. “연맹이 무저갱에서 나와 지속되지 못할 불안정한 평화로 나아갈 것을 보여 주는 등 계시록 17장의 예언은 얼마나 정확하게 밝혀졌는가! 뒤따르는 세계적인 사건들 ‘유럽’에서 승전하고 일본에게 승전한 날이 도래하고 1945년 국제 연합이 미래 평화에 대한 해답이라고 환영을 받았을 때 이 나라에 오게 된 환희로 동요되지 않도록 우리를 얼마나 놀랍게 보호해 주었는가! 정말 그 연설은 실제 적용되는 지속적인 인상을 남겼다.” 그 결론 역시 명백하였다. 여호와의 종들에게 할 일이 있으며 그 일을 할 수 있는 때가 어느 정도 남아 있다는 것이다.

양떼를 방문하는 목자들

1942년의 그 대회에서 ‘왙취 타워 협회’의 대표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회중을 정기적으로 방문할 것이 발표되었다. (이전에는 지구의 종들이 그러한 일을 했으나 그들의 활동과 지역적인 종들 및 지구 대회를 갖는 일 등은 1941년 12월 1일자로 중단되었다.) 여행하는 협회의 대표자들을 파견하는 일은 1942년 10월 1일에 재개되었다. 이 형제들은 “형제들의 종”으로 알려졌으며 오늘날의 순회 감독자에 해당한다. ‘제이. 노리스’ 자매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회중 기록을 조사하고 왕국 관심사를 발전시키는 일에서 형제들을 도왔다. 그러나 모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께서 그의 조직을 통해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였다.”

1946년 10월 15일 이후 그러한 활동과 관련해서 몇가지 새로운 점들이 소개되었다. 영적인 밭을 여러 순회구로 분할하였는 데 각 순회구는 약 20개 부회(회중)로 이루어졌다.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이러한 회중을 위해 일주일 동안 섬겼으며 그 감독자들은 호별 방문 전파에서 증인들을 돕는 데 주로 관심을 가졌다. 한 순회구에 속한 모든 회중은 일년에 두 번씩 한곳에 모여서 3일간의 순회 대회를 가졌는데 그 대회는 “지역의 종”이 주재하였다. 계속되는 여러 해가 지나가면서 이러한 마련에 조정이 있게 되었으며 당신이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이라면 지금도 그것으로부터 유익을 얻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러 해 전에는 그러한 것들이 어떠했는가?

이들 하나님의 양떼의 자진적인 목자들이 나타낸 노력을 살펴보기 위해 1940년대의 지역사업을 예로 들어 보자. ‘니콜라스 코발락’은 1940년대 후반에 미합중국에서 몇몇 형제들과 함께 지역 사업을 한 사람인데, 1949년 10월에 그는 “그 한달 동안 나는 차로 4,020‘마일’을 여행하였다!”고 말한다. 그는 역시 이런 말도 하고 있다. “주말들에는 5개의 순회 대회를 가졌고 그 외에도 그 사이에 몇 회중을 섬겼다. 그러므로 나는 여행하고, 연설하고, 증거하고, 기록을 조사하고, 먹고, 연구하고, 읽고 그리고 잠을 조금 잤을 뿐이다.” 어떤 주간에는 두 회중을 섬기기 위해 2,000‘마일’에 가까운 여행을 하였고 주말에는 순회 대회를 가졌다. 물론 자동차를 사용하는 그의 여행이 전부 그렇게 긴 것은 아니었다. ‘코발락’ 형제는 이런 점을 인정하고 있다. “지금은 회중이 많아져서 더 용이해졌다.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시며 우리를 지원해 주시는 분이다.”

오늘날의 순회 및 지역 감독자들도 여호와를 숭배하는 동료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야외 봉사에서 그들을 돕고자 하며 그들을 영적으로 세워 주고자 한다. 순회 대회 역시 왕국 관심사를 증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봉사 연도에 미합중국에서만도 매주 평균 20개의 순회 대회가 열렸고 평균 참석수가 1,605명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1년 전체를 통틀어서 1,064개 순회 대회가 있었고 그 참석수는 1,708,143명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다

1940년대초에 ‘왙취 타워 협회’의 새로운 집행부가 출범할 당시 제2차 세계 대전은 진행 중이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호와께 대한 자기들의 충성을 시험받고 있었다. 1940년 미합중국은 아직 평화로운 상태에 있었지만 선발징병법이 실시되었다. 그 법은 18세 이상의 젊은 남자들에게 군복무를 위한 징집을 부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법은 4-D에서 “정규 즉 정식으로 임명된 종교 교역자”에 대한 면제를 규정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여호와의 증인들은 교역자로 분류되는 것을 거절당하였다. 그들은 선동적이 아니며 군대나 인간 정부의 다른 계획을 방해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증인들 자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엄정 중립을 지키고자 한다. (요한 17:16) 더우기 그들은 ‘칼을 쳐서 모습을 만들’었다.—이사야 2:2-4.

증인들이 연방 법원에서 구제를 받을 수 있기 전 수많은 경우에 검사들은 증인들이 입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성실을 지키는 자들은 연방지방 법원에서 감옥으로 가게 되었는데 여러 사람들이 법정 최고형인 5년형과 10,000‘달러’의 벌금을 물게 되었다. 흥미롭게도 ‘유진 알브란트’ 형제에 의하면 자기와 6명의 다른 증인들이 선고받을 때 판사는 재판석 뒤에 있는 벽에 걸린 기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들 저 국기가 보이나? 사실, 나는 저 국기에서 나의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저것을 숭배하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 너희들도 그와 같이 생각해야 한다.”

옥중에서 시간을 선용함

투옥된 첫날밤에 겪게 된 일은 잊혀지지 않는 경험이었다. ‘파이오니아’였던 ‘다니엘 시들릭’(지금은 ‘브루클린’ ‘벧엘’에서 일하고 있다)은 그리스도인 중립으로 인하여 1944년에 투옥되었다. 그는 침상 위에 누워 “우르렁거리는 천둥소리 처럼 울려오는” 철문 소리를 듣고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하나씩 그 문들의 소리가 가까와졌고 결국 그의 감방문이 철커덕거리더니 다시 천천히 닫혀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갑자기, 억누를 수 없는 역겨운 감정이 엄습하여 빠져나갈 길 없는 올가미에 걸려있는듯이 느껴졌다. 그러자 곧 똑같이 강렬한 다른 감정이 용솟음치게 되었는데 그것은 나로 하여금 큰 평안과 즐거움, 성서에서 말한 그러한 평화 즉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느끼게 하였다!”—빌립보 4:7.

‘시들릭’ 형제는 다른 많은 형제들과 같이 결국 연방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스도인 중립을 지키는 사람들은 거기서 무엇을 하였는가? 그들은 자기들의 시간을 선용하였다. 형무소 일이 바쁘지 않을 때는 종종 성서 및 ‘왙취 타워 협회’의 출판물의 연구를 위해 집회를 열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또한 그들은 서반아어나 희랍어와 같은 외국어를 공부하는 등 전반적인 자신들의 교육을 개선하였다. ‘웨스트 버지니아’ 주 ‘밀포인트’에 수감되었던 그리스도인들에 관하여 ‘루돌프 제이. 슈널’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회중 서적 연구를 가졌다. ··· 각 ‘기숙사’에 있는 형제들의 집단은 봉사회와 신권 전도 학교를 가졌다. ··· 일요일에는 도서실에서 「파수대」 연구를 가졌다. ··· 우리가 계획할 수 있었던 다른 마련은 소규모 대회들을 가지는 것이었다. ··· 어느 해 여름 우리는 야구장을 사용하였고 음악을 위해 ‘피아노’와 다른 악기를 가지게 되었고 상당히 교육적인 ‘프로’를 즐길 수 있었다.”

그 당시 형무소 내의 그리스도인 교육 ‘프로그램’을 회고하여 ‘에프. 제이. 몰로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모든 집회는 특히 잘 다루어졌으며 그것이 너무나 교육적이었기 때문에 익살스럽게도 우리는 ‘레븐워드’를 연방 형무소를 ‘돌담 대학’이라고 불렀다.”

‘왙취 타워 협회’는 이들 젊은 이들의 영적 복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에이. 에이치. 맥밀란’과 ‘티이. 제이. 설리반’과 같은 특정한 형제들이 그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도록 마련하였다. 그 이유는? 성서적인 충고와 격려를 주기 위해서였다.

자유로운 상태에 있든지 투옥되어 있든지 여호와의 증인들은 제자를 삼는 그들의 임무를 수행할 방법을 모색한다. (마태 28:19, 20) 물론 이들 그리스도인 중립을 지키는 자들에게 열려진 기회가 제한되어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이 그들의 입술을 완전히 잠잠하게 하지는 못하였다. ‘몰로한’ 형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한가지 기회를 아주 잘 사용하였으므로 종신형을 복역하고 있는 선한 마음을 가진 ‘프랭크 리덴’이라는 사람이 나의 첫 ‘추천장’이 되었으며 노새 여물통에서 침례를 받게 되었다.”—고린도 후 3:1-3, 새번역.

사면을 위한 청원

1946년 8월 10일 ‘오하이오’ 주 ‘클리블런드’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의 즐거운 백성 신권 대회’에 참석한 60,000명 이상의 대표자들은 의미심장한 결의문을 전원일치로 채택하였다. 그 결의문은 미합중국 대통령에게 부당하게 유죄 판결을 받고 투옥된 4,000명 이상의 증인들에 대한 완전 사면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관대한 조치가 취해진다면 1940년부터 1946년까지 징모 위원회와 연방 법원에 의해 불법적으로 권리를 유린하게 된 이들 그리스도인 중립을 지키는 사람들의 공권이 회복될 것이다.

‘에드가 시이. 케네디’는 이렇게 말한다. “놀라웁게도 의장은 그러한 모든 사람을 위해 완전 사면을 요청하는 결의문을 협회의 대표자가 미합중국 대통령에게 친히 제시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해리 트루만’이 대통령이었는데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나와 함께 복무하였던 육군 장교였으므로 나는 그 사실을 의장실에 알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였다.” 후에 알려진 바와 같이 1946년 9월 6일 금요일 오후 12:30에 협회의 상임고문 또 한 사람의 변호사와 ‘파이오니아’인 ‘케네디’ 형제는 약 50분 동안 대통령과 면담하였다. ‘케네디’ 형제에 의하면 협회 변호사가 관대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청하는 결의문의 내용을 설명하자 ‘트루만’은 그것을 주의 깊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런 일이 있었다고 ‘케네디’ 형제는 말한다. “‘트루만’은 격한 어조로 이렇게 불쑥 말을 꺼내었다. ‘자기 나라를 위하여 싸우지 않으려는 나쁜 사람들과 상대하고 싶지 않소. 그뿐 아니라 나는 당신네들이 기에 대해 보이는 무례를 좋아하지 않소.’” ‘케네디’ 형제는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이제 내가 말을 할 차례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전에 동료 육군 장교였다고 내 신분을 밝히고 전쟁 중에 나는 그의 포병대가 전투에 필요로 하는 모든 탄약을 공급하는 책임자였다고 말하였다. 나는 내 서류 가방에서 그 연대에 속한 장교들이 찍은 사진 한장을 꺼내 그의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그는 그것을 보더니 자기 도서실 책상 위에도 같은 사진이 걸려 있다고 말하였다. 그 때 나는 그에게 전쟁에서 싸울 때보다 그리스도인 원칙을 위해 싸우는 것이 더 힘들다고 말했다. 나는 간단히 여호와의 증인들이 기를 경배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는 듣고 나서 ‘내가 오해했군요.’라고 말하였다.”

‘케네디’ 형제에 의하면 그 후 대통령은 “협회의 변호사가 선발 징병법에 의거하여 투옥되어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석방 요청에 대한 결론을 내릴 때” 주의를 기울였으며, “그때 ‘트루만’은 법무 장관과 그 문제를 논의해 보겠다고 말하였다.”

때가 되어 ‘트루만’ 대통령은 사면 위원회를 임명하였다. 그들은 수많은 법원 기록과 징모 위원회의 서류를 검토하였으며 얼마의 사면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1947년 12월 23일 ‘트루만’은 1,523건의 사면을 내렸는데 증인들에게는 단지, 136건의 사면을 허용하였을 뿐이다. 4,300명의 증인들에 비해 다른 종교 단체들은 전부 해서 1,000명 밖에 투옥되어 있지 않았었는데도 제일 큰 몫은 그들에게 돌아갔다. 결과적으로 중립을 지키는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성실을 지키려는 그들의 굳은 결심 때문에 냉대를 받은 것이다.

법적 투쟁이 계속되다

1946년 2월 4일 미합중국 대심원은 ‘스미드’와 ‘이스테프’ 사건에서 증인들에게 정당한 심문의 기회를 주지 않고, 그들이 법정에서 자신들을 변호하기도 전에 입대해야 한다고 주장한 연방 하급 법원은 잘못이라고 판결하였다. 1946년 12월 23일 대심원은 ‘깁슨’과 ‘도데즈’ 사건에서 ‘양심적인 거부자 수용소’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혐의를 받았거나, 보고를 한 뒤에 그러한 수용소에 남아있게 된 여호와의 증인들이 법정에서 변호할 수 있도록 그 법률의 적용을 확대하였다.

검사들은 전 시간 ‘파이오니아’들에게 일정한 회중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군복무와 훈련에서 면제될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더우기, 검사들은 부회의 종(주임 감독자들)은 평신도로 이루어진 회중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들로 구성된 회중을 주재하고 있으므로 면제될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주장은 1953년 11월 30일 미합중국 대심원이 여호와의 증인에게 유리하도록 판결한 ‘디킨슨’ 사건을 통해 무효가 되었다. 그 판결은 모든 연방 법원들을 위한 판례가 되었다.

투옥되어 있었음에도 믿음에서 굳건함

그리스도인 중립을 지킨 많은 사람들이 성실을 지킨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던 30여년 전을 돌이켜 볼 때 어떤 사람들은 비슷한 환경에서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의아하게 생각할 지 모른다. 하나님의 백성을 감금시키기 위해 적이 어떤 구실을 대든지 그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러 해 전에 바로 그러한 수백명이 그리스도인 중립을 지켰을 때와 같이 여호와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성실을 지킬 수 있다. 1965년, 중공 감옥에서 7년을 지낸 후 ‘스탠리 어니스트 존스’는 ‘뉴우요오크’ 시 ‘양키 스태디움’에서 34,700명 이상의 청중에게 연설하였다. 투옥되어 있는 동안 그는 성귀들을 묵상해 보고 늘 기도하였으며 여호와의 영의 도움으로 계속 영적으로 튼튼할 수 있었다. 그가 언급한 한 가지는 이런 것이었다. “우리는 ‘십일 동안’만 환난을 당할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것이 끝날 때가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그 정해진 때에 끝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견디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이기게 하실 것이다.”—계시 2:10.

동료 선교인이었던 ‘해럴드 킹’도 중공 감옥에서 약 5년을 보냈다. 그도 역시 영적으로 계속 강함을 유지하였다. 투옥되어 있는 동안 그가 성서적인 사상에 근거하여 심지어 노래까지 작곡하였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그렇다,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노래책—「마음의 음악에 맞추어 노래함」—에는 ‘킹’ 형제가 옥중에서 창작한 노래가 들어 있다. 그것은 10번 “집집으로”라는 노래이다. 그러므로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라. 중공 감옥에서 심한 고역을 치른 ‘존스’ 형제나 ‘킹’ 형제를 포함하여 미합중국에서 그리스도인 중립 때문에 감금되었던 사람들이나 다른 많은 성실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하신 바와 같이 여호와께서 당신을 지원해 주실 수 있다.

도움의 손길을 뻗치다

1945년 9월 2일에 제2차 세계 대전은 끝났다. 이내 ‘왙취 타워 협회’의 지부가 여러 나라에서 재개되었다. 회중들이 다시 세워지고, 계속 증가되는 영적 양식으로부터 다시 유익을 얻게 되었다. 그렇지만 전쟁이 휩쓸고 간 여러 나라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물질적인 것 역시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궁핍한 동료 신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인 사랑의 표시로써 여호와의 백성은 전세계적으로 2년 반에 걸친 구호 활동을 폈다. (요한 13:34, 35) 미합중국, ‘캐나다’, ‘스위스’, ‘스웨덴’, 그리고 다른 곳에 있는 증인들은 ‘오스트리아’, ‘벨기에’, ‘불가리아’, 중국, ‘체코슬로바키아’, ‘덴마크’, ‘영국’, ‘핀란드’, ‘불란서’, ‘독일’, ‘희랍’, ‘항가리’, ‘이탈리아’, ‘네델란드’, ‘노르웨이’, ‘필리핀’, ‘폴란드’, ‘루마니아’ 등지의 그리스도인들을 돕기 위해서 의류 및 식품비를 기부하였다.

‘해이즐’과 ‘헬렌 크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던 우리 형제들이 돌아 오게 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병들고 물질적 소유를 완전히 빼앗겨버린 사람들이 많았고, 자기 가족과 헤어져서 그들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놀라우리만큼 영적으로 강하였다. 전세계의 모든 형제들로부터 그들은 환영을 받았다. 그들의 첫째 관심사는 왕국 사업을 위하여 재조직하고 그들이 투옥되었던 이유인 동일한 좋은 소식을 선포하며 그들의 영적 지식을 보충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커다란 그리고 장기간에 걸친 고난에 이어 그들이 보여준 강한 열심은 우리에게 고무적인 것이었으며, 약속한 것이었지만 그들의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도록 도울 수 있는 특권에 대해서 우리는 즐거워하였다. 의류, 구두 그리고 다른 필요한 것들을 모아다가 왕국회관에서 분류하였으며 형제들에게 발송하기 위해 ‘트럭’들에다 실었다. 그렇게 하여 여러 ‘톤’이 사랑에서 우러나 공급되었다.”

의류 선적량은 총 1,056,247‘파운드’에 이르렀다. 식품 선적량은 총 718,873‘파운드’가 되었다. 그 외에도 이 구호 활동 중 124,110켤레의 구두가 어려운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졌다. 이 모든 것을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1,322,406‘달러’ 90‘센트’나 되었다. 형제들은 그러한 사랑의 선물에 깊은 감사를 나타냈다. 그러한 감사를 나타낸 한 경우를 들어 ‘에스더 알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보내온 감사의 편지는 우리로 하여금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물질적인 것들이 그리고 다른 편으로는 깊은 감사와 격려적인 성실의 기록이 넘쳐 흘렀다.

여러 해에 걸쳐 미합중국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물질적인 면으로 국내외에 있는 동료 신자들을 도울 기회가 많이 있었다. 1970년 ‘페루’의 지진을 생각해 보자. ‘리마’에 있는 회중들은 의류, 식품, 돈을 함께 모아서 즉각적으로 약 7‘톤’에 달하는 물자를 재해 지역에 공급하였다. ‘뉴우요오크’ 시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10‘톤’ 이상의 의류를 기증하였다. 사실상 이것은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의류였다. 또한 ‘왙취 타워 협회’는 재해지역의 형제들에게 무엇이 필요하든지 그것을 구입하는 데 사용하도록 그 지부에 20,000‘달러’를 지급하였다. 마찬가지로 1972년 ‘니카라구아’의 ‘마나구아’가 지진으로 황폐되었을 때 도움이 베풀어졌다. 그러한 그리스도인 사랑의 표시는 제1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선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관대함을 생각하게 한다.—고린도 후 9:1-14.

그러나 여호와의 동료 숭배자들에게 베풀어진 도움이 항상 물질적인 것만은 아니다. 1961년 미합중국과 다른 나라들에 살고 있는 여호와의 종들이 ‘스페인’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숭배의 자유를 주도록 요청하는 수천 통의 서신을 ‘스페인’ 당국자들에게 보낸 사실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그리고 1968년 그들은 ‘말라위’ 당국자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곳에 살고 있는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에 대한 학대에 항의하였다. 그들은 어느 곳에 있든지 간에 그들의 형제들에 대하여 사랑에 찬 진정한 관심을 갖고 있다.

역사적인 대회들이 참으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다

고대나 현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의 커다란 모임은 영적으로 큰 유익을 주는 것이었다. 종종 그 때는 참으로 즐거운 때이기도 하였다. (신명 31:10-13; 느헤미야 8:8, 12) 분명히 그러한 점은 1946년 8월 4-11일 전후 첫해에 ‘오하이오’ 주 ‘클리블런드’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의 즐거운 백성 신권 대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대회는 좀 특이하였다. 이전의 여러 해 동안에는 많은 도시의 대회들이 여러 나라의 무선 전화 시설을 통해 연결되어 많은 청중들이 함께 듣게 되었다. 그러나 ‘즐거운 백성 신권 대회’는 전세계 각지로부터 대표자들이 하나의 도시에 함께 모이는 국제 대회로서 하나님의 백성은 처음으로 그러한 대회를 가지게 되었다.

대회 전에 수행해야 할 커다란 일 한가지는 대표자들을 위한 숙박시설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 일은 광범위한 호별 방문 활동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러나 많은 대표자들은 ‘증인 이동 주택 주차지’에 묵게 되었다. 때가 되자 그곳에 20,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 편리하고도 값싸게 지낼 수가 있었다. 대표자들에게도 육적 음식이 당연히 필요하였으며 대회 장소에 마련된 식당은 정말 의의 있는 것이었다. 그곳에서는 1시간에 15,000 내지 20,000명의 사람들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적 양식이 가장 중요하였으며 그러한 양식이 풍부하게 공급되었다. 예를 들어 ‘에프. 더불류. 프랜즈’는 “추수 때, 세상 끝”에 대해 연설하였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매혹적으로 설명하였다. (마태 13:24-30, 36-43) 그리고 ‘엘. 에이. 스윙글’이 “깨어라!”란 제목을 토론한 것도 그 동일한 대회에서 였다. 그는 20세기의 세계를 합성적이고, 원자 파괴 장치를 가지고 있고, 분사추진식 장비를 갖추고, ‘레이다’로 조종하며, 전자를 이용하면서도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진정한 쟁점에 대해서는 깨어 있지 않기 때문에 멸망의 구렁텅이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노워’ 형제는 “감동적인 부름에 응답함”이란 연설을 하였는데 그의 청중들에게 ‘깨어 있으며 계속 깨어 있으며 「깨어라!」를 읽으라’고 권고하였다. 그렇다. 이전에 「황금 시대」로 알려져 있던 「위안」지를 새로운 잡지 「깨어라!」로 개명하게 되었다. 여러 해 후에 ‘헨리 에이. 캔트웰’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깨어라!」가 많은 사람을 도와서 무기력의 잠에서 깨어나 참 숭배를 향하게 함으로써 그 이름에 합당한 역할을 해 왔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대회에서 받게 된 훌륭한 주요 성서 연구 보조 서적 즉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라는 서적 때문에 그 감동적인 대회를 잊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약 6년 이내의 기간에 초판으로 10,500,000부 이상이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1일에 개정된 그 책은 계속 배부되어 왔으며 1971년 초까지 54개 언어로 총 19,246,710부가 발행되었다.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는 그 당시 20세기 비소설부문의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명단에 4번째로 열거되어 있었다.

1946년의 그 대회에서 8월 8일 목요일은 특히 주목할 만하였다. ‘노워’ 형제는 “재건과 확장하는 문제”에 대해서 연설하였다. 영국 제도의 ‘에드가 클레이’는 후에 그 일을 회고하여 이렇게 기술하였다. “나는 그날 저녁에 연단 위에서 그의 뒤에 있게 되는 특권을 즐겼다. 그가 그 활동을 대략 설명하고 ‘브루클린’ ‘벧엘’ 가정과 공장을 확장할 계획을 발표했을 때 많은 청중들로부터 박수가 반복해서 터져나왔다. 연단에서 얼굴을 확실히 볼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즐거움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세계 무대를 살펴봄

신권적 재건과 확장이 있어야 하였다. 그것은 분명하였다. 그러므로 ‘즐거운 백성 신권 대회’가 있은지 약 6개월 후인 1947년 2월 6일 협회장 ‘엔. 에이치. 노워’와 그의 비서 ‘엠. 지이. 헨첼’은 지구 전역에 걸친 봉사 여행에 들어갔다. 47,795‘마일’의 그러한 여행중 친히 관찰함으로써 세계적인 조직을 강화하고 연합시키기 위하여 어떠한 조처가 필요한지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러한 여행으로 많은 것이 이루어졌다. 특히 그 여행 후에 ‘아시아’의 어떤 나라들과 태평양의 섬들에 ‘길르앗’을 졸업한 선교인들이 파견되었다. 왕국 관심사가 증진되고 있었다. 신권 통치가 크게 확장되고 있었다!

신권 통치의 증가

여호와께서는 ‘작은 자가 천을 이루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루’게 하실 수 있다. (이사야 60:22) 여러 세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에서 그들의 고토로 회복시키셨을 때 그분은 그렇게 하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큰 ‘바벨론’ 즉 거짓 종교 세계 제국의 포로 상태에서 영적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셨다. 더구나 그분은 그들을 축복하여 증가하게 하셨다. 1938년에는 전세계적으로 최고 59,047명의 왕국 선포자들이 있었다. 그러자 여러 해에 걸친 전쟁과 더불어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있었고 그 후에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조직적인 재건이 있게 되었다. 그 결과는? 자, 1949년에 가서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의 수가 317,877명이 되었다! 신권 통치의 증가가 분명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여호와의 증인의 신권 통치 증가 대회’를 위해 모인다는 것은 참으로 적절하였다. 1950년 7월 30일부터 8월 6일까지 8일간의 국제 대회를 위해 그들은 자동차, ‘버스’, 열차, 선박, 비행기 등을 사용하여 ‘뉴우요오크’ 시의 유명한 ‘양키 스태디움’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약 10,000명이나 되는 외국인들이 밀어 닥친 데 놀란 미국 이민국은 무례하게도 이들 방문객들에게 차별대우를 하였다. 그후 대회에 모인 대표자들은 그러한 행동에 강력히 항의하였다.

1946년 ‘오하이오’ 주 ‘클리블런드’에서 열린 국제 대회에서와 같이 수만 명이 식사할 수 있는 대규모적인 식당 설비가 갖추어졌다. 그것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뉴우요오크 타임즈」지는 보건성 검사관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 보도하였다. “나는 매혹되었다. 이처럼 원활하게 진행되는 일은 처음 보았다.”

많은 대표자들은 개인 가정이나 ‘호텔’에 유숙하였다. 그러나 결국 ‘뉴우요오크’ 시에서 40‘마일’ 떨어진 ‘뉴우저어지’ 주의 ‘증인 이동 주택 주차지’에도 13,000명 이상이 야영하게 되었다. ‘마리이 엠. 그리담’은 이렇게 말한다. “수도관, ‘가스’, 전력, 화장실, 목욕 설비 등을 위해 ‘뉴우요오크’ 주 및 ‘뉴우저어지’ 주 전역에서 온 여러 형제들이 여러 주일 동안 작업하였다. ··· 이 도시는 ‘뉴우요오크’ 대회와 무선전신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뉴우요오크’ 시 대회에서 제공되는 모든 내용을 ‘이동 주택 주차지’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1950년 8월 2일 수요일이 밝아 왔을 때 전체적인 여호와의 백성은 그 “‘말씀을 전파하는’ 날”에 놀라운 축복이 그들을 위해서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날 오후 ‘노워’ 형제는 “열방에게 순결한 언어를”이란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스바냐 3:9) 특히 그는 ‘왙취 타워 협회’가 1902년에 「엠파틱 다이야글롯」이라는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서의 번역판을 소유하게 되었고 1926년 12월 21일 협회의 인쇄시설을 사용하여 맨 처음 인쇄한 성서가 바로 그것이었음을 언급하였다. 그후 협회는 아주 괄목할 만한 다른 성서 출판 활동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1950년 그 대회 회기에 특별히 감격적인 일이 있었다. 잊을 수 없는 그 회기에 ‘노워’ 형제는 영어로 된 「신세계역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을 발표하는 커다란 즐거움을 누렸다. 놀랍기도하고 심히 즐겁기도 하여 ‘스태디움’과 ‘이동 주택 주차지’에 있었던 82,075명의 청중은 참으로 열렬히 그리고 오래 계속된 박수와 깊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성서를 받아 들였다. 그 대회에 참석한 대표자들은 그 성서 수만부를 간절한 마음으로 구하였다. 참으로 그것은 대회에 참석한 모두에게 감격적이었다.

“군왕”이 여기에 있다!

여러 해 동안 여호와의 백성은 ‘아브라함’, ‘요셉’, ‘다윗’과 같은 고대 충성자들이 이 악한 사물의 제도가 끝나기 전에 부활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과거에 살았던 그러한 하나님의 종들은 “고대의 훌륭한 인물들”, “고대 충성자들” 그리고 “군왕”등으로 불리웠다. 시편 필자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왕의 아들들이 왕의 열조를 계승할 것이라. 왕이 저희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 (시 45:16) 그러므로 여러 해 전에 여호와의 백성이 대회에 갔을 때 기대가 상당하였다. 아마 고대에 살던 사람들 즉 그러한 군왕 중 한 사람이나 그 보다 더 많은 사람이 나타나 그러한 대회를 특징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1950년 8월 5일 토요일 저녁 ‘에프. 더불류. 프랜즈’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던 82,601명의 대회 참석자들과 생각을 함께 해보자. 성서에 근거한 그 매혹적인 연설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는 이렇게 물었다. “이 국제 대회는 오늘밤 여기 우리들 가운데 미래에 새 땅의 군왕이 될 여러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을 기뻐할 것입니까?”

그러한 물음에 대한 반응은 어떠했겠는가! 몇가지 생생한 회고담이 여기에 있다. “그 대회를 휩쓴 숨막히는 놀라움을 나는 기억하고 있으며 우리는 기대에 차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하였다. ··· 여기에 ‘다윗’이 있다는 말인가 혹은 ‘아브라함’이, ‘다니엘’이, 혹은 ‘욥’이? 많은 자매들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다!”(‘그레이스 에이. 이스테프’) “나는 너무나 흥분하여 야구장의 선수 대기소를 뚫어지게 바라 보면서 내 좌석 가장자리에 겨우 걸터 앉아 있었다. 나는 고대 충성자들 한 사람 혹은 더 많은 사람이 어느 때든지 나타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드위트 티이. 케년’ 자매) “복도에 있는 사람들은 연대를 보기 위해, 아마 ‘아브라함’, ‘다윗’ 혹은 어쩌면, ‘모세’를 보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스태디움’ 입구로 몰려갔다. 청중은 일어섰다. 그 분위기는 엄숙하였다. 나는 긴 수염을 가진 어떤 사람이 연대로 걸어 왔다면 청중들을 걷잡을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엘. 이이. 로이쉬’

그 다음에 의미있는 고요가 청중을 사로 잡았다. 모든 귀는 연사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긴장해 있는 듯했다. 그는 “군왕”으로 번역된 ‘히브리’어의 진정한 의미를 토론하였다. 그는 현대의 “다른 양”도 그들의 믿음 때문에 고대 여호와의 증인들만큼 고통을 당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필요한 대로 이들 “다른 양”을 “온 세계의 군왕”으로 삼는 것에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시 45:16; 요한 10:16) 그 다음에 연설을 결론지으면서 ‘프랜즈’ 형제는 이렇게 말하였다. “훌륭한 전망이 우리 앞에 아주 가까우므로, 자, 신권 조직과 계속 함께 합시다. 또한 하나님께서 신세계 사회로서 신권 조직을 계속 개선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멸망이 작정되어 있는 이 현대적 ‘소돔’을 결코 뒤돌아 볼 수 없읍니다. 오히려 우리는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앞을 계속 바라볼 결심을 하고 있읍니다. 신세계 사회로서 우리 모두는 함께, 앞으로 그러면서도 꾸준히 나아갑시다!”

신권 통치가 증가하고 있는 증거

8월 6일 일요일 오후는 대회 참석자들에게 감동적인 날이었다. ‘양키 스태디움’은 87,195명이 모여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그 외에도 25,215명이 복도에 그리고 근처의 천막에 모여 있었다. 또 다른 11,297명은 ‘이동 주택 주차지’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노워’ 형제의 “당신은 이 땅에서 영원히 행복스럽게 살 수 있는가?”라는 널리 광고된 매혹적인 공개 강연에 총 123,707명이 참석하였다. 그 논리적이고도 감동적인 연설은 이 땅에서 영원히 행복스럽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풍부한 성서적인 증거를 제시하였다.

신세계 사회로서 모임

신권적 역사 가운데서 또 다른 획기적인 사건은 1953년에 있었다. 7월 19-26일은 여호와의 백성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었다. 미합중국 외의 96개 나라에서 여호와의 백성이 참석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뉴우요오크 양키 스태디움’을 메웠다. 그 8일간의 신세계 사회 대회를 통해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이 국제적으로 연합되어 있다는 놀라운 증거를 세상에 제시하였다.

또 다시 수천 명의 대회 참석자들을 위해 개인 집의 숙박시설을 구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호텔’에 묵었고 다른 45,000명은 ‘뉴우저어지’ 주 ‘뉴우마아켓’ 근처의 ‘스태디움’에서 40‘마일’ 떨어진 ‘신세계 사회 이동 주택 도시’에서 생활하였다. 부가적인 것으로, 이동 주택 도시의 시장은 그리스도인 정직성에 관해서 그 지방의 물품 공급자에게 말없는 증거를 해주었다. (히브리 13:18) 많은 증인들이 ‘스태디움’에서의 자진 봉사를 위하여 시장이 문을 열기 전에 떠나서 닫은 후에 돌아 왔으므로 그들은 지키는 사람이 없는 쟁반에 돈을 넣고 필요한 것을 가져갔다. ‘알. 디이. 캔트웰’은 이렇게 말한다. “이 신사(공급자)는 그것을 보고 놀라서 결국 이렇게 말하였다. ‘‘캔트웰’ 씨 저는 이 점을 당신에게 말할 수 있읍니다. 즉 우리 교회에서는 이렇게 할 수 없다고요. 사람들을 믿을 수 없으니까요.’”

대회의 국제적인 성격은 ‘스태디움’의 윗층과 중이층 전면에 매어 놓은 90개에 달하는 각가지 색깔의 깃발로 강조되었다. 대표자들은 다음과 같은 문구들을 볼 수 있었다. “백향목의 나라 ‘레바논’으로부터 ‘살라함’” “‘하와이’로부터 그리스도인 ‘알로하’” 또한 매일 “북미의 날”, “대서양 도서의 날” 등과 같은 지역적인 주제가 있었다.

대회 주제와 일치하게 7월 20일 ‘노워’ 형제는 “지금 신세계 사회로서 생활함”이란 시기에 적절한 강연을 하였다. 그날 오후를 상기하여 ‘시이. 더불류. 바아버’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하나의 ‘신세계 사회’로서 그와같이 수만명이 함께 모여 있었으므로 그 단결과 일치성에 관해서 이 거대한 무리가 말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가 되었다.” 어떻게 그러한가? 하나의 연합된 신세계 사회를 구성하고 있음을 여호와의 증인들은 실감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느낌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결의문을 채택함으로써 였다. 그 결의문은 ‘스태디움’, 가득찬 천막과 ‘이동 주택 도시’에 참석해 있던 125,040명에 의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경고가 발해지다

그 웅장한 대회는 ‘웹스터 엘. 로우’가 “감격적인 것”이라고 부른 또 하나의 대회 특별 연설 때문에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특별한 연설에 대해서 ‘로저 모어건’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1953년 ‘양키 스태디움’ 대회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강연은 ‘프랜즈’ 형제의 ‘신세계 사회는 극한 북방으로부터 곡의 공격을 받음’이란 연설이었다.”

1953년 7월 23일 목요일 저녁 사실상 한 가지 경고가 발해졌다. 부협회장 ‘에프. 더불류. 프랜즈’는 앞으로 ‘마곡’의 ‘곡’과 그 군대에 의해 여호와는 백성에 대한 공격이 있을 것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그 예인의 주연인 ‘곡’은 ‘사단’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프랜즈’는 악령들이 (통용기원) 1918년까지는 하늘에서 쫓겨나서 지구 근처의 제한된 영적 영역에 있게 되었는데 악령들이 있게 된 바로 그 곳이 ‘마곡’ 땅이라는 점도 밝혀 주었다. (계시 12:7-9) 그 연사는 현재 여호와의 백성의 번영, 연합, 안전 등은 ‘곡’과 그 군대로 하여금 공격하게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무서운 공격하에서도 여호와께서는 신세계 사회를 보존하실 것이다. 112,700명의 청중은 그러한 경고와 계속 여호와를 신뢰하고 그리스도에 의한 그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라는 교훈에 대해서 참으로 감사하였다.

감동적으로 막이 내려진 대회

대표자들은 7월 26일 일요일 오후에 특히 감동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다. ‘엔. 에이치. 노워’의 “아마겟돈 후—하나님의 신세계”라는 공개 강연을 듣기 위하여 165,829명이 ‘양키 스태디움’ 내부와 예비된 천막 그리고 ‘이동 주택 도시’에 운집하였다. ‘스태디움’ 자체에는 91,562명이 있었다. 공개 강연이 시작되기 얼마 전에 경기장 문들을 열어 수만 명이 줄지어 들어가 경기장 잔디밭에 앉게 하였다. 그 외에 수많은 사람들이 협회의 WBBR 방송을 통해 연설을 들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그 시간은 빨리 지나갔으며 곧 공개 강연은 끝났다. 시원한 미풍이 대회의 마지막 회기에 참석하려고 남아 있는 수천 수만명의 기분을 새롭게 해 주었다. 시편 145편을 근거로 한 한 시간의 강연에서 ‘노워’ 형제는 여호와를 찬양하고, 하나님으로서 그분을 높이고, 우주 주권자로서 그분을 광고하고, 그분의 왕권을 널리 알릴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승리를 찬양하고 노래하라!”라는 서정적인 노래와 마지막 기도로 그 당시로는 가장 컸었던 그리스도인 대회가 행복스런 가운데 막을 내렸다.

성의 국제 대회

“1958년이 언급되면 지금도 여호와의 증인들의 머리에 떠오르는 한가지 커다란 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큰 대회’ 즉 ‘여호와의 증인의 성의 국제 대회’이다. 참으로 훌륭한 대회였다!”라고 ‘앤젤로 시이. 마네라’는 기술한다. 이 주목할 만한 모임에 적어도 123개 나라와 섬들에서 온 대표들이 함께 모였다. 중동에는 전운이 감돌아 국제 관계가 긴장되어 있었지만 여호와의 백성은 1958년 7월 27일부터 8월 3일까지 ‘뉴우요오크’ 시 ‘양키 스태디움’과 근처의 ‘폴로 그라운드’에서 평화와 연합 가운데 모였다.

대회가 있기 전 약 2주일 동안 ‘노워’ 형제는 협회의 지부 감독자들 및 그 보조자들 80여명과 회합을 가졌다. ‘브루클린’에 있는 제일 큰 미국 지부를 친히 검사한 후 지부 운영 방법에 대해 그가 준비한 새로운 책을 그들은 토론하였다. 대회 기간 중에도 그들과 그리고 선교인, 특별 ‘파이오니아’, 순회 및 지역 감독자들과 함께 가진 다른 유익한 모임들이 있었다.

7월 30일 수요일에는 중요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어니스트 잰스마’로 하여금 이렇게 말하도록 감동시켰다. “그 중요성은 신권적인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사실 기원 33년 오순절 이래 그와 같은 일은 없었다. 그때 ‘예루살렘’에서 하루 동안에 약 3,000명에 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추종자들이 침례를 받았다. (사도 2:41) “성의에 따라 침례 받음”이라는 연설이 있은 직후 7,136명(2,937명의 남자와 4,199명의 여자)이 몇 ‘마일’ 떨어진 ‘오처드’ 해안에서 침례를 받음으로써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헌신을 상징하였다. 그것은 현대에 와서 한 장소에서 침례받은 수로서는 가장 많은 수였다.

그 장엄한 모임 중 ‘노워’ 형제가 행한 “우리의 영적 낙원을 계속 유지함”이란 강연에서 지적 낙원, 영적 낙원, 천적 낙원—그 세가지가 모두 고려되었다.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킨 그 연설 후에 연사는 ‘타일랜드’에 있는 선교인들이 거짓을 논파한 것이 아닌 성서의 참된 가르침을 직접 설명한 연구용 서적을 협회에서 출판할 것인지 문의한 적이 있었다고 말하였다. 그들과 또 각지에 있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필요를 총족시키기 위해 협회는 「낙원을 잃은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라는 새 책을 발행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쉬운 말로 쓰여졌고 삽화가 풍부하게 들어 있어서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다 그 책을 좋아하였다. ‘그레이스 에이. 이스테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린이들은 모두가 「낙원」 책을 어루만지면서 성장해 왔는데, 그들은 집회에 그 책을 가지고 가고, 같이 노는 꼬마 애들과 함께 보고, 글을 읽을 만큼 나이가 들기 오래 전에도 단지 그림만 보고 전체 성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8월 2일 토요일은 “당신의 뜻이 이루어진” 날이었다. 그날 오후 협회장은 “당신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감동적인 강연을 하였다. 그 강연 후에 그는 「당신의 뜻이 땅위에 이루어지이다」라는 새 책의 출판을 발표하여 175,441명의 청중을 감격하게 하였다. 대표자들은 예언 특히 「다니엘」서에 나오는 예언 설명을 참으로 알고 싶어 했다!

“참으로 여호와를 증거하는 것이었다!”

8월 3일 일요일 ‘성의 국제 대회’에서 일어난 일을 완벽하게 묘사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대회 보고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참으로 여호와를 증거하는 것이었다!” 정말 그랬다. ‘에드가 시이. 케네디’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요일은 대회 참석자라면 누구나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사람들이 공개 강연을 듣기 위해 ‘양키 스태디움’에 모여드는 것은 볼 만한 광경이었다. 우리가 앉아있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계속 ‘스태디움’으로 밀려 들어와서 ‘스탠드’를 가득 메우고 미쳐 못들어간 사람들은 경기장으로 들어가 질서있게 구분되어 있는 잔디밭 위에 앉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은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남은 자들 편에 와서 그들과 함께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고 그분의 ‘성의’를 행하는 ‘큰 무리’를 확실하게 보여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큰 무리의 일부가 될 수 있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스태디움’이 가득차고 있을 때, ‘폴로 그라운드’도 마찬가지였다. 오후 3:00 의장이 일어서서 연사인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장’ ‘엔. 에이치. 노워’를 소개하고 ‘하나님의 왕국은 통치한다—세상 끝은 가까왔는가?’라는 강연 제목을 말하였을 때 그 순간 25만여 청중석이 정적에 휩싸였다.”

그 거대한 청중은 253,922명이나 되었다! 금요일의 수많은 청중으로 판단해 보건대 약 60,000명의 공중이 참석하였음에 틀림없다. 그 한 시간 동안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왕국이 1914년 이래 통치해 오고 있으며, 세상의 끝이 가까왔다는 성서적인 확실한 증거를 듣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입수할 있게 함

생명을 위해 사람들을 교육하고 하나님의 왕국의 지적 관심사를 증진시키기 위해 왕국 주제를 실은 바로 그 성서를 사람들이 쉽게 입수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절실히 요청되였다. 여러 해 동안 ‘노워’ 형제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사실상 협회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성경 전서를 출판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어떤 자료를 오랫 동안 자기 책상에 보관해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생각을 밀고 나아갈 수 있는 그러한 여건이 발전되지 않았다. 그러나 협회장이 된 뒤 ‘노워’ 형제는 그 생각을 실현시키는데 있어서 잠시도 지체하지 않았다. 또한 일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구해서 읽을 수 있도록 값싼 성서를 출판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1942년 ‘오하이오’ 주 ‘클리블런드’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의 신세계 신권 대회’에서 ‘엔. 에이치. 노워’가 “‘성령의 검’을 제시함”이란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그는 성서가 가장 위대한 공격용 무기 즉 “성령의 검”이라고 밝혔다. (에베소 6:17) 요컨대 그는 전체 여호와의 종들의 생각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원하는 성귀를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가 반대자들을 막을 수 있을 것이며, 슬퍼하는 자를 위로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에게 아주 분명한 것들을 풍부한 증거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필요로 한 것을 빨리 찾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가진 성서가 우리에게 있다면!’

그 대회에서 그러한 마련이 있었다—그것은 새로운 ‘왙취 타워’판 「흠정역」으로서 협회가 인쇄한 성경 전서로서는 최초의 것이었다. 150여명이 여러 달 동안 공동 연구한 결과로 그 출판물의 일부이며, 전파 활동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사용하도록 특별히 계획된 ‘콘커단스’가 편집되었다. ‘제임스 더불류. 필슨’이 말한 바와 같이 그 성서는 “실질적인 필요를 충족시켰다. 우리에게 그것이 필요하였다. 우리의 구역에서 사람들에게 전하는데도 그것이 필요하였다. ··· 단지 1‘달러’로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값싸고 좋은 성서를 가지게 된 것은 훌륭한 일이었다. 오늘날까지 진리 안에 있지 않은 많은 사람들의 가정에 까지도 있게 된 유일한 성서이다.”

‘노워’ 형제는 또 다른 주요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언어로 여호와의 이름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히브리’어 성경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한 성서 번역판이 있었다. 그것은 「미 표준역」이었다. 협회는 그 성서를 출판하기 위해 판의 사용권을 샀으며, 1944년 ‘연합된 선포자들의 신권 대회’에서 즐거움에 가득찬 대회 참석자들은 ‘왙취 타워’판을 갖게 되어 깊은 감사를 느꼈다. “우리는 그 성서를 재방문이나 성서 연구에서 광범위하게 사용하였다”고 ‘에드가 시이. 케네디’는 말하고 있다.

새로운 성서 번역

특히 1946년 이후에 협회장은 원문의 뜻을 충실히 전달하여 더 많은 진리를 얻을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을 현대어로 번역하고자 하였다. 1950년 8월 2일 국제적인 ‘신권 통치 증가 대회’에서 82,075명의 청중에게 연설할 때 ‘노워’ 형제는 1949년 9월 3일 ‘브루클린’ ‘벧엘’에서 ‘펜실베이니아’ 및 ‘뉴우요오크’ 법인 이사회의 합동회의가 있었는데 이사 한 사람만 불참하였으며 그 회의에서 자신이 “신세계역 성서 번역 위원회”가 있음을 발표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 위원회는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의 번역을 완료하여 ‘펜실베이니아’ 주 법인인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가 소유하고 관할하도록 인계하였다. 공장에서는 1949년 9월 29일에 첫 원고의 작업이 시작되었다.

1950년 8월 2일 그날 오후 ‘노워’ 형제는 영어로 된 「신세계역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을 감격한 대회 참석자들에게 발표하는 즐거움을 가졌다. 그것은 이전의 어떤 번역의 개정판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신세계역 성서 번역 위원회’는 다른 사람들이 마련한 희랍어 성서 사본들도 역시 참조하는 한편 ‘웨스트코트’와 ‘호트’라는 학자들의 유명하고 가장 우수한 희랍어 사본을 사용하였다. “thee”나 “thou”등과 같은 고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 번역판은 현대어로 되어 있어서 현대 영어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신세계역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 본문에 237회나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한 것은 특히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그 번역 위원회가 쓴 머릿말에는 그 이름을 사용한 정당한 근거가 명백히 제시되었다. 「신세계역」에는 훌륭한 점들이 많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세계역」은 전체 여호와의 백성의 언어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같은 신도들”이란 말인 “brethren” 대신 그 번역은 “형제들”이란 말인 “brothers”를 사용하였으며 그에 따라 하나님의 종들도 그 현대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로마 1:13) 또한 1953년초에 와서 「신세계역」에서 사용한 “회중”(會衆)이란 말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관련된 “부회”(部會)란 낱말을 대신하게 되었다.—사도 20:17; 골로새 4:15, 신세 참조.

여러 해에 걸쳐 「신세계역 히브리어 성경」 5권이 나왔고 하나님의 백성의 대회들에서 발표되었다. 1961년 ‘연합된 숭배자들의 지역 대회’에서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은 전부 한 권으로 된 「신세계역 성서」를 받게 되어 특히 기뻐하였다. 그에 더하여 그 당시까지 전세계적으로 왕국 선포자 수가 965,169명으로 증가하였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노력을 축복해 오셨음이 분명하다. 그의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자라게 하고 계셨다.—고린도 후 3:6, 7.

성서 출판이 진행되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갖게 하려는 여호와의 종들의 진실한 열망은 여러 해에 걸쳐 계속되었다. 그 결과로 여러 형태의 성서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1963년 여호와의 증인의 “영원한 복음” 대회는 1961년에 개정된 ‘포켓’판 영문 「신세계역 성서」가 발표되어 특색을 이루었다. 전후 참조, 각 주 및 광범위한 부록을 갖추고 있고 굵은 글자로 인쇄되었고 한권으로 된 값진 또 다른 영문 성서가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네델란드’, 불란서, 독일, ‘포루투갈’, ‘스페인’의 대회 참석자들이 느낀 자기 나라 말로 새로 나오게 된 「신세계역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을 받게 되었을 때 즐거움을 좀 상상해 보라. ‘이탈리아’ 말을 하는 대표자는 “브라보! 브라비시모!”라고 외쳤다. 독일의 한 대회 참석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한 때 독일인들이 성서에 대해 가졌던 관심을 여호와의 증인들이 일깨울 수 있는 훌륭한 기회이다.” 그 후에 앞서 말한 언어들로 된 「신세계역 성경 전서」가 나오게 되었다.

1971년 “하나님의 이름” 지역 대회에서 발표된 출판물 중에는 같은 해에 개정되었으며 굵은 글자로 인쇄된 영문 「신세계역 성서」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성서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1969년에 발행된 1,184면의 「왕국 행간역 희랍어 성경」이 있다.

여호와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지속적인 욕망으로 인하여 다른 성서도 출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왙취 타워 협회’는 1972년에 고 ‘스티븐 티이. 바잉튼’이 번역한 「현용 영어 성서」를 출판하였다. 그 성서는 ‘히브리’어 ‘테트라그라마톤’을 “여호와”로 일관성 있게 옮긴 것이다.

1950년 이래로 수백 만부의 「신세계역」이 전세계적으로 배부되어 왔으며 그 배부 수의 대부분은 영문 「신세계역」이 차지하였다. 그러므로 1973년에 약 14,700단어와 333,200가지에 이르는 기재 사항을 수록한 「신세계역 성서 대형 콘커단스」가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로부터 깊은 감사를 받게 되었다. ‘브루클린’ ‘벧엘’에 있는 많은 성원들이 그것을 편집하고 교정하는 등 열심히 일하였다. 그 서적이 마련됨으로써 원하는 성귀를 찾는 데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오늘날 「신세계역 성경 전서」는 7개국으로 나와 있고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은 다른 한 언어로 발행되어 있다. 또한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에 대한 작업이 다른 4개 언어로 진행 중이다. 영문 「신세계역 성경 전서 보급판」은 매 권 당 1‘달러’면 지금도 구할 수 있고, 다른 언어로 된 이 훌륭한 성서 번역판도 외국 돈으로 그와 동일한 값에 구할 수 있다. 그처럼 염가인 이유는 무엇인가? 성서가 사람들의 손에 전해져서 그들 가운데서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성서를 읽고 그것을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진실로 그러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데살로니가 전 2:13.

협회의 한 인쇄기로 ‘왙취 타워’판 흠정역 성서 첫째 권을 인쇄하게 된 지도 어언 30년 이상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헌신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이르도록 부지런히 일하여, 항상 그 배부 수가 증가해 왔다. 사실상 1942년부터 1974봉사년도까지 전역과 부분역을 합쳐 28,533,890부의 성서가 협회의 ‘브루클린’ 인쇄 공장에서 생산되었다. 그리고 1974년에는 ‘브루클린’의 ‘왙취 타워 협회’의 윤전기 15대가 성서를 인쇄하기 위해 전 시간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면 당신은 놀랄 것이다.

그렇게 엄청난 성서 생산과 더불어 수백 만부의 성서 연구 보조 서적의 출판도 함께 행해졌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유익하다」와 「성서 이해를 위한 보조서」와 같은 이 모든 서적들은 여러 생활 분야에서 나온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서를 부지런히 연구하게 하고 좋은 소식의 유능하면서도 신권적인 선포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성서의 확실성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성서가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근원하였음을 증명하려는 진지한 노력도 있었다. 그 점과 관련하여 27개 언어로 18,768,000부 이상이 인쇄된 「성서는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인가?」라는 192면의 서적은 주목할 만하였다. 1969년에 발행된 이 협회 출판물은 성서의 정확성이란, 성서의 근거가 박약하여 세상적인 “권위자들”로부터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고고학자가 밝힌 증거에나 의존하고 있는 그런 것이 아님을 훌륭하게 밝혀 주고 있다. 오히려 그 서적의 주요점들은 성서 자체의 강력한 증거와 이치적인 점 그리고 달리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성서는 대답해 준다는 점 등에 근거하여 성서적인 관점에서 설복력있게 논하고 있다. “교직자들이 점점 더 노골적으로 성서에 대한 불신을 나타내고 있을 때에 그 책이 나와서 많은 사람들의 약해진 믿음을 북돋아 주고 성실하게 성서 연구를 할 수 있게까지 도와 주었다.”고 ‘웹스터 엘. 로우’는 말하고 있다.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장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고린도 후 2:17, 새번역) 그들은 성실하게 성서를 옹호하며 자기 스스로 그것을 믿고 있다. 피에 관한 하나님의 법에 굳게 고착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사실상 피를 먹어서도 안되고 신체의 활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신체 조직에 피를 넣어서도 안된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그들이 충실히 적용해 왔기 때문에 그들은 전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사도 15:28, 29) 심지어 생명이 위험에 처해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요컨데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반복해서 말해 왔다.—로마 14:7, 8.

1927년 12월 15일호 「파수대」에서 피의 신성함이 강조되었다. “하나님께서 복수하시는 한 가지 이유”라는 그 「파수대」 기사는 특히 이렇게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모든 산 동물은 그 식물이 될 것이지만 생명이 그 피에 있으므로 피는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여러 해 후에 「파수대」(1944년 12월 1일호)는 이렇게 말하였다. “‘노아’의 후손으로서 뿐 아니라, 이제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법에 매어 있는 자로서 ··· 타국인도 수혈을 통해서건 입을 통해서건 간에 피를 먹거나 마시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창세 9:4; 레위 17:10-14)” 계속되는 여러 해 동안에 그 문제는 더욱 더 명확해졌다.

1945년 7월 1일호 「파수대」는 피에 관한 그리스도인 입장을 명백히 밝혔다. 그 「파수대」는 특히 수혈이 고대 ‘애굽’ 시대에 시작되었지만 가장 최초로 보고된 경우는 1492년 교황 ‘인노센트’ 8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세 청년의 생명을 희생시키고 행한 수술로서 그 시도는 실패하였다고 지적하였다. 더욱 중요한 것으로 그 「파수대」는 ‘노아’에게 주어진 피에 관한 하나님의 법이 모든 인류에게 구속력이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피를 멀리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사도 15:28, 29) 요약하여 「파수대」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므로 지존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모든 후손과 함께 맺으신 영원한 언약과 일치하게 피의 처리에 대하여 명백한 지시를 내리셨음을 생각할 때; 그리고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그분이 정당하다고 인정하시는 피의 사용은 단지 화해 혹은 속죄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었음을 고려할 때; 그리고 그러한 일은 피를 직접 인간 몸에 집어 넣음으로써가 아니라 그의 거룩한 제단에서나 시은좌에서 행해지는 것이었음을 생각할 때; 의로운 신세계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여호와의 모든 숭배자들은 마땅히 피의 신성함을 존중하고 이 심각한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법을 따라야 한다.”

수혈에 대한 그리스도인 입장은 이제 분명히 밝혀졌다. ‘새뮤얼 무스카리엘로’는 그 문제에 대한 자신의 성실성을 시험하는 일에 직면하였다. ‘블로스코 무스카리엘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형무소에서 나온 직후(그는 그리스도인 중립 때문에 감금되어 있었다.) 나의 동생 ‘새뮤얼’은 일종의 연쇄상 구균에 의한 목 병을 앓게 되었고 그로 인해 요독증이 생기게 되었다. 의사들은 동생에게 ‘수술을 받지 않고 피를 넣지 않으면 기껏해야 2년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수술—물론 수혈과 함께—을 받으라고 하였다. 동생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가 1947년 이었다. ··· 「파수대」에 나온 말[그들이 특별히 유의하였던 말] 외에도 형무소를 [방문한] ‘설리반’ 형제의 ··· ‘피를 취하는 것은 잘못이다’는 말이 우리 귀에 쟁쟁하였다. 꼭 이년이 되어 동생은 다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거기서 사망하였다. 압력을 받고 할 수 없이 나는 그의 침대로 가서 ‘‘샘’, 의사들이 너에게 수혈하려고 한다’라고 말하였다. 반쯤 마취 상태에 있었고 반 밖에 의식이 없었는데도 그는 [수혈을 피하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였다. [동생에게 수혈은 결코 시행되지 않았다] ··· 우리 가족은 [동생의 사망으로] 슬펐지만 ‘샘’이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사망할 때까지도 여호와께 성실하였으므로 격려를 받았다.”

1950년대 초에 여호와의 증인들의 수혈 거부는 한가지 쟁점으로 발전하였다. 1951년 4월 18일 그 사건은 ‘일리노이’ 주 ‘시카고’ 법원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의사들이 아이에게 수혈하기 위해 그 부모로부터 아이를 빼았아 갔다. 난지 6일된 ‘셰릴 라브렌즈’는 적혈구가 파괴되어 가고 있는 희귀한 병을 앓는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의사들은 수혈을 받지 않게 되면 그애가 사망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 아이의 부모인 ‘다렐’과 ‘로다 리브렌즈’는 여호와의 증인들로서 수혈은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에 반대하였다. 그들은 자기 아이의 영원한 복지를 염려하였다. 영원한 생명이란 하나님의 법에 고착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전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모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법원 명령에 의해 ‘셰릴’에게 수혈이 시행되었다.

‘라브렌즈’의 경우는 긴 이야기의 처음 장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20년 이상에 걸쳐 여호와의 증인들이 피에 관한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존경심을 보여왔기 때문에 그들은 특히 눈에 띄게 되었다. ‘마리이 엠. 그리담’은 자기 친 오빠인 ‘단 모어건’에게 있었던 일을 잘 기억하고 있다. 말기의 암 환자로서 그가 수혈을 완강히 거부하였기 때문에 ‘뉴우요오크’ 시의 한 전문 병원에서 세번이나 쫓겨났다. 네 번째 입원하게 되었는데 그때에도 그는 수혈을 계속 거부하였다. ‘그리담’ 자매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 일은 1951년 8월에 있었으며 ‘단’은 54세로 1951년 10월에 사망하였다. ‘단’은 아주 평온하였고 행복하였다. 사망하기 바로 나흘 전에 그는 다른 누이에게 자기가 어떻게 곧 눈을 감게 될 것인가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추종자로서 ‘적은 무리’의 한 사람이었으며, 충실을 유지해왔고 따라서 보상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행복하였다.”—누가 12:32; 계시 2:10.

그러면 어떤 사람이 수혈을 거부했다고 해서 죽음이 불가피한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글라디스 볼튼’의 경우 의사는 그 자매에게 비장으로 통하는 대동맥에 동맥류가 있어서 비장을 제거해야 하겠다고 말하였다. 수혈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 자매는 수술에 동의하였다. 의사는 놀랐지만 그 자매의 설명을 주의깊이 듣고 ‘혈액 대용액’의 사용에는 반대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하였다. 그는 피를 사용하지 않고 수술을 할 것에 동의하였으며, 그 수술은 1959년 5월 21일에 시행되었다. 그러나 비장을 제거할 수 있기 전에 동맥이 파열되어 ‘볼튼’ 자매는 피의 7할 이상을 잃게 되었다. 수술실에 있는 의사와 간호원들은 수혈하자고 하였지만 그 의사는 자기 약속을 지켰다. 그 자매는 2주일 동안 혼수상태에 있었으며 산소실에 3주일간 있게 되었고 연속되는 병발증으로 고통하였으나 그 의사는 아주 정성스럽게 돌보았으며 점차적으로 ‘볼튼’ 자매는 회복되었다. 그 자매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우리만 있게 되었던 어느날 그 의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볼튼’ 부인,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결코 버리지 마십시오. 의료의 역사나 기록상으로 볼 때 부인은 결코 지금 살아있을 수 없읍니다. 그렇게 피를 많이 잃고 산 사람은 결코 없읍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데이비스’ 선생님, 저는 여호와를 저버릴 생각은 조금도 없읍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호와의 증인들이 오늘날 기적에 의한 병 고침을 믿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훌륭한 의사와 간호원들에게 우리는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는 제가 살아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셨읍니다. 하지만 피에 관한 여호와의 명령에 우리가 순종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나의 대답에 만족한듯이 보였으며 나에게 감사하다고 말하였다.” ‘볼튼’ 자매는 1959년 7월 1일 퇴원하였다.

여러 해 동안에 걸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피에 관한 자기의 법에 고착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자비롭게도 풍부한 마련을 해 주셨다. 계속 베풀어지는 그러한 영적 보조 마련에 있어서 1961년에 출판된 「피와 의학과 하나님의 법」이라는 64면의 소책자를 빼놓을 수 없다. 당신은 그 중대한 문제에 대하여 주치의와 논의하기 위해 그 소책자를 사용해 보았는가?

참 숭배를 촉진시킴

여호와의 종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즐기기 위해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숭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야고보 1:27) 그들은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정결해야 한다. (이사야 52:11; 고린도 전 6:9-11) 전반적인 세상이 도덕적으로 더욱 더 심히 타락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비교적 근래에 와서 특히 그런 점들이 대회 연설, 「파수대」 기사 등을 통해 강조되어 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951년에 참 숭배의 옹호자들은 “종교”라는 말에 대하여 중요한 점을 알게 되었다. “종교는 올무이며 술책이다”라고 쓴, 생각을 자극하는 간판을 자신들이 때때로 들고 다녔던 1938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당시 그들의 견해로는 모든 “종교”가 마귀로부터 유래한 비그리스도교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1951년 3월 15일호 「파수대」는 종교와 관련해서 “참”과 “거짓”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한다는 점을 발표하였다. 더우기 (1951년에 출판되었고 영국 ‘런던’ ‘웸블리 스태디움’에서 개최된 “정결한 숭배” 대회에서 발표된 바 있는) 「종교는 인류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라는 그 매혹적인 책은 그 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종교’란 말이 사용되고 있는 방법을 고려해 보면 ‘종교’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그것이 참 숭배냐 거짓 숭배냐에 관계없이 조직적인 숭배, 숭배의 형태이다. 그 점은 숭배에 해당하는 낱말로서 그 대상에는 관계없이 문자적으로 ‘봉사’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보다’의 뜻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 후부터 “거짓 숭배”와 “참 숭배”라는 표현이 여호와의 증인들 사이에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은 참 숭배를 실천하고 여호와의 봉사를 위하여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계속 정결을 유지하고자 하는 각오가 되어 있었다. “조직의 정결함을 계속 유지함”, “제명 처분의 타당성”, “죄로 인하여 복귀가 불가능하게 됨” 등의 매우 중요한 기사를 실은 1952년 3월 1일호 「파수대」에 그 점이 특히 강조되었다. 그 잡지는 회개하지 않는, 침례받은 범죄자를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추방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밝혔다. (고린도 전 5:1-13) 죄인이 후에 회개하면 복귀가 가능하다는 점도 지적되었다.—고린도 후 2:6-11.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회중에서 추방하는 것에 대해서 「파수대」가 언급한 것은 그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1952년 이후에는 그리스도인 회중의 영적 정결함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특히 강조되었다. 여러 해가 지나면서 회개한 자들을 자비롭게 대하는 것도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점점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야고보 2:13) 그러므로 회중에서 추방될 정도까지 문제가 악화되기 전에 감독자들이 잘못한 사람들을 영적으로 회복시키는 일이 종종 있게 되었다.—갈라디아 6:1.

그리스도인들은 제명된 자들을 형제와 같은 영으로 교제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들은 그들 사이에 악을 묵인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제명받은 사람이 자기의 잘못된 행로를 버렸을 때는 어떤가? 1974년 11월 1일호 「파수대」(국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자비는 잘못한 자들에게 돌아올 길을 지적해 준다”와 “제명당한 사람들에 대해 균형잡힌 견해를 유지함”이라는 기사는 상기의 질문에 대해 아주 적절한 대답이었다. 그 기사들은 제명된 자들도 생명의 길로 다시 돌아오도록 실질적인 격려를 받을 수 있다고 알려 준다.

많은 대회 연설들이 조직의 정결성을 유지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해 왔다. 예를 들어 ‘엘. 이이. 로이쉬’는 특히 ‘에프. 더불류. 프랜즈’가 1964년 대회에서 행한 “공중에게 봉사하는 조직에 순수성과 순결성을 유지함”이란 연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정조 관념이 약한 젊은 여자를 여러 사람이 사용하는 세면장의 더러운 수건에 비유하였다. 도덕에 관한 솔직하고 직선적인 말들을 통해 알기 쉽게 사실들을 하나 하나 밝혀 주었다. ··· 참으로 시기에 적절한 것으로서 그 후의 엄청난 도덕적 붕괴에 대비한 현명한 충고였다.”

성서에 근거한 건전한 충고는 여러 해 동안 계속 증가해 왔다. 영적으로 말해 그 출판물들은 여호와의 백성이 행할 합당한 길을 알리는 것이었다.

왕국 증거의 확장

1950년대에 왕국 소식의 선포 활동을 확장하기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다. 사실 1951년에는 매우 의미심장한 조치가 취해졌다. 1951년 10월 ‘와싱턴’ 시 대회에서 행한 연설중에 ‘노워’ 형제는 미합중국에 있는 절반에 가까운 군(3,062개중 1,469개)이 전혀 봉사되지 않았거나 단지 부분적으로 증거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러한 일에 변화가 있게 되었다. 1952년 6, 7, 8월중에는 정규적인 전도인들과 ‘파이오니아’들이 그러한 구역에서 활동하도록 임명되었다. 그에 대한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격지 구역에서의 비슷한 활동이 현재까지 계속 수행되어 오고 있다.

왕국 증거를 증진시키기 위한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조치의 발표가 1957년 “생명을 주는 지혜” 지역 대회를 특징지웠다. ‘마리이 기바아드’는 이렇게 기술한다. “이 때에 처음으로 ‘더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사실상 가족들이 선교인과 같은 봉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길르앗’ 학교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정규 선교 활동을 할 수 없는 사람들과 가족들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 준 봉사에 있어서의 새로운 개념이었다.”

미합중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그전 회중에서보다 왕국 전파자들을 더 필요로 하는 곳으로 이사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동료 신자들을 격려하고 세워줄 수 있었으며 새로운 자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돕고 심지어 회중 설립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좋은 소식의 나은 전파자가 됨

‘노워’ 형제는 “모두가 호별 방문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그것을 그리스도인 사이의 주요 목표로 언급하였다. 그는 1953년 7월 22일 ‘신세계 사회 국제 대회’에서 그 말을 하였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과거 여러 해 동안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서 축음기판이나 증거 ‘카아드’를 사용해 왔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더 훈련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모든 종들의 주요 활동”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노워’ 형제는 새로운 호별 방문 훈련 계획을 선언하였다. 순회 및 지역의 종(감독자)들이 그와 관련해서 할 일이 많았으나 회중의 모든 임명된 종들도 왕국 전도인들 각자가 좋은 소식의 정규적인 호별 방문 선포자가 되도록 도움을 베풀 것이다. 회중을 방문하는 동안 순회의 종은 훈련 계획으로서 경험있는 호별 방문 전파자들을 선정하여 경험이 없는 새로운 자들과 함께 활동하게 할 것이었다. 더 많은 그리스도인 증인들이 자격을 갖출 수 있게 한, 이 원대한 마련은 1953년 9월 1일에 시작되었고 곧 이어 전적으로 시행되었다.

‘제임스 더불류. 필슨’은 이렇게 말한다. “그 훈련 계획은 ··· 아주 훌륭한 마련이었다. 수줍어하는 사람들은 극복하도록 도움을 받았다. 자기들은 잡지 활동과 같은 일 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어떤 사람들이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봉사의] 다른 분야에서도 일할 수 있도록 노력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자기 자신들의 능력이 개선되었다.”

담대하게 “성령의 검”을 휘두름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휘두를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에베소 6:17) 이점에 있어서 훈련 계획은 크게 도움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왙취 타워 협회’는 제안된 3분 내지 8분간의 호별 방문 연설 및 10분 내지 15분간의 재방문 연설의 여러 가지 골자를 매달의 봉사 지시지인 「통보」 및 그 후 그것을 대신한 「왕국 봉사」에 싣게 되었다. 후에 어떤 증인들은 이사야 2:4이나 요한 17:3과 같은 한 성귀를 사용한 짧은 연설을 하는 것이 더 쉽거나 더 편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월터 알. 위스만’에 의하면 호별 방문 증거와 재방문에서 성서 연설을 하는 것은 “우리의 신권적인 발전에 있어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점점 더 성서와 연관시키게 되었다. ‘알. 디이. 캔트웰’은 이렇게 말한다. “오래지 않아 문간에서 귀가 닳도록 들었던 여호와의 증인들은 ‘책 장사’라는 비난을 점점 덜 듣게 되었다.”

‘머틀 스트레인’은 “우리는 호별 방문 봉사에서 참으로 많은 발전을 하게 되었다”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읽어보라고 사람들에게 ‘카아드’를 넘겨 주거나 ‘레코오드’판을 틀어 준다거나, 들어가서 하나님의 목적의 전체 개요를 말하려고 한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제 우리 모두는 문간에서 두세개의 명백한 성귀를 사용하여 확정적인 주제를 가진 잘 준비된 간단한 연설을 하는 방법을 배웠다. 우리는 간단한 연설을 많이 사용할 수 있었으며 각 연설은 시기에 적절한 중요한 성귀에 근거해 있었다. 더우기 우리는 집주인을 대화에 참여하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렇게 하여 소식을 받아들이건 받아들이지 않건 간에 사람들에게 증거가 행해졌다.

거짓 빛을 폭로함

여호와의 증인들이 사람들의 집을 방문하여 더 능란하게 성서를 사용하게 되었지만, 과거 여러 해 동안 그들의 활동의 특징이 되어 왔던 불같은 열성은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1955년초에 여호와의 증인들은 두려움없이 소식을 선포하여 거짓 영적 빛을 폭로하였다.

1955년 4월 3일 일요일에 그리스도교국 그리고 사실상 전체 거짓 종교 제도에 대하여 심판의 대담한 선포를 행하였다. 전세계적으로 동시에 여러 나라 말로 그리스도인 연사들이 공개 연설을 함으로써 그렇게 하였다. “그리스도교국 혹은 그리스도교—어느 것이 ‘세상의 빛’인가?”라는 강력한 연설을 50만명 이상이 들었다.

여호와의 종들은 그리스도교국이 거짓된 빛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간절히 알려 주려고 하였다. 때가 되자 ‘왙취 타워 협회’는 30개 언어로 22,000,000부의 소책자를 발행하여 그 소식에 대한 많은 요구에 응하였다. 그 배부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수천 명의 새로운 전도인들이 1955년 4월에 처음으로 야외 봉사에 참여하였다. 전세계적으로 그달에 625,256명의 왕국 전도인 신기록에 도달하였다. 1955년 7월 후반에 여호와의 증인들은 교직자들과 편집자들에게 편지와 강력한 그 소책자를 우송하였다.

“말씀”—그는 누구인가?

많은 교직자들이 그리스도교국의 거짓 빛이 폭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음은 분명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써 그들이 여호와의 증인들로부터 마지막 소식을 들었던 것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많은 교직자들은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다는 것을 부인하고 있었다. 다른 교직자들은 성서를 옹호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명예가 되는 교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거짓된 그러한 가르침 중에는 삼위일체가 들어있다. 이 점과 관련해서—그들이 좋아하건 싫어하건 간에—1962년 후반에 교직자들은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로부터 한가지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소식은 「‘말씀’—요한에 의하면 그는 누구인가?」라는 64면의 소책자를 통해서 오게 되었다. 그 소책자는 삼위일체 교리가 거짓됨을 부인할 수 없이 폭로하였다. 1962년 11월에 그 소책자의 특별 배부 활동이 계획되였다. 왕국 선포자들은 그것을 호별 방문에서만 제공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왙취 타워 협회’가 마련한 소갯장과 함께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교직자들에게 한 부씩 우송하였다. 그리하여 대단한 증거를 하게 되었으며 요한 1:1의 “말씀”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이전 존재로서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임을 밝혔다.

움직이는 대회들

전파 활동에 필요한 그리스도인 담대함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의 정규적인 대회는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한 대회들 중 어떤 것은 특별한 점에서 이채로운 것이었다. 그러한 대회는 움직이는 대회로서 얼마의 대표자들이 이곳 저곳으로 심지어 세계적인 범위로 여행을 하였다. 그 대회는 참으로 연합시키는 힘이 있었다. 어떤한 나라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나라에 있는 동료 신자들의 경험담과 활동에 대하여 읽어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을 만나고 교제를 즐긴다는 것은—언어 장벽이 있을지라도—참으로 가치있는 경험이다. 국가와 인종적 배경이 다른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이면 동일한 언어로 의사소통은 할 수 없지만 그들은 한 언어 즉 은혜롭게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지상의 모든 자들에게 주신 진리의 “순결한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스바냐 3:9, 신세.

움직이는 대회들 중 1955년에 있었던 여호와의 증인의 “승리의 왕국” 대회는 주목할 만하였다. 단지 10주일 동안에 미합중국과 다른 나라에서 13개 대회가 개최되었으며 많은 대표자들은 여러 대회로 여행하였다. 어떤 출판물은 그 여행이 “아마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국의 공격이 있었던 이래 미국인들이 ‘유럽’ 전역에 집단적으로 이동한 것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을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왙취 타워 협회’는 42대의 비행기와 두 척의 기선(‘아로사 쿨룸’과 ‘아로사 스타’호)를 전세 내었다. 이들 항공기 및 선박은 사실상 공중에 혹은 물 위에 떠있는 대회장이었다. 왜냐 하면 영적으로 세워 주는 ‘프로’들이 승객들의 유익을 위해 매일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대회 장소들 중 한 곳은 ‘뉴렘베르크’의 ‘제페린비제’였는데 107,423명이 모였다. ‘시이. 제임스 우드워드’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에 있는 우리는 ‘히틀러’가 여호와의 증인들을 ‘멸절’시키라고 소리쳤던 바로 그 장소에서 이들 그리스도인 백성이 모든 ‘승리의 왕국’ 대회 가운데서도 가장 큰 대회를 가졌음을 알고서 참으로 기뻐하였다! ‘히틀러’는 어디 있는가?”

세계 일주 대회

여호와의 백성들에게 매우 의미있었던 일이 1963년 6월 30일 ‘위스컨신’ 주 ‘밀워키’에서 시작되어 9월 8일 ‘캘리포니아’ 주 ‘파사디이나’에서 끝났다. 그것은 여호와의 증인의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로서—24개 이상의 도시에서 개최된 사실상 세계 일주 대회였다. 전부해서 583명의 대표자들이 전세계를 휩쓰는 여행을 하였다. 조금씩 다른 노정을 취한 여러 여행자들은 ‘런던’, ‘스톡홀름’, ‘뮤니히’, ‘예루살렘’, ‘뉴우델리’, ‘랑군’, ‘방콕’, ‘싱가포르’, ‘멜보른’, ‘홍콩’, ‘마닐라’, 서울 그리고 ‘호놀룰루’ 등과 같은 도시에서 많은 동료 신자들과 함께 모였다.

‘런던’ 대회에 참석한 많은 대표자들은 대영 박물관을 방문하였다. 특히 거기에서 그들은 ‘나보니더스’ 연대기를 보았는데 그것은 ‘바벨론’이 함락된 기원전 539년이란 연대를 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바벨론’ 종교에서 점치는데 사용한 진흙으로 만든 간도 흥미있었다.—에스겔 21:21 참조.

성서의 땅으로 여행한 대회 참석자들은 성서적으로 의미가 있는 여러 곳을 방문하였다. 유명한 ‘레바논’의 백향목, 모압 평지, 혹은 ‘힌놈’의 골짜기 등을 보았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여행하는 대회 참석자들이 극동에 이르렀을 때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곳에서도 ‘바벨론’ 종교의 영향이 미친 결과를 보았다. ‘방콕’의 ‘왓 포’에서 참석자들은 애 못 낳는 여인들이 자녀를 갖기 위해 그 앞에서 기원하는 성 상징물을 보았다. 역시 ‘방콕’에 있는 ‘불교인 왓 사케트’에서 본 벽화는 열반과 고초의 지옥을 묘사하고 있었다. ‘단테’의 지옥편과 대회 참석자들이 본바 그곳에 묘사되어 있는 것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이 두 가지 종교 사상이 같은데서 유래하였음이 분명하였다.

그러한 거짓 숭배의 특징들을 보고난 그들에게는 “짓거 종교 위에 내릴 하나님의 심판 집행”이란 감동적인 대회 연설이 더 의미있었다. 그 연설을 듣는 사람들은 연설 중에 고대 ‘바벨’(바벨론)로 여행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 도시의 탑 건축자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을 때 그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고 불결한 종교도 함께 가지고 갔다. 불결한 종교는 여러 언어로 행해지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거짓 종교 세계 제국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 근원이 ‘바벨론’에 있었으므로 성서 「계시록」은 그것을 “큰 ‘바벨론’”이라고 부른다. (계시 18:2) 대회 대표자들은 그 감동적인 연설과 관련하여 「“큰 ‘바벨론’은 무너졌다!” 하나님의 왕국은 통치한다!」라는 704면의 새로운 영문 서적을 받게 되었다. 사실상 한 권에 책 두권이 들어 있는 셈인데 제1부는 고대 ‘바벨론’과 여호와의 백성과의 관계를 고려한 것이고 제2부에서는 계시록 14-22장을 한 귀절 한 귀절 설명하고 있다.

시각적 보조물이 제자를 삼도록 돕다

대회 후 여러 달이 되어 협회는 생각을 자극하는 활동 사진을 만들어 내놓았다. “강력하다!” “고무적이다!” “계몽적이다!” “놀랍다!” 이러한 말들은 “전세계에 ‘영원한 기쁜 소식’을 선포함”이란 2시간의 천연색 활동 사진에 대한 전형적인 반응들이었다. 총 580,509명이 “하나님께서 온 땅의 왕이 되실 때”라는 두드러진 공개 강연을 듣기 위해 모인 바 있는 1963년 세계 일주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를 주로 찍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영화는 단순한 기행 영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 폐허가 된 한 도시가 오늘날 수백 만명의 생명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거의 전세계 거민들에게 퍼지게 되어 그들의 생명의 길을 방해하는 상징물과 의식이 그 도시—고대 ‘바벨론’—로부터 나오게 되었다. 큰 ‘바벨론’을 버리는 것이 긴급함을 강조하였다. 전세계의 대회들에서 나타난 참 그리스도인들의 온정과 사랑이 묘사되었다. 시청자들은 큰 ‘바벨론’에서 나오자 마자 연합해야 할 조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의를 사랑하는 자들은 거짓 종교 세계 제국을 버리고 여호와의 숭배자들과 연합하도록 권고받았다.—계시 18:4, 5.

1963년까지 ‘왙취 타워 협회’는 10여년 동안 제자를 삼는 시각적 보조물로서 현대적인 활동 사진을 사용해 왔다. 1953년의 국제 대회 후에 협회는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라는 매혹적인 영화를 내놓았다. 그것은 거의 40여년 전의 “사진극” 이후 협회가 제작한 활동 사진으로서는 처음 것이었다. 하나님의 지적 조직의 크기와 ‘벧엘’ 가족이 수행하는 엄청난 양의 일, 전반적인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 그들의 큰 대회 그리고 신세계 사회가 운영되고 있는 원활하고 효율적인 방법 등을 시청자들에게 알리는 데 1시간 20분짜리 그 영화가 강력한 도구임이 증명되었다. ‘에이치. 에이. 캔트웰’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관심자들에게 실제로 조직이 얼마나 크고 광범한지를 알 수 있게 돕는 훌륭한 수단이었다.”

1955년 및 1958년의 큰 대회 후에 협회는 “신세계 사회의 행복”과 “여호와의 증인의 성의 국제 대회”라는 활동 사진을 내놓았다. 여호와의 종들은 “하나님은 죽었다”라는 철학에 대처하는 데도 역시 활동 사진이라는 매개체를 사용하였다. 1966년 ‘왙취 타워 협회’는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다”라는 매혹적인 천연색 사진을 만들었다. 믿음을 고취시키는 이 영화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지구와 인류를 위해 자기 목적을 수행하고 계심을 입증하였다. 사이 사이에 인상적인 천연색 삽화가 든 색채가 풍부한 이 활동 사진은 청중들로 하여금 주요 성서 사건을 눈으로 그려보고 우리 시대에 있어서 그 중요성을 깨닫도록 도와 주었다.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다. 특히 ‘하나님이 거짓말하실 수 없다’는 증거로서 성서의 예언이 성취된 역사적 사건들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거기에 나오는 여러 폐허들은 하나님이 거짓말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존재하고 있다. 그것들을 보고 나니 현재나 미래에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결코 거짓되지 않으리라는 점을 나는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1966년에 역시 ‘왙취 타워 협회’가 만들어낸 “유업”이라는 활동 사진은 오늘날 젊은이들이 직면하는 여러 가지 유혹을 다루었다. 그러나 ‘엔젤로 시이마네라’는 그 영화가 “신세계 사회의 젊은이들이 무엇을 하고 있으며 그들이 어떻게 그 유혹들을 극복하고 그리스도인 행로를 따르고 있는지” 알려 주었다고 말한다. 최근에 협회가 제작한 다른 영화와는 달리 거기에는 ‘필름’ 옆에 녹음대가 있었다는 점이 독특하였으며 많은 ‘텔레비젼’ 방송국이 그것을 방영하였다. 그러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가정에서 볼 수 있었다. 또한 “유업”은 순회 대회와 다른 공중적 모임에서도 제공되었다.

최근의 몇 해 동안 순회 감독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회중을 방문한 동안 공개 집회에서 환등사진을 제공해 왔다. 그 중 처음 것은 1970년 9월에 상연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 본부를 방문함”이란 제목이었는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조직을 알려 주어 그들이 합당한 행동을 취하도록 감동을 주기 위해 기획된 것이었다. 또 다른 환등 “교회들을 가까이 살펴봄”은 그리스도교국의 교회들이 진리와 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장소가 되지 못함을 청중이 인식하도록 도왔다. 그 환등은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 종교 세계 제국과의 관계를 스스로 끊게 하였을 뿐 아니라 큰 ‘바벨론’에서 도망하도록 다른 사람을 도와 줄 수 있게끔 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성서 교육을 위한 시각 보조물로서 순회 감독자들이 제공한 환등 중 몇 가지 예에 불과하다.

새롭고 감동적인 것!

“우리 시대를 위한 ‘다니엘’의 말을 들으라.” 당신은 1966년의 “하나님의 해방의 아들들” 지역 대회에서 있었던 그 ‘프로’를 기억하고 있는가? 대표자들이 그 내용을 들었을 때 놀라운 일이 있었다. ‘다니엘’과 충실한 세 ‘히브리’인들—심지어 천사들의 역을 하는 색다른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올려 퍼졌다. 음악이 흘러 나오고 ‘두라’ 평지에 ‘느부갓네살’이 세운 금신상에 절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세 ‘히브리’인들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굳건하게 그들은 성실을 유지하였으며, 절하기를 거절하였고, 여호와의 구출을 경험하게 되었다.—다니엘 3장.

그것은 성서 교훈을 전달하는 새롭고 독특한 방법이었다. 대회에 참석한 청중들은 자신들이 고대 ‘바벨론’에 가 있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들은 “우리 시대에 필요한 ‘예레미야’의 인내를 보라”는 ‘프로’로부터도 비슷한 감동을 받았다. 대표자들은 참으로 ‘예레미야’의 인내를 “보게”되었다. 성서 ‘드라마’가 청중들의 눈앞에 전개되었는데 고대 ‘예루살렘’에 살던 그 ‘히브리’ 예언자의 생활 및 그 당시를 묘사하는 의상을 갖춘 연기자들이 등장하였다. ‘드라마’의 영향력은 음향 효과로서 배가되었다. 모든 참석자들은—아우성을 치며 그의 생명을 요구하는 폭도들을 직면해서 홀로 있었던—‘예레미야’의 시련과 그의 충실성에 관하여 훨씬 더 잘 알게 되었다. 그 ‘드라마’는 참으로 여호와의 숭배자들이 자기 하나님께 신뢰를 두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들은 심지어 죽음에 직면해서도 하나님의 봉사에서 인내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 대해 참으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므로 1966년에 중요한 일 즉, 하나님의 백성의 대회에서 가르치는 새로운 방법이 시작되었다. 1966년 이래 여러 해에 걸쳐서 성서 ‘드라마’는 여호와의 백성에 의해 개최된 큰 대회들의 정상적인 주요 ‘프로’가 되어 왔다. 종종 이들 ‘드라마’들은 ‘왙취 타워 길르앗 성서학교’의 졸업식에서 미리 제공된 것으로 학생들이 고대 및 현대인의 역을 하였다.

이들 ‘드라마’의 축복과 유익을 생각하면서 ‘제임스 더불류. 필슨’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성서의 교훈과 충고를 우리로 하여금 깊이 느끼게 하는 데 이 성서 ‘드라마’가 훌륭한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사실상 대회 ‘드라마’로부터 감동을 받아 잘못을 고백하고 영적 도움을 구하게 된 사람들이 상당하였다.—잠언 28:13; 야고보 5:13-20.

다른 정부가 아닌 하나님의 왕국의 옹호자들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은 하나님의 왕국에 충성하고 있다. 여러 해에 걸쳐 그들은 되풀이 하여 그러한 점을 나타내었다. 예를 들어 약 4반세기적인 1950년 8월 1일 화요일—‘여호와의 증인의 신권통치 증가 대회’에 있어서의 “신권적 헌신의 날”로 돌아가보자. “그 정부의 증가”라는 강연에서 ‘노워’ 형제는 풍부한 증거를 제시하여 여호와의 증인들이 공산주의를 지지한다는 종교적인 반대자들의 주장이 전적으로 거짓됨을 폭로하였다. 미합중국의 여러 정부 기관들이 증인들을 파괴 활동자 및 공산당 동조자 명단에 올리는 것을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1879년 이래 ‘왙취 타워 협회’ 자체의 출판물은 여호와의 종들이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점을 확실히 증명하였다. ‘노워’ 형제는 무신론적 공산주의의 발생 및 성장의 길을 터놓은 것은 참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위선적인 그리스도교였음을 명백히 밝혔다! 그 후에 협회장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선언문 겸 결의문을 제안하여 84,950명의 대회 참석자들이 열광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

몇 년 후인 1956년과 1957년 초 즉, 1956년 6월부터 1957년 2월까지 199개 여호와의 증인 대회에서 462,936명의 대표자들은 한가지 청원서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각 대회에서 채택한 그러한 청원서는 그 당시 소련 수상이었던 ‘니콜라이 에이. 불가닌’ 앞으로 보내지는 것이었다. 그 청원서는 소련과 ‘시베리아’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이 받은 잔인한 박해를 묘사하였다. 그 청원서는 투옥된 증인들을 자유롭게 해 주고, 조직하도록 허가해달라고 요청하였으며 그들이 통치체와 정상적인 관련을 가질 수 있도록 그리고 성서 출판물을 출판하고 수입하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 청원서는 그들이 정치적인 어떠한 관심이나 관련도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여호와의 증인들이 행한 왕국 전파 활동에 주의를 이끌었다. 더우기 그 청원서는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대표자들과 소련 정부의 대표자들 사이에 토론을 제안하였다. 그 청원서는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들이 억류되어 있는 여러 수용소의 방문을 위해 증인들의 대표단이 ‘모스크바’로 갈 수 있도록 허용해 줄 것을 제안하였다.

1957년 3월 1일 연합적인 청원서는 ‘왙취 타워 협회’의 일곱 이사에 의해 서명되어 소련 정부에 보내졌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로부터는 여하한 대답도 없었으며 그것을 받았다는 통고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다른 정부가 아닌 하나님의 왕국의 옹호자들로서 계속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왔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나님의 왕국의 충실한 옹호자들일 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의 실패에도 주의를 이끌었다. 그러므로 1958년 8월 1일 금요일 ‘성의 국제 대회’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매우 의미심장한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대회에 참석한 대표자들은 오후 회기에 참석하도록 권고받았으며 194,418명이 참석하였다. ‘왙취 타워 협회’의 부협회장 ‘에프. 더불류. 프랜즈’가 “이 대회에서 결의해야 하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연설했을 때 그들은 주의깊이 들었다. 그에 뒤이어 ‘노워’ 형제가 ‘프로그램’을 다루었는데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이 오늘날 지상에서 가장 비난받을 만한 집단임을 폭로하는 결의문을 강력하게 제시하였다. 또한 그 결의문 내용은 여호와의 백성의 신권적인 원칙들을 재확인하였고, 그리스도에 의한 하나님의 왕국을 유일한 구원의 마련이라고 주저없이 선언하였으며, ‘아마겟돈’에서 여호와께서 끝나게 하실 때까지 그 증거 사업을 중단하지 않고, 사랑과 평화와 연합 가운데 그 왕국을 전파하겠다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단호한 결의를 천명하였다. ‘노워’ 형제는 그 결의문을 낭독한대로 채택하자는 동의안을 제출하였고 그에 대한 재청이 있었으며 그가 많은 청중에게 질문하였을 때 승인을 표시하는 만장일치의 함성이 터져나왔다.

때가 되자 세계적인 배부를 위해 53개 언어로 이 결의문을 실은 72,348,403매의 전도지가 출판되었으며 그 활동의 대부분은 1958년 12월에 행해졌다. 1958년 11월 1일호 「파수대」에 그 결의문과 그것의 예비적인 연설이 나왔을 때에도 그 내용이 광범위하게 배포되었다.

그러한 배부는 효과적이었는가? 참으로 효과적이었다. 예를 들어 ‘피터 드뮤라’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1959년 봄에, 나는 결의문에 감동되어 진리를 배우고 헌신하게 되었으며 그 후에 ‘파이오니아’를 시작하게 된 한 젊은이를 만났다.” 그리고 ‘시이. 제임스 우드워드’는 이렇게 말한다. “바로 이곳 ‘오하이오’ 주 ‘클리블런드’의 여러 회중에서 지금은 여호와의 헌신하고 침례받은 증인들로서 활동적으로 일하고 있는 어떤 분들은 처음에 그 결의문을 읽고 성서 연구를 하게 됨으로써 큰 ‘바벨론’에서 빠져 나오는 행진을 시작하게 되었다.”—계시 18:4.

1963년의 세계 일주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 중에서 여호와의 종들은 자신들이 다른 정부가 아닌 하나님의 왕국의 옹호자들임을 보일 수 있는 훌륭한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열광적으로 결의문을 채택하였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여호와를 우주의 영원한 주권자로 인정하고 있음과 보이지 않는 악령들에 의해 ‘아마겟돈’으로 인도되고 있는 나라들이 하는 바와 같이 정치적 형상인 국제 연합에게 우상 숭배를 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였다. (계시 13:11-18; 16:14, 16) 오히려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리스도 휘하의 천사와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메시야 왕국 및 그분의 심판에 관한 “영원한 기쁜 소식”을 모든 민족에게 계속 선포하겠다는 결심을 굳게 하였다. (계시 14:6) 세계적인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에 참석한 454,977명이 그 결의문을 채택한 후 그 결의문은 전국 대회들에서도 채택되었다. 또한 그것은 66개 언어로 1964년 3월 15일호 「파수대」(국문)에 실리게 되어 세계적으로 배포되었다.

“왜 우리 모두가 결의에 참가해야 하는가”라는 연설과 함께 그 포괄적인 결의문에는 가능한 한도까지 계시록 16장의 일곱가지 재앙 모두가 들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1922년부터 1928년까지의 하나님의 백성의 대회에서 제시된 일곱개의 연속적인 결의문 및 그와 관련된 재료에 처음 선언된 바 있는 심판의 소식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전에 그러한 결의문의 채택에 참여하지 못한 수십만 명이 계시록 16장에 예언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바 여호와로부터 오는 재앙을 쏟는 일에 자신들이 호의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지지한다는 것을 이 포괄적인 한가지 결의문을 통해 공개적으로 선언할 수 있었다. 다시 한번 여호와의 종들은 자신들이 다른 정부나 어떤 정치 제도가 아닌 하나님의 왕국의 옹호자들임을 아주 분명하게 밝혔다.

1969년 “지상의 평화” 대회에서 있었던 “하나님과의 평화의 적들에 대한 마지막 화”라는 연설에서 계시록 8-11장에 언급되어 있는 상징적 일곱 나팔 소리가 고려되었다. 그 연설에 이어서 강력한 선언문이 제시되었는데 그것은 창조주와의 평화가 그분의 메시야 왕국을 통해서만 올 수 있다는 점을 강력하게 지적하였다. 그 선언문을 채택함으로써 여호와의 백성은 그리스도교국에 대해 불리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들은 모든 정치적인 논쟁에 관해서 엄정 중립을 선언하였고, 하나님의 왕국을 온전히 신뢰하며 종말이 올 때까지 모든 나라에게 왕국 전파를 중단하지 않겠다는 점을 아주 명백히 하였다.

1973년 6월 후반부터 1974년 1월까지 전세계 여러 곳에서 개최된 “하나님의 승리” 국제 대회에서 또 다시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은 자신들이 다른 정부가 아닌 하나님의 왕국의 옹호자들임을 나타냈다. “땅의 새로운 왕을 위하여 재산을 늘림”이라는 대회 연설은 예수의 ‘므나’의 비유를 중점적으로 다룬 흥미있는 것이었다. (누가 19:11-27) 그 연설 후에 연사는 선언문 겸 결의문을 제시하였고 그 후에 대회 참석자들은 큰 소리로 찬성을 표시하여 그것을 채택하였다. 그것은 특히 2,520년간의 이방인의 때가 기원전 607년의 지적 ‘예루살렘’의 황폐로 시작되었고 온전한 성취는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용기원 1914년 바로 그곳에서 메시야 왕으로 즉위하셨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히브리 12:22) 임박한 “큰 환란”에 대하여 인류 세계에 더욱 경고할 필요가 있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마태 24:21)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은 계속 하나님의 승리에 믿음을 두고 그러한 경고를 발하며 고난에 처한 인류를 위해 모든 것을 치료할 하나님의 메시야 왕국을 선포하기로 굳게 결의하였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종들은 다른 정부가 아닌 하나님의 왕국의 옹호자라는 점이 사실로써 입증되었다. 그들이 전세계적으로 전하는 소식은 왕국의 좋은 소식이다. 그들이 되풀이 하여 하나님의 메시야 왕국에 대한 충성을 나타내 왔으며 그들은 전세계적으로 계속 그렇게 하고 있다.

때를 따라 공급되는 영적 양식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은 하나님의 왕국 옹호자들로서 확고한 입장을 어떻게 계속 유지할 수 있었는가? 다른 사람들이 믿음을 상실하고 있을 때 그들은 어떻게 계속 “믿음에 굳게 서” 있었는가? (고린도 전 16:13) 여호와 하나님께서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 반열을 통해 때를 따라 영적 양식을 풍족히 공급해 주심으로써 그러한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마태 24:45-47.

1960년대를 예로 들어 보자. 그 당시 종교 및 사회적 변화의 선풍이 미합중국 전역을 휩쓸고 있었다. 많은 그리스도 교국의 교직자들이 성서의 일부를 신화로 본다는 사실은 점점 더 평범한 일이 되어 가고 있었다. 또한 그들에게 있어서는 성서의 도덕적 규범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더우기 어떤 교직자들은 “하나님은 죽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1960년대가 되면서부터 사회적, 심리적, 정치적, 경제적, 요인들은 미합중국에서 인종적 소동 심지어 폭력적인 사태를 조장하였다. 예를 들어 1964년의 이른바 “지리하고 무더운 여름”에 남부 지방의 불안과 더불어 ‘미시시피’ 주에서 세 명의 민권 운동 지도자들이 살해되었다. 북부 지방의 도시들도 영향을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폭동을 두려워하였다. 1965년 8월 11-16일에 있었던 ‘로스앤젤레스’의 폭동만 하더라도 폭도들에 의한 전투, 약탈, 방화로 인해 35명이 죽고 200,000,000‘달러’로 추산되는 손해가 발생하였다.

그러한 종교 및 사회적인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합중국과 다른 곳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계속 여호와를 신뢰하고 그 말씀에 고착하였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올바른 지도를 받게 하셨다. 예를 들어 1962년의 “담대한 전도인들” 지역 대회에서 “‘복종하라’—누구에게?”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그 이유는?” 그리고 그와 관련된 내용을 다른 연설로부터 그들은 큰 유익을 받았다. 그 후 그러한 주요 내용이 「파수대」에 실렸다. (국문 1963년 3월 1일호부터 4월 1일 참조)

로마서 13장에 언급된 “위에 있는 권세”는 세속 정부 권세로서 현 세상에서 책임있는 지위를 갖도록 여호와께서 허용하고 있다는 점을 명백히 설명하였다. 오늘날 모든 하나님의 종들은 위에 있는 정부의 권세에게 상대적인 복종을 하며, 하나님의 법과 충돌되지 않는한 지상에 있는 정부의 법을 무시하지 않도록 권고받고 있다.—로마 13:1-7; 사도 5:29.

“여호와께서는 세상의 정치적 통치자들과 관계에 있어서 참으로 현명하게 우리를 인도하셨다”고 ‘엘. 이이. 로이쉬’는 강조하면서 이렇게 부언한다. “1964년에 민권 운동 문제가 일어나고 그것이 심해져서 거리에서의 폭동, 폭력적인 혹은 소극적인 시민적 반항이 생겨날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 우리도 행진, 항의, 그리고 당시의 사회 문제에 깊이 관여한 교직자들의 이론에 똑같이 빠져 있을 수도 있었다. 아주 적절한 때인 1962년 여름 대회에서 우리는 ‘때를 따라 양식을’ 받게 되었다. (마태 24:45) ··· 상대적인 복종이 명백히 설명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여호와 앞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왕국 통치가 그들을 제거할 때까지 존재하도록 그 분이 허용한 정치 권세들 앞에서 우리의 위치가 보호될 수 있었다.”

그렇다.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영적 양식을 풍부하게 공급하셨다. 자, 비교적 근래에 와서 ‘왙취 타워 협회’가 출판한 서적들을 꽂아둔 책장을 잠간 살펴보자. 「다니엘」서를 다룬 것으로 1958년 발행된 「당신의 뜻이 땅위에서 이루어지이다」라는 책이 있다. 「계시록」 전체를 한 귀절 한 귀절 다룬 내용은 「그 때 하나님의 신비가 끝난다」와 「“큰 ‘바벨론’은 무너졌다!” 하나님의 왕국은 통치 한다!」에 나온다. 1971년에 출판된 「‘열국이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어떻게?」라는 책은 「에스겔」서의 예언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신권통치에 의하여 인류에게 회복될 낙원」이란 책은 「학개」와 「스가랴」의 회복에 관한 예언 성취를 다루고 있는데 20세기의 유리한 입장에서 고찰하고 있다.

연로한 사람에게나 연소한 사람에게나 다 같이 그들을 위해 풍부한 영적 마련이 베풀어졌다. 쉬운 말로 되어 있고 많은 그림이 들어있는 「낙원을 잃은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라는 책이 1958년에 출판되었다. 1971년에 나온 192면의 「위대하신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음」이란 책은 더욱 ‘세대차’를 없애주었다! 그 책은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과 함께 읽도록 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그리고 그 서적은 쉬운 말로 되어있고 훌륭한 그림들이 들어있어 어린이들로 하여금 그것이 ‘그들을 위한’ 것이라고 느끼게 한다.

제자를 삼는 일에 대한 강조

여호와의 백성이 사용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 출판물 중 어떤 것은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제자를 삼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그들을 돕기 위해서 특별히 기록된 것이다. (마태 24:14; 28:19, 20) 1946년에 처음 출판된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는 그러한 종류의 서적이었다. 그 책은 성서의 기본 교리를 다룬 보조서였다. 그 후 1950년에 나온 「“이것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라는 서적은 더 깊은 성서적인 내용들과 그리스도인 생활을 다룬 자료를 제공하였다. 또한 1965년에 출판된 416면의 「하나님이 거짓말 하실 수 없는 사실」이라는 책을 고려해 보자. 그 책은 기본적인 성서 연구 보조서적으로서 왕국 선포자들이 가지게 된 유용한 도구임이 입증되었다.

여호와의 종들은 전파하고 제자를 삼는 사업을 위해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계속 공급 받고 있다. 1967년 지역 대회를 돌아 보면서 ‘시이. 더불류. 바아버’는 자기가 “혁신”이라고 불렀던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의 조직은 언제나 새로운 감동과 즐거움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번에는 그것이 새로운 종류의 야외 봉사용 서적으로서 「사람은 진화되었는가 혹은 창조되었는가?」라는 작은 책이다. ··· 이 책은 25‘센트’로 제공하게 되어 있었다. 그 책은 처음 머리말부터 생각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큰 호소력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수백만 부를 왕국 선포자들이 야외 봉사에서 전하였다. 1968년 5월중에는 교육자들에게 그 서적을 전하려는 특별한 노력을 하여 훌륭한 결과를 얻게 되었다. ‘마리이 기바아드’는 이렇게 말한다. “‘뉴우요오크’ 주 ‘화이트 플레인’에 있는 한 학교 선생은 12살된 학생으로부터 그 책 한부를 전해 받고 그후 흥미를 가지게 되어 지금은 침례받은 증인이 되었다.”

전진하도록 활동에 영향을 주는 것!

또 다른 주목할 만한 “혁신”이 1968년에 있었다. “만국을 위한 기쁜 소식” 지역 대회를 광고하면서 「파수대」는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을 기쁘게 할 뿐만 아니라 틀림없이 당신을 놀라게 할 일이 금요일에 계획되어 있다. 왜냐 하면 그것은 앞으로 여러 해 동안 우리가 행할 사업에 상당한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종들은 참으로 궁금하였다. 새로 전개될 그것이 무엇일 것인가? 그 대답은 “거짓 종교 없는 세계의 ‘기쁜 소식’”이라는 강력한 기조 연설이 있은 후 밝혀졌다. 그 결론에서 192면의 새로운 ‘포켓’용 성서 연구 보조서적이 발표되었다.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라는 그 책을 받자 모두는 크게 기뻐하였다. “하나님은 누구인가?”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왜 오늘날까지 악을 허락하셨는가?” “이 악한 사물의 제도의 마지막 날” “행복한 가정을 세워 나감” “참 숭배—우리 생활의 길”—이러한 것들은 그 책에서 관심을 끄는 몇몇 장의 제목이다. 그 새로운 출판물은 어디에서나 그 내용을 연구생과 관련시키고 있다.

그러나 대회 대표자들을 더 놀라게 한 것이 있었다. 새로운 진리책은 6개월 성서 연구 마련에 사용될 것이다. 그 출판물이 연구생을 연관시키고 있는 점 때문에 일반적으로 그가 그 책을 마칠 때까지는 진리를 옹호하든지 반대하든지 간에 어떠한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명백한 영적 진보를 나타내지 않고 얻은 지식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면 한 사람의 여호와의 증인이 그와 더 이상 여러 해 동안 성서 연구를 계속하지 않을 것이다.

시기에 적절한 마련

1960년부터 1965년까지 매년 침례받은 수는 60,000명 정도 되었다. 그러나 1966년에 그 수는 58,904로 감소되었다. 그러한 상태를 보고 사업이 늦추어지고 있는가? 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렇지 않음이 입증되었다.

1967년 봉사년도에 74,981명이 침례받았다. 그것은 상당한 증가였으며 그것은 또다시 낙관할 수 있는 이유가 되었다. 그 다음에 1968년이 되었고 「진리」 책과 6개월 성서 연구 마련이 있게 되었다. ‘에드가 시이. 케네디’는 이렇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2년전에 발표된 6000년(지상 인간 존재의)이 1975년 끝난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마찬가지로 ‘시이. 더불류. 바아버’도 1968년을 “전환점”이라고 말하고 시대의 단축과 긴급성을 언급하면서 이러한 말을 하고 있다. “모든 곳에서 형제들은 분발하여 좋은 소식을 전하는 ‘더 쉬운’ 이 방법을 열심히 사용하였다. 전도인의 수가 전세계적으로 또다시 증가되기 시작하였다. 듣기만 하던 자들이 행하는 사람이 되기 시작하였다. ··· 참으로 여호와께서는 작지만 강력한 그런 제자를 삼는 도구가 출판되도록 지도하셨다.”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라는 책은 아주 놀라울 정도로 배포되었다. 그 책이 지금은 91개 언어로 발행되었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더우기 그 책이 처음 발행된지 6년이 되자 74,000,000부가 출판되었다. 이 성서 연구 보조 서적은 수십만 명으로 하여금 성서의 정확한 지식을 얻어 “생명의 말씀을 굳게 잡”도록 도와 주었다. (빌립보 2:16, 새번역) 물론 여호와의 증인들이 사람들과 성서 연구할 때 「진리」 책만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여호와의 증인들이 전세계적으로 사람들의 가정에서 사회하고 있는 1,411,256건의 가정 성서 연구의 대부분이 그 출판물에 있는 훌륭한 성서적인 재료에 기초를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밀물같이 쏟아지는 출판물이 여호와의 천국을 선포하다

하나님의 메시야 왕국의 좋은 소식이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전파되고 있다. 마치 밀물처럼 쏟아지는, 여호와의 천국을 선포하는 출판물이 그 활동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 한 예로 「파수대」지를 들어보자. 한 때 「‘시온’의 파수대」로 알려져 있었던 첫 호(1879년 7월호)는 단지 6,000부 밖에 되지 않았다. 1975년 현재 매호당 평균 인쇄 부수가 78개 언어로 9,950,000부가 발행되고 있다.

1879년 이래 여러 해 동안에 걸쳐 「파수대」지는 그 명칭과 체제에 있어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처음에는 「‘시온’의 파수대와 그리스도의 임재의 전령」이라고 알려졌다. 오늘날 그 겉표지는 「파수대, 여호와의 천국 선포」라고 되어 있다. 여러 해 동안 「파수대」 표지는 흑백 인쇄를 하였다. 그러다가 1939년 1월 1일로부터 새로운 색채 표지가 소개되었다. 그 당시 그 잡지는 지금보다 크기는 더 컸지만 지면이 적었다. ‘여호와의 증인의 신권 통치 증가 대회’에서 발표된 1950년 8월 15일호에는 다른 표지 도안이 나왔으며 색채 그림이 들어 있었고 16면에서 32면으로 증가되었다. 「파수대」가 신권통치의 증가에 기여했는가? 정말 그랬다! 1942년부터 1974년 봉사 연도까지만 해도 2,836,041,443부의 「파수대」가 출판되었다는 것을 알면 틀림없이 당신은 놀랄 것이다!

「파수대」의 자매지인 「깨어라!」는 「황금 시대」와 「위안」지를 대신한 것이다. 첫 호부터—1946년 8월 22일호—「깨어라!」지는 바로 이 세대 내에 하나님의 의로운 새 질서가 세워질 확실한 소망을 반영해 왔다. 이 출판물 역시 왕국을 선포하는, 거대한 밀물같이 쏟아지는 출판물의 일부이다. 자, 1942년부터 1974봉사 연도까지 2,600,751,501부의 「깨어라!」(와 「위안」)가 출판되었다!

1973년에 발행된 「하나님의 천년 왕국은 다가왔다」 책을 비롯하여 여호와의 왕국을 선포해 온 밀물같이 쏟아지는 서책도 무시할 수 없다. 1942년부터 1974봉사년도까지 ‘왙취 타워 협회’가 본부와 전세계 다른 인쇄 시설을 통해 352,513,470부의 서책을 출판했음을 알게 될 때 당신은 놀랄 것이다.

인쇄 시설의 확장

그처럼 늘어가는 성서 출판물은 미합중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 다른 여러 곳의 ‘왙취 타워 협회’의 인쇄 시설을 계속 확장되게 하였다. 협회가 ‘뉴우요오크’ ‘브루클린’ ‘아담스’ 가 117의 철근 ‘콘크리트’로 된 현대식 내화 건물로 이사한 것은 1927년 이었다. 연 건평이 2,000평으로서 그 건물은 아주 거대한 것으로 보였었지만 왕국 전파와 제자를 삼는 활동이 가속화 됨으로써 협회 시설이 확장되어야 하였다.

1946년 8월 8일 ‘즐거운 만국 신권 대회’에서 ‘노워’ 형제는 그에 관한 주요 조처를 발표하였다. 그는 대회 참석자들에게 협회의 인쇄 공장과 ‘브루클린’ ‘벧엘’ 가정이 확정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원래의 공장에 인접한 건물을 사서 그 내부를 치우고, 그 다음에 헐었다. 새로운 공장을 위해서 1948년 12월 6일 기초작업을 시작하였으며, 건축은 1949년 1월에 시작되었다. 완성되자 증축된 이 9층 ‘콘크리트’ 건물로 인하여 공장 건평은 거의 두배가 되었다. 1950년까지는 ‘아담스’ 가 117번지의 협회 인쇄 공장이 시의 한 구획 전체를 다 차지하였다.

1954년에 ‘왙취 타워 협회’는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어그’ ‘비그로우 불리바드’ 4,100번지에 새로운 건물을 완성시켰다. ‘그랜트 수우터’는 이렇게 말한다. “그 건물은 등록된 협회 사무실일 뿐만 아니라 ‘펜실베이니아’ 법인의 연례 회의 장소도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 왕국회관이 있었다.” 그 회관은 여호와의 증인의 몇 회중에 의해서 사용되었다. 또한 천국 전도 학교의 하나가 1974년 5월 4일까지 여러 해 동안 그곳에서 열렸다.

1950년대 중반까지 왕국 전파 활동은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얼마 전인 1944년에 협회는 17,897,998부의 「파수대」와 「위안」(지금은 「깨어라!」)을 출판하였다. 그러나 1954년에는 총 57,396,810부였다. 그러므로 ‘뉴우요오크’ ‘브루클린’ 협회 시설의 확장은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1955년 봄에는 새로운 공장을 위해 기초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1956년에 13층 공장이 완성되었다. ‘샌드’ 가 77번지에 위치한 “왙취 타워 건물”이라고 불리우는 이 건물의 연 건평은 5,300평이나 되어 ‘아담스’ 가 117번지에 있는 공장보다 더 넓었으며 ‘아담스’ 가에 있는 공장과는 길 위에 걸려있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1958년에 협회는 인접한 구획에 있는 9층 공장을 사들였으며 그 건물은 거의 전적으로 창고로 사용되었다.

1960년 중반에 가서는 전세계적인 왕국 선포자 수가 일백 만을 넘었다. 또 다시 협회의 ‘브루클린’ 공장이 비좁게 되었다. 그래서 1966년에는 다른 공장들과 인접한 구획에다 또 다른 큰 공장 건축을 시작하였다. 1968년 1월 31일에 봉헌된 그 11층 건물은 여러 건물로 이루어진 ‘왙취 타워’ 공장의 건평에 6,300평을 더 해 주었다. 그때까지 해서 협회의 ‘브루클린’ 공장 건물들은 길 위에 걸려있는 다리로 상호 연결되어 있었으며 시의 네개 구획에 걸쳐 있었다.

1969년 후반에 확장 속도는 극적으로 증가하였다. 1969년 11월 25일 사단법인 ‘뉴우요오크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는 ‘브루클린’에 있는 10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스큅’ 제약 회사 건물을 사들였다. 그것을 매입함으로써 협회 본부 시설의 건평은 17,500평이나 늘게 되었다. ‘시이. 더불류. 바아버’는 여러 해 전에 ‘스큅’ 회사의 여러 건물의 건축을 다소 살펴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 여호와의 조직이 바로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였으나 결국 ‘스큅’ 회사가 그것을 소유하게 되었다. ‘바아버’ 형제에 의하면 “그곳이 모래가 많은 곳이어서 ‘스큅’ 회사도 또한 자기네 건물의 기초를 놓는데 많은 어려움을 직면하였었다.” 그는 이렇게 부언한다. “결국 그들은 멋있게 보이는 여러 건물을 함께 세웠으며 나는 그것이 협회의 소유라면 참 좋겠다고 늘 생각했었다. 그런데 보라. 그것이 실현되었다!”

‘벧엘’ 가정의 확장도 그 보조를 맞추다

‘브루클린’에 있는 ‘왙취 타워 협회’ 공장 시설이 확장되어 가자 그와 관련해서 ‘벧엘’ 가정의 확장 역시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1950년에 ‘벧엘’에 12층 건물이 증축되었다. 그러나 협회 직원들은 계속 늘어만 갔다. ‘브루클린’ ‘콜롬비아’ ‘하이츠’에 한 건물 즉 ‘벧엘’ 별관을 신축할 예정이었던 바 1958년 12월 8일에는 그 신축 예정지에 있는 낡은 건물들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1959년 그곳에 건축이 시작되었고 오래지 않아 12층의 ‘벧엘’ 증축 공사가 완료되었다. 그 봉헌식은 1960년 10월 10일 월요일 저녁 새로운 건물에 있는 아름다운 왕국회관에서 거행되었다. ‘벧엘’ 가족 성원들과 건축에 종사한 형제들이 참석하여 총 630명이 되었다. 본부 직원은 1950년에 355명이던 것이 1960년에는 607명으로 증가하였다.

1965년에 ‘벧엘’ 가정의 소재지—‘브루클린’ ‘하이츠’ 구역—는 ‘뉴우요오크’ 시에서 처음으로 “역사적인 지역”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협회는 거주를 위해서 또 다른 12층 건물을 세우고 싶었지만 ‘경계표 보존 위원회’에 협조하여 건축을 제한하게 되었다. 오래된 세 건물의 전면을 그대로 두도록 허용되었고 7층짜리 숙소가 그 세 건물 뒤에 있어 그 건물들과 한데 연결되어 있었다. ‘콜럼비아’ ‘하이츠’ 119번지의 새로운 건물은 1969년 5월 2일에 봉헌되었다. 그 옆에 여호와의 증인들이 소유한 대형 ‘아파트’가 있으며 그 대부분은 본부 직원들의 숙소로 사용되어 왔다. 1970봉사 연도 말까지 (‘브루클린’과 협회 농장에서 일하는 정식 직원 및 임시 직원을 포함한) ‘벧엘’ 가족은 1,449명으로 증가하였다. 그 외에도 그 당시 본부에 ‘길르앗’ 학교 학생 70명이 있었으므로 총 수는 1,519명이 되었다. 그 많은 사람들의 수용을 돕기 위해 협회는 인근에 있는 ‘타워스 호텔’의 세층을 빌렸다.

확장이 계속되다

그러나 시설 확장이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그랜트 수우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1964년에 결국 협회는 (‘뉴우요오크’ 주 ‘사우드 랜싱’ 근처의) ‘길르앗 왙취 타워 성서 학교’가 전에 사용하던 건물을 비롯하여 왕국 농장 부동산의 일부를 매각하기 위한 조처를 취하였다.” 몇 년 후에 매각 처분은 완료되었다. 그리하여 농장의 크기는 축소되었다.

그동안 사단법인 ‘뉴우요오크 왙취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이사회는 ‘뉴우요오크’ 주 ‘파인 부쉬’ 근처에 소재한 농장 시설을 구입하였다. 처음에는 811‘에이커’인 농장을 1963년에 취득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왙취 타워 농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68년에는 그곳에 숙박 시설로서 훌륭한 건물이 완성되었고 그 후에도 다른 건축이 있었다. 때가 되자 근처에 있는 다른 농장도 구입하게 되었다. 오늘날 두개의 ‘왙취 타워 농장’은 1,698‘에이커’가 된다.

‘왙취 타워 농장’에서는 협회 본부 직원들의 식품이 되는 채소, 과일, 고기, 낙농 제품이 생산된다. 더우기 1번 농장에 있는 여러 건물 중에는 공장이 둘 있다. 1호 공장에 4대의 윤전기가 있으며 각 윤전기는 매 시간당 12,500부의 잡지를 인쇄할 수 있다. 2호 공장에는 다른 많은 시설과 함께 종이 저장과 14대 이상의 윤전기를 둘 수 있는 충분한 장소가 있다. 6대의 윤전기는 이미 그곳에서 돌아가고 있으며 두 공장에서 함께 10대의 인쇄기가 움직이고 있다. 완성되면 이들 공장은 약 11,000평의 건평이 될 것이다. 1974년 10월까지 460명 이상의 정식 및 임시 직원들이 ‘왙취 타워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왙취 타워 협회’가 확장시킨 인쇄 시설은 비단 미합중국 내에 있는 것만이 아니다. 확장하는 일은 전세계적으로 있어야 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현재 ‘오스트레일리아’, ‘브라질’, ‘캐나다’, 영국, ‘핀란드’, 불란서, 독일, ‘가나’, 일본, ‘나이제리아’, ‘필리핀’, 남‘아프리카’, ‘스웨덴’, ‘스위스’ 등지에 인쇄 공장을 가지고 있다. 사실상 여호와의 백성은 전세계적으로 37개 인쇄 공장을 소유하고 있다. 또한 1955년부터 지금까지 대형 윤전기 수는 전세계적으로 9대에서 64대로 증가되었다. 확실히 그러한 인쇄시설은 성서 출판물에 대한 점증적인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 유용한 것이다.

이러한 모든 확장 사업이 왜 전세계적으로 수행되어 왔는가? 여호와의 조직에서 그러한 결정을 내릴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서 지식을 얻도록 돕는 데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목적도 역시 그러한가? 만일 당신이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의 한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본부 성원들도 모두 그렇게 바라고 있다. 그들이 성서 출판물을 생산하려고 부지런히 일해 오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의 연합적인 노력으로 1974년 봉사년도에 미국에서만 268,509,382부의 「파수대」 및 「깨어라!」 그리고 13,874,957부의 소책자, 45,189,920부의 서적 및 성서 그리고 261,387,772매의 전도지가 생산될 수 있었다.

이러한 모든 신권적인 확장에 대한 영예는 누구에게 돌아 가야만 하는가? 그것은 단순한 인간 계획과 성실한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그 영예는 만물을 자라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 그 분이야말로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있어서 자기 백성의 노력을 축복해 오신 분이다.—고린도 전 3:5-7.

하나님의 인도의 1세기를 기록함

1970년은 ‘차알스 테이즈 러셀’과 몇 명의 동료들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서를 간절히 연구하기 위해 모이기 시작한지 1세기가 되는 해다. 그 모든 기간을 통해 여호와의 종들은 영적 계몽과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왔다. 80대의 ‘에디스 알. 브레니슨’은 그러한 세월 중 참으로 여러 해 동안을 여호와의 조직에 몸담아 왔다. 그 자매는 1970년의 “선의자” 지역 대회중 하나에 참석하였을 때 깊은 감동을 받았다. ‘브레니슨’ 자매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1970년 ‘보스턴’ 대회에 참석하여 ‘펜웨이’ 공원에 사람들이 그토록 많이 모인 것을 보았을 때 나는 1902년 ‘러셀’ 형제의 연설을 들으려고 ‘보스턴’ ‘스퀘어’ 공원에서 열린 하루간의 대회에 처음 참석하였던 일이 생각났다. 정말 단지 손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였다. 또한 내가 처음 ‘맥밀란’ 형제를 만났던 것도 그곳이었다. 68년이 지난 후 바로 그곳 ‘보스턴’에 앉아서 주위에 있는 그토록 많은 증인들을 바라보며 느꼈던 나의 감회를 이루 다 설명할 수가 없다. 극소수였던 초기 시절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성령과 여호와께 대한 열심과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하였다.”

그 해에 있었던 대회에서 의장은 “100년에 걸친 하나님의 인도”라는 제목으로 개회사를 하였다. ‘마가레트 그린’은 그 연설이 “우리로 하여금 1870년대의 조직 및 그 보잘 것 없는 시작과 과거 100년간의 믿기 어려운 성장에 대해서 우리가 읽었던 것을 되새겨 보게 하였다”고 말한다.—스가랴 4:10 비교.

하나님의 인도에 따름

여호와의 종들은 하나님의 인도에 계속 순응할 것을 굳게 결심하였다. 그들은 1971년 5일간의 “하나님의 이름” 지역 대회에서 그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였다. 그 대회들은 여호와란 이름을 높였으며 그 이름이 대표하는 하나님의 원칙에 순종하도록 교훈하였다. 특히 현대 그리스도인 회중을 신권적이 되게 하는 점에 대해 지적하였다.

그러나 1971년 지역 대회에서 강조된 조직적인 발전을 고려하기 전에 과거를 한 번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 초에 발생하였다. 먼저 약 30년전으로 돌아가 보자.

“신권 통치는 성년이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1944년 9월 30일부터 10월 2일까지는 매우 중요한 때였다. ‘여호와의 증인의 신권 대회’ 및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연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수천 명이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어그’에 모였다. 대회의 주요 ‘프로’들 중에는 ‘티이. 제이. 설리반’에 의한 “마지막 활동을 위한 신권 조직”, ‘에프. 더불류. 프랜즈’의 “활동하는 신권 조직”, ‘엔. 에이치. 노워’가 행한 “오늘날의 신권 노선”등의 연설이 들어 있었다. 그 연설들의 주제는 그 해의 연례 회의에서 처리될 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들이었다. 그리하여 1944년 10월 2일 월요일에 수천 명이 협회의 실무 회의를 위해 ‘피츠버어그’에 계속 남아 있었다.

‘더불류. 엘. 펠레’는 “내가 마지막으로 ‘밴 앰버어’ 형제를 만나서 환담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나를 보자 그가 맨 처음 한 말은 ‘‘펠레’ 형제, 신권 통치는 이제 성년이 되었읍니다!’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협회의 연로한 총무겸 재무이사가 그런 말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때 있었던 새로운 발전 때문이었다.

‘왙취 타워 협회’ 정관의 변경을 제안하는 여섯 가지 수정 결의안 통과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첫 번째 수정 결의안은 앞에 놓인 거대한 세계적인 사업에 적절히 대치할 수 있도록 협회의 목적하는 바를 확대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그 안은 특히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를 정관에 삽입하게 하였다. 세번째 수정안은 협회에 돈을 기부한 것을 근거로 회원이 되게 하는 정관의 제도를 완전히 폐지하게 하였다. 그 수정안이 효력을 발생하면 회원은 500명 이내로 제안되고 회원은 모두 하나님께 대한 활동적 봉사를 근거로 선택하게 되었다. 1944년 11월 1일호 「파수대」가 다음과 같이 말한 바와 같다. “이 수정안은 국가의 법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정관을 신권적 마련에 가깝게 해 줄 것이다.” 전부 해서 6개의 수정 결의안이(2, 3, 5, 7, 8, 10조와 관련된)이 채택되었다.

여호와의 백성은 그 당시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였지만 1944년에 있었던 조직 구성에 대한 그들의 결정은 성서적인 의미가 있음이 분명하다. ‘다니엘’의 예언에는 상징적인 ‘작은 뿔’(영미 세계 강국)이 2,300“주야” 혹은 날 동안 지상에 있는 예수의 기름부음 받은 추종자들로 대표된 여호와의 신권적인 “성소”를 짓밟을 것이 예언되어 있다. (다니엘 8:9-14) 이 일이 2차 세계 대전 중에 발생하였다.

예언된 2,300일이 시작될 때 「파수대」(1938년 6월 1일과 6월 15일호)에 “조직”이라는 2부로 된 기사가 실렸다. 1부에서 다음과 같은 점이 지적되었다. “여호와의 조직은 결코 민주적이 아니다. 여호와는 최고 주권자이며 그의 정부 혹은 조직은 엄밀히 신권적이다.” 2부는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들이 채택하는 결의문을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위로부터 아래로 모든 회중에서 일하는 모든 종들의 신권적 임명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2,300일을 1938년 6월 1일로부터 계산하면 1944년 10월 8일에 이르게 된다. 혹은 1938년 6월 15일부터 계산하면 1944년 10월 22일에 끝난다. 그 기간 끝에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어그’에서 1944년 9월 30일부터 10월 2일까지 열렸던 대회와 연례 회의에서 있었던 조직적 연설과 조정 그리고 1944년 10월 15일(“마지막 활동을 위하여 조직함”) 및 11월 1일 「파수대」(“활동하는 신권 조직”과 “오늘날의 신권 노선”)에 실린 신권 조직에 관한 기사들에서 신권 조직이 또 다시 강조되었다. 그러므로 시련기인 2,300일의 끝에 하나님의 종들은 그전 어느때 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여호와의 신권 정부에 더욱 고착되어 있음을 나타냈다. 예언된 대로 그때 “성소”가 “올바른 상태로 회복”되었다.—다니엘 8:14; 미표 1972년 2월 1일호 「파수대」(국문) 55-69 참조.

사도적인 회중 구조

이제 1971년의 “하나님의 이름” 지역 대회를 살펴보자. 초기 그리스도인 회중 통치 제도를 다룬 ‘프로’는 특히 중요하였다.

근래에 와서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는 성서적인 그리고 사도적인 회중 구조에 대해서 연구를 해 왔다. 그리하여 현대에 있어서 몇 가지 조정이 필요함을 밝혔다. 근래 여러 해 동안 한 사람의 장성한 그리스도인 남자가 회중의 종 혹은 주임 감독자로서 일해 왔으며 임명된 “종들”이 보조한 반면에 각 회중을 통치하는 사도적인 방식은 장로의 회에 의한 것이었다. (사도 20:17-28; 디모데 전 4:14) 또한 제1세기에 회중 장로의 회에서 사회자의 윤번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한명 외에 더 장로가 있는 회중에서는 매년 장로의 회의 사회자가 바뀌는 것이 적절한 것으로 생각된다.

장로들과 봉사의 종을 선택함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는 “장로의 회”와 봉사의 종들을 선정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서신을 각 회중에 보냈다. 1971년 12월 1일자(한국, 1972년 2월 1일) 그 서신에 의하면 회중에서 20세 이상되는 침례받은 모든 남자들이 고려되게 되었다. (에스라 3:8 참조) 1972년 1월 15일호 「파수대」(국문)에 나오는 “민주정치와 공산주의 한 복판에 있는 신권 조직” “신권 조직 안에 있는 임명받은 역원들” “사회자의 직책이 윤번하는 ‘장로의 회’” 등의 기사를 고려함으로써 장로들과 봉사의 종에 관한 토론에 참여하는 형제들은 잘 준비하였다. 또한 “여러분 가운데 지혜롭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양떼를 치도록 임명된 장로들”이라는 제목의 1972년 3월 1일호 「파수대」(국문) 기사를 주의깊이 연구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그 형제들은 「성서 이해를 위한 보조서」에서 “연로자”, “감독자”, “봉사자” 등의 제하에 나오는 자료를 읽었다.

회중 위원들과 다른 자격있는 형제들이 함께 모였을 때 그들은 기도하였다. 그들은 특히 디모데 전 3:1-10, 12, 13; 디도 1:5-9; 베드로 전 5:1-5의 하나님의 말씀에 나오는 장로와 봉사의 종을 위한 자격을 읽고 고려하였다. ‘알. 디이. 캔트웰’은 “여러 사람들은 첫째로 진실하게 자신들을 고려하였으며, 모두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살펴보는 데 있어서 여호와 앞에 정직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깊이 느꼈다. 몇몇 사람은 자신들이 자격이 없다고 판정해야 하였다. 조직에 관한 성서 원칙의 이해에 있어서 이러한 진보적 단계 없이는 나타날 수 없는 정직성과 겸손이 그러한 마련으로 인하여 나타났다.” (하지만 그 이전의 여러 해 동안에도 성서의 요구 조건이 회중에서 책임을 맡을 사람을 결정하는 근거가 되었다. 「여호와의 증인을 위한 신권 조직에 대한 교훈」 영문 19면 「일치 연합하여 전파함」 27면 참조)

결국, 회중 형제들의 자격을 분석한 후 추천서가 통치체에 보내졌다. 1972년 8월 1일 이후 회중은 감독자와 봉사의 종을 임명하는 편지를 받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함

여호와의 백성이 그러한 회중적 마련의 온전한 시행을 열렬히 학수고대하고 있는 동안 미합중국, ‘캐나다’, 영국 제도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은 1972년 6월 후반과 8월말 사이에 개최된 “하나님의 통치권” 지역 대회에 참석하였다. 그 모임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권에 가장 많은 주의가 기울여졌다.

대회에서 발표된 주요 출판물 가운데 하나는 「왕국을 전파하고 제자를 삼기 위한 조직」이라는 192면의 새로운 서적이었다. 그것은 특히 그리스도인 회중 구조에 있어서 개선되는 주요점을 설명하였다. 「조직」 책과 대회 ‘프로’는 함께 그러한 계획의 실제적인 면을 잘 지적하였고 그러한 점들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잘 보여 주었다.

“하나님의 통치권—온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공개 강연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것이 이 지역 대회에서 강조되었다. 대표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여호와의 통치권을 개인적으로 인정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 나온 「조직」 책과 대회의 여러 가지 주요 ‘프로’는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한 회중적인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통치체가 본을 보이다

이제 우리가 1971년 9월 13일 월요일 아침으로 돌아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7시에 ‘왙취 타워 협회’ 본부 직원들은 ‘브루클린’ ‘벧엘’ 가정의 여러 식당에 있는 각자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들은 평상시와 같이 일용할 성귀 토론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으며 그 토론이 끝나면 아침 식사를 하게 된다. 협회장이 본부에 있을 때는 언제나 그가 그러한 토론을 사회하는 것이 관례였다. 오늘은 ‘노워’ 형제가 ‘벧엘’에 있었지만 그가 식탁의 상좌에 앉아 있지 않다. 대신에 부협회장 ‘에프. 더불류. 프랜즈’가 오전의 일용할 성귀의 토론을 사회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가 오전의 일용할 성귀 토론과 월요일 저녁 ‘벧엘’ 가족의 「파수대」 연구에 있어서 일주일마다 사회자를 윤번하는 마련을 시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슷한 마련이 하나님의 회중에서 전반적으로 시행되기 1년전부터 ‘브루클린’ ‘벧엘’에서는 윤번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마련은 그 이상으로 적용되었다. 1971년 9월 6일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가 채택한 결의문에 의하면 통치체의 사회자를 매년 ‘알파베트’ 순서로 윤번하게 되어있다. 그리하여 1971년 10월 1일부터 1년간은 ‘에프. 더불류. 프랜즈’가 통치체의 사회자가 되었다. 통치체가 새로운 조직적 마련의 시행에 본을 보인 것은 적절한 일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다”

‘로저 모어건’은 장로와 봉사의 종을 임명하는 새로운 회중적 마련을 회고하면서 감동적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다”라고 말하였다. 다른 사람들도 그 유익한 결과를 생각해 보았기 때문에 틀림없이 그의 말에 동의할 것이다. 처음 임무를 교대하는 일은 1972년 9월에 시작되어 10월 1일까지는 대부분의 회중에서 그러한 조정이 매듭지어졌다. 많은 경우에 이전의 부회중의 종이 주임 감독자가 되고 회중의 종은 신권 전도 학교 감독자가 되는 등등이었다. 그 점에 있어서 확실히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의 통치권이나 그의 백성의 회중 내에서 사물을 처리하는 여호와의 방법을 인정한 것이 분명하였다. 매년 회중의 장로들은 여러 가지 지위로 윤번하게 되며 그들은 회중의 영적 복지 및 그들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양떼를 치는 데 있어서 서로 협조해야 할 필요성을 염두에 두고 한 집합체로서 같이 일하게 되는 것이다.—베드로 전 5:2.

새로운 회중적 마련에는 많은 유익이 있다. 예를 들어 ‘에드가 시이. 케네디’는 그것이 “회중이 얼마 동안 통치체로부터 격리되는 경우에 있어서도 강력하게 단결해 줄 수 있는 마련일 것이다”고 생각한다. ‘그레이스 에이. 이스테프’는 이렇게 말한다. “확실히 그것은 여호와의 조직에 있어서 특별한 발전인 것이며 여호와께서 이 사물의 제도가 지나간 후에 오게 될 시대를 위해 자기 백성을 얼마나 잘 준비시키고 있는지 보여 주는 것이다.” 1972년의 지역 대회에 대한 보고에서 「파수대」가 이렇게 논평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참으로 여호와께서는 모여든 자기 백성을 ‘아마겟돈’을 지나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새로운 질서로 들어갈 수 있는 조직적인 상태로 이끌고 계신다.”

“하나님의 승리” 국제 대회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인도에 따르고 있으며 기꺼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받아들인다는 풍부한 증거를 제시해 왔다. 1973년 6월 후반부터 1974년 1월까지 그들은 전세계적으로 하나님의 승리를 학수고대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 주는 국제 대회를 개최하였다. 대부분 5일간의 모임이었던 이 전세계적인 여러 대회는 미합중국, ‘캐나다’, ‘유럽’, ‘아시아’, 중남미, 남태평양과, ‘아프리카’에서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 중 많은 사람들이 먼 나라들로 여행하여 그곳에서 다른 나라에 사는 동료 신자들과 함께 영적으로 세워 주는 대회 ‘프로’를 들었다. 보통 낮에만 회기가 있어서 대표자들이 숙소로 일찍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어두워진 후 다니는 것이 별로 좋지 않은 곳에서 어두워진 후에 다니지 않아도 될 수 있게 하였다. 종종 저녁 시간은 대회 주요점들을 복습하는 데 보냈다.

그 대회의 여러 가지 훌륭한 ‘프로’들 중에 “여호와의 날의 임재를 항상 유의하라”는 관심을 집중시킨 연설이 있었다. 그 연설은 그리스도인들이 정신적으로 여호와의 날을 제쳐 놓아서는 안된다는 점을 참으로 강력하게 보여 주었다. 타락되는 세계 상태와 장로와 봉사의 종에 대한 마련 및 “큰 무리”를 구성할 사람들이 급속도로 밀려든 점 등 신권 조직의 발전을 볼 때 여호와의 날이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드로 후 3:11-13; 계시 7:9) 생각을 자극하는 그 연설이 있은 후 「참다운 평화와 안전—그 근원은 무엇인가?」라는 192면의 서적이 발표되어 깊은 감사를 느끼게 하였다.

대회에서 발표된 출판물에는 「신세계역 성서 대형 콘커단스」와 「하나님의 천년 왕국은 다가왔다」라는 416면의 서적도 들어 있다. “하나님의 승리—그것은 고난받는 인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공개 강연은 참으로 격려적이었다. 담대하게도 그 연설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승리를 통해 자신을 입증하실 우주적인 ‘할마게돈’ 전쟁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불결한 영감받은 표현의 지배적인 영향력 아래 “온 천하 임금들”이 지구의 통치권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을 대항하는 전쟁을 위해 모아지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계시 16:13-16) 그러므로 어느 사람이든지 그 쟁점에서 이편 혹은 다른 편에 서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 왕 중 왕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만이 살아남게 될 것이며, 그들만이 하나님의 승리의 증인들일 것이며 그 후에 있을 축하에 함께 참여할 사람들인 것이다.

1973년 6월과 7월중에 미국 대륙에서 개최된 19개 “하나님의 승리” 국제 대회에서 15,851명이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물의 침례를 받음으로써 상징하였다. 자기 백성을 위해 여호와께서 마련하신 풍부한 영적 축복을 즐기기 위해 총 665,945명이 그러한 대회에 모였다. 전세계적으로 개최된 140개 대회에서 81,830명이 침례를 받았으며 총 2,594,305명이 참석하였다. 참으로 승리자 하나님께 감사를 나타낼 만한 일이었다!

특별한 활동이 증가에 박차를 가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승리” 국제 대회에서의 매우 중요한 다른 ‘프로’가 또 있었다. 여러 달 전에 「파수대」는 그 ‘프로그램’이 왕국 전파와 제자를 삼는 사업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일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그 「파수대」는 이렇게 부언하였다. “한가지 특별한 활동이 지적되고 설명될 것이다. 전세계 여호와의 증인의 모든 회중은 대회 후 특정한 기간 동안 그 일에 참여할 것이다.” 그 특별한 활동이란 무엇이었는가?

그 대답은 “무력 충돌 없이 세상을 이김”이란 대회의 기조 연설이 있은 후에 나왔다. 그 연설 후 4면 전도지로서 “인류에게 때는 거의 찾는가?”라는 「왕국 소식」 16호가 발표되었다. 그 배부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12세 이상의 모든 청중에게 8매로된 한 묶음의 무료 전도지가 주어졌다. 10일간 9월 21일부터 30일까지 이 전도지 배부를 위한 기간이 될 것이라고 연사는 지적하였다. 그 전도지는 호별 방문 활동에서 개인적으로 사람들에게 전해질 것이며 집에 아무도 없으면 문 밑에 놓아 둘 것이다. ‘왙취 타워 협회’는 각 전도인당 전도지 100매씩을 각 회중에 보낼 것이다. 매 집에 한매씩 전해 주기를 원하였다. 그러므로 수백 만매가 무료로 배부될 것은 확실하였다. 여호와의 백성은 왕국 선포에 있어서 그러한 특별 활동을 즐거움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므로 다른 곳에서와 같이 미합중국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1973년 9월의 마지막 열흘 동안에 「왕국 소식」 16호를 수백만 매씩 배부하였다. 1973년 12월 22일부터 31일까지 그들은 또 다시 ‘왕국 소식’의 대량 배부에 참여하였다. 이 번에는 17호로서 “종교는 하나님과 인간을 배반하였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그에 대답하는 것이었다. 5월 3일부터 12일까지 그들은 ‘왕국 소식’ 18호로 그 구역을 다시 돌았으며 이번에는 “하나님의 정부—당신은 그것을 지지하는가 아니면 반대하는가?”라는 중대한 질문이 그 특징을 이루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감동을 받아 왕국 소식의 배부에 참여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주게 되었다. 자, 1973년 9월중에 (‘알래스카’ 주와 ‘하와이’를 제외한) 미합중국에서 512,738명의 왕국 전도인들이 그러한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보고는 ‘왕국 소식’ 16호가 43,320,048매 배부되었음을 알려 준다. 12월에는 놀랍게도 총 525,007명이 ‘왕국 소식’ 17호의 배부에 참여하였다. 그 수자는 바로 일년전 야외 봉사에 참여한 수보다 103,112명이 더 많은 전도인이었다. 그리고 1974년 5월에는 539,262명이 야외 봉사에서 일하였다.

경험에 의하면 ‘왕국 소식’ 배부가 참으로 제자를 삼는 사업에 자극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신사에게 두 전도인이 한매를 전하고 자기들의 길을 갔는데 후에 가서야 그에게 환영을 받게 되었다. 그의 집을 다시 방문하였을 때 그들은 그의 아내를 만났는데 그 여자는 쓰레기통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을 발견하였었다. 그 여인은 거기서 말한 것이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성서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그 여인은 정기적으로 그리스도인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으며, 그 후 「왕국 소식」 배부에 참여하는 정도로 발전하였고 침례받을 계획을 하고 있었다.

‘왕국 소식’ 한매가 담배를 피우고, 마약을 사용하고, ‘로큰롤’ 악단에서 연주하고 있던 긴머리를 가진 친형제 두 사람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얼마 있지 않아 그 두 사람은 그 「왕국 소식」을 전해 준 증인과 성서를 연구하게 되었다. 그들은 머리를 깍고 담배와 마약사용을 중단하였으며 영적으로 급속도의 발전을 하게 되었다. 한부의 「왕국 소식」을 받은지 바로 3개월 후 그들은 야외 봉사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왕국 소식」 다음 호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은 1973년 12월에 침례를 받았으며 그 후 얼마 있지 않아 임시 ‘파이오니아’ 활동을 즐기고 있었다.

“큰 무리”를 모음

사도 ‘요한’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큰 무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그의 성전에서 밤낮 거룩한 봉사를 드리는 것을 보았다. (계시 7:9, 15) 지적 소망을 가진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일 즉 왕국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데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름부음받은 추종자들을 진심으로 지지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전의 산’으로 모여드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감동적인 일이다!—이사야 2:2-4.

‘여호와의 전’의 뜰로 모여든 그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헌신하였으며 그것을 물침례로 상징하였다. 1958년 7월 30일 ‘뉴우요오크’ 시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침례”라는 연설이 있은지 얼마있지 않아 7,136명이 침례를 받았다. 기원 33년 오순절 이후 그와 같은 일은 없었다. (사도 2:41) 1958년에 있었던 그 침례를 세상이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에이치. 엘. 필브릭’은 얼마 전에 이렇게 기술하였기 때문이다. “신문에 침례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멋있는 사진들이 실렸다. ··· 신문을 읽는 모든 독자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을 더 이상 소수 ‘파’라고 볼 수 없다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진리는 계속 진행하고 있었다!”

여호와의 백성이 단순히 수자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점은 침례 지원자들이 자신들의 행하고 있는 바를 이해하는 것이다. 1967년에 발행된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니이다」라는 책에 나오는 마련에 깊은 감사를 느낀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 책 8면에서 40면까지에는 장성한 형제들이 침례 지원자들과 함께 토론할 80가지 성서적인 질문이 들어 있었다. ‘얼 이이. 뉴우얼’ 형제 부부는 이렇게 말한다. “회중 위원회의 도움으로 80가지 질문을 공부한 후 그들은 헌신과 침례가 평생 걸어야 할 행로이며 그와 함께 부가되는 책임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더 최근에 나온 「왕국을 전파하고 제자를 삼기 위한 조직」(1972년 발행)이란 책에도 침례를 고려하고 있는 사람과 성서적인 질문을 토론하기 위한 비슷한 마련이 들어 있다. 회중의 여러 장로들이 각 개인과 함께 그러한 모임을 갖게 될 때 침례를 고려하는 사람들은 성서적인 문제에 관하여 자기 생각을 발표하고 여호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저울질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게 된다. 그러한 마련은 참 제자들을 삼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제자를 삼고 침례를 주는 일이 얼마나 증가해 왔는지 단순히 살펴보자. 1968년에 침례받은 수는 82,842명이었다. 1969년부터 1973년까지 총 792,019명이 침례를 받았다. “큰 무리”를 모으려는 열렬한 노력이 계속되어 가면서 매년 수만명 이 침례를 받고 있다. 사실상 1974 봉사 연도에만 297,872명이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헌신을 상징하는 침례를 받았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러한 훌륭한 모으는 사업에 참여하여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은 참으로 감동적인 일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여호와의 그리스도인들이 200만명 이상이나 된다.

계속 “깨어 있으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악한 사물의 제도에 대한 심판을 집행하려고 오는 것에 대해 추종자들이 주의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그는 제자들을 주인이 외국 여행에서 돌아올 때 깨어있도록 주인으로부터 명령받은 문지기에 비유하심으로 그렇게 하셨다. 예수의 현명한 충고는 “깨어 있으라”는 것이었다.—마가 13:32-37.

“하나님의 목적” 지역 대회는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이 긴급성을 느끼고 영적으로 깨어 있도록 강조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74년 6월부터 8월까지 미합중국, ‘캐나다’, 영국 제도 등에서 85개 이상의 그러한 대회들이 개최되었다. 이러한 모임은 확실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시간의 흐름 가운데 그들이 바로 어느 시점에 살고 있는가를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왔다.

세가지 감동적인 성서 ‘드라마’는 강력한 교훈을 주었다. 대회 참석자들의 주의가 ‘애굽’의 속박에서 벗어나 광야를 헤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집중되자 믿음의 부족에 대해 경계해야 할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또 다른 ‘드라마’가 열왕 상 13장에 주의를 집중시켰는데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을 때 위험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도 ‘바울’의 생활과 활동을 묘사한 것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그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의 숭배와 봉사에 대한 새로운 열심을 가득 불어 넣어 주었다.

어떻게 사람들이 물질주의, 마귀의 영향, 거짓 종교의 착취 등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가? 그 대답은 “여호와께 둔 믿음과 희망으로 보호받음”이라는 감동적인 연설에서 있었다. 그 대회 연설 후에 「현 생명이 인생의 전부인가?」라는 새로운 192면 서적이 공개되었다. 그 책은 독자들에게 현 생명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건전한 이유를 제시하면서도 거짓 종교 세계 제국인 큰 ‘바벨론’에 대하여는 강력한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그 책은 의로운 새 질서에서 얻을 생명에 대한 여호와의 약속과 웅대한 부활의 소망에 대하여 믿음을 세워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름부음받은 추종자들과 지적 소망을 가진 그 동료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행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목적이 조금도 틀림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러한 확신은 인류의 유익을 위하여 「지금 성공을 거두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라는 대회에서 발표된 다른 출판물의 제목과 내용에 나타나 있다. 그 책에는 참으로 하나님의 목적에 신뢰를 둘 수 있는 타당한 이유들이 나온다. 대회의 절정으로서 “인간 계획의 실패와 하나님의 목적의 성공”이라는 제목의 공개 강연이 있었을 때 특히 그러한 점들이 분명해졌다. 그 연설과 다른 중요한 내용은 미합중국에서 69개의 “하나님의 목적” 지역 대회에 참석한 891,819명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미합중국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비틀거리는 세상을 안정시키기 위해 인간들이 계속 노력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인간 계획이 아무리 웅대하게 보인다 할 지라도 그리고 그러한 것이 성공할 것이라는 인간의 확신이 얼마나 강력하든지 간에 여호와의 백성은 하나님의 목적만이 승리할 것을 알고 있으며, 그분의 말씀과 왕국을 선포하는 웅대한 특권에 대해서 그분께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의미심장하게도 ‘이사야’의 예언은 “그날들의 마지막 부분에”(신세)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위에 굳게 설 것이며 사람들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사야 2:2-4) 지금 우리는 “그날들의 마지막 부분”에 살고 있다! “큰 무리”가 크게 증가하고 있는 점은 시대의 긴급성에 대하여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지금은 어느 곳에 있는 여호와의 종이든지 자기 만족에 빠지거나 나태해지거나 활동을 중지할 때가 아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 우리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잠간 생각해 보라! 1966년에 그 중요성은 우리의 머리에 깊은 인상을 새겨 주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때 관심을 집중시킬 「하나님의 아들들의 자유 가운데서의 영원한 생명」이란 책을 받았다. 곧 대부분의 사람들은 1975년이 “인간 존재의 여섯번째 1,000년이 끝나는 (초가을에)” 해라고 지적한 연대표에 유의하게 되었다.

그점은 확실히 여러 가지 질문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것은 큰 ‘바벨론’이 1975년까지는 쓰러질 것이라는 의미인가? 그때까지는 ‘아마겟돈’이 끝나고 ‘사단’이 갇히게 될 것인가? ‘메릴랜드’ 주 ‘발티모어’에서 열린 “하나님의 해방의 아들들” 지역 대회에서 비슷한 질문들을 제시한 후에 ‘왙취 타워 협회’ 부협회장 ‘에프. 더블류. 프랜즈’는 ‘그럴 수도 있다’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요지로 부언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 어느 누구도 지금부터 1975년까지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확정적으로 말하려고 하지 말라. 그러나 친애하는 벗들이여, 참으로 중요한 문제는 이것이다. 즉 시간이 짧다는 사실이다.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다는 점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프랜즈’ 형제는 특히 이렇게 격려하였다. “기회가 있는 동안 시간을 선용하고 여호와께 대한 모든 선한 사업을 열심히 하자.”

그 후 몇년이 지났으나 그 사실은 전파 사업의 긴급성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여호와의 종들은 자기들이 특정한 해까지만 하나님께 헌신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들은 그분의 영원히 헌신한 백성이다! 오늘날 전세계 인류가 하나님의 일하는 밭이요, 그 사업은 긴급한 것이다. 여호와의 백성이 그 밭에서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하나님의 목적과 구원을 위한 마련을 알리는 것은 참으로 큰 특권이다. 헌신한 이들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과분하신 친절에 대한 깊은 인식과 굳은 결의를 가지고 그 활동에 열심히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있다.—고린도 전 3:9; 고린도 후 5:18-6:2.

하나님의 성령의 도움으로 미합중국에 있는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은 전세계에 있는 그들의 동료 숭배자들과 함께 천적 아버지를 충실하게 계속 섬길 것이다. 우리 모두가 여호와께 대한 흔들리지 않는 충성을 보이기를 바란다. 종말이 가까오면서 우리가 계속 경계하고 활동적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한다. 지금은 영적으로 잠꾸러기가 될 때가 아니다! 지금은 비길데 없이 놀라운 목적을 가지고 계시며 또 그 목적이 실패할 수도 없고 실패하지도 않을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깨어 있고 부지런하고, 충실해야 할 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