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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마’

‘파나마’

‘파나마’

“물고기가 많은 나라”로 따라 가 보자. 이 명칭은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사이를 연결하는 길고 협착한 지협인 ‘파나마’에 붙여진 이름이다. 길이가 약 772‘킬로미터’ 가량되며, 동서로 아무렇게나 뻗은 이 나라는 눕혀 놓은 “S”자 형처럼 생겼다. 동남쪽에는 ‘콜롬비아’와 그리고 북서쪽에는 ‘코스타리카’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파나마’ 지협의 폭은 최대 193‘킬로미터’에서 최소 60‘킬로미터’까지에 이른다. 가장 협착한 지역은 ‘파나마’ 시와 ‘콜론’ 시 사이로서 이 지역이 자연히 대양 사이를 연결시키는 운하 부지로 선정되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수로—‘파나마’ 운하—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중요한 연결점이다.

‘파나마’는 통용 기원 1500년경 ‘로드리고 드 바스띠다스’가 발견했다고 전한다. 그 지협은 1502년 ‘콜럼버스’에 의하여 탐험되었었고, 1513년 9월 26일 태평양의 발견과 더불어 ‘발모아’에 의해 횡단되었었다.

‘파나마’는 전 국토 면적이 74,108평방 ‘킬로미터’ 정도다. 이 나라는 ‘인디언’들과 주로 ‘스페인’인과 ‘인디언’ 원주민 사이에 혼혈인들을 포함하여 여러 다른 혈통들로 이루어진 약 1,700,000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비록 운하 지대에서는 영어가 사용되지만 ‘스페인’어가 공용어이며, 여러 ‘인디언’ 방언들이 사용되고 있다.

이 열대 나라는 두개의 주요 산맥이 가로지르고 있으며 수백개의 강들이 펼쳐져 있다. 이 나라 전역은 연간 229에서 330‘센티미터’ 가량의 다양한 강우량을 보이고 있다. ‘파나마’는 2,000여종의 열대 특유의 식물들과 ‘아메리카’ 사자, 산돼지, 나무늘보, 개미핥기, 악어를 포함하여 광범위한 종류의 동물들로 유명하다. 그 밖에도 뱀들이 많으며, 어떤 뱀들은 수분내에 사람을 죽게 하는 맹독을 가지고 있다.

16세기에 ‘스페인’은 ‘파나마’를 정복하여 식민지로 만들었다. ‘로마 가톨릭’이 국교가 되었다. 1718년에 ‘파나마’는 ‘뉴우그라나다’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다.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고, ‘콜롬비아’와 합병하게 되었다. 1846년의 ‘비드락’ 조약에 의하여 미합중국이 지협 통과 운송권을 얻어 연안 사이를 잇는 철로를 건설하였다. 이것은 미합중국 연안에서 ‘캘리포니아’와 그곳의 전설상의 금광 지대에 이르는 여행을 용이하게 해 주었다.

1903년 미합중국이 운하를 파는 것을 ‘콜롬비아’가 거절하자, ‘파나마’는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나서 ‘파나마’는 미합중국에, 운하를 파고 그것을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하여 수로 양쪽에 폭이 8‘킬로미터’되는 좁고 기다란 땅을 영구적으로(그 때 이래로 논쟁되어 왔던 점) 사용할 권리를 주었다. ‘파나마’ 운하는 1914년에 완공되었었고 1920년에는 공식적인 “세계 무역의 집결지”가 되었다. 366,000,000‘달러’ 정도의 비용을 들여 적어도 상업적인 의미에서, “나라는 분단시켰으나 세계를 연합시킨” 운하가 완성되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파나마’는 오늘날 비교적 부유한 나라다. ‘바나나’가 주요 수출품이며, 수출용으로 기르고 있는 소는 점점 더 중요시 되어 가고 있다. 과일, 야채와 ‘코오피’도 수출한다. ‘파나마’ 공화국에는 운하의 운용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정규 수입으로 수백만 ‘달러’가 들어온다. 또한, 관광 사업의 중요성도 점점 더 커지고 있다.

‘파나마’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다.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교인이다. 그러나, 동양 종교 및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교들이 퍼져 있다.

좋은 소식을 듣게 되다

‘파나마’에서의 왕국 사업은 금세기 초에 시작되었다. 1890년대 말엽에 ‘미국 성서 협회’의 한 대표자가 이 나라에 ‘왙취 타워 협회’ 간행물 얼마를 가져와 배부하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왕국 소식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것에 관하여 말하기 시작하였다. ‘콜론’ 시에 사는 학교 교사인 ‘아이자이어 리처어드’가 반(또는 “에클레시아”라고 불려짐)을 조직하여 매주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다. 그것은 1900년경이었다.

‘자메이카’ 섬에서와 ‘파나마’에서의 하나님의 진리의 전파 사업간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왜냐 하면 많은 서인도 제도인들이 운하에서 일하려고 이곳에 왔기 때문이다. 처음에 대서양 쪽에 있는 ‘콜론’에서 몇몇 사람들이 관심을 나타냈었다.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직업상 ‘파나마’ 시에서 ‘콜론’으로 이사온 숙련공 조합원인 ‘허버어트 L. 워커’라는 사람이 있었다. 1910년 ‘자메이카’ ‘킹스턴’에 있는 협회 대표는 두명의 ‘콜포처’ 즉 전 시간 봉사자들—‘모어건’ 형제와 ‘레잉’ 형제—을 ‘파나마’ 시와 그 부근에서 좋은 소식을 전하도록 보냈다. 그들은 ‘워커’가 ‘콜론’으로 이사하기 전 그의 집에 들어가게 되었었다. 그 형제들은 또한 집회를 위한 방 하나와 서적 보관을 위한 방 하나도 갖게 되었다. 이미 수천부의 성경과 ‘왙취 타워 협회’의 「성경 연구」가 대개 운하 건설 노무자들인 영어로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 배부되어 왔었다. 같은 해에, 그리스도인 회중이 ‘파나마’ 시에 세워졌고 그곳에 연합한 사람들은 근 50명이 되었다.

그 바로 전에, 서‘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후에 “바이블” ‘브라운’으로 알려지게 된 ‘W. R. 브라운’이 좋은 소식에 관심을 갖게 되었었다. 1907년, 그는 ‘아이자이어 리처어드’가 길 모퉁이에서 하는 강연에 참석하였었다. 그 성서 강연은 “시대들의 도표”에 근거한 것이었는데 그 도표는 하나님의 목적을 설명하는 데 보조물로 사용되었다. 진리를 안 후 ‘브라운’은 ‘자메이카’로 되돌아 갔다. 그의 목적은? 그의 어머니와 누이에게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 다 진리를 받아들였고 침례로써 그들의 믿음을 표현하였다. 그 때는 1909년이었다. ‘브라운’ 형제는 ‘콜론’에 돌아온 후 선박 조종사로 취직을 하였다. 그는 진리에 무척 열성적이었다. 그리하여 ‘콜포처’들인 ‘모어건’과 ‘레잉’ 형제가 ‘파나마’ 시에서 일을 시작하자, ‘브라운’은 즉시 ‘콜론’을 떠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에 그들과 합세하였다. 그 당시 그들 세 사람은 방 셋이 있는 ‘아파아트’로 세 들었다. 그들은 방 하나에 기거하고 나머지 방 두개는 집회와 창고용으로 사용하였다.

1911년 ‘왙취 타워 협회’의 대표인 ‘E. J. 카워드’ 형제가 운하 건설 노무자들 사이에서의 성서 강연 여행차 ‘파나마’에 왔다. 그는 ‘브라운’, ‘모어건’, ‘레잉’ 형제 및 ‘파나마’ 시와 ‘콜론’에 있는 관심자들 모두를 만났다. ‘카워드’ 형제는 ‘브라운’ 형제가 특별 봉사를 위해 자격을 구비하였다고 생각하고 그의 지협 강연 운동을 마친 후 그를 데리고 ‘트리니다드’로 갔다. 거기서 ‘브라운’ 형제는 그와 그의 가족이 “바이블” ‘브라운’으로 매우 유명하게 된 ‘아프리카’로 떠난 1922년까지 계속 봉사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콜포처’들과 관심자들은 ‘파나마’에서 왕국 선포에 전념하였다. 그 결과, 튼튼한 반들이 지협 양쪽에 그리고 운하 지대의 노무자 촌에 세워졌다.

반면, ‘자메이카’의 ‘킹스턴’에서 ‘카워드’ 형제는 몇몇 젊은이들을 ‘콜포처’가 되도록 임명하여 훈련시켰다. 1912년 그들 중 세명이 세속 직업을 구하러 운하 지대로 왔다. 그들은 또한 회중들과 긴밀히 연합하였으며, 기존하는 조직을 세워 주고 진리를 전파하는 데 많은 일을 수행하였다.

‘왙취 타워 협회’ 초대 협회장인 ‘차알스 테이즈 러셀’이 1913년에 ‘파나마’를 방문하여 ‘파나마’ 시에 있는 국립극장에서 그리고 ‘콜론’의 ‘가아든’ 극장에서 강연을 하였다. 자연히 왕국 소식에 대한 관심이 그의 방문의 결과 크게 고조되었다. 그러나 운하가 개통되어 운항할 수 있게 된 때인 1914년에 변화가 생겼다. 건설 사업이 차츰차츰 마무리되어 가자, 많은 형제들과 관심자들이 그들의 고국인 서인도 제도로 돌아가야만 했다. 노무자들의 거주를 위해 세워졌던 많은 마을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주 튼튼한 ‘성경 연구생’(그 당시 여호와의 증인을 일컫던 이름) 집단들이 ‘파나마’ 시와 ‘콜론’에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한 동안은 왕국 전파 사업이 계속 번창했었다.

시련기에 충실함

그러나 1916년 ‘패스터 러셀’의 사망과 잇따른 변경으로 많은 사람들의 열심이 식어졌다. 게다가 어떤 자들은 자신들이 양떼의 지도자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였으며, 다른 가르침들 특히 이전에 ‘뉴우요오크’ 시에 있는 협회 본부 가족 성원이었으나 불충실이 드러난 자들을 따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태 진전으로 우리 사업은 ‘파나마’에서 감소를 겪었으며, 1930년까지 소수의 사람들만이 충실하게 회중 집회들과 「파수대」 낭독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나마’ 시와 ‘콜론’에 있는 그리스도인 회중들은 결코 와해되지 않았다.

1931년 ‘왙취 타워 협회’ 제2대 협회장인 ‘J. F. 러더포오드’ 형제가 ‘캘리포오니아’로 가는 도중에 ‘파나마’를 지나게 되었다. 그는 ‘라보카’와 ‘크리스토발’의 운하 지대 도시들에서 소수의 관심자들에게 연설하였다. 참석자들 가운데에는 협회가 운영되고 있는 방법에 불만을 나타냈던 몇몇 사람들이 있었다. 이 모임은 이들에게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 떨어져 나가기 시작하였으며, 그들이 1931년 성경 연구생들이 채택한 이름인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동일시되는 것을 거절함으로써 그들은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그후 불충실한 자들은 그들 자신의 집단을 형성하였다. 이것은 충실한 소수에게 축복임이 틀림없다. 어떤 사람은 “여러 해만에 처음으로 우리는 집회에서 아주 편안감을 느꼈고, 주님과 그리고 서로간에 온전히 조화됨을 느꼈다”고 말하였다.

1938년 ‘자메이카’ 협회 지부 사무실의 ‘T. E. 뱅크스’ 형제가 ‘파나마’를 방문하여 이곳 회중들을 강화하기 위하여 힘써 일하였다. 왕국 전파 사업은 계속되었으나 별 증가가 없었으며 ‘스페인’ 밭은 사실상 손을 대지도 못하고 있었다. 시급히 필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왙취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가 대답해 줄 수 있을 것이었으며, 1945년 ‘파나마’에서 왕국 사업을 위한 진정한 전환점을 가져다 줄 것이었다.

선교인들이 도착하다

1945년 2월 어느 화창한 여름날, ‘팬’ 미항공 회사 비행기가 운하 지대의 ‘알브루우크’ 공군 기지에 있는 조그마한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승객들 가운데 가죽 가방을 든 중년 남녀가 있었다. 충실한 증인들의 집단이 ‘파나마’에 도착한 ‘길르앗’ 학교 제1기 졸업생인 ‘로이 W. 하아베이’ 형제와 자매를 따뜻하게 환영하였다. 1945년초에 이 나라에는 45명의 왕국 선포자들이 있었다. 당시 전국에 세개의 그리스도인 회중들이 일하고 있었다. 이 회중들은 ‘파나마’ 시 ‘콜론’ 그리고 ‘보카스델토로’에 있었다.

‘하아베이’ 부부를 뒤따라 곧 오게 될 ‘길르앗’ 학교 제2기 졸업생 선교인들을 위하여 적당한 집을 구할 필요가 있었다. ‘하아베이’ 형제는 회중들이 왕국의 이익을 확장하기 위하여 더 훌륭히 조직하도록 도우려고 방문하는 “형제들의 종” 즉 순회 감독자로 일하게 되었다. 여행하지 않을 때에는 ‘하아베이’ 형제 자매는 ‘파나마’ 시에 있는 회중과 연합하였다.

그 후 얼마 안있어 ‘도널드 졸리엔’ 형제가 도착하였으며 ‘콜론’에서 선교 사업을 하도록 임명되었다. 조금 후인 1945년 9월에는 네명의 선교인이 더 도착했다. 그들은 ‘안나 뮬러’, ‘델마 헐트퀴스트’, ‘메어리 도브로월스키’ 그리고 ‘에이다 앤더슨’이었는데 그들 모두는 ‘파나마’ 시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했다. 선교인들의 도착으로 그 나라 인구의 굉장한 수가 자국어인 ‘스페인’어로 왕국 소식을 처음으로 들을 기회를 갖게 되었다. ‘졸리엔’ 형제만이 ‘스페인’어를 알고 있었다. 다른 선교인들은 ‘스페인’어를 배울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스페인’어를 배웠다!

1945년말경 ‘하젤 버어포오드’, ‘실비아 프레스코트’ 그리고 ‘엘렌 키엔바움’이 도착하였고, ‘콜론’으로 임명되었다. ‘하아베이’ 형제는 그 지방 변호사를 통하여 협회의 법적 신분을 확보해 놓았다. 증가를 위한 만반의 준비가 되었었고 사람들은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945년 말경 이 나라에는 53명의 왕국 전도인들이 있었다. 재방문도 전해의 총 1,657건에 비해 1945년에는 3,879건으로 증가하였으며, 성서 연구는 32건에서 113건으로 증가하였다. 선교 사업도 ‘파나마’에서 효과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지부 사무실이 설립되다

독감에 걸려 ‘뉴우요오크’로 떠났었던 ‘버어포오드’ 자매의 짝인 ‘메어리 힌즈’ 자매가 1946년 초에 지협에 도착하여 ‘콜론’으로 임명되었다. 4월에, ‘왙취 타워 협회’의 3대 협회장인 ‘N. H. 노워’가 ‘F. W. 프랜즈’를 동반하여 ‘파나마’를 방문하였다. 협회가 ‘파나마’에 지부 사무실을 설립중이라는 발표를 듣고 모두 기뻐하였다. ‘로이 W. 하아베이’가 이 나라의 초대 지부 감독자가 되었다. 1938년 이래 ‘파나마’는 ‘코스타리카’ 사무실의 감독하에 있어 왔었다.

그 밖에도, ‘노워’ 형제의 방문중 새로운 선교인 집이 마련되었다. 이것은 선교인들에게 크게 안도감을 갖게 하였다.

소식을 가지고 전진함

1946년 늦게, ‘아아키 래퍼’ 형제와 ‘줄리우스 루이스’ 형제가 도착했다. 그들과 다른 몇 사람들의 임지는 ‘파나마’ 서부에 있는 ‘치리키’ 도의 ‘데이비드’가 될 것이었다. 이곳은 대도시들과 인구 밀집 지대에서 떨어진 곳으로 ‘길르앗’ 선교인들이 임명되는 최초의 임지 중 하나였다. ‘졸리엔’ 형제와 ‘래퍼’ 형제는 먼저 집을 마련하였고, 나중에 ‘루이스’ 형제가 그들과 합세하였다. 그런데 그 집에는 방이 다섯개 있었다. 또 다른 두명 즉 ‘알 잭자크’와 ‘F. E. 하아베이’가 그 해 말에 도착하였다.

여러 면으로 그들의 임지인 ‘치리키’ 도의 ‘데이비드’는 초기 미국 서부 개척지의 도시와 비슷하였다. “카우보이들”이 먼지 투성이의 뒷길로 소를 몰고 가는 것을 볼 수 있있다. 이러한 비옥한 지역에서는 그 나라에서 소비하는 고기와 쌀과 채소들이 풍부히 생산되었다. 물론 선교인들은 그곳에서 어떠한 영적인 수확을 거두게 될 것인가에 관심이 있었으며 그리하여 그 “밭”에서 일을 시작하였다.—고린도 전 3:5-9과 비교.

6개월 후 9명으로 이루어진 한 집단이 형성되었다. 이들 새로운 왕국 전도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아무런 성서 연구도 사회하고 있지 않았으나 그들 자신이 영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다음 6개월만에 그 집단에 세명이 더 연합하였으며 이제는 왕국 소식을 가지고 더 전진해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였다.

1947년과 1948년에 ‘데이비드’에 있는 선교인들은 ‘치리키’ 도에 있는 거의 모든 동네와 마을들에 널리 증가하였다. 그들은 독서계의 도움으로 우리들의 서적을 수천부 전했으며 얼마의 진리의 씨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박차를 가하다!

1946년 이곳에서 선교인 활동을 시작했던 또 다른 사람들은 ‘로퍼’ 형제 부부와 그들의 딸 ‘메어리 레아’, ‘에밀리 드지라크’(지금은 ‘아아키 래퍼’ 형제의 아내), ‘에델 코프만’ 및 ‘호프 레이어’ 등이 있다. 이 때 즈음 최초의 ‘스페인’어 회중이 ‘파나마’ 시에 세워졌다. 1945-46년 봉사년도가 끝났을 때 평균 전도인 수는 109명이었고 전도인 최고 기록은 131명이었다. 이 전도인 수에는 23명의 선교인과 소수의 ‘파이오니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략 그들은 왕국 전파 사업에 12,000시간을 바쳤었고 38,000부의 서책과 소책 그리고 28,000부의 잡지를 전하였다. 재방문은 15,000건에 달하였으며 평균 214건의 성서 연구가 사회되었다. 그렇다, 그 당시까지 ‘파나마’에서의 왕국 사업은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1946-47년 봉사년도에 ‘파나마’에서의 최초의 순회 대회가 ‘스페인’어로 열렸다. ‘데이비드’로부터 다섯명의 선교인들이 참석하였는데 그들은 ‘프로그램’을 맡을 정도로 ‘스페인’어에 숙달되어 있었다. 그해 말에는 아홉개의 회중이 있었는데 그 중 여섯개는 내지에 있었다. 그 때쯤에는 175명이 왕국 전도인들이 있었다. 1945년초부터 1947년 봉사년도 말까지 전도인 수에 있어서 289‘퍼센트’의 증가를 보았다.

계속되는 여러 해 동안, 몇몇 선교인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그들의 임지를 떠났다. 항상 회중들을 위한 적당한 집회 장소를 구하기 위해 분투 노력해야 하였다. 지부 집은 더 많은 선교인들을 수용하고 서적을 보관할 방을 위하여 여러 번 이사했었다. 두명의 원주민 특별 ‘파이오니아’가 임명되던 1948년부터 이들의 수가 계속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여러 해를 통하여 그리스도인 활동에 꾸준한 성장이 있어 왔다.

주목할 만한 모임

1948년 지역 대회가 ‘파나마’ 북서쪽의 조그마한 섬에 있는 ‘보카스델토로’에서 개최되었었다. ‘콜론’과 ‘파나마’ 시로부터 100명 가량의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을 수송하기 위하여 배 한척이 계약되었다. 그러나 여행하기로 한 날 계약된 배가 결항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다른 배를 마련해 주셨으며 단지 한두시간 늦게 103명의 행복한 증인들의 집단은 ‘콜론’ 항구의 방파제를 지나 ‘카리브’ 해안의 파도가 센 푸른 바다로 출범하였다. 밤이 되자 많은 사람들은 갑판 밑의 다소 불안하게 보이는 침대에 눕기 보다는 고요한 열대의 하늘 아래서 갑판에 누워 잤다. 하여간 침대들은 터무니 없이 부족하였다. 많은 항해자들은 배멀미를 하게 되었고 난간 옆에서 밤을 지냈다. 그러나 모두는 회복되어 402‘킬로미터’ 정도의 항해를 마치고 이튿날 오후 2:30에 안전하게 도착하게 된 것을 감사하였다.

순회 감독자 ‘아아키 래퍼’는 우리의 숙박 장소와 대회 장소가 모두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승선했었다. 그러나 또 다시 여호와께서 마련해 주셨으며, 배를 숙소로 사용하였다. 그 조그마한 섬의 주민들이 선창으로 몰려 왔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파나마’에 한 조직을 갖고 계시며 그분의 백성들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조그만 배에는 백인 미국인들, 흑인 서인도인들, ‘스페인’어를 하는 ‘파나마’ 원주민들, 그리고 적어도 한명의 중국인과 다른 인종 및 국민들이 모두 섞여 비좁은 배에서 함께 식사하고 생활하였다. 이러한 그리스도인 연합은 섬 사람들에게는 처음 보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들이 알고 있었던 백인들이란 ‘파나마’의 인구를 형성하는 수개국의 인종들로부터 엄밀하게 분리되어 있는 배타적인 “교직자들” 또는 통조림 회사의 감독들이었다.

대회장은 환초로 둘러싸인 바다 위로 돌출된 곳에다 지붕만 덮은 곳이었는데, 무역풍이 불어서 시원했다. 이 대회가 시작할 때에는 99명이 참석하였는데, 마지막 공개 강연에는 178명이 참석하였다. 그것은 대단히 성공적이었으므로 그 이듬해에 또 하나의 대회가 계획되었다.

이와 같은 대회들과 점증하는 특별 ‘파이오니아’들의 활동은 왕국 소식을 전파하는 데 많은 일을 성취하였다. 지부 사무실은 전 지역에 왕국 소식이 들어가게 될 때까지 점진적으로 전파 사업을 확장시킬 계획을 세웠다. 전도인들이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위하여 자격을 갖추게 되면 그들을 즉시 내보내곤 했는데, 일반적으로 처음에는 큰 도시들로 다음에는 그 다음 크기의 도시들로, 이렇게 차차 작은 도시들로 파견하였다. 만일 어느 특별한 도시에 제자들을 생산해 낼 전망이 있다면 더 많은 ‘파이오니아’들을 그곳에 보내곤 하였다. 결과가 좋지 않은 곳이라면, 그곳의 ‘파이오니아’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고 그 구역은 남겨 두었다.

1950년—다사다난한 해

이제 ‘뉴우요오크’ 시에서 ‘신권 통치 증가 대회’가 있었던 해인 1950년으로 가보자. ‘파나마’로서는 처음으로 국제 대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네명의 원주민 증인들이 참석하였다.

1950 봉사년도에 ‘파나마’의 14개의 회중과 여러 격지 집단에서는 496명의 전도인 신기록을 수립하였다. ‘파나마’에서의 처음 5년간의 선교인 봉사 기간에 약 1,000‘퍼센트’의 전도인 증가가 있었다!

1950년 초에 ‘노워’ 형제와 ‘로버어트 E. 모어건’ 형제가 ‘파나마’를 방문했었다. 협회 본부로부터 형제들의 방문 직후인 2월에 전국 대회가 ‘치리키’ 도의 ‘데이비드’ 시에서 열렸다. ‘콜론’과 ‘파나마’ 시로부터 여행을 한 일을 회상하여 ‘하젤 버어포오드’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여러 대의 ‘버스’들이 양쪽 시발점인 도시에서 형제들을 태우고 ‘파나마’ 시로부터 올라 왔다. 그 여행은 바퀴 자국과 패인 자국 투성이의 울퉁불퉁한 먼지 길을 20시간 정도 달리는 것이었다. 이 때는 건기가 끝나갈 즈음이었기 때문에 흙가루 먼지가 수‘센티’나 쌓여 있었다. 바퀴통 위와 뒤에 앉은 우리 일행들은 먼지 더미에 앉아 있었다. 버스 바닥이 바퀴통으로부터 수‘센티’가량 뜯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바퀴에 따라 일어나는 먼지가 ‘버스’ 안으로 퍼부어졌다. 때때로, 우리는 ‘버스’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우리는 먼지를 어느 정도 막기 위해서 코와 입에 손수건을 대고 있었으나 그래도 우리는 상당한 양의 먼지를 들이마시고 삼켰다. 우리가 정오 즈음에 ‘데이비드’에 도착했을 때, 우리 모두는 피부, 머리, 옷 할 것 없이 온통 잿빛 일색이었다. 우리는 우선 ‘샤워’를 해야 했는데, 친절하게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마련을 받았다. 곧 우리 모두는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여느 때처럼 그 대회는 훌륭하였다. 그 대회는 ‘데이비드’와 변두리 주민들에게 훌륭한 증거가 되었으며, 그곳에 있는 형제들을 참으로 고무시켜 주었다. 우리의 ‘버스’ 사정을 잘 알았기 때문에, 돌아올 때는 베부대로 바퀴 통 둘레를 싸서 먼지가 ‘버스’ 내로 들어오는 것을 상당히 막게 되었다.’

선교인 생활을 간단히 살펴봄

이들 선교인들이 ‘신권 통치 증가 대회’와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후, 그들 중 네명은 ‘치뜨레’에 있는 새로운 임지로 갔다. 그 당시를 회고하면서 1930년 이래 ‘파이오니아’로 일해 온 ‘메어리 힌즈’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8월말에 ‘하젤’과 나는 짐을 꾸린 다음 자기 ‘트럭’을 가져 와서 우리를 이사시켜 주겠다는 관심자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늦게 도착하였다. 그런데 ‘트럭’ 바닥을 씻어내지 않고는 떠날 수가 없었다. 그 ‘트럭’은 전날 소를 수송하는 데 사용되었었다. 게다가 ‘타이어’를 갈아 끼우려고 고속 도로에서 멈췄었기 때문에 우리가 ‘엘렌 키엔바움’을 도중에 태우기로 한 ‘파나마’ 시에 늦게 도착하게 되었다. 우리는 또한 새로운 임지에는 싱싱한 과일과 야채가 매우 희귀하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통조림 제품을 구입하였다. 지부에서 점심 식사를 한 후에 우리는 다시 떠나게 되었다.

‘그곳에 도착하기까지 우스운 일이 많이 있었다! ‘트럭’ 운전사의 부인이 우리와 동행했는데, 단 세 사람만이 ‘트럭’ 앞 좌석에 탈 수 있기 때문에 다른 두명은 가구를 실은 뒤에 타야 하였다. 그 여행의 후반에는 운전사의 부인과 내가 뒤에 탔었는데, ‘트럭’ 적재함의 뒷닫이 문 바로 앞에 책상을 뒤집어 놓고 그 위에 침대요를 깔고 앉았으며 위에는 방수천을 쳤다. 우리는 비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운전사는 속력을 내며 비가 ‘트럭’ 뒤끝으로 흘러 떨어지는 것을 막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속력을 내었다. 우리는 비뿐 아니라 울퉁불퉁한 길이라 몹시 튀는 바람에 혼이 났다.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우리는 이웃 사람들의 눈총을 받아가며 짐을 부렸다. 우리는 ‘아파아트’ 마루 위에 침대요를 깔고 밤을 지냈다. 두개의 침실, 커다란 식당겸 거실과 복도, 한끝에 있는 부엌, 이 모든 방에는 벽장이 없었다. 창에는 나무로 만든 ‘셔터’가 쳐져 있었다. 목공일에 우리의 솜씨를 발휘해야 하였다. ‘하젤’과 ‘엘렌’은 창문에 망을 대서 망창을 만들었다. 얼마 후, ‘하젤’과 나는 부엌에 찬장을 만들고 침실에 옷장을 만들었다.

‘우리는 사람들이 목욕하고 수영하며 빨래하는 부근에 있는 강으로부터 ‘파이프’로 물이 공급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 강에서 소들이 마시고 돼지들이 딩굴곤 하였다. 물빛이 맑든 ‘초콜렛’ 색이든 우리는 마실 물은 모두 15분간 끓인 후 침전물을 가라 앉혔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에서 2년 이상 있는 동안 이질에 한번도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그 지방에서 많이 자라는 일종의 선인장의 살을 이용하여 옷을 세탁할 물의 오물을 제거하였다.’

‘힌즈’ 자매는 그 지방 생활 양식과 주민들에 관해 다음과 같이 계속 이야기하였다. ‘‘치뜨레’는 발전하며 농업이 성한 ‘헤레라’ 도의 도청 소재지로서 신문명과 구문명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이곳에는, 흙 바닥에 토벽 초가와 ‘콘크리이트 브로크’ 벽에 기와 지붕, 반짝이는 ‘타일’ 바닥을 한 현대식 ‘샬레이’풍 집들이 나란히 서 있다. 또한 마법사들이 현대 의사들과 나란히 개업을 하고 있으며, 여름철 메마른 목초지로부터 물을 먹이기 위해 먼지 투성이의 도로를 따라 강으로 몰려가는 소떼가 있는 바로 곁에 현대식 시설이 갖춰진 물이 흐르는 목장에 같은 종류의 다른 소들이 있다.

‘이곳은 ‘가톨릭’교가 엄격하게 지배해 온 도시여서 사람들은 성서를 읽는 것을 두려워하며, 성서를 토론하는 것은 더더구나 두려워하였다. 또한 죽은 친척의 영을 달래기 위해 친척이 죽은 후 며칠 동안 밤샘을 하지 않으면 큰 일날 것으로 생각하며; 어떤 면으로든 사제의 비위를 거스리면, 그 결과 사제의 눈 밖으로 나서 자기들이 “성지”에 매장되는 것을 금지 당할까봐 두려워하며; 그들에 가르침받아 온 여하한 전통도 거역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캄페시노스’(시골 사람) 장이 있는데, 그들은 머리에 커다란 달걀 그릇을 이고 ‘치바’(집에서 만든 작은 달구지)를 타고 오든가 말을 타고 양쪽에 농사지은 것, 심지어 돼지까지 망태에 달아 매고 왔다. 때로는 짐을 실은 둘째 짐승을 앞의 놈 꼬리에 묶어 끌고 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어깨에 농사지은 것을 담은 바구니를 메고 걸어 왔다. 물건을 팔고 살 때, 그들은 지폐보다 은화를 더 좋아하였다. 이곳은 무엇이든 자기 것을 남에게 나누어 주며, 다른 사람들도 동일한 후대를 나타낼 것으로 기대하는 관습에 젖은 소박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 부지런히 일을 하는 사람들의 안식처였다. 그들 중 대부분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땅을 경작해서 근근히 생계를 이어 나아갔다. 이러한 곳이 2년 남짓 즐겁게 일한 우리의 구역이 될 것이었다.’

선교인들이 그곳에서 좋은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게 되어 있었다. 이것은 용이할 것인가? ‘힌즈’ 자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이제 문제는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에 어떻게 이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휴가 동안 진리의 씨를 뿌리고 간 다른 사람들이 전한 서적이 그 지방 사제의 화를 돋구어 놓았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들이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소굴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들의 말을 듣지 마시오.” “그들의 서적을 읽지 마시오.” “그들에게 침을 뱉으시오.” “그들에게 돌을 던지시오.” “만일 당신이 그 성경을 절반쯤 읽어 나가면 미쳐 버릴 것이오.” 사제는 그런 말들을 해 왔다! 사람들이 우리가 오는 것을 보고 도망하여 숨어 버리곤 하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우연히도 나는 다음과 같은 봉변을 당한 적이 있다. 어느날 아침 내가 어떤 집 대문을 두드리자 한 사람이 대꾸을 하고 나왔는데, 그는 길고 더러운 ‘가운’같이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고, 홀쭉하고 키가 크며 초췌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나는 ‘스페인’어 여성형 어미 때문에 그만 그에게 “가엾은 작은 부인” 하고 부르며,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다. 내가 안으로 초대된 후에 보니 그는 사제였다! 그는 나에게, 사람들을 오도하며 뇌물로 사람들을 매수해서 그들의 종교를 떠나게 하는 ‘양키’ 제국주의자라고 욕을 퍼부어, 나는 호된 야단을 당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도인 열심과 이웃 사랑은 성공을 거두었음을 ‘힌즈’ 자매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친절과 인내와 감정이입이 얼마나 필요하였고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 모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람들은 우리를 집안으로 초대하였고, 사제가 그토록 우리를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 왔다. 조금씩 조금씩 우리는 그들의 신임을 얻어갔다. 그리하여 ‘세뇨르 라모스’는 몇차례 연구를 한 후 용기를 내어 “‘노아’ 시대의 홍수는 1914년 이전이었나요 혹은 그 이후였나요?” 하고 물었다. ‘마리아’는 그의 낮은 ‘벤치’에 앉아서 “금요일에 고기를 먹는 것이 왜 죄가 되나요?” 하고 질문하였다. 많은 질문들은 단순한 것들이었지만, 그들로서는 그 대답을 생전 처음 들어 보았다. 곧 우리 넷은 우리가 적절히 돌볼 수 있는 모든 가정 성서 연구들을 사회하게 되었다 ···

‘건강 문제는? 물론 선교인들이라고 면역이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열대 질병을 잘 아는 훌륭한 의사를 한 사람 알게 되었는데, 그가 우리에게 나타낸 지극한 관심 때문에 우리는 그를 몹시 사랑하였다. 그는 자기 환자가 회복되어 안도감을 얻을 때까지 밤낮으로 왕진을 해 주었으며, 얼마를 돌봐 줬든지 첫 번째 왕진시 이후에는 치료비를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로자스 수크레’ 의사는 ‘하젤’의 학질도 낫게 해 주었고 나의 악성 독감도 고쳐 주었는데, 나는 그러한 병들이 온대 지방에서보다 열대 지방에서 훨씬 더 심하다는 것을 알았다.’

‘치뜨레’에서 28개월 후 새로 형성된 회중이 헌신한 원주민 형제들의 감독하에 있게 되었다. 선교인들은 다시 임명받았으며 그들 중 두명은 운하 지대로 임명되었다.

괄목할 만한 증가의 해

1951년 상반기에 ‘길르앗’ 학교 제12기 졸업생인 ‘조오지 A. 러닝’은 ‘파나마’로 임명되었다. 6월 1일 그는 ‘파나마’의 두번째 지부 감독자가 되었다. 그러나 ‘러닝’ 형제는 곧 병이 들어 수개월 후 더 이상 계속 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전에 ‘쿠바’ 지부 감독자였던 ‘조오지 파파뎀’이 ‘파나마’로 보내져 이곳에서 세번째 지부 감독자가 되었다. 그러나 ‘러닝’ 형제는 선교인으로서 ‘파나마’에 계속 남아 있었다.

그 당시 운하 지대에는 회중이 하나 밖에 없었다. 그 회중은 ‘감보아’ 시에 있었으며, 운하 회사에 고용되어 있는 흑인 형제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운하 지대에 고용된 대부분 미국인인 백인들 가운데서는 거의 봉사가 되어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1952년 ‘하젤 버어포오드’와 ‘메어리 힌즈’가 운하 지대 마을들에서 활동하도록 임명되었다. 약 1년 반 후 한 회중이 ‘발보아’에 형성되었다. 이 회중은 두명의 선교인과 모두 자매들인 다섯명의 전도인들로 이루어졌다. 이 회중 왕국 전도인들의 수는 진리 안에 있는 자매들의 남편들인 군인들이 복무를 마치고 떠나게 되든가, 또는 운하 지대에 고용된 사람들이 떠나게 되곤 함으로서 변동이 심했다. 얼마 후, 그 지방 고용인들을 위해 세워진 운하 지역 도시 즉 ‘파라이소’에 또 하나의 회중이 세워졌다.

왕국 전도인 수가 1952년 509명에서 1955년에는 근 78‘퍼센트’가 증가된 906명으로 성장했다. 1951년부터 몇명의 선교인 자매들과 다른 얼마의 사람들이 이곳에 도착하였다. 이들 중에는 ‘코스타리카’로부터 온 ‘도렐 스웨비’와 ‘페이 구우딘’, ‘자메이카’로부터 온 ‘마비스 마이어스’와 미국에서 온 ‘프란시스 테일러’, ‘도리스 비일스’ 그리고 ‘밀드레드 타일러’ 등이 있었다. 몇 사람은 내륙 도시로 보내졌으며 그렇게 해서 새로운 지역들에서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조치가 훌륭한 결과를 가져왔음은 1955년 말까지 회중이 31개로 증가한 사실로 명백해졌다.

1955년초 ‘파파뎀’ 형제는 ‘멕시코’ 지부 사무실로 전임되었으며, 얼마 동안 이곳에서 순회 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던 ‘아아키 래퍼’가 이 나라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었다. ‘F. E. 하아베이’ 형제는 몇개의 격지 집단을 포함하여 그 당시 약 20개에 달하는 ‘스페인’어 회중 모두를 섬기도록 순회 사업에 임명되었었다. 수개월 후, ‘길르앗’ 학교 제14기 졸업생인 ‘W. R. 길크스’ 형제도 순회 사업에 임명되었다. 그 당시 세명의 순회 감독자들이 있었으며, 지역 사업은 지부 감독자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었다. 그 당시에 그곳에는 세개의 순회구, 31개의 회중과 상당수의 격지 집단들이 있었다.

1955년-1960년 사이에 꾸준한 발전이 있었다. 특별 ‘파이오니아’ 사업이 강조되어 1960년 말까지 이들 전 시간 전파자들은 40여명에 달하였다. 또한, 그 당시 ‘파나마’에는 21명의 선교인이 있었다.

새로운 지부 시설

1957년 우리는 새로운 지부 사무실과 30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왕국회관이 딸린 선교인 숙소를 건축할 허락을 받았다. 이 건물은 ‘M. G. 헨첼’ 형제가 1958년 1월에 방문하였을 때 봉헌할 준비가 되었다.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선교인 가족과 모든 지방 회중들은 훌륭한 새 시설을 기뻐하였다. 그것은 ‘파나마’에서의 왕국 사업 향상에 실질적인 혜택이 되었다.

1960년까지 ‘파나마’에는 1,231명의 왕국 전도인이 있었다. 5년간에 근 36‘퍼센트’의 증가가 있었다. 또한 격지 집단들과 연합한 사람들이 영성을 크게 발전시키고 형제들이 회중적 책임을 질 자격을 구비함에 따라 새로운 회중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60년에는 41개의 회중과 얼마의 격지 집단이 있었다. 점증하는 필요성에 부응하여 ‘디마스 알바레즈’가 특별 ‘파이오니아’ 대열에서 그 나라의 두번째 원주민 순회 감독자가 되도록 임명되었었다. 그후 얼마 안있어, 이전에 특별 ‘파이오니아’였던 ‘데이빗 샌체즈’도 순회 사업을 하게 되었다. 그 때까지 왕국 사업은 사실상 ‘파나마’ 전역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강화할 때

1945년초 45명의 전도인에서 1960년에 1,231명으로 증가한 후 이제는 모아진 사람들을 튼튼히 만들고 진리에 이미 들어와 있는 사람들을 강화시킬 때가 된 것 같았다. 결국 1960년부터 1965년까지는 단지 95명의 전도인들만이 증가하였다.

이것은 우리 사업이 맥이 빠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았다! 전파 활동은 전 지역으로 계속 확장해 가고 있었다. 단순히 반응이 적었을 뿐이었다. 이 기간에 불안정한 정치적 상태도 어느 정도 우리의 사업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전파 활동이 증가하다

1966년부터 1970년까지 건전한 성장이 있었다. 1970년 말에 ‘파나마’에서 45개의 회중과 약 16개의 격지 집단과 더불어 왕국 전도인 수가 평균 1,781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증가의 대부분은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 그리고 전도인들과 ‘파이오니아’들이 그 책을 전하고 성경 연구를 시작하는 일에 열정적으로 활동한 데 기인한 것이었다.

1971년에서 1976년 사이에도 증가는 계속되었다. 1971년 4월에 우리는 처음으로 전도인 수에서 2,000명선을 돌파하였다. 1972년과 1973년에는 별로 증가가 없었다. 그러나 1974년에는 여호와의 왕국을 선포하는 사람들의 수가 15‘퍼센트’ 증가하였다. 1975 봉사년도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자가 전 해보다 16‘퍼센트’ 증가하여 월 평균 2,686명의 전도인이 있었다. 그리고 1976년 4월에 3,028명의 행복한 왕국 선포자들이 전파 활동을 보고하였다.

세워 나아갈 때

초기의 여러 해 동안, 우리는 적당한 집회 장소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과분하신 친절로 이 문제가 극복되어 왔다. 예를 들면, ‘파나마’ 시 한 복판에 있는 지부 건물에는 훌륭한 왕국회관이 있다. 1959년부터 1976년 중엽까지 적어도 38개의 왕국회관이 새로 건축되었거나 건물을 매입해서 집회 장소로 개조되었다. 그리하여 1976년에는 대다수의 회중들이 그들 소유의 왕국회관에서 집회를 즐기고 있었다.

‘파나마’에서 왕국 전파 사업의 발전은 또한 서적을 저장할 장소의 필요성을 증가시켜 왔다. 1970년에 처음으로, 그리고 1975년에 다시 이러한 필요성에 부응하여 지부 사무실에서 얼마간의 확장과 수리하는 일이 있었다. 주로, 이러한 일은 자신의 시간과 정력을 기꺼이 바치는 형제들 손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1958년에 완성된 건물에 충분한 적재 공간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전할 서적의 양이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증가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였다. 오늘날은 원래 공간보다 약 3배나 되는 공간을 가지고 있지만, 2년분의 성서, 서책 그리고 소책자들을 보관하기에는 아직도 공간이 충분치 못하다. 필요하다면, 우리는 ‘파나마’에서의 전파 사업을 위하여 충분한 양의 성서 출판물을 갖게 될 수 있도록 기꺼이 좀더 조정을 하려 한다.

영성이 높아지다

‘파나마’의 신권적 역사에 있어서 두드러진 점은 ‘왙취 타워 협회’ 본부로부터 온 형제들과 지구의 종들의 영적으로 격려적인 방문들을 들 수 있다. 우리는 1966년 12월에 이곳에서 열린 “하나님의 자유의 아들들” 국제 대회를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600명 정도의 방문객들이 여러 나라로부터 왔으며 ‘왙취 타워 협회’의 이사들 중 한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참석하였다. 이 대회는 영어와 ‘스페인’어로 동시에 열렸었다.

다른 곳에서와 같이 이곳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의 영성에 크게 이바지하여 온 협회 교육 사업의 또 하나의 부면은 천국 전도 학교였다. 제1기생들은 회중 감독자들과 특별 ‘파이오니아’들로 구성되었었는데 형제들 뿐만 아니라 자매들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코오스’가 그리스도인 장로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한 훈련은 이곳에서의 전파 사업에 아주 유익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한 훈련은 회중을 더 잘 조직하도록 하였으며, 감독자들에게 성서 원칙들을 더 깊이 인식하도록 도와 주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받는 고난

여러 해에 걸쳐, 증인 자녀들이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는 경우들이 왕왕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국가 상징물 앞에서의 숭배 행위와 이 현 사물의 제도에 속한 것을 위해 경건한 감정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과 관련된 그들의 입장 때문이었다. 최근에, 여호와의 백성들로 하여 그들의 관습을 따르게 하려는 당국의 강요가 심해졌었다. 그러나 물론 참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적인 문제에 관하여 중립을 지키며 그들은 모든 형태의 우상 숭배를 피한다.—신명기 5:8-10; 요한 15:19; 18:36; 고린도 전 10:14.

일단의 여호와의 증인들의 자녀들이 학교에서 기 경례와 애국가 부르기를 거절한 일이 있은 후 1971년 5월 20일에 이것이 신문에 보도되었었다. 또한 순회 감독자 ‘페드로 코르도바’와 그밖에 3명의 남자 증인들(그들 중 한명은 15살의 미성년자임)이 국방군들에 의하여 구속되었었다. 이들 그리스도인들은 끌려 가 술취한 육군 소령에게 모욕을 당하였으며 후에 ‘파나마’ 시에 있는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근 일주일 후 소년 법원 판사는 미성년자를 그 부모의 보호하에 두도록 석방시켰다. 다른 형제들은 아무런 혐의도 씌워지지 않을 채 수주일 후 석방되었다.

수감되었던 형제들의 소송 사건을 맡았던 변호사는 그 나라 고위 당국자 중 한 사람인 각료 앞에서 면책을 당하였다. 왜 그러하였는가? 형제들에게 씌워진 혐의의 근거로 인용된 법률이 그 사건에 적용할 수 없는 것임을 그 변호사가 그에게 설명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파나마’의 법전에는 기에 경례해야 하거나 애국가를 불러야 할 의무를 직접 지적하는 법률이 없는 것 같다.

인내의 보상

참 그리스도교를 실천하는 데서 여러 가지 문제들을 직면하면서도 ‘파나마’에서의 왕국 선포자들은 꾸준히 좋은 소식을 전파해 왔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노력을 축복해 오셨다. 인내의 대가는 ‘에밀리 래퍼’가 경험한 일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0년 전 나는 어떤 부유한 남자의 첩으로 있던 한 여자와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 당시 그에게는 열 두세살 가량된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도 연구할 때 같이 앉아 있곤 하였다. 이 여자는 우리의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고, 아들도 데리고 나왔다. 하지만 그 아들은 자기 어머니와 의붓 아버지와의 실제 관계를 알면서 반항적이 되었다. 그 여자는 그 남자와 헤어지고 여호와께 자기의 생명을 헌신하고자 무척이나 원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장애거리가 너무나 많았다. 그 여자에게는 합법적인 신분 증명서가 없었으며 그것 없이는 직업을 구할 수 없었다. 그 남자는 그 여자의 마음을 돌리려고 자살하겠다며 위협까지 하였다. 엎친 데 덮치기로 본처 자식들은 이 여자가 자기들의 아버지의 생명을 파멸시키려 한다고 하면서 갖은 모욕과 위협을 퍼부었다. 몇년 후, 성서 연구는 중단됐지만, 나는 계속해서 이따금씩 그의 집을 방문해서 격려해 주고, 최근호 우리의 잡지를 전해 주었다. 이럭저럭하는 동안에 그 여자는 건강이 나빠졌고 그의 아들은 과음하고 거친 아이들과 몰려 다니는 불량 소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여자는 무엇을 할 수 있었는가?

‘그런데, 이 때 즈음 정부가 바뀌어 모든 외국인들에게 거류 증명을 정리하든가 아니면 이 나라를 떠날 것을 요구하는 법이 발효하였다. 그 아들은 이미 결혼을 했으므로 그들 셋은 정처없이 ‘파나마’를 떠났다. 내가 그들에게 기울인 7년간의 수고는 모두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는가?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 하며 3년이 지난 어느 날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감격을 안겨 준 편지가 한통 날아왔다. 그 아들과 그의 아내는 침례를 받았고 임시 ‘파이오니아’ 봉사까지 했으며, 어머니는 다음 순회 대회에서 침례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얼마 후, 우리는 그들을 방문할 특권을 갖게 되었다. 이 가족이 변화된 것을 보았을 때 무척이나 감격하였다! 그 어머니는 이제 막 임시 ‘파이오니아’ 기간을 마쳤고 그 아들은 우리의 대회 ‘드라마’ 중 하나에서 한 역을 맡아 열심히 연습중이었다. 이제 이 가족은 질서가 잘 잡힌 행복한 가족이었다. 여호와께서 분명히 그들을 축복해 오셨으며, 진리가 그들 마음에서 자라게 해 주셨다.’

얼마 후, 이전에 불륜의 첩이었던 이 여자는 어느 그리스도인 남자와 결혼하였으며, 그리하여 성서 원칙에 근거한 가정에서 결혼 생활을 즐기게 되었다. 수년 동안 ‘파나마’에서 약 850쌍의 여호와의 증인들의 결혼식이 거행되어 온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아마, 이들 중 절반 또는 절반 이상이 합의 결혼 관계로 살아 왔으며, 그들 중 한쪽이나 양쪽이 함께 성서 원칙을 배우고 하나님께 헌신을 상징하는 침례를 받기 위하여 이 성서 원칙들을 따르기를 열망하게 되자 합법적으로 결혼하게 되었다.

과거와 장래의 축복

틀림없이 ‘파나마’인들 가운데에는 그들의 생명을 여호와께 헌신할 진실한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제자를 삼기 위해 노력해 온 여러 해 동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풍성히 축복해 오셨으며, 그분께서는 왕국 소식을 선포하는 일에서 앞으로의 우리 노력도 축복해 주실 것을 확신한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여호와의 찬양자들이 들어오는 수가 가속화되어 왔다. ‘파나마’에서 왕국 전도인들이 일천명선에 이르는 데 약 55년이 걸렸다. 그 때가 1955년이었다. 그 다음 16년이 경과한 1971년에 우리는 2,000명선에 다달았다. 그러나 단 5년 후 즉 1976년 3월에 우리는 3,000명선의 전도인에 도달하였다.

이제 ‘파나마’에는 3,000명이 넘는 튼튼한 왕국 선포자들이 여호와께서 계속 축복해 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앞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맡기신 일을 수행하면서 우리의 하나님께 계속 충성을 바칠 것을 기도한다. 우리는 그러한 활동이 풍부한 보상을 가져 올 것임을 알고 있다. 왜냐 하면 “충성된 자는 복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잠언 2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