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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어마’

‘버어마’

‘버어마’

‘버어마’는 숲이 우거진 아름다운 나라이다. 이 나라의 길이는 북쪽에서 남쪽까지 즉 우뚝 솟은 ‘티벳’ 산맥에서 열대의 인도양까지 약 2,100‘킬로미터’이다. 서쪽에서 동쪽까지는 즉 ‘방글라데시’와의 접경에서 ‘버어마’와 ‘라오스’ 접경을 이루는 ‘메콩’ 강까지는 약 925‘킬로미터’이다.

편자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는 산들이 북서쪽에서는 ‘방글라데시’ 및 인도와, 북쪽에서는 ‘티벳’과, 북동쪽으로는 중공과 그리고 동남쪽에서는 ‘라오스’ 및 ‘타일랜드’와 튼튼한 자연적인 국경선을 이루고 있다. ‘버어마’의 총면적은 678,030평방 ‘킬로미터’이다. 그러므로 이 나라의 면적은 영국과 ‘프랑스’를 합친 것과 거의 비슷하다.

시편 필자가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라고 경탄하여 외친 말은 ‘버어마’를 두고 한 말인 것같다. (시 104:24) 최북단에 만년설로 덮여 있는 ‘흐카카보 라지’ 산은 ‘버어마’의 최고봉으로서 해발 약 5,887‘킬로미터’나 된다. 세개의 산맥 즉 서(혹은 ‘아라칸’) ‘요마’, ‘페구 요마’ 및 ‘샨’ 고원이 ‘이라와디’, ‘싯당’ 및 ‘샐위인’이라고 불리우는 세개의 평행을 이루고 흐르는 강 계곡을 형성하고 있다.

역사와 종교

‘버어마’의 역대 기록은 기원전 850년에, ‘이라와디’의 상류에서 ‘라가웅’의 창설로 시작된다. 하지만 ‘버어마’의 초기 역사는 모호하다. 이 나라의 토착민들은 ‘몽고’ 혈통으로부터 나왔으며, 이 혈통으로부터 세개의 주요 부족 즉 ‘티베토-버어마’족, ‘몬-크메르’족 및 ‘타이-차이나’족이 나왔다. ‘버어마’ 이주민들은 초기의 한 집단인 ‘몬’족을 따라 이 햇빛이 밝은 나라로 내려 왔는데, ‘몬’족은 최초로 길을 개척한 종족으로서 해안가에 정착하여 높은 문화 수준을 이룩하였다. ‘타이’족은 13세기에 ‘윤난’으로부터 마지막으로 대단위로 이주해 왔다. 9세기에는 순수 ‘버어마’인들이 ‘버어마’ 중앙의 건조 지역에 정착하였으며, 거기에 가 보면 그들의 고대 수도들이었던 ‘파간’, ‘아바’, ‘아마라푸라’ 및 ‘맨달레이’ 등의 터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버어마’의 구릉 지대들은 지세가 험하고, 교통이 나쁘기 때문에, 주요 인종들을 언어가 다른 수많은 부족들로 갈라지게 만들어 놓았다. 따라서 ‘버어마’ 국적을 가진 100여종이 넘는 다른 구릉 지대의 사람들이 ‘카친’, ‘카야’, ‘카우툴레’, ‘샨’ 및 ‘친’ 주에 살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삼각주와 건조 지대에 인구가 밀집되어 있다.

종교를 보면, 순수 ‘버어마’인, ‘몬’족 및 ‘샨’족은 압도적으로 많은 수가 불교를 믿고 있다. 그러나 ‘친’족, ‘카친’족 및 ‘카렌’족의 대부분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다. 물론 그들 가운데에는 물활론자들도 있다.

‘버어마’에는 육상 교통망이 잘 갖추어져 있지 않다. 동부에 있는 ‘버어마’ 도로는 ‘버어마’와 중공을 연결하고 있는데, 여행하기가 매우 힘들고 위험하다. 서부에 있는 ‘타무’ 도로는 인도와 ‘버어마’를 잇고 있는데, 역시 여행하기가 어려운 노선이다. 현재 이 길들은 밀수꾼들이나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버어마’는 해상과 항공 교통에 의존하고 있다.

“좋은 소식”이 ‘버어마’에 이르다

하지만, 하나님의 왕국 소식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버어마’에 들어왔다. 현재 이 소식은 이 나라 방방곡곡에 전해졌다.

성서 진리의 불씨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버어마’인들의 관심에 불을 붙이기 시작한 때는 1914년이었다. 그 해에 2명의 ‘콜포처’(전 시간 봉사자)인 ‘헨드리 카마이클’과 또 한 형제가 인도의 ‘마드래스’에서 ‘버어마’로 왔다. 수도 ‘랭구운’에서 그들은 ‘왙취 타워 협회’의 초대 협회장 ‘C. T. 러셀’이 쓴 책과 소책자 얼마를 배부하였다. 서적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두 사람이 특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그들은 즉시 ‘왙취 타워’ 출판물들을 탐독하였다. 그들은 명백한 말로 설명된 진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교국과 관계를 끊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증거 활동에 관해서 새로운 관심자들을 훈련시키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새로 형제가 된 ‘버트람 오스카 마셀린’과 ‘버논 프렌치’는 자기들의 소견대로 행하도록 남겨지게 되었다. 그들은 친구들이 자기들의 집을 방문해 올 때만 비공식적으로 증거를 했다.

1918년초, ‘버어마’ 내의 영국 정부는 모든 사람들에게 군복무를 위해 등록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마셀린’ 형제는 법령에 순종하여 등록은 했지만, 자기는 양심적인 거부자이며, 여하한 싸움에도 참여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마셀린’ 형제는 다음과 같이 회상을 한다. “나는 육군 본부로 끌려갔다가 얼마 후 직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판정을 받기 위해서 병역 면제 심사국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출두해 보니 그 심사국은 내가 ‘임명된 성직자’가 아니므로 병역 면제를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들은 내 사건을 판결하도록 법원으로 보냈다 ·⁠·⁠·. 판사 앞에서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중립이며 어느 편에도 가담할 수 없다는 점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심사국의 결정을 지지하는 한편, 나에게 비전투적인 임무를 부여하도록 추서하였다. 나는 다시 내 세속 직장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다른 훈령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았다.”—요한 17:16.

1918년 3월, ‘마셀린’ 형제가 정부의 한 휴양지인 ‘마이미오’에 있는 동안, 군 당국은 그가 군사 훈련 즉 무기를 가지고 하는 훈련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훈련을 받았으나 무기를 가지지 않고 훈련을 받았다. 그가 무기를 가지고 훈련받는 것을 끈질기게 거절하자, 체포되어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돌을 캐고 도로를 닦는 등의 중노동을 하게 되었다. 매일 두명의 무장 위병이 ‘마셀린’ 형제를 군법 회의로 호송해 갔다. 하지만 매번 그는 그의 감방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결국 한달 후에 그는 석방되었다.

증거 사업의 확장

1914년부터 1927년까지, 우연한 증거를 제외하고는 이곳에서의 전파 사업은 거의 행해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프렌치’, ‘클레이’, ‘우우튼’ 및 ‘F. 트루트웨인’ 형제와 얼마의 관심자들은 ‘마셀린’ 형제의 집에서 집회를 갖곤 했다. 그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들려 준다. “우리는 기도로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파수대와 그리스도의 임재의 전령」을 낭독한 다음, 질문을 하고 해설을 하곤 했다. 그 다음, 우리는 한 두곡의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로 끝을 맺었다. 18내지 20명이 참석하곤 하였다.”

1926년에 ‘펜실베이니아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는 인도의 ‘봄베이’에 새로운 지부 사무실을 개설하였다. 이 지부 사무실은 인도, ‘아프가니스탄’, ‘버어마’, ‘실론’과 ‘페르시아’에서 수행되는 왕국 사업을 감독했다. 처음에는 지부 사무실과 ‘버어마’의 ‘랭구운’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소수 집단간에 서신 연락만이 있었다.

그러나 1928년에 ‘봄베이’ 지부는 ‘조지 A. 라이트’ 형제를 ‘버어마’로 파견하였다. 그 때까지 우리의 사업은 단지 ‘랭구운’ 시에서만 행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라이트’ 형제가 ‘버어마’로 오자, 그는 협회 서적 가운데 「하나님의 거문고」, 「구원」 및 「성서 연구」라는 책들을 배부하면서 약 5개월 동안 이 나라를 널리 여행하였다. 의심할 바 없이 이러한 방법으로 진리의 씨가 심어졌다. 또 이전에 관심을 보인 사람들과도 접촉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1928년에 와서야 비로서 ‘버어마’에서 왕국 사업을 확장하기 위한 신중한 노력이 기울여질 수 있었다.

열렬한 ‘콜포처’들이 도움을 주다

1930년에 ‘봄베이’ 지부는, ‘실론’에서 임명을 완수한 (두명의 열렬한 ‘콜포처’들인) ‘클라우드 굿맨’과 ‘로널드 티핀’을 ‘버어마’로 파견하였다. ‘굿맨’ 형제는 ‘실론’으로부터의 그들의 여행과 ‘버어마’에서 그들이 기울인 노력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들 바다 주변에서는 원주민들이 갑판 위에 타고 여행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여행을 위해서는 두루말이 침구를 가져다가 갑판 위 지정된 곳에 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곧 여행하는 동안 객실이 된다. ‘론’과 나는 영국과 ‘버어마’를 왕래하는 좀더 고급인 정기선 위의 갑판 자리 하나를 확보하였다. ·⁠·⁠· 나는 1.3‘센티미터’ 정도 두께의 ‘매트’ 위에 누워 있는 동안 배의 요동에 따라 이리저리 미끌어져 살 닿는 부분이 얼얼해지던 일이 생생하게 생각난다. 또 우리가 원주민들과 함께 갑판 여행을 함으로써 ‘영국인의 위신을 손상’시킨다고 경멸조로 우리를 비난하던 영국인 장교도 생각난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으며 그러는 동안 우리는 ‘랭구운’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마셀린’이라는 한 형제의 주소를 알게 되었는데, 그는 ‘프렌치,’ ‘클레이’, ‘트루트웨인’과 ‘우우튼’ 등의 형제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 당시 ‘버어마’ 내에 있던 관심자들이라고는 그들이 전부였다. 그때는 1930년 6월이었다. 여기에서도 ‘실론’에서와 같이, 아무런 조직적인 증거가 행하여지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이들 형제들에게 우리와 함께 일요일 오전에 따라 나서도록 격려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들은 차차 호응하게 되었다. 이 형제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우리 ‘파이오니아’들을 재정적으로 도와 주는 것으로써 증거하는 일에 대신할 수 있느냐고 묻던 일과, ‘론’이 ‘당신 대신 대리자를 신세계에 들여 보내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읍니다’ 하고 대답하였던 일이 기억난다.

“‘론’과 나는 ‘랭구운’ 외곽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실론’에서 발전시킨 방법을 여기서도 사용하였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페구’, ‘토웅구’, ‘피인마나’, ‘맨달레이’, ‘마이묘’, ‘시파우’, ‘라시오’, ‘시웨보’, ‘모고크’, ‘바모’, ‘미치나’, ‘마그웨’, ‘바세인’, ‘모울메인’, ‘애캡’ 및 기타 지역들이었다.”

그들이 진리를 발견하다

여기 흥미있는 한 가지 사건이 있다. ‘티핀’ 형제는 호별 방문 증거를 하던 중 ‘랭구운’의 ‘케멘다인’에서 기차 역장인 ‘시드니 쿠우트’ 씨를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에게 10권으로 된 한 질의 책을 전하였다. ‘쿠우트’ 씨의 장녀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바로 그날 밤 아버지는 「하나님의 거문고」라는 책의 상당 부분을 읽으시고, 같은 날 밤 어머니께 이것이 진리라고 말씀해 주셨다. 며칠 가지 않아 아버지는 바로 이것이 평생 찾고 계시던 것임을 알게 되셨다. 아버지께서는 14세 때 목사에게 삼위일체에 관해 설명해 달라고 질문하던 일을 기억하신다. 그 때 그 목사는 “저리 비켜라. ‘소니’, 네가 그런 문제로 골치썩이기에는 너무 어리다” 하고 말하였다. 아버지는 그대로 물러나고 말았지만, 삼위일체 교리가 계속 거리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왙취 타워’ 출판물을 읽으셨을 때 비로서 그 문제가 풀렸다. 아버지께서는 곧 교회와의 일체의 관계를 끊으셨으며, 더 이상 고민거리가 없어지게 되셨다. 한편 교회에서도 좋아했는데, 왜냐 하면 항상 그들에게 대답해 줄 수 없는 성서 질문들을 해 오던 사람이 없어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께서도 진리를 인식하시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금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여호와의 증인이 되시고 네 자녀를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도록 키워 주신 데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무척 감사를 드린다.”

그 당시에는 「모든 사물을 확인하고 훌륭한 것을 굳게 잡으라」와 같은 책이 없었다. 하지만 ‘쿠우트’ 형제는 비슷한 내용을 함께 열거한 자기 나름대로의 한 권의 책을 만들었다. 그는 그 책의 이름을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지었다. 모든 교리들을 열거해 놓았으며, 그가 사용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성귀를 발견할 때면, 자기 책에 들어 있는 적절한 제목 밑에 기입해 놓곤 하였다.

‘쿠우트’ 형제는 다음에 협회의 인도 지부에 편지를 하여, ‘버어마’ 내에 다른 증인이 또 있는지를 물어 보았다. 그는 몇 사람의 이름과 주소가 들어 있는 명단을 받았다. 이 명단을 받고 나서, 그는 각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에게 와서 함께 하루를 보내자고 초대를 하였다. 왜냐 하면, 그는 어떻게 전파 활동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몹시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대여섯명의 형제들이 그를 방문해 왔으며, 그들은 조그마한 집회를 가졌다. ‘버어마’에서는 호별 방문 증거가 수행되고 있지 않았지만, ‘쿠우트’ 형제는 자기 친척들에게 편지를 썼으며 그들에게 협회 서적들을 보내 주었다.

‘쿠우트’ 형제의 누이로서 ‘로마 가톨릭’ 신자인 ‘데이지 드소우자’ 부인은 동생으로부터 「왕국, 세상의 희망」이라는 소책자를 받자, 허기진 듯이 그 내용을 “삼켰다.” 그는 동생에게 더 많은 책들과 성서를 한권 보내 달라고 편지하였다. 즉시 커다란 서적 꾸러미가 도착하였다. 그는 이 책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권 한권 모조리 읽었으며, 그러느라 새벽까지 뜬 눈으로 새곤 하였다. 바로 이것이었구나! ‘드소우자’ 부인은 진리를 발견하였다! 그는 혼자서 호별 방문을 시작하였다. 그는 또 자기 자녀들을 시켜 모든 이웃들에게 소책자를 전해 주었다. 남편이 이 일을 알게 되었다. 남편은 처음에 몹시 반대하였지만, “무엇 때문에 새벽 2시까지 저 책들을 읽는 것일까? 뭔가 중요한 것이 그 속에 있는 모양이지?”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직업은 한 철도 매점의 지배인이었으므로, 그의 일은 밤 11:30께나 끝났다. 어느날 밤 그는 아내에게 “당신이 그렇게 늦게까지 자지 않고 있는 걸 보면 당신이 읽고 있는 것이 매우 재미있는 모양인데, 나에게도 읽어 주지 않겠오?” 하고 말하였다. ‘드소우자’ 자매는 두 마디가 필요 없었다. 그로부터 그는 밤마다 남편에게 읽어 주었다. 얼마 있지 않아, 그들은 ‘가톨릭’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얼마 후, 교구 사제가 찾아와 그들이 교회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때쯤은 ‘드소우자’ 자매가 “성령의 검”으로 잘 무장되어 있었다. (에베소 6:17) 그리하여 그는 ‘로마 가톨릭’ 성서를 사용하여 ‘가톨릭’ 교회의 교리들이 어떻게 잘못되어 있는지 증명해 주었다. 그 사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도 지옥이나 연옥과 같은 장소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오. 하지만 내가 그러한 교리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그들을 교회에 나오게 할 수 있단 말이오?”

‘드소우자’ 자매는 이렇게 대꾸하였다. “당신이 만일 정직한 사람이며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관해서 진리를 가르쳐야지 그분을 냉혹한 마귀로 묘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듣자, 그 교직자는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가 버렸다. 그는 나가면서 “내가 여러 해 동안 그렇게 가르쳐 왔는데, 이제와서 어떻게 다르게 가르칠 것을 기대한단 말이요?” 하고 말했다.

‘드소우자’ 자매는 “당신이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그래야지요” 하고 응수하였다. 결국 그 교직자는 ‘드소우자’ 자매에게 자기의 양떼를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어느 일요일 아침, 그 사제는 자기 양떼에게서 거두어들일 수 있는 모든 ‘왙취 타워’ 출판물들을 모아다가, 그가 ‘드소우자’ 자매에게서 빌려 간 몇권의 책과 함께 교회 밖에서 불태워 버렸다. 하지만 이러한 일을 보고도 ‘드소우자’ 자매의 가족은 낙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였다.

왕국 소식을 가지고 ‘버어마’를 여행함

한편, ‘굿맨’과 ‘티핀’ 두 형제는 계속해서 ‘버어마’를 여행하며 서적을 전하고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였다. ‘굿맨’ 형제로부터 그가 여행할 때의 경험 한 가지를 들어 보도록 하자.

“우리는 한 「파수대」 예약자가 ‘남투’ 은(銀) 및 납(鉛)광산 지역(북부 ‘샨’ 주)으로 이사하였다는 통지를 받았다. 그곳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교통편은 인근 마을에서 철로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철도편을 사용할 수 있는 허가를 받기 위해 편지를 했으나 거절을 당하였다. 그곳에서 우리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는 거부하는 대답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라시오’에 갔을 때 수소문하여 ‘라시오’에서 ‘남투’까지 ‘정글’로 통하는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으며, 기꺼이 그 길로 여행을 하겠다는 한 ‘택시’ 운전사를 찾아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우리는 그의 차에 여러 상자의 책을 싣고 출발했다.

“‘남투’는 수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광구에서 운반해 오는 원광을 제련하는, 산속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도시였다. 나는 정부의 한 휴게소에 머물면서 그 도시에서 봉사하였다. 많은 서적을 전했다. 마침내 그 도시를 다 돌게 되었지만 광산촌인 ‘보드윈’에 사는 그 예약자를 아직 만나 보지 못했다. 철도편이 아니고서는 그곳에 갈 수 있는 딴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회사 전무에게 증거를 한 다음 그에게 직접 내 문제를 제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내가 통행을 거절당한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였다. 그는 건장하게 생긴 ‘오스트레일리아’인이었으며, 내가 솔직하게 사정을 이야기하자 (내가 ‘정글’의 산길로 왔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던 것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는 즉시 접대하고 있던 손님들을 남겨 두고 자기 차로 나를 광산 사무실까지 태워다 주었다. 거기서 그는 ‘로마 가톨릭’교 신자이며 이전에 나의 통행을 막았던 그의 비서에게 나를 소개해 주었다. 그가 내 이름을 듣자 놀라서 입이 쩍 벌어지던 일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지시를 받았다! ‘‘굿맨’ 씨를 회사의 손님으로 모시도록 하게. 이분이 원하는 곳에는 어디에든지 가실 수 있도록 하고 이분께 특별 열차를 한대 내드려 마음대로 사용케 하고, 이분이 회사 영역안에 머무시는 동안 숙박과 식사를 마련해 드리도록 하게,’ 그래서 나는 ‘선생님’(Sir)이라고 불리우게 되었고, 내가 언제 특별 열차를 원하는지 그리고 내가 가는 곳마다 거기서 얼마나 머물고자 하는지를 물어왔다. 사람들에게 소식이 전달되지 못하도록 막으려 하던 바로 그 사람이 바로 이 모든 심부름을 하였다.”

1931년 1월경까지, 이 형제들은 대체로 ‘버어마’ 전 지역을 다 돌았으며 ‘싱가포르’로 옮길 준비가 되었다. ‘로널드 티핀’ 형제는 먼저 떠났다. 그러나 ‘클라우드 굿맨’ 형제는 해안 기선을 이용하였으며 그래서 그는 남쪽으로 가는 도중 ‘타보이’와 ‘매르귀’에서 전도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수행하다

‘조오지 라이트’, ‘클라우드 굿맨’, ‘로널드 티핀’ 등의 증인들이 수행한 초기 봉사를 ‘에워어트 프랜시스’가 이어받아 계속하였다. 그는 1933년에 인도에서 왔다. 그 때까지 우리의 사업은 ‘랭구운’, ‘마타반’ 및 ‘맨달레이’에서 잘 조직되고 있었다. 하지만, ‘프랜시스’ 형제는 1934년에 인도로 다시 불리워 갔으며 그 대신 ‘랜달 호플리’와 ‘클레런스 테일러’ 형제가 왔다. 그 당시 ‘호플리’ 형제는 ‘J. F. 러더포오드’ 형제의 녹음 강연을 가지고 있었다. 그 강연은 수 주일 동안 지방 방송국에서 방송되었다. ‘버어마’인들의 서적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1934년에 「왕국—세상의 희망」과 「왕국으로 도피하라」라는 소책자가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기타 출판물들이 뒤이어 ‘버어마’어와 ‘카렌’어로 나왔다.

증인인 ‘호플리’는 처음에 ‘랭구운’ 시에서 집중적으로 봉사하였다. 그곳의 한 거리에서 증거를 하던 중, 그는 음식점에서 일하는 한 희랍인 청년에게 얼마의 서적을 전하게 되었다. 이 사람은 신속히 성서 진리를 이해하고 더 많은 것을 알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는 ‘봄베이’ 지부 사무실로 편지하여 몇권의 서적을 주문했다. 동시에 그는 그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좋은 소식을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파하도록 누군가를 보내 주십시오. 내가 알기로는 이곳에서 이 소식에 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나 뿐인가 합니다.” 지부는 즉시 ‘랭구운’ 회중에 편지하여 누군가가 그를 방문해 줄 것을 요청했다. 형제들과의 교제를 통해 ‘바실 사토스’라는 이 희랍인 젊은이는 튼튼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얼마 후에 그는 ‘랭구운’ 회중의 회중의 종(주임 감독자)으로 봉사하게 되었다.

1935년과 1936년에 형제들은 ‘카렌’인들, ‘앵글로-버어마’인들 및 ‘앵글로’-인도인들에게 집중적으로 주의를 기울였다. 왜냐 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왕국 소식에 대해 더 좋은 반응을 보이는 것같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카렌’인들은 그리스도교국의 여러 종파에 속한 성원들이라는 점을 유의할 것이다. ‘클레런스 테일러’ 형제가 ‘파인마나’에서 일하는 동안 ‘랜달 호플리’ 형제는 ‘맨달레이’와 기타 북부 도시들에서 집중적으로 전도하였다. 이 때쯤 소식은 북부 ‘버어마’에도 전해지고 있었다.

부언한다면, 그 당시 ‘버어마’는 인도 정부하의 한 도(道)였다. ‘버어마’는 하나의 독립된 나라로 취급되지 않았다. 그래서 1937년까지 모든 봉사 보고 기록은 인도의 보고에 포함되었으며 그 당시 ‘버어마’의 증인들이 얼마나 보고를 내고 있었는지를 알려 주는 기록이 없다.

지부 감독의 변화

1938년에 ‘버어마’에서의 왕국 전파 활동의 감독하는 일에 변화가 생겼다. 그 해 초까지 ‘왙취 타워 협회’의 인도 지부가 ‘버어마’에서의 사업을 감독해 왔다. 그 다음 ‘오스트레일리아’ 지부가 이 책임을 인계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1938년에 인도에서 온 ‘파이오니아’들은 인도로 돌아갔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파이오니아’들이 그곳에 심어진 씨들에 “물주는” 일을 돌보게 되었다. 이 형제들과 ‘버어마’에 있는 왕국 전도인들이 그들의 임무를 충실하게 행함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증가를 주셨다.—고린도 전 3:16.

짧은 기간 동안 ‘S. 켈티’ 형제가 ‘버어마’에서의 왕국 활동을 돌보았다. 그러나 그는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프랭크 듀어’가 1938년 3월부터 7월까지 이곳의 사업을 돌보았다.

새로운 ‘파이오니아’들의 도착

1938년의 봉사 연도 말에는 ‘버어마’에 있는 3개의 회중에서 25명의 왕국 전도인이 보고했다. 한편 ‘헥터 오우티스’와 ‘프레드 패튼’ 형제가 사업을 돌보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랭구운’으로 왔다.

‘랭구운’의 중심가는 도로들이 평행으로 쭉쭉 뻗어 있고, 구획들이 반듯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주요 도로와 작은 길, 심지어 뒷골목까지 모두 조직적으로 이름과 번호가 있다. 그 도시의 동쪽 끝에는 ‘총무처’라고 불리우는 정부 청사들이 큰 구획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 건물 주위에는 잘 가꾸어진 나무들이 열을 지어 서 있는 깔끔하게 포장된 도로들이 있다. ‘랭구운’에는 사이에 공간이 없는, 간격없이 길을 따라서 나란히 늘어서 있는 일정한 모양의 4층 건물들이 길게 열을 지어 있다. 1930년대의 ‘랭구운’의 교통 수단으로는 전차, ‘버스’, 인력거 및 한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사용되었다.

‘프레드’와 ‘헥터’의 도착에 대비해서 ‘프랭크 듀어’는 ‘랭구운’ ‘댈하우지’가 ‘총무처’ 맞은 쪽에 있는 한 이층을 세얻었다. 새로운 ‘파이오니아’들은 한 대의 녹음재생기, 한 ‘세트’의 ‘레코오드’ 그리고 그 당시 ‘왙취 타워’ 협회장이었던 ‘J. F. 러더포오드’ 형제의 녹음 연설들을 가지고 왔다. 그 ‘파이오니아’ 형제들은 오자마자, 앞쪽의 조그마한 ‘발코니’에 그 기계를 설치하고는 ‘스피이커’를 ‘총무처’쪽으로 향해 장치해 놓았다. 그들은 ‘오케스트라’ 한 곡을 들려 주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각층에서 사람들이 창문으로 머리를 내 밀었다. 그 때 ‘프레드 패튼’ 형제는 ‘러더포오드’ 형제의 짧은 녹음 연설을 하나 들려 주었다. 이 연설은 이 낡은 사물의 제도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질서에 대해 분명하면서도 신랄한 사실들을 제시해 주었다. ‘총무처’에 있는 상당수의 직원들은 침례교인들이었다. 기타 많은 사람들은 ‘로마 가톨릭’교 신자들이었으며, 커다란 ‘성 마리아 성당’이 ‘총무처’의 한 쪽 끝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 소식이 얼마나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침내 ‘프랭크 듀워’ 형제는 ‘버어마’를 떠나 ‘싱가포르’로 가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1938년 7일 14일 나는 ‘랭구운’에서 여권을 갱신한 다음 곧 ‘프레드’와 ‘헥터’ 형제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기차와 자동차 편으로 ‘버어마’ 해안으로 내려 갔다. 그 다음 ‘타보이’에서 ‘메르귀’까지 가는 데는 배를 일곱번 바꿔 탔다. 나는 그곳의 여러 도시들과 조그만 마을들에서 왕국 소식을 전했다. ‘메르귀’에서 나는 ‘빅토리아 포인트’로 가는 한 기선의 갑판에서 하룻밤의 여행을 하게 되었다. ‘빅토리아 포인트’는 현재 ‘카우타웅’이라 불리우는 곳인데, ‘버어마’ 남단에 있는 조그마한 영국 관리 주둔지이다. ‘다크 방갈로’(옛말 인도 제국 전역에 있는 대부분의 도시에 여행하는 관리들의 숙소로 쓰던 아담하고 조그마한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에, 나는 한 거룻배 사공에게 1‘루피’를 주고 나와 내 짐을 ‘파칸’ 강 어구를 거쳐 ‘피낭’ 항구의 입구까지 실어다 달라고 부탁했다.”

“좋은 소식”의 전파

그 동안, 왕국 소식은 ‘버어마’의 여러 도시에 뿐만 아니라, 양같은 사람들의 마음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이 때에 ‘루비 코프’와 그의 자녀들이 진리를 받아들였다. ‘코프’ 자매는 몇시간 하는 봉사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자매와 아들 ‘데스몽드’는 ‘파이오니아’ 대열에 가담했다. 이 나라 전도인들 가운데서 그들은 최초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한 전도인들이었다.

협회의 자동차와 확성 장치가 된 짐차를 몰고 다니면서, ‘파이오니아’들은 ‘페구’, ‘니아웅글레빈’, ‘토웅구’, ‘렛파단’, ‘타라와디’, ‘프롬’ 및 기타 여러 지역에서 증거했다. 그들은 시장에 자동차를 주차시키고 잠시 동안 음악을 틀다가 ‘러더포오드’ 형제의 연설 하나를 들려 주곤 했다. 장보러 온 수백명의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곤 했으며,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소식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하지만, 거의 매 경우에 어떤 사람들이 서적을 받으러 왔다.

‘고프’ 자매는 ‘랭구운’에서 16‘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도시인 ‘인세인’을 자기 구역으로 맡아 봉사했다. ‘인세인’은 ‘카렌’ 침례교인들이 튼튼한 기반을 닦아둔 곳이다. (이들은 오늘날까지도 그곳에 신학교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고프’ 자매가 그들에게 전해 주는 소식을 환영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냉대를 받은 어느날 저녁 늦게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조용히 기도했다. “여호와 하나님, 제가 집에 가기 전에 단 하나의 양이라도 찾게 해 주십시오.” 바로 다음 집에서 ‘고프’ 자매는 ‘카렌’ 침례교인인 ‘다우 흠웨 키아잉’이라는 한 겸손한 부인을 만났다. 그는 ‘고프’ 자매로부터 성서 한권을 받고 나서, 그의 자녀들이 집에 있을 때인 토요일 오후에 다시 와 달라고 말했다. 그 날 저녁 그 부인은 자기 두 딸에게 ‘루비 고프’ 자매가 기타 종교를 모두 단죄하는 것을 보니 약간 광적인 것 같다고 말했다.

‘고프’ 자매는 재방문을 하여 ‘다우 흠웨 키아잉’과 그의 두딸, ‘마 추 메이’(현재는 ‘데이지 바 아이’)와 ‘마 흐닌 메이’(현재는 ‘릴리 듀워’)와 성서 연구를 시작했다. 곧 세 사람 모두는 이 소식이 진리임을 알았다. 후에 딸들은 협회의 출판물을 번역하는 일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마 흐닌 메이’ 자매는 ‘고프’ 자매와 함께 호별 방문 활동에 가담했으며, 그리하여 그는 최초의 ‘카렌’인 증인이 되었다.

하루는 ‘고프’ 자매가 ‘타매잉’ 역에서 증거를 하다가 한 젊은이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는 부랑자 생활로 그의 인생의 대부분을 지내왔다. 그는 여러 나라로 밀입국을 하고, 보석을 훔치고, ‘서어커스’단에도 들어갔다가, 권투 시합도 주선하는 등 갖가지 일을 해 보았지만 인생의 진정한 만족을 얻지 못하였다. 그가 서적 대금을 헌금할 돈이 없자 그 자매는 친절하게 소책자 한권을 무료로 주며 그 지방 왕국회관 주소를 알려 주었다. 그것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기차 여행을 하는 동안 그는 그 소책자를 읽었으며, ‘랭구운’ 역에 도착할 때쯤에는 이것이 진리라는 결론을 얻었다.

바로 그 다음날 ‘사이릴 게이’라는 이 젊은이는 증인들을 방문하여 여러 가지 궁금한 문제들을 질문했다. ‘헥터 오우티스’라는 증인은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녹음된 강연들을 들려 주었다. 그로부터, 부랑자였던 이 사람은 변화를 받은 사람이 되었고, 곧 ‘파이오니아’ 대열에 가담했다.

‘파이오니아’들은 여러 지역으로 가서 계속 “좋은 소식”을 전파하였다. 한번은 ‘헨자다’에서 개최되고 있는 침례 교회 대회에 모인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위해 확성 장치를 한 차를 타고 그리로 급히 달려 갔다. 그러나 침례교인들은 그 소식을 듣기를 거절하였다. 그들은 한 경찰관의 협조를 얻어 형제들을 몰아냈다. 하지만 ‘파이오니아’들은 시장으로 가서 거기서 ‘J. F. 러더포오드’ 형제의 녹음 강연을 계속 틀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많은 서적을 전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어떠한 좋은 결실을 냈는가?

얼마 후, 일단의 증인들이 그 지역으로 가게 되었다. 거기서 증거를 하던 중, 그들은 한 ‘카렌’인 남자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는 서적을 받기를 거절하면서, 자기도 가족과 함께 기도할 때 사용하는 성서 책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전해 주는 책은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형제들은 그 책을 보여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사람은 ‘왙취 타워 협회’가 발행한 책 한권을 가지고 나왔다.

또 하나의 예로서, ‘헨자다’에서 온 한 남자는 증인들을 찾으려고 ‘랭구운’으로 갔다. 그는 가두 잡지 봉사를 하며 행인들에게 협회 간행물을 전하고 있는 증인들을 발견하였다. 그 사람은 어떻게 증인들을 알게 되었으며 또 그가 증인들을 찾고 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앞서 ‘파이오니아’들이 ‘헨자다’로 여행하였을 때, 한 ‘카렌’인 ‘가톨릭’교인이 형제들에게서 몇권의 책을 받고는 ‘헨자다’에서 19‘킬로미러’ 떨어져 있는 ‘팅가나인’이라는 자기 마을로 돌아갔다. 그는 거기서 그 책들을 읽기 시작하였으며, 그 책의 내용을 진리로 신속히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 마을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가 형제들을 만나기 전에 그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책들을 가지고 집회를 마련하고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그 책을 가르쳤다. 그는 일요일이면 자기 친척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협회 출판물을 ‘카렌’어로 번역해 읽어 주곤 하였다. 조만간 그의 친척 중 12명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가톨릭’ 교회와의 손을 끊었다. 그 지방 사제는 이들을 자기네 “무리” 안으로 다시 데려 가려고 애썼으나, 이들은 진리편에 굳게 섰다. 전쟁이 끝난 후 이 사람은 ‘랭구운’에 얼마의 증인들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비록 증인들의 주소를 몰랐지만 증인들과 접촉하기 위해 그의 편지와 함께 한 사람을 보냈다. 그는 직접 ‘랭구운’에 있는 증인들에 관해 수소문 하던 중 그는 직접 우연히 길거리에서 그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확성 장치를 한 차를 가지고 그리고 ‘러더포오드’ 형제의 녹음 연설을 들려 줌으로써 수행한 증거 사업은 성공적임이 증명되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관심가진 사람들에게 서적을 전하게 되었고, 어떤 사람들은 참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최초의 ‘버어마’ 대회

1938년에 ‘버어마’의 증인들은 11월 26-28일에 ‘랭구운’에서 대회가 열릴 것이며, ‘오스트레일리아’ 지부 감독자 ‘알렉스 맥길리브레이’ 형제가 참석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서 감격해 했다. ‘싱가포르’, ‘말레이’ 및 ‘사이앰’(현재는 ‘타일랜드’)와 ‘파이오니아’들이 참석하도록 초대되었다. 그리고 대회 장소는 거대한 청동문들이 달려 있는 궁전같은 시청 건물이었다.

그 대회는 소규모 국제 대회와 같았다. 또한 기타 참석자들이 ‘오스트레일리아’와 ‘타일랜드’로부터 왔다. 참석자들 가운데는 ‘타일랜드’에서 온 ‘J. E. 시웰’과 ‘F. 듀워’ 형제가 있었다. 그들의 ‘랭구운’까지의 여행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방콕’을 출발하여 기차와 ‘버스’로 ‘라하엥’ 마을까지 여행했다. 그 여행의 나머지 부분에 관해 ‘시웰’ 형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날밤 우리는 (‘라하엥’에서) 머물고 그 다음날 동이 틀 때 대형 ‘커누우’를 타고 ‘메핑’ 강을 건넜다. 그리고 우리는 열대성의 처녀림으로 덮인 산속을 통과하여 80‘킬로미터’를 걷는 기나긴 모험을 시작했다. 그 지역에는 전화선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선을 따라갔다. (그 선은 ‘사이앰’과 ‘버어마’를 연결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권할 수 없는 위험한 여행이었다.

“우리는 ‘정글’속에 있는 맹수들을 두려워했다. 예를 들면, 그 지역에는 호랑이들이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우리는 많은 원숭이를 보았다. 그러나 호랑이나 코끼리나 흑곰은 보지 못했다. 그 지역에는 아름다운 ‘밴텀’닭이 살고 있었으며, 가끔 우리 앞으로 가로질러 날아 가곤 했다. 하룻길을 걸은 다음, 우리는 매우 심한 피로를 느꼈다. 그리고 두 명의 짐꾼을 만났다. 이 사람들은 분명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상품을 가지고 가는 밀수꾼들이었다. 우리는 이 긴 여행을 해 나아가려면 앞으로 많은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며, 또 밤에 잠을 잘 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 자신들을 보호해야 할 것인지 모르는 막연한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빈 광주리를 (막대기 양쪽 끝에 하나씩) 메고 ‘버어마’로부터 돌아 오고 있는 이 두 사람의 밀수꾼에게 우리를 도와 줄 수 있는지 물었다. 각자는 약간의 사례금을 받고서 도와 주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우리의 물건을 그들의 광주리에 넣고서 그들을 따라 갔다. 하룻밤은 나무에 설치한 평판 위에서 지내고, 그 이튿날 밤은 어느 작은 마을에서 지냈다. 드디어 우리는 ‘사이앰’의 국경 도시인 ‘마에소트’에 도착했다. 거기서 강을 하나 건넌 다음, 8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조그마한 ‘버스’를 타고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 여행은 매우 산이 많고 돌이 많은 울퉁불퉁한 길을 가야 하는 험한 여행이었다. 그 날밤에 우리는 어느 ‘카렌’ 마을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곳에서 한 신사가 우리를 데리고 가서 잠자리를 제공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버스’를 타고 다시 29‘킬로미터’를 간 다음, 조그마한 기선을 타고 ‘파안’에서 ‘모울메인’까지 다시 약 65‘킬로미터’를 갔다. 거기서 우리는 ‘샐위인’ 강 어구를 지나 기차의 시발역이 있는 도시인 ‘마타반’까지 갔다. 그 다음 우리는 기차로 ‘랭구운’으로 갔다. 우리가 이 여행을 하는 데 1주일이 걸렸으나 ‘랭구운’ 시청에서 열린 훌륭한 대회를 즐겼다.”

‘맨달레이’, ‘마타반’, ‘인세인’, 및 기타 여러 지역에서 온 많은 형제들과 관심자들이 이 대회에 참석했다. 공개 강연이 잘 광고되었기 때문에 그 대회장은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850석이 있는 그 대회장에 무려 1,000명이나 참석했다. 안내인들이 파도처럼 몰려 오는 군중을 막기 위해 커다란 문을 닫으려고 힘썼지만, 세번째 시도한 끝에 겨우 문을 닫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적극성이 있는 일부 젊은이들은 작은 옆문들을 통해 들어왔다. 아마도 대회장 안으로 들어 갈 수 없었던 사람들이 1,000명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강연 제목 그리고 널리 광고한 것이 그렇게 기록적인 군중이 모여들게 하였을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스트라스피일드’에서 온 지부 감독자 ‘맥길리브레이’ 형제는 “우주적인 전쟁이 가까왔다”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그 대회가 그렇게 성공적이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버어마’에서의 여호와의 백성들의 역사에 있어서 그것은 분명히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었다.

간섭이 시작되다

1939년 말경 협회의 ‘스트라스피일드’ 지부 사무실은 ‘미크 엥겔’이라는 또 한명의 ‘파이오니아’를 파견하여 ‘버어마’의 서적 보관소를 돌보게 했다. 그 때까지 ‘버어마’ 내의 ‘파이오니아’ 수는 증가해 왔다. ‘마흐 닌메이’(‘릴리’)가 그 중 한 사람이었다. 4명의 지방 ‘파이오니아’가 ‘오스트레일리아’ ‘파이오니아’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었다. 1939년 봉사 연도가 끝났을 때, ‘버어마’의 3개의 회중에서 야외 봉사를 보고한 증인들은 28명이었다.

왕국 선포가 활력을 얻어 가자 박해가 그의 추한 머리를 들어 올렸다. 1940년 말경에, ‘버어마’에 있는 영국 국교회, 감리교회, ‘로마 가톨릭’ 교회 및 미국 침례 교회의 교직자들이 우리의 서적에 대해 금지령을 내리도록 영국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형제들은 ‘랭구운’ 정부 당국이 그 명령을 받기도 전에 그 사실을 알았었다. 어떻게?

전신국에 근무하고 있던 우리 형제들 중 두 형제가 ‘버어마’에 있는 우리의 모든 서적을 금지하고 압수하라는 명령이 담긴 한 전보가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즉시 ‘미크 엥겔’ 형제에게 연락하였고, 그는 대부분의 서적을 ‘다메임’에 있는 우호적인 ‘카렌’인들의 집과 교외의 여러 곳을 포함하여 여러 장소로 분산시켜 감추게 했다.

그 당시에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사용하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장개석 휘하의 중국 국부조 정부로 엄청난 전쟁 물자들이 보내지고 있었다. 이 물자들은 북부 ‘버어마’에 있는 ‘라시오’로 보내진 다음 꾸불꾸불하고 위험한 ‘버어마’를 통해 중경으로 수송됐다. 수천대의 군 ‘트럭’이 ‘랭구운’으로부터 북쪽으로 줄을 지어 ‘타이어’, 연료, 탄약 및 다른 전쟁 물자들을 가득 싣고서 이동했다. 형제들은 중경으로 가는 이들 ‘트럭’들 중의 하나에 우리의 서적을 실어 보낼 수 있다면 압수를 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조오지 포웰’ 형제는 ‘싱가포르’로 가서 거기서 차량을 하나 구해서 ‘버어마’로 돌아와 협회 출판물을 싣고 중경으로 운반해 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가 ‘싱가포르’에 도착하기 직전에 어떠한 차량도 그곳에서 반출해 나가는 것을 금하는 금지령이 내려졌다. 이제 우리의 출판물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압수당해 없어질 것인가?

그 동안 ‘엥겔’ 형제는 고위 미국 관리에게 접근하여 우리의 서적을 군 ‘트럭’에 실어 운반하는 것을 허락하는 허가장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 허가장을 가지고, ‘미크 엥겔’, ‘프레드 패튼’ 및 ‘헥터 오우티스’ 등의 형제들은 ‘라시오’로 갔다. 그들은 중국으로 보내지는 거대한 호송단을 지휘하고 있는 장교를 찾아가서, ‘트럭’에 실을 만한 자리를 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자 그는 대경실색하는 것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소리를 질렀다. “뭐라구요? 급한 군수품들과 의약품들이 여기 노천에서 썩어가고 있고, 곧 장마가 닥치게 될 판국인데도 전혀 여유가 없는데, 당신네 그 하찮은 책자들을 위해 우리 차량에서 이 귀한 자리를 내 줄 수 있을 것 같소?”

‘프레드’는 그를 바라보며 잠시 잠잠히 있다가, 자기 가방에서 ‘랭구운’의 그 고위 관리로부터 받아낸 허가장을 꺼냈다. ‘프레드’는 그것을 그 도로 통제관에게 내 주면서, 만일 그 통제관이 ‘랭구운’에 있는 당국자들을 무시하고 도와 주기를 거절한다면 그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프레드’의 말은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그 도로 통제관은 2‘톤’의 서적을 수송할 수 있도록 마련해 주었을 뿐 아니라 형제들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운전사와 공급품이 가득 실린 소형 차량을 한대 내 주었다. 그리하여 두명의 대담한 ‘파이오니아’들 즉 ‘프레드 패튼’과 ‘헥터 오우티스’는 ‘트럭’을 타고 중경으로 가서 그들이 싣고 온 서적들을 배포하였다. 중경에서 그들은 장개석을 만났으며, 그에게 증거를 하였다.

일본이 ‘버어마’를 침공하자, 거의 모든 증인들은 그 나라를 떠났다. ‘미크 엥겔’ 형제는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났으며, 영국계 인도인 형제들과 영국계 ‘버어마’인 형제들 대부분은 인도로 갔다. ‘쿠우트’ 형제와 그의 두 딸들은 인도로 향해 여행을 떠났는데, 인도에 도착하기 전에 그는 사망하였다.

1941년 8월부터 10월까지 ‘버어마’에서는 단지 18명의 전도인들 만이 보고를 하고 있었으며, 그 때까지 이곳에는 ‘파이오니아’들이 전혀 없었다. 11월경에는 ‘사에릴 게이’ 형제와 ‘마 추 매이’, ‘마 흐매이’ 두 자매 즉 모두 세 사람을 제외한 모든 증인들은 ‘버어마’를 떠났다. 그들은 단지 비공식적인 증거만 했다.

1942년 3월 8일에 ‘버어마’의 수도 ‘랭구운’은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그 이후에 곧 기타 도시들도 함락되었다. 영국군은 계속 후퇴라는 모진 기록을 남겼다. 일본군은 승승장구였다. 5개월 사이에 일본군은 ‘프랑스’보다 넓으며 그 당시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의 인구를 합친 것 만큼이나 되는 인구를 가진 한 나라를 정복하였다. 1942년 5월 말경에는 ‘버어마’ 전체가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 갔다.

1942년부터 1945년 사이의 일본 치하중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사업이 ‘버어마’에서는 사실상 완전히 중단되었다. 출판물이 없었기 때문에 이곳 세 명의 증인들은 동일한 호의 「파수대」를 되풀이 하여 연구하였다. 그들은 4년 이상이나 「1942년의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을 일용할 성귀 토론용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버어마’는 단기간만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다. 공습이 재개되었는데 이번에는 영국군의 공습이었다. 영국 전투기들이 수천 ‘톤’의 폭탄을 투하하여, 수많은 건물들이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1945년에 전쟁이 끝났다. 그리고 영국이 다시 ‘버어마’를 점령했다.

우리의 사업이 재개됨

종전 직후 인도로 피난했었던 형제 자매들이 ‘버어마’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증거 사업은 활기를 얻기 시작했다. 그리고 1946년 4월 20일에 ‘랭구운’에 다시 하나의 회중이 세워졌으며 8명이 야외 봉사를 보고했다. 협회의 인도 지부 사무실은 전쟁이 끝난 얼마 후 ‘버어마’ 내의 왕국 전파 사업을 감독했다.

제1기 ‘갈르앗 학교’ 졸업생인 ‘R. W. 커어크’ 형제가 이곳으로 파견되어 1947년 초에 도착했다. 같은 해에 제3대 협회장인 ‘N. H. 노워’ 형제와 그의 비서인 ‘M. G. 헨첼’ 형제의 첫 번째 방문이 있었다. 그 방문에 맞춰 이 나라에 있는 19명의 증인들을 위해 하나의 대회가 마련되었다.

‘노워’와 ‘헨첼’ 형제는 수상 비행기 편으로 ‘사이앰’에서 왔다. 이 비행기는 1947년 4월 12일에 ‘랭구운’ 강의 건너편에 내렸으며, 그들은 ‘모우터 보우트’로 강건너 부두에 도착했고, 거기서 대기하고 있던 ‘버스’를 타고 ‘랭구운’ 중심가로 들어왔다. 그들은 차를 타고 도심지로 들어 오면서 전쟁이 입힌 숱한 참화를 목격할 수 있었다. 도로변에는 대나무로 임시로 만든 집들이 늘어서 있었고 수천명의 사람들이 곤핍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 방문자들이 도심지에 도착해 보니 건물들은 벽돌로 지어진 아주 현대식 건물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내부는 타 버려 많은 집들이 단지 뼈대만 앙상하게 서 있었다.

‘노워’ 형제는 일요일 오전 10시에 공개 강연을 하기로 마련되었다. 그 당시 ‘랭구운’에 살고 있던 18명의 왕국 전도인들과 한 명의 선교인은 그 강연을 열심히 광고했다. 강연 장소로 선택된 곳은 ‘더 뉴우 엑셀지어’ 극장이었다. 그런데, 강연이 시작되기 약 한시간 전에 그 극장의 지배인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래서 그의 직원들은 그의 죽음을 알리는 게시판을 급히 걸고 그의 사망을 이유로 그 날 극장을 닫으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은 집회를 열 수 있게 해 달라고 남아있는 책임자들을 설득했다. 그래서 극장 입장이 가능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287명이 참석한 것을 보는 것은 정말로 기쁜 일이었다.

‘랭구운’은 무덥고 다습한 도시이며 심지어 오전 10시경이지만 몸을 별로 움직이지 않아도 땀이 흐르는 곳이다. ‘노워’ 형제는 열대 지방에 적합한 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연설을 하는 도중에 곧 땀에 흠뻑 젖었다. 연단에는 환기 장치가 없었다. 그리고 바깥 열을 막기 위해 문들은 꼭 닫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땀에 범벅이 되었으며, 강연을 한다는 것이 매우 신기하게 생각되었다. 그의 등에서는 물이 줄줄 흘러 내려 그의 신발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강연이 끝났을 때 그의 발은 푹 젖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랭구운’에서 그가 물에 젖게 된 한 가지 경우에 불과하였다. 신축한 왕국회관에서 열리는 오후 집회에 가기 전에, 이들 여행자들은 ‘캘커타’행 출발을 확인하기 위해 공항 사무실에 보고하였다. 그날은 ‘딘간’(물의 축제) 즉 불교도들이 서로에게 물을 뿌리는 종교적 축제일의 첫날이었다. ‘노워’, ‘헨첼’, ‘커어크’ 및 ‘사토스’ 형제는 ‘지프’차를 타고 시가지로 나갔다. 이 축제의 첫날 젊은이들은 전부 나와 소화전이 있는 길 양쪽에 열을 지어 서 있었다. 지나가는 보행자와 차량은 모두 물 세례를 받았다. 깡통, ‘바케스’, 항아리, 물총 또는 ‘호우스’를 사용해서 사람들에게 물을 뿌려댔다. 「파수대」의 보고는 다음과 같다.

“우리 네 사람은 얼마 못가서 흠뻑 젖었다. 그러나 우리는 흠뻑 젖을 때마다 웃으면서 우리의 곤경을 유쾌하게 생각하려고 힘썼다. 우리는 ‘이라와디’ 강에 빠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우리가 공항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바로 그런 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였다. 왜냐 하면 우리는 표를 산 다음에 우리가 왔던 그 도시의 같은 길을 지나 왕국회관으로 돌아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왕국회관 앞에서 ‘지프’차에서 내려, 몸에서 물을 좀 짜내었을 때는 이미 얼마의 형제들이 왕국회관에 모여 있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우리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곳 사람들의 습관에 익숙했었다. 그래서 그들은 물이 스며들지 않는 그릇에 갈아 입을 옷을 가지고 왔다. 그들은 옷을 갈아 입었으니 멀쩡하게 보였다. 그러나 오후에 연설할 세 명의 연사 즉 ‘커어크’, ‘노워’와 ‘헨첼’ 형제들은 마치 방금 비를 맞고 들어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형제들이 그러한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연사들은 계속 성경적인 조언과 교훈을 주었다. 집회가 약 절반 쯤 진행되었을 때 어떤 용감한 젊은이들 몇 사람이 그 회관 문으로 달려와서 한 ‘바케스’의 물을 퍼부었던 단 한번의 일 외에는 집회를 방해하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도 젖지는 않았다. 거기에 참석한 37명의 형제들은 그 집회를 매우 즐겼다.”

이 여행 중에, 1947년 9월 1일자로 ‘랭구운’에 협회의 지부 사무실을 설립할 마련이 이루어졌다. 또한 더 많은 선교인들을 ‘버어마’로 파견하는 계획들도 세워졌다.

‘길르앗’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음

1947년 7월 4일, 형제들은 두번째 선교인으로 ‘버어마’에 도착하는 ‘노어만 H. 바아버’를 환영하기 위하여 부두에 모였다.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의 형제가 배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말할 수 없이 즐거워하였다! 예기치 않게 도착한 그 사람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바아버’ 형제는 ‘싱가포르’에서 ‘프랭크 듀워’를 만났는데, 그는 ‘버어마’까지 그와 동행하기로 했다.

그 당시 ‘버어마’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려고 하고 있었다. 수차례의 협상이 있은 후 ‘버어마’는 1948년 1월 4일 오전 4시를 기해 독립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의 사업에 특별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그렇지 않았다. 왜냐 하면 ‘버어마’ 정부는 숭배의 자유를 약속했기 때문이다.

‘버어마’가 독립을 한지 바로 11일째인 1948년 1월 15일 두명의 ‘길르앗’ 졸업생 ‘R. W. 리처어드’와 ‘H. A. 스멧스타드’란 형제가 또 도착했다. 그들이 도착하자, 이민국 관리들이 “‘비자’를 제시하시오” 하고 요구했다. “우리는 ‘비자’가 없읍니다.” 하고 형제들은 대답했다. 형제들은 자기들이 ‘버어마’가 대영제국의 일부일 때인 1947년 11월에 ‘캐나다’를 떠났기 때문에 ‘버어마’가 독립을 하기 이전에 ‘버어마’에 도착할 것으로 예측했고(당시 ‘캐나다’는 영연방의 한 자치령이었다.) 그래서 비자를 요구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 관리들은 막무가내였다. 그들은 “‘비자’도 없이 당신들이 어떻게 ‘버어마’에 입국을 할 수 있단 말이오?” 하고 주장했다. 장시간 숙의 끝에 한 관리가 동정적으로 나왔다. 새로운 선교인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문제를 해결한 후, 그들은 ‘랭구운’의 ‘시그널 파고다’ 39번지에 최근에 세워진 선교인 집으로 갔다.

‘버어마’ 사람들은 대체로 접근하기가 쉽고, 우정적이며 손대접을 잘하는 사람들임을 알고서 선교인들은 기뻐했다. 심지어 낯선 사람이 그들의 집을 찾아와도 차와, 과자를 대접하며 환대받는 느낌을 주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음식에 대해서 말한다면, ‘버어마’ 사람들은 음식 튀기는 냄새를 두려워한다. 특히 집 안에 환자가 있을 경우 그렇다. 그들은 이러한 냄새가 환자나 신생아와 그의 산모를 죽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두려워 그들은 문과 창문을 닫은 다음, “냄새를 싫어하는” 사람을 두꺼운 담요로 덮어 주는데 심지어 무더운 여름 철에도 냄새가 다 빠져나갈 때까지 그렇게 한다. 그러기 때문에 ‘버어마’의 가정 주부가 자기 집에서 뭔가를 튀길 때에는 이웃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경고한다.

선교인들은 이러한 ‘버어마’인들의 견해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하루는 그들이 점심용으로 어떤 음식을 튀기고 있었는데, 위층에 사는 ‘버어마’인 아주머니가 내려와서 화가 나서 이렇게 외쳤다. “이봐요! 뭘 튀기려면, 먼저 우리에게 알리고 나서 거리에 나가 튀겨요. 알아들어요?” 당황한 선교인들은 그 지방 형제들이 그 문제를 설명해 줄 때까지 이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바아버’ 형제가 길에서 생선을 튀기고 있는데, 놀랍게도 여러 명의 어린이들이 손에 돈을 들고 그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생선을 사기 위해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이곳 ‘버어마’에서는 길에서 먹을 것을 튀기면서 파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불안기

‘버어마’가 독립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여러 반대 집단들과 부족들이 새로 설립된 정부를 대항하여 무력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지하로 들어가 정부와 국민에게 무차별 폭행을 자행했다. 그 반정부 집단들은 교량과 철로를 폭파하며 많은 피해를 입혔다. 대부분의 반란군들은 ‘카렌’인들과 ‘카친’인들 및 미국 침례교 개종자들이었다. 때때로 반란군들이 객차를 파괴하고, 도시를 약탈하고 송수관을 폭파했다는 보도를 들었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증인들은 ‘랭구운’에서 개최되는 지역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마이묘’를 출발해서 여행을 시작했다. 그 대회가 끝난 후인 1949년 1월 19일, ‘프랭크 듀워’ 형제는 ‘마이묘’에 있는 작은 집단을 돕기 위해 그리로 갔다.

1949년 2월 4일 ‘버어마’ 경찰은 ‘마이묘’에서 ‘카렌’인이라는 혐의가 있는 사람은 모두 체포하여, ‘맨달레이’ 형무소로 보냈으며 그 후 ‘시웨보’ 형무소로 보냈다. 2월 6일 ‘버어마’의 정보국원들은 경찰을 시켜 ‘카렌’인 증인 집에 있는 ‘듀워’ 형제를 체포하였다. 그들은 그가 ‘카렌’인 반란군들을 위해 첩보 활동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당국자들은 그를 석방하였다.

3월이 되자 ‘카렌’ 반란군들은 ‘마이묘’와 ‘맨달레이’를 공격하였다. 반란군들과 ‘버어마’ 정부군 사이에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사람들은 머리 위로 총탄이 나르고 있는 속에서 며칠 밤을 참호에서 자지 않으면 안되었다. 3월 7일 그 전투가 끝났을 때 ‘카렌’ 반란군들이 두 도시를 모두 장악하였다. 반란군들은 다른 여러 도시들도 점령하였고 심지어 수도 ‘랭구운’에서 16‘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인세인’까지 쳐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의 강력한 전진은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다. 재집결되어 현대식 무기로 잘 무장한 정부군은 반란군을 밀림으로 몰아냈다. 이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우리의 증거 사업은 ‘랭구운’, ‘인세인’, ‘마이묘’ 및 ‘팅가나인’에만 국한되었다. 형제들 사이의 통신은 두절되었다.

“이것이 진리이다”

1948년에 한 왕국 전도인이 ‘버어마’ 석유 회사에 취직이 되어 ‘차우크’에 있는 유전으로 가게 되었다. 그와 그의 가족은 정착하자마자, 일요일과 공휴일에 증거를 시작하였다. 호별 방문으로 “좋은 소식”을 전하던 중 그들은 양같은 ‘타밀리아’인을 하나 만났다. ‘M. C. 네이든’이라고 하는 이 사람은 증인을 만나게 된 바로 그 주간에 ‘가톨릭’과의 모든 관계를 끊고 지체없이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

그 당시, ‘네이든’ 형제의 조카가 그와 함께 방학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는 자기 삼촌이 가족들에게 증거하는 왕국 소식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젊은이는 ‘가톨릭’ 사제가 되겠다고 생각해 왔지만, 얼마 후 “삼촌 말씀이 참됩니다” 하고 시인하게 되었다. 삼촌이 집에 없을 때면, 그는 협회 출판물들을 꺼내서 읽곤 하였다. 그 소식은 매우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것이 진리이다” 하고 말하게 되었다. 이어서, ‘모리스 A. 라지’라는 이 젊은이는 1949년 12월 24일에 ‘이라와디’ 강에서 침례를 받았다. 얼마 후 그는 ‘파이오니아’를 시작하였으며, 1963년에는 순회 감독자가 되었다. 그 다음 1966년에 ‘라지’ 형제는 지역 감독자 겸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도움이 되었던 또 다른 방문

‘카렌’인들의 반란이 있은 후, ‘팅가나인’ 마을에는 무자비한 강도단이 휩쓸고 지나갔다. 우리 형제들은 모든 재산과 성서 서적 및 집들을 잃었을 뿐 아니라, 형제 하나가 살해되었다.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흩어져 버려 사실상 그들 사이의 모든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다. 후에 밝혀졌지만, 여러 가지 고난으로 인하여 형제들 가운데 네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고 말았다.

정부가 이 나라 주요 지역들에 질서를 회복시킨 후인 1951년에 우리는 증거 활동을 재조직할 수 있었고, 좋은 발전도 있었다. 협회장 ‘N. H. 노워’ 형제와 그의 비서 ‘M. G. 헨첼’ 형제가 1947년 ‘버어마’를 방문하였을 때는 이 나라에 겨우 18명의 전도인과 한명의 ‘길르앗’ 졸업생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1951년 4월 10일로 예정된 두번째 방문시에 ‘버어마’는 94명이라는 전도인 신기록을 달성하였다.

‘노워’ 형제와 ‘헨첼’ 형제의 세계 일주 여행에 맞추어 대회가 마련되었다. 공항에서 성대한 환영을 받은 다음, 우리를 방문한 형제들은 왕국회관에서 이미 진행 중인 대회로 달려 갔다. 만장의 박수가 그들을 환영하였다. ‘헨첼’ 형제가 먼저 연설을 하고, 뒤이어 ‘노워’ 형제가 연설을 하였다. 그들의 연설은 ‘버어마’어로 통역되었다.

수요일에 ‘노워’ 형제는 ‘랭구운’ 시청에 모인 256명의 청중에게 “만방에 자유를 선포하라”는 공개 강연을 하였다. 그리고 나서 ‘헨첼’ 형제가 연설을 하는 동안, ‘노워’ 형제는 ‘랭구운’에 있는 국영 방송국으로 가서, 15분간 방송 연설을 했다. 그 연설은 대회장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대회는 그 다음날까지 계속되었고 폐회시에는 참석자 수가 90명이었다.

이번 방문 중에 ‘노워’ 형제는 새로 임명된 지부 감독자 ‘로버어트 W. 리처어즈’ 형제로 하여금 반란 때문에 어려움이 많은 북쪽 지방에 있는 형제들을 방문하도록 마련하였다. 그의 방문은 매우 격려적이었으며 효과가 있었다.

‘로버어트 W. 커어크’(‘버어마’의 초대 지부 감독자) 형제가 ‘파이오니아’인 ‘클레어 드소우자’ 자매와 결혼을 하기 위해 그의 임명을 떠났을 때, 이미 지부 감독직에는 변화가 있었었다. 1954년에 ‘커어크’ 자매가 ‘길르앗’ 제22기 학급에 초대되었고, 그 해에 ‘커어크’ 형제가 지부 감독자로 재임명되었다. 1955년부터 1959년 사이에, ‘버어마’ 지부는 6명의 지방 ‘파이오니아’를 더 ‘길르앗’에 보냈다. ‘D. J. 오니일’ 형제와 ‘노마 바아버’ 자매가 1956년에 졸업했고, ‘루사이’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를 하던 ‘조이스 랄트’가 1958년에 졸업했으며 ‘도린다 스멧타드’, ‘조지안나 레드몬드’ 및 ‘도리스 바 아이’(현재 ‘모리스 라지’ 부인)가 1959년에 졸업했다.

1956년에 ‘노워’ 형제가 동양의 여러 나라를 방문할 때, ‘버어마’가 그의 여정에 들어 있었다. 이번에는 “모든 인류를 창조주 아래 하나로 만듬”이란 그의 공개 강연을 듣기 위해 268명이 참석했다. 공개 강연이 끝난 다음, ‘노워’ 형제와 ‘커어크’ 형제는 자동차로 ‘버어마 방송국’으로 급히 갔다. 거기서 ‘노워’ 형제는 회견을 했다. 의미심장하게도, 바로 이 대회에서 그는 신간 ‘버어마’어 「파수대」를 발표하였다.

‘노워’ 형제는 선교인들에게 연설하면서 특히 ‘버어마’어를 배워야 할 중요성을 강조했다. 선교인들은 자신들이 아직도 ‘버어마’어를 유창하게 할 수 없다는 점을 시인하였다. 하지만 ‘노워’ 형제의 격려에 감명을 받은 그들은 ‘버어마’어를 열심히 배우기 시작하였다.

자연히, 선교인들이 배우고자 힘써야 했던 우선적인 말은 그들이 호별 방문 증거를 할 때 문전에서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간단한 성서 제공과 맨 끝에 가서 “타-오우크 탐마” 즉 “소책자 하나는 4‘안나’입니다”라고 하는 말을 배웠다. 어느 선교인이 야외에서 이 말을 사용했을 때, 집주인은 어리둥절해가지고, 자기 옆에 서 있는 여자에게 “저 사람이 뭐라고 하는 건가요?” 하고 물었다. 옆에 있던 여자는 “팔 계란이 있다는군요” 하고 즉시 대답한다. “얼마래요?” 하고 첫 번째 여자가 물었다. 앞의 여자는 “계란 하나에 25‘안나’라는데요” 하고 대답하였다. 그 선교인은 “타-오우크”라고 말해야 할 것을 “타-우우크”라고 해서 마치 계란을 팔고 있는 것처럼 말을 했던 것이다.

외국인들이 ‘버어마’어를 정확하게 발음한다는 것은 정말로 매우 어렵다. 만일 각 음절을 정확하게 발음하지 못한다면, 그 의미가 원래 의도했던 것과 정 반대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발음을 정확하게 하지 않으면, “신세계”(카바-아디트)라는 말이 “죽은 자의 세계”(카바-아데이트)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선교인들이 ‘버어마’어로 증거를 하고 나면, 집주인들로부터 “‘버어마’어로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영어를 알아 듣지 못합니다” 하는 말을 듣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또 다른 방문자로부터 격려를 받음

이제 ‘왙취 타워 협회’의 또 다른 대표자의 방문에 주의를 기울여 보자. 1956년 12월 30일 일요일 오후 5시, 그 당시 협회의 부협회장이었던 ‘F. W. 프랜즈’ 형제를 태운 비행기가 ‘밍갈라돈’ 공항에 착륙하였다. ‘프랜즈’ 형제의 ‘하모니카’ 반주에 맞추어 우리가 왕국 노래를 부르며 ‘버스’를 타고 ‘랭구운’ 시로 향하던 일은 정말로 즐거운 일이었다! 우리가 왕국회관에 도착하였을 때 「파수대」 연구가 막 끝났다. 즉시 ‘프랜즈’ 형제가 ‘프로’를 맡아 우리에게 한 시간 이상 여행담을 들려 주었다. 3일 후에 5일간의 대회가 시작될 것이었다. 그러나 왕국회관에 모인 55명의 참석자들은 대회가 이미 시작된 것처럼 느꼈다.

‘버어마’에서의 8일간의 체류 기간중에, ‘프랜즈’ 형제는 5명의 ‘길르앗’ 졸업생들과 선교인 집에서 머무는 즐거움을 가졌다. 그는 불교의 나라인 ‘버어마’에서도 신년 축제가 열리고 있음을 알고서 놀랐다. 그렇다. 12월 31일 월요일 한 밤중에, 야간 파수군의 12번째이자 마지막 징소리에 연이어 나는 딱총 소리, ‘사이렌’ 소리, ‘랭구운’ 강에서 울리는 뱃고동 소리가 일제히 울려 퍼졌다.

대회 참석자들은 의외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왔다. 온 가족들이 기차를 타고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서, 그 당시에 그 나라의 불안정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언제 지연을 당할 것인지도 모르면서 수백 ‘킬로미터’를 여행했다. 하지만, 그들은 무사하게 도착했으며, 대회를 위해 제시간에 참석할 수 있어 기뻐했다. 한 대회 참석자는 대회 때 해산을 할 예정이어서 일찌감치 ‘랭구운’에 와서 아기를 낳았다. 며칠 후에 그는 아기를 품에 안고 대회에 참석하여 연설을 들었다.

토요일에는 11명(그 당시로서는 신기록임)이 ‘로오열’ 호수에서 물 침례를 받음으로써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헌신을 상징했다. 그 곳에는 ‘쉐 다곤 파고다’ 탑과 햇빛을 반사하고 있는 그 탑의 황금 빛 담이 물에 비치고 있었다. 침례 지망자들은 네 인종 집단에 속한 사람들 즉 6명의 ‘타밀리아’인, 3명의 ‘카렌’인, 한 명의 ‘앵글로’-인도인과 한 명의 ‘구르크하’인들이었다.

거의 모든 연설이 영어에서 ‘버어마’어로 통역되었다. 그리고 침례 연설의 일부는 ‘타밀’어로 통역되었다. 토요일에 열린 한 ‘타밀’어 집회에서는 그 대회의 주요 연설들이 요약되었다.

목요일까지도 널리 광고된 “우리 시대에 새로운 세계 평화—그 이유는?”이란 공개 강연을 ‘프랜즈’ 형제가 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능하신 조정으로 그 공개적인 행사는 광고된 대로 진행할 수 있게 길이 열렸다. 1957년 1월 6일 일요일 오후 4시에 그 공개 집회는 237명이 참석한 가운데 철도청 강당에서 개최되었다. 연설이 끝난 후, “신세계 사회의 행복”이란 영화가 ‘버어마’에서 처음으로 상영되었다. 강당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월요일 밤 10시 30분에 ‘프랜즈’ 형제는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비행기 편으로 ‘방콕’으로 떠났다.

‘F. W. 프랜즈’ 형제의 방문은 우리에게 매우 고무적이었다. 그 대회가 끝난 후 형제들은 영적으로 잘 먹고 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 대회가 끝난 직후에 얼마의 ‘파이오니아’들이 왕국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 새로운 지역으로 파견되었다. 그 때쯤 우리의 사업은 ‘인세인’, ‘바세인’, ‘마이묘’, ‘타웅기이’와 다른 여러 지역에서 잘 진행되고 있었다.

“황금의 도시”에서의 발전

선교인 ‘로버트 W. 리처어즈’와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된 그의 아내가 ‘버어마’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인 인구 180,000의 ‘맨달레이’에서 일하도록 임명되었다. 그 도시는 기원 1857년에 ‘민돈’ 왕에 의하여 창설되었다. ‘버어마’인들은 흔히 그 도시를 “황금의 도시”란 뜻인 ‘쉐만’(Shweman) 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맨달레이’ 언덕 부근에 ‘민돈’ 왕이 높고 두꺼운 담을 쌓아 올리고 그 안에 금을 입힌 장엄한 목조 궁전을 세웠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제2차 세계 대전중에 그 궁전은 파괴되었다. 그러나 그 궁전을 둘러싸고 있는 사각의 벽돌담은 아직도 서 있다.

‘버어마’의 방문객에게 흥미를 끄는 또 한 장소는 약 300‘미터’ 높이의 탑이 서 있는 ‘맨달레이’ 언덕이다. 군데군데 거대한 불상들이 서 있고 지붕이 씌워져 있는 세 개의 계단이 그 언덕 꼭대기까지 놓여져 있다. 거기에 올라가 보면 ‘맨달레이’와 그 주위의 장엄한 경관을 구경할 수 있다. 그 언덕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은 이곳에 여러 개의 탑을 세운 ‘민돈’ 왕에 관해 말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이들 탑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쿠도다우’ 탑인데, 이것은 그 언덕 바로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거기서 정말로 놀랄 만한 종교적 걸작품을 볼 수 있다. 그 탑 단지 안에는 조그마한 하얀 탑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이 조그마한 탑은 각각 ‘팔리’어로 불경을 새겨 넣은 수직의 대리석 판을 덮고 있다. 이 대리석 판들은 높이가 약 1.5‘미터’, 폭이 약 1.2‘미터’이다. 대리석 판 하나를 새기는 데도 상당한 각고의 수고가 요했을 것인데, 거기에는 수백개가 있다. 이 대리석판 수는 전부 729개이다. 기원 1857년에 ‘민돈’ 왕의 명령으로 이처럼 놀라운 일이 수행되었다. 그는 2,400명의 승려들을 궁전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5개월간 불경들을 토론하고 검토하여 729개의 대리석판에 그것들을 새기게 하였다.

1957년에 ‘랭구운’ 시의 ‘맨달레이’에서 첫 번째 순회 대회가 계획되었다. 그 대회에서는 한 사람만이 침례를 받았다. 이 사람은 참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첫 번째 ‘카친’인이었다. 그 당시에는 이 사람을 통해 더 많은 ‘카친’인들이 진리를 알게 되고, 6개의 회중이 설립될 것이며, 1978년에는 여러 개의 격지 집단들이 형성되리라고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 형제는 후에 이들 ‘카친’인 회중들 중 한 회중의 주임 감독자가 되었다.

부언하자면, ‘맨달레이’는 기후가 극도로 심한 차이가 있다. 겨울에는 매우 추우나, 여름에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무덥고 건조하다. 사실상 이 나라의 여러 다른 지역에서 이 대회에 온 형제들 중 얼마는 이 열기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들의 침대보를 물에 적시었고, 어떤 이들은 심지어 젖은 ‘매트’ 위에서 잠을 잤다. 낮에는 형제들의 ‘셔어츠’가 땀으로 흠뻑 젖곤 했다. 그러나 ‘캐나다’인인 ‘로버트 W. 리처어즈’ 형제는 그의 아내와 기타 전도인들과 함께 아무 불평없이 이 도시에서 증거했다.

다른 곳에서도 꾸준히

한편 ‘프랭크 듀워’와 그의 아내 ‘릴리’는 ‘바세인’에서 열심히 일했고, 거기에 회중을 하나 세웠다. ‘바세인’은 ‘카렌’ 침례교인들이 많이 사는 남부 해안 도시이다. 거기에서도 ‘맨달레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침례교 교직자들은 그들의 신도들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왜 당신들은 불교인들에게 전도를 하지 않고 우리 양들을 데리고 가는가?” 하고 항의한다. ‘바세인’에서 ‘프랭크 듀워’ 형제는 “저 백인 양 도둑”이라고 불리워졌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이라고 불리워지든간에, ‘버어마’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사람들이 거짓 종교 세계 제국인 큰 ‘바벨론’에서 나오도록 돕는 일을 계속해 왔다. 그러나 ‘버어마’의 시골 지역에서는 집집으로 또는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다니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여름철에는 형제들이 무덥고 먼지 많은 길 위를 걷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피곤한 몸으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집으로 돌아 왔다. 계절풍이 부는 장마 철에는 물이 흥건한 들판을 지나서 진흙 투성이가 되어 돌아 왔다.

마을들의 대부분의 집들은 대나무로 지어져 있다. 그리고 이들 집들의 벽은 대나무 ‘매트’를 둘러쳤고 지붕은 풀로 덮었다. 이들 집들은 대개 지상에서 약 1 내지 2‘미터’ 높게 지어져 있다. 마루는 대나무 “들보” 위에 단단히 엮어 짠 대나무 ‘매트’로 되어 있다. 계단은 대개 대나무나 나무 토막으로 만들어져 있다. 계단에는 물 항아리가 깡통과 함께 놓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붕에서 떨어지는 낙수를 거기에 받는다. 항아리는 사람들이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발을 씻도록 거기 놔둔다. 그러므로 전도인들은 호별 방문 증거를 할 때 집안으로 들어 가기 전에 발을 씻는다. 그 집을 떠나 다음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다시 먼지 또는 진흙(계절에 따라 다름)에 빠져들게 된다. 전도인들은 다음 집에 들어 가기 전에 발을 씻는데, 이렇게 그 날 증거를 마칠 때까지 발을 씻는 일은 계속된다.

물론 ‘랭구운’에 사는 증인은 ‘버스’를 타고 봉사 구역에 간다. 그는 구역 내에 있는 4층짜리 ‘아파아트’ 건물의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한다. 이러한 곳에는 6 내지 8개의 ‘아파아트’가 있다. 초인종을 누르면 누군가가 문에 있는 조그마한 구멍으로 내다 본다. 우리는 집주인이 얼른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왜냐 하면 남의 이름을 사칭하는 자들이 친구인 체 찾아와서는 집안으로 들어와 총을 겨누고 강도질을 해 가는 일이 매우 빈번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체 ‘아파아트’ 동을 끝마치고서도 한집도 들어가지 못하거나 왕국 소식을 전할 기회를 얻지 못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당신 자신이 여러 언어로 된 서적들과 소책자들(‘랭구운’은 국제 도시이다) 및 두 가지 성서(하나는 영어 성서, 또 하나는 ‘버어마’어 성서)를 가득 넣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당신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땀 투성이가 되어, 녹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들은 다른 곳에서와 같이 ‘버어마’에서도 행복하다. 왜냐 하면 “양”들이 위대하신 목자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1958년 ‘로버어트 W. 리처어즈’ 형제와 그의 아내는 ‘카친’ 주로 임명되었다. 그들의 활동 근거지는 북부 ‘버어마’의 ‘바모’ 시였다. ‘리처어즈’ 형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준다.

“‘바모’에 사는 사람들은 ‘카친’인, ‘카렌’인, 중국인 및 소수의 ‘샨’인과 ‘버어마’인 등이다. 여기 저기 산재해 있는 마을들에는 대부분 ‘샨’인들과 ‘카친’인들이 살고 있다. ‘카친’인들의 약 절반은 ‘가톨릭’ 신자들과 불교 신자들이다. 나머지는 물활론자들이다. 아내와 나는 모두 자전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첫 주의 대부분은 인근 마을들을 방문하는 데 보냈다. 일요일에는 시내에서 봉사하였다. 우리는 어디에서나 친절한 대접을 받았다. 마을 사람들 중 많은 수가 닭을 기르고 있었으며, 우리가 그들의 집을 떠나기 전에 그들은 달걀을 우리에게 선물로 가져왔다.

“우리는 관심을 나타낸 사람들을 다음 주에 다시 방문하도록 마련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응대를 받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친절하긴 했지만, 우리에게 단호히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신들이 교직자 연합회가 인가한 증명서, 즉 당신들이 이 지방에서 전도하는 것을 허락하는 허가서를 가져오지 않는 한, 우리는 당신들과 종교 문제를 논할 수 없읍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이미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이 그들의 양떼에게 ‘여호와의 증인’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서둘러 경고를 했던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였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처지에 계셨다면 어떻게 하셨을 것인가? ·⁠·⁠· 우리는 계속 전파하였다.

“적어도 ‘카친’ 침례교인들 가운데 널리 배포되어 있던 ‘카친’어 성서 ‘히브리’어 성경 안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수백번 나와 있었다. 이 영화로운 이름에 대한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의 태도는 어떠하였는가? 얼마 안있어 그들의 태도를 알아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나는 영어를 잘하는 한 퇴역 육군 대위와 성서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그의 가족 중 일부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하루는 ‘카친’ 침례교회 목사가 그들과 집을 방문해 왔는데, 누군가가 그에게 ‘여호와의 증인’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나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인분 냄새를 맡는 기분이 된다’고 그는 말했다.”

‘카친’ 주의 수도까지의 여행에 관해서 ‘리처어즈’ 형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아내와 나는 험한 산길을 통해 ‘바모’ 북서쪽 185‘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미치나’까지의 마지막이라고 생각되는 방문을 하기로 마련하였다. 그 여행은 짐을 가득 실은 ‘지프’를 타고 6시간이나 가야 하는 지루한 여행이었다.

“바로 그 특별한 날 아침, 만사가 틀려 가는 것같이 보였다. 우리는 그 도시에서 나가는 첫 번째 여객 ‘지프’차를 타지 못하고, 겨우 세번째 차를 탈 수 있었으며,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게 된 것을 속상해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뒷차를 타게 된 것이 납치를 당하는 일을 모면케 해 주리라고는 우리가 전혀 꿈도 꾸지 못한 일이었다. 여행자들은 몰랐지만, 반군들이 ‘바모’에서 1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한 들판에 매복해 있었다. 그들은 우리보다 앞서 떠난 두대의 차를 습격하였다. 다음은 우리가 탄 차가 당할 차례였다. 그러나 정말로 우연하게도 강력한 호위병들과 함께 한 육군 장교가 반대편 방향에서 오는 것을 보자 반군들은 갑자기 당황하게 되었다. 반군들은 선두 ‘트럭’에 사격을 가하였으며, 몇 명의 군인들이 사상을 당하였다. 그러나 뒤따라 오던 군대들이 반군들을 격퇴시켰다. 부상병들을 싣고 오던 한 대의 ‘지프’차가 우리를 멈춰 세우고 길을 치울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였다. 우리는 그렇게 하였다. 결국 늦게 나마 우리는 무사히 ‘미치나’에 도착하였다. 이렇게 구원을 해 주신 데 대하여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친’ 구릉지와 그 인근 지역에서 많은 열매를 맺음

1959년까지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사업은 ‘카렌’인들, ‘카친’인들 및 ‘몬’인들 가운데서 집중적으로 수행되었다. 그러나 1960년 11월부터 우리는 인도 국경 가까이에 있는 서부 미개척지인 ‘친’ 구릉지에서 증거하기 시작하였다. 이 지역은 정말로 비옥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20개의 회중이 설립되어 있다. 이 지역에 파견되었던 특별 ‘파이오니아’ 중 한 사람인 ‘모리스 타지’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들려 준다.

“‘타한’은 ‘친’ 구릉지의 기슭의 메마른 평야에 자리잡고 있다. ·⁠·⁠· 그 당시 ‘타한’의 인구는 약 5,000명이었고, 정말로 급속히 팽창하고 있는 마을이었으며, 인도에서 들어온 ‘루사이’인들과 구릉지에서 온 소수의 ‘친’인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었다. ‘루사이’인들은 그리스도교국의 여러 종파에 속하여 있었으며, ‘친’인들은 ‘가톨릭’과 침례교에 속해 있었다. 나머지는 물활론자들이었다.

“‘루사이’인들과 ‘친’인들은 성서를 많이 읽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종교에 관해서 논하기를 좋아한다. 우리가 ‘타한’에 도착한 날 밤, 성서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 약 40명이 모였다. 그들이 우리의 도착을 어떻게 알았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 자기의 ‘루사이’어 성서를 가지고 거기 모였다. 그들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여러 가지 질문을 했으며, 그들이 ‘버어마’어나 영어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통역을 사용해야 하였다. 그들은 앉아서 밤 11시까지 또는 그보다 더 늦게까지 여러가지 점들을 우리에게 질문하였다. 이러한 일이 여러 날 계속되었다. ·⁠·⁠·

“얼마 후에 밤 집회 참석자 수는 감소해서 단지 몇명의 독실한 사람들만 남게 되었다. 나는 즉시 그 모임들을 정규 집회 즉 다섯 가지 집회로 만들었다. 그 집회들은 통역의 도움을 받아가며 진행하였다.

“한 달 내에 5명이 야외 봉사에 나갔다. 협회는 ‘타한’에서 나와 함께 일하도록 다른 한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를 보내 주었다. ·⁠·⁠· 우리는 구역으로 걸어 가면서 서로 ‘루사이’말을 연습하곤 했다. 동시에 우리는 문에서 우리의 제공을 통역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곤 했다. 하루는 소를 치는 한 젊은 목동을 만나게 되어, 그가 ‘버어마’어를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의 통역인이 되어 주겠는지 물어 보았다. 그는 당장 그렇게 해 주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몇 집을 하고 나서는 그는 자기 혼자서 증거를 시작했다. (2년 후 내가 순회 감독자로 ‘타한’ 회중을 방문했을 때, 이전에 나의 특별 ‘파이오니아’ 짝이었던 주임 감독자인 ‘제임스 자비어’ 형제가 낯익어 보이는 젊고 활기있는 한 젊은이에게 내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 젊은이가 바로 우리의 통역인이었던 그 목동이었다.)

“7개월 후, 두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 자매가 ‘타한’으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나는 ‘랭구운’으로 다시 가게 되었다. 1년 내에 그 ‘파이오니아’들은 ‘루사이’ 말을 유창하게 하게 되었다. ·⁠·⁠· 사업은 급속히 발전하여 하나의 회중이 설립되었고, 왕국회관이 건축되었다. 그것은 ‘버어마’의 증인들이 건축한 최초의 왕국회관이었다. 이 회중에서 13명의 ‘루사이’인 특별 ‘파이오니아’가 배출되었다.”

1960년에 ‘버어마’는 ‘친’ 주에서의 성장의 결과로 왕국 전도인 201명의 신기록에 도달했다. 그 해에 38명이 침례를 받았다. 1962년의 전도인 최고 기록은 216명에 달했다.

그 동일한 해에, 형제들이 ‘모울메인’에서 한 순회 대회에 참석하고 있던 중, 1962년 3월 2일 ‘구테타’가 일어났다는 ‘라디오’ 방송이 있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인 중립을 유지했다. 그러나 정부가 바뀌게 된 것이 우리의 사업에 영향을 주지나 않을까 궁금했다. 이 새로운 정부가 더 많은 선교인들의 입국을 허락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길르앗’ 학교에 참석하도록 허락할 것인가? 1961년에 구 정부는 우리의 ‘파이오니아’ 2명이 ‘길르앗’에 가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여권을 얻고자 하는 2번째 시도 역시 허사였다. 그러나 이제는 어떠할 것인가?

신 군사 정부는 숭배의 자유를 보장했다. 그들의 정책은 종교가 정치에 간섭하지 않는 한, 그들도 종교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요구대로 우리는 우리의 사업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려 주었다.

‘여호와의 증인’의 “영원한 기쁜 소식”

그 당시 왕국 전도인이 200명이 조금 넘는 한 나라인 ‘버어마’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세계 일주 국제 대회들 중 한 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은 정말로 감동적인 일이었다! 우리는 1963년 8월에 ‘랭구운’에서 개최될 이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를 학수고대했다. 집회 개최와 확성기 사용을 통제하는 엄격한 규제로 인해서 경찰의 특별한 허가를 받아야 했다. 이러한 허가를 오래 전부터 요구했지만, 필요한 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당국과 접촉하는 데 온갖 사람들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러던 중 지부 감독자가 우연히 대회 ‘프로그램’을 인쇄하고 있던 한 우정적인 불교인과 대화하는 가운데 그 문제를 언급하게 되었다. 그는 도와 주겠다고 하며 필요한 접촉을 한 끝에 필요한 허가서를 늦지 않게 우리 손에 갖다 주었다.

대회는 ‘랭구운’ 시청에서 개최되었다. 간이 식당을 준비하다가 우리는 ‘버어마’에서의 특유한 한 문제를 직면했다. 그것은 보편적으로 “튀기는 냄새”라고 하는 문제였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버어마’ 사람들은 음식 튀기는 냄새가 건강에, 특히 아픈 사람들의 건강에 해롭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다. 많은 사무실들이 시청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형제들은 요리실로 준비된 방 안에서 요리할 수 있는 허락은 받았지만, 그에 앞서 담당 직원들은 어떠한 튀기는 냄새도 내지 말라고 요구하였다. 그래서 오전 8시 이후에는 “튀기는 냄새” 비슷한 것도 내는 것을 피하기 위해 오전 4시 이전에 일부 요리를 해야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반대가 일어나서 우리의 간이 식당의 문을 닫아야 할 것이었다. 시청의 인근에 있는 사람들과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우리 형제들에게 유익하다. 부언하자면, 한 시청 직원은 우리가 그 영내에서 요리를 하도록 허락받은 첫 번째의 집단이었다고 말하였다.

그 대회는 잊을 수 없었다. 우리는 한번에 그렇게 많은 외국인 형제들과 자매들을 본 적이 없었다. 우리의 방문객들 중에는 ‘N. H. 노워’ ‘F. W. 프랜즈’와 ‘그랜트 수터’ 형제도 있었다.

대회는 8월 8일에 시작되었는데, 참석자는 310명이었다. 그 날 저녁 한 감동적인 연설의 결론에서, ‘수터’ 형제는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버어마’판 「낙원을 잃은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란 책을 발표했다.

토요일 오후 6시에, ‘노워’ 형제는 “하나님께서 온 땅의 왕이 되실 때”란 제목의 공개 강연을 했다. 모든 형제들에게 즐거움이 된 일은 그때까지 최고 참석자 수가 603명에 도달한 일이다. 이들 참석자들 중의 약 100명은 외국 형제들이었으며, 약 200명은 지방 전도인들이었고, 일반인들이 약 300명 참석했다. 그것은 정말로 훌륭한 일이었다!

그 날 저녁, ‘버어마’에서 봉사하고 있던 10명의 선교인 집단이 ‘노워’ 형제와 ‘프렌즈’ 형제와 함께 식사를 즐겼다. 흥미있는 경험담들을 서로 들려 준 후 그 집단은 ‘노워’ 형제로부터 “계속 충실하게 일하며 형제들을 세워 주라”라는 교훈을 주의 깊게 들었다. 그는 지방 조직이 맹렬한 박해하에서도 견뎌 나아갈 수 있는지의 여부는 주로 그러한 시기에 그 조직이 얼마나 장성해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했다.

대회 마지막 날에 행해진 괄목할 만한 강연은 ‘F. W. 프랜즈’ 형제의 “세상—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밭”이었다. 잠간 휴회 후, 그는 2시간 길이의 연설과 마지막 기도로써 그 잊을 수 없는 대회를 끝마쳤다.

외국 선교인들의 추방

우리는 1965년에 270명의 왕국 전파자 최고 기록에 달하였으며, 우리의 사업은 꾸준히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6년 5월에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렸다. 정부는 1966년 6월 30일까지 우리의 모든 선교인들이 이 나라에서 떠나야 한다고 지부 사무실에 통고해 왔다. 물론 우리의 선교인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국에 속한 선교인들도 6월 30일까지 떠나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이러한 조처를 취하게 된 경위는 그리스도교국의 선교인들이 그 나라의 정치에 간섭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음이 밝혀졌다. ‘커어크’ 형제는 별도리 없이 영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영국에 있는 병든 그의 아내와 함께 있기로 하였다. 그리고 ‘바아버’와 ‘리처어즈’ 형제는 아내들과 함께 인도로 떠났다. ‘프랭크 듀워’와 그의 가족은 ‘타일랜드’로 떠났다.

이제 ‘버어마’에서의 우리의 사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모든 외국 형제들은 떠나 버렸다. 이 나라 증인들이 사업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형제들은 충격을 받았지만 실망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역대 상 28:20) 곧 협회는 ‘모리스 라지’ 형제를 지부 감독자로 임명했다. 그리고 ‘던스탄 오닐’ 형제가 순회 사업을 맡게 되었다. 그렇다. ‘버어마’의 하나님의 백성은 정상대로 활동했다. 사실상 우리의 사업은 계속 수행되어 나아갔으며, 이 사실은 여호와의 손이 짧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이사야 59:1.

사업의 확장

1966년 말경, 지부 사무실은 ‘버어마’의 북부에 있는 ‘카친’ 주의 수도인 ‘미치나’에서 증거 사업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카친’인들은 일부 그리스도교국의 교파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그곳의 종교들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암흑으로 인도하였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반란군에 가담하였고, 다리를 폭파하고, 열차를 파괴하는 등 ‘정글’ 지역에서 파괴를 일삼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의 ‘카친’인들 특히 나이 많은 사람들은 다른 데서 지침을 찾고 있었다. 그 시기는 우리가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의 소식을 선포해야 할 적절한 때였다.

‘미치나’로 간 ‘카친’의 특별 ‘파이오니아’ ‘라방 감’은 매우 열심히 일했다. 처음 몇달 동안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호별 방문을 했다. 교직자들이 그 사실을 알기도 전에, 그 도시에는 우리 잡지들로 홍수를 이루고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증인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자 공격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일요일마다 모든 교회에서는 ‘여호와의 증인’들을 공격하는 설교가 행해졌다. 사람들은 그 ‘파이오니아’와 이야기하지 말고, 그로부터 서적을 받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자들은 불어났다. 사실은 한 사람의 ‘파이오니아’가 돌보기에는 너무 벅찼다. 그래서 또 한명의 ‘파이오니아’를 보내 주어 그를 돕게 했다. 그들이 증가를 모두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더 많은 ‘파이오니아’들이 파견되었다. 6개월 동안에 하나의 회중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1968년에 ‘미치나’ 회중은 왕국회관을 건립하였다.

‘미치나’ 회중의 많은 전도인들이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어 ‘몬힌’, ‘바모’, ‘카다’ 및 ‘푸타오’로 파견되었다. ‘라시오’로 파견된 ‘파이오니아’들도 1년 내에 그곳에 회중을 하나 설립할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곳의 증인들 역시 대나무 ‘매트’와 풀로 엮어 만든 지붕을 씌운 왕국회관을 건립했다. 현재 ‘카친’ 주에서 우리의 사업은 9개 지방에서 수행되고 있다. 내륙 지방의 ‘카친’인들 사이에는 관심이 매우 컸지만, 우리는 반란군 때문에 그곳에 ‘파이오니아’들을 파견할 수 없었다.

1966년 12월, 지부 감독자는 몇 군데의 새로운 지역을 포함해서 모든 회중과 격지 집단들을 방문하는 광범위한 여행을 했다. 많은 새로운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임명되어 미개척지로 파견되었다. 그 결과, 우리의 사업은 계속 확장되었다.

열심히 하는 지구 감독자들의 도움

여기서 지구 감독자들과 그들이 지부를 방문할 때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가를 소개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한 때 ‘버어마’ 정부는 여행객들이 이 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그래서 지구 감독자 중 한 사람인 ‘로널드 재카’ 형제는 단지 24시간 이곳에 체류를 허락하는 통과 사증을 가지고 입국해야 하였다. 그는 오후 7시에 ‘밍가라단’ 공항에 도착했다. 그는 세관에서 정상적인 절차를 밟은 후, 오후 9시에 지부에 도착했다. 그 날 밤 ‘재카’ 형제는 10시에 일을 시작하였다. 그와 지부 감독자 ‘라지’ 형제는 눈 한번 붙이지 못하고 꼬박 밤을 새워 일하였다. 새벽 5시에 그들은 공항으로 나갔다. 인도의 ‘T. H. 샌더슨’ 형제가 지구 감독자로 ‘버어마’를 방문하였을 때도 이와 똑같이 일하였다. 이러한 방문은 짧은 것이었지만, 그러한 방문은 매우 고맙게 여겨졌다.

색다른 대회

1969년 “지상의 평화” 지역 대회가 ‘랭구운’이 아니라 ‘미치나’에서 개최되었을 때 색다른 점이 있었다. ‘버어마’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차나 기선으로 여행을 했는데, 보통 정원 초과가 되어 승객들은 종종 지붕에 앉아 여행을 했다. 협회는 ‘미치나’까지의 여행을 위해 임시 열차를 마련했다. ‘버어마’의 철도청 당국은 매우 협조적이어서 ‘랭구운’에서 ‘맨달레이’까지 두 대의 객차를 마련해 주었다. 이곳에서 두 대가 더 추가되었다. 이러한 마련이 없었더라면 만원이 된 기차를 타고 ‘랭구운’에서 ‘미치나’까지 1,162‘킬로미터’의 거리를 주야로 2일간 여행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버어마’의 남부로부터 온 참석자들은 토요일에 ‘랭구운’을 떠나 일요일 아침에 ‘맨달레이’ 역에서 ‘친’과 ‘샨’ 주에서 오는 대회 참석자들과 만났다. 그들이 저녁 늦게까지 출발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호별 방문 전파 사업을 계획하였다.

‘맨달레이’와 ‘모니인’에서 협회는 대회 참석자들이 식사를 하도록 마련해 주었다. 보통 기차가 식사 시간쯤 되어 한 정거장에 정차하면, 승객들은 먹을 것을 사기 위해 음식점으로 달려 간다. 음식이 매진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끼니를 놓치는 일이 흔하다. 그러나 증인들은 음식을 객차 안에서 받았다. 식사 한 끼니에 단지 미화 12‘센트’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매우 고마와했다! 기차역들에서 파는 도시락은 적어도 미화 29‘센트’나 되었다! 한 형제는 다음과 같이 감사의 말을 했다. “나는 협회가 사려깊게 마련해 준 데 대해 정말로 감사한다. 이런 마련이 없었더라면, 여덟 식구인 나의 가족 모두가 한 끼의 식사를 하는 데는 미화 2불 86‘센트’가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미화 91‘센트’만으로도 음식이 충분했다.”

이들 여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물질적인 양식 뿐만 아니라 영적인 양식도 공급받았다. 80명의 ‘파이오니아’들이 기차 안에서 강연을 하도록 임명되었다.

대회를 위해 대나무로 하나의 거대한 ‘도움’식 지붕을 만들었다. 가운데 받침 기둥이 없이 만들어진 주 대회장은 지붕을 제외하고는 대나무로 세워졌다. 먼저 대나무 장대들을 일정한 간격으로 서로 마주 보게 땅에 박은 다음, 몸이 가볍고 날렵한 사람들이 그 장대를 구부리기 위해 그 위로 올라갔다. 이렇게 올라가는 일은 매우 주의깊게, 서서히 해야 하였다. 대나무들이 구부러져 중앙에서 그 끝이 만나게 되면 그 끝을 함께 묶었다. 대나무는 또 잡아 매는 끈으로도 사용되었다. 어떻게? 대나무를 얇게 쪼개서 물에 불리면 유용한 끈이 된다. 대나무를 켜는 경험있는 사람들의 손놀림과 그 민첩함은 가히 놀랍다. 마침내 대나무 지붕이 풀로 덮여졌다.

간이 식탁 역시 대나무 장대들과 ‘매트’로 만들어졌다. 또, 반쪽을 내어 마디를 제거한 대나무는 인근에 있는 우물로부터 물을 보내오는 홈통으로 이용되었다. 대회 기간 중에 대나무는 국과 밥을 담는 그릇으로도 이용되었다.

참석자들은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 왜냐 하면 이제까지 한 대회에서 신간 ‘버어마’ 서적이 세권씩 발표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참석자들은 「하나님이 거짓말하실 수 없는 사실」 책과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니이다」 책 및 새로운 노래책인 「마음의 음악에 맞추어 노래함」을 받고 무척 기뻐하였다! 이들 ‘버어마’어 출판물들 외에도, 참석자들은 다섯권의 새로운 영문 출판물을 받는 축복을 누렸다.

세 가지 성서 ‘드라마’가 상연되었다. 그러면 필요한 의상은 어떻게 마련하였는가? 이 지방 의상의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의상 ‘스타일’로 얼마나 잘 변조될 수 있는가를 알면 참으로 놀랄 만하다. ‘루사이’인들이 입는 ‘사롱’이 이 경우 매우 유용하였다. ‘드라마’ 출연자 각자는 자기의 의상을 마련해 왔다. 그런데 ‘다니엘’역을 맡은 형제가 그의 흰 수염을 포함해서 그의 의상을 가져오는 것을 그만 잊어 버렸다! 어떤 대책을 급히 세워야 했다!

막이 올라갔다. ‘드라마’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연로한 ‘다니엘’이 등장하였다. 분장 요원들이 응급실에서 약간의 솜과 두쪽의 반창고를 가지고 왔다. 접착면이 바깥쪽으로 향하게 하여 반창고 두쪽을 함께 꿰맸다. 한쪽면은 얼굴에다 붙이게 하고 다른 한 면에는 솜을 붙였다. 필요한 색깔을 내기 위해, 숯가루와 재를 식용 기름과 혼합하여 이것을 솜에다 발랐다. 그렇게 하여 “다니엘”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큰 확장을 촉진시킴

1970년 중에 우리는 사업을 더 확장시키고자 노력했다. 하나님의 왕국 소식이 그 당시 이 나라 북부의 ‘나가’ 구릉지에서는 선포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2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4월에 ‘캄티’로 파견되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많은 관심자들을 발견하였다. 단지 1주일만에 5명이 집회 참석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급속한 발전은 잠간이었다. 정부는 그 형제들에게 24시간 이내에 ‘캄티’도(‘나가’ 구릉지)를 떠나야지 그렇지 않으면 투옥될 것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한 명령을 내리는 이유는 듣지 못했다. ‘파이오니아’들이 탄원을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문제를 담당하고 있던 경찰은 ‘파이오니아’들이 ‘캄티’를 떠나야 한다고 단호한 태도를 취하였다. ‘캄티’를 왕래하는 여행은 단지 비행기 편 뿐이었다. 그리고 매일 비행기 편이 없었다. 그래서 형제들은 그들이 24시간 내에 떠날 수 없다고 말했다. 왜냐 하면 그들이 다음 비행기를 기다려야 했으며, 그 비행기는 지정된 시간 안에는 오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경찰관은 그들이 24시간 이내에 떠나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 떠납니까?” 하고 형제들이 질문했다. “대나무 뗏목을 만들어 강에 띄워서 가시오.”라고 단호히 말하였다. 물결이 거센 강을 대나무 뗏목을 타고 수백 ‘킬로미터’를 여행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할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이치적으로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특별 ‘파이오니아’들인 ‘윈 페’ 형제와 ‘아웅 나잉’ 형제는 커다란 곤경에 빠져 있었으나,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예기치 않게도 공군 소속 비행기 한 대가 ‘캄티’ 기지에 착륙했다. 그래서 당국자들은 그들을 그 비행기에 태워서 ‘미치나’까지 무료 여행을 하게 했다. 그 이후 관심자들은 서신을 통해 도움을 받았다.

그 당시에 ‘친’ 주의 ‘티딤’에서 예기치 않던 문제가 발생했다. 인도의 ‘미조’ 반란군들이 국경선을 넘어 ‘티딤’의 일부 지역에 불을 지르고서는 자기들의 나라로 달아났다. ‘버어마’에서는 ‘미조’인들이 ‘루사이’인들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많은 ‘루사이’인들이 그러한 외국 반란군들의 지지자들로 의심을 받았다. 그 도시에 있는 ‘랄 취하나’와 ‘찰 리아나’란 두 명의 ‘루사이’인 특별 ‘파이오니아’가 그 반란군들의 첩자들이라고 거짓 고발을 받아 감금되었다. 그들은 감금되어 있다가 6개월만에 석방되었다. 동시에 그리고 동일한 이유로 ‘캄파트’의 특별 ‘파이오니아’들인 ‘B. T. 루알라’와 ‘바이 천눙가’가 투옥되었다.

많은 문제들을 직면함

그 후 멀지 않아서, ‘친’ 주의 ‘반나’에 있던 형제들은 그리스도인 중립이라는 그들의 입장 때문에 반대를 직면하게 되었다. 선거시 투표는 경제적이었다. 형제들이 그들의 종교적 확신과 세상에 물들지 않으려는 결의 때문에 정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자 그들이 호별 방문 증거를 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야고보 1:27) 또 증인 자녀들은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그러한 일 때문에, 지부 감독자는 아내를 동반하여, 그 지역에 있는 형제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그리로 갔다. ‘랭구운’에서 ‘칼레묘’까지는 비행기를 타고 갔고 거기서 ‘하카’까지는 ‘트럭’으로 갔다. 이 ‘트럭’(“버스”)의 정원은 단지 22명 밖에 되지 않았는데, 50명이 넘는 사람들이 ‘버스’ 안에서 콩나물 시루를 만들었고, 지붕에도 10명 정도의 사람들이 탔다. 거리는 단지 180‘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그 여행을 하는 데는 2일이 걸렸다. 날씨 때문에 길들이 매우 질퍽질퍽했고 미끄러웠다. 그 위험하고 꾸불꾸불한 길을 따라서 해발 1,800내지 2,400‘미터’까지 올라갔다. ‘하카’로부터는 말을 타고 여행하였고, ‘반나’와 ‘흐마이카’까지는 걸어서 여행했다. 바로 이곳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기회있는 대로 여러 지역 당국자들을 찾아가서 이야기하고, 우리의 종교적 신념에 근거한 우리의 중립적인 입장을 설명하였다. 형제들과 자매들은 이 방문으로 격려를 받았고, 그것을 대단히 감사히 생각했다. 그들은 믿음 안에서 튼튼하며 하나님께 계속 충성을 지키고자 하는 결의에 차 있다.

‘캄티’에서의 상황이 조금 “누그러지”고 그 지방 당국내에 변화가 생기자, 우리는 4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를 그곳으로 파견하여 관심자들을 돕도록 했다. 수개월 내에 3개의 집단이 형성되었고, 16명이 야외 봉사 보고를 내었다.

‘파이오니아’들은 ‘정글’ 깊숙이 들어가 왕국 소식을 가지고 모든 마을 사람들을 방문하였다. 이러한 일은 분명히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의 비위를 건드렸을 것이다. 그들은 간교한 입술과 속임수로 형제들이 반란군들의 첩자들이라고 거짓 고발을 하여 지방 당국자들의 생각에 편견을 심어 주었다. 많은 심문을 받은 후, ‘파이오니아’들은 7일 이내에 그 지방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 날 ‘파이오니아’들은 ‘주 의회’ 사무실을 찾아가서 그 날 이용할 만한 교통편이 없으니 하루나 이틀을 더 머물러야 되겠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당국자들은 그들이 해가 지기 전에 그곳을 떠나야 한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래서, ‘S. 듀워’ 형제, ‘B. 마위아’ 형제, ‘바 이이’ 형제 및 ‘Z. 리아니’ 자매는 그들의 소유물을 챙겨서 ‘캄티’를 당장 떠나야 하였다. 그들은 그 날밤 한 마을에 이를 때까지 계속 걸었다. 하지만, 그들이 뒤에 남겨 두고 떠났던 형제들과 관심자들은 진리 안에 굳게 서 있으며, 정기적으로 “좋은 소식”을 선포하고 있다.

인쇄상의 문제들을 해결함

‘버어마’어 「파수대」(킨미오진)의 발행은 급속도로 증가하여, 1967년 1월에는 8,500부를 발행하였다. 그런데 정부는 1967년 5월호부터 매월 5,000부씩만 발행하도록 제한함으로써 증가를 중단시켰다. 설상가상으로, 1972년 4월, 당국자들은 5,000부가 아니라 단지 3,000부만을 인쇄할 수 있는 정도의 종이만 줄 수 있다고 통지해 왔다. 그 정도의 부수로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었는가? 그 문제를 여호와께 기도로 아뢰는 길 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지부 감독자 ‘모리스 라지’ 형제는 ‘무역 상사 제9호’의 지배인에게 특별 면담을 요청하여 승락을 받았다. ‘라지’ 형제는 ‘왙취 타워 협회’가 외화 즉 미국 ‘달러’로 종이를 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것은 그에게 매우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라지’ 형제는, “하지만 우리가 10,000부를 발행할 수 있는 분량의 종이를 살 수 있을 경우에만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결과는? 바로 다음 달에 우리는 10,000부를 인쇄할 수 있었다. 우리는 1975년 1월 이후 매월 2개호씩 즉 20,000부의 잡지를 인쇄하는 특권을 누려 오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인쇄를 하는지 설명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우리는 인쇄하게 될 매호의 원고를 4벌 타자해서, ‘인쇄-출판 위원회’에 제출하여 승인을 받아야 한다. 승인을 받는 데 1주일 또는 심지어 1개월이 걸리는 수도 있다. 우리가 인쇄 승인을 받은 다음에는 종이 구매 승인 신청을 한다. 이것이 또 한 주일 정도 걸린다. 우리가 종이 관리청으로부터 승인을 받으면, 종이를 사기 위해 창고(종이를 쌓아 두는 보세 창고)로 간다. 거기서 우리는 구입 차례를 기다리며 줄을 서야 한다.

잡지가 인쇄된 후 우리는 잡지를 인쇄소에서 지부로 운반하기 전에, 17부를 ‘인쇄-출판 위원회’로 보내야 한다. 그 위원회는 그 잡지가 원래 제출한 원고와 일치한지 검토한다. 삭제도 첨가도 허용되지 않는다. “승인”을 받은 다음, 우리는 그것을 5부의 「파수대」와 함께 종이 관리청으로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출고된 종이가 실제로 우리의 신청서에 명시된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는가를 인쇄소에서 확인하도록 한다. 이러한 절차가 매월 매호에 대해서 실시된다.

여행하는 감독자들의 여행

특히 1967년 이후, 우리의 일은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특별 ‘파이오니아’들과 ‘D. J. 오닐’ 및 ‘J. T. 재비어’ 등 두 명의 여행하는 감독자를 포함하여 ‘버어마’의 증인들 위에 내린 여호와의 축복으로 인하여, 4년 내에 ‘버어마’의 증인들의 수는 거의 배가 되었다. 1968년에는 전도인 24%의 증가가 있었고, 1969년에는 26%의 증가, 1970년에는 18%의 증가, 1971년에는 12%의 증가가 있었다. 이 4년 동안 276명이 물 침례를 받음으로써 여호와께 그들의 헌신을 상징했다. 이리하여, 1971년에는 ‘버어마’의 증인들의 근 절반이 지난 4년 동안 침례를 받은 전도인들이었다. 1971년에 우리는 3개의 순회구를 마련했다. 3번째 순회 감독자는 1966년에 특별 ‘파이오니아’로 일하다가 추방되었던 ‘프랭크 듀워’의 아들인 ‘도널드 듀워’ 형제였다.

여기서 우리가 순회 감독자들이 경험한 어려움들 중의 얼마를 소개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동료 신자들을 방문하기 위해, 그들은 흔히 만원이 된 기차나 ‘버스’나 배를 타고 여행한다. 때때로 그들은 심지어 기차나 ‘버스’나 소형 선박의 지붕 위에 타고 여행하기 까지 한다. 어떤 곳에서는 반란군들이 다리를 폭파하거나 도로를 파헤쳐 놓는다. ‘친’ 구릉지에서는 대부분의 여행을 걸어서 한다. 그러나 이 일은 쉽지 않다. 왜냐 하면, 이 여행은 해발 2,400‘미터’ 높이까지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산속에 있는 모든 회중을 방문하기 위하여,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약 800‘킬로미터’를 걸어야 한다. 또한, 그들은 그들이 먹을 음식과 자취 도구를 가지고 다녀야 한다. 더구나 야생 동물의 위험도 뒤따른다. 예를 들면, ‘제임스 재비어’는 ‘톤장’에서 ‘티딤’까지 혼자서 여행하다가 비비 떼를 만났다. 제일 큰 놈이 ‘재비어’ 형제를 노려 볼 때 그는 무서워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나는 막대기 하나를 집어 들고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그들이 약간 움직였을 때, 나는 기력을 다해서 뛰었다. 그 다음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몹씨 추웠으며 도중에 어느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녹초가 되어 버렸다. 나는 매우 친절한 한 침례교 목사 집에서 비를 피할 수 있는 거처를 제공받았다. 불을 쬐는 동안 나는 그와 훌륭한 성서 토론 기회를 가졌다.”

‘도널드 듀워’는 ‘하카’에서 ‘친’ 주의 ‘레이타크’까지 68‘킬로미터’의 거리를 하룻길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서, ‘바나나’잎으로 음식을 싸서 챙긴 다음 길을 떠났다. 가는 도중 휴식도 거의 취하지 않으면서, 동행하는 형제와 함께 빠른 걸음으로 산들을 오르내렸다. 마지막 5‘킬로미터’는 매우 가파르고 바위가 많은 산을 계속 올라가야 하였다. ‘듀워’ 형제는 큰 어려움을 겪으며, 동행하는 형제의 도움으로 계획한 여행을 끝마쳤다. 그러나 그는 다음날 거의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곳의 일부 지역은 ‘버스’ 여행에도 용이하지 않다. 하루는 만원 ‘버스’가 ‘모곡’에서 꾸불꾸불한 길을 내려오고 있던 중에 비극이 일어났다. ‘모곡’은 ‘버어마’의 명물인 ‘루비’를 캐내는 곳이다. ‘도널드 듀워’와 기타 많은 승객들이 지붕 위에 타고 있었는데 운전 기사가 갑자기 차를 조정하지 못하는 바람에 사고가 나서 몇사람은 목숨을 잃었다. 그 사고로 ‘듀워’ 형제는 다리 하나에 골절상을 입고 ‘맨달레이’에서 여정이 끝나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다른 위험들도 발생할 수 있다. ‘제임스 재비어’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내가 ‘로이카우’(‘카이야’ 주)에서 ‘타웅기’(‘샨’ 주)로 ‘트럭’(또는 ‘버스’)을 타고 여행할 때 차가 갑자기 정부군과 반란군들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진 그 사이에 갇히게 되었다. 우리는 ‘트럭’에서 뛰어 내려 전투가 끝날 때까지 차 밑에 피신해 있어야 했다. 후에 우리는 사망자들과 부상병들을 ‘시세잉’ 마을에 있는 한 가까운 병원으로 운반했다.”

통치체 성원으로부터 도움을 받음

통치체 성원들의 방문은 매우 도움과 격려가 되었다. 우리는 특히 이러한 형제들이 겸손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에 찬 관심을 나타내는 태도를 보고 감명을 받았다. 예를 들어, ‘M. G. 헨첼’ 형제가 1973년 1월 24-27일에 ‘버어마’를 방문했을 때, 그는 지방 형제들과 허물없이 어울렸으며 모두는 그의 겸손함에 대해 감탄했다.

1975년 1월에 ‘N. H. 노워’와 ‘F. W. 프랜즈’ 형제가 우리를 방문했다. 그들이 ‘랭구운’에 있는 ‘간디 홀’에서 연설을 시작하기 바로 직전에, 정부가 공공 장소에서의 집회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국제 연합 사무총장 고 ‘우탄트’ 씨의 장례식과 관련하여, 과격파 학생들과 일부 불순분자들이 이르킨 소요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미 ‘간디 홀’에 모인 악 500명의 형제들과 관심자들은 인근에 있는 한 왕국회관으로 가게 되었다. 그 왕국회관의 수용 능력은 겨우 150명 정도였는데, 그 날 저녁 ‘노워’ 형제와 ‘프랜즈’ 형제의 연설을 듣기 위해 270명이 입추의 여지없이 몰려들었다. 200명 이상이 그들의 연설을 듣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그 다음 이틀 동안 6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에릭 마르셀린’ 뜰에 모여, 소풍나온 것처럼 나무 밑에 앉아서 영적인 음식을 즐겼다. ‘버어마’의 증인들은 그 방문자들을 위해 훌륭하고 다채로운 오락 ‘프로그램’을 베풀었으며 이에 대한 보답으로 ‘F. W. 프랜즈’ 형제는 ‘하모니카’를 불고 일행들은 합창을 하였다.

1977년 3월에, 통치체의 ‘존 부우드’ 형제가 ‘브루클린 벧엘’ 가족의 ‘돈 아담스’ 부부와 함께 ‘버어마’를 방문했다. 이 방문 역시 이 나라에 사는 여호와의 백성들을 위한 행복한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버어마’ 북부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그 방문과 때를 맞추어 마련된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왔다. 그 대회는 ‘랭구운’으로부터 약 16‘킬로미터’ 위치에 있는 ‘인세인’의 ‘시온 힐’에서 열렸다. 다시금 ‘버어마’의 증인들은 그 방문자들을 위해 매우 흥미있는 오락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최근인 1978년 1월에 통치체의 성원인 ‘L. A. 스윙글’ 형제가 지구 방문을 했다. ‘옥카라파’에서 열린 한 대회에서 302명이 그로부터 하나님의 예언자 ‘예레미야’처럼 인내하라는 격려적인 연설을 들었다. 이 방문중에 ‘스윙글’ 형제는 또 우리의 새로운 ‘벧엘’의 봉헌식 연설을 했다. 그의 연설을 들은 청중은 248명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건물을 어떻게 구하게 되었는지 들어 보라.

새로운 ‘벧엘’ 집을 얻음

어느 일요일 야외 봉사를 마친 후, 지부 조정자가 어떤 형제를 방문하게 되었다. 대화중에 그는 ‘N. H. 노워’ 형제는 1962년 방문 이래로 우리가 새로운 지부와 ‘벧엘’로 쓸 만한 시설을 구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언급했다. 그 형제는 도와 주겠다고 하면서 아주 가까운 곳에 하나의 매우 훌륭한 장소를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지부 조정자인 ‘라지’ 형제는 그를 따라 그 장소로 가 보고는 그곳이 아주 적당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약 600평의 대지 위에 서 있는 2층 건물이었다. 그 건물에는 침실과 사무실로 쓸 만한 공간이 충분했으며 왕국회관으로 사용될 수 있는 곳도 있었다. 또 그 건물은 장차 확장을 위해서도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이튿날, 지부 조정자는 지부의 다른 직원들을 동반하여 그 건물에 가 보았다. 그의 아내 ‘도리스’는 그 집 주인의 아내가 학교 친구인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라지’ 자매는 곧 그 집 자녀들과 성서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라지’ 형제는 그 자녀들의 부모들에게 성서 연구를 제의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연구는 해 보겠읍니다만, 내 종교는 바꾸지 않겠읍니다.” 하고 말했다. 아버지는 어느 쪽도 상관하지 않았다. 왜냐 하면, 그는 ‘가톨릭’ 교회에 대해 크게 실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라지’ 형제는 그 부부와 성서 연구를 시작했다. 연구를 시작한지 3개월 되었을 때 그들은 이것이 진리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집안에서 종교적 형상들을 없애 버리고 교회에 나가는 일을 중지했다. 그 다음 지역 대회에서 그들과 장남은 물의 침례를 받음으로써 여호와께 그들의 헌신을 상징했다. 그 이후, 그 집은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의 이름으로 등기되었다. 그리하여, 1978년 1월에 ‘스윙글’ 형제가 지부와 ‘벧엘’을 위한 봉헌식 연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사업이 계속 발전하다.

여러 가지 난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업은 계속 발전했다. 1972년 봉사 연도 말에 644명의 왕국 전도인들이 있었으며, 이것은 7%의 증가를 의미했다. 1974년에는 762명이 야외 봉사 보고를 하였으며, 111명이 침례로 하나님께 그들의 헌신을 상징함으로써 5%의 증가가 있었다. 1975년에 ‘버어마’의 형제들은 매우 열심히 일하여 14‘퍼센트’ 증가의 축복을 받았다. 그 해에 108명이 침례를 받았고, 최고 왕국 전도인은 822명이었다. 1976년 봉사 연도는 최고 전도인 845명의 기록으로 막을 내렸다. 그 해 10월에 ‘모리스 라지’ 형제와 그의 아내는 ‘뉴우요오크 브루클린’ 본부에서 지부 조정자들의 회의가 열리는 동안, 그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특권을 받았다.

1977년 봉사 연도중에는, 이 나라의 왕국 선포자들의 수가 1‘퍼센트’ 감소했다. 이 감소는 ‘버어마’에서의 ‘여호와의 증인’들의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감소가 있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인플레이션’이 하나의 이유였던 것 같다. 물가가 계속 치솟았다. 예를 들어, 몇년 전에만 해도, ‘코오피’ 한 ‘파운드’의 가격이 1‘달러’였던 것이 1978년 초에는 12.14‘달러’로 인상되었다. 그것은 무려 1,114‘퍼센트’의 상승이었다! 그리하여 많은 증인들과 관심자들이 생계를 꾸려 나아가기 위해 몹시 바쁘게 일해야 하였고, 이러한 사정이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영적인 것들에 대한 인식을 잃게 만든 것 같다.

담배를 피우고 빈랑을 씹던 일을 중지했었던 어떤 사람들은 이전의 불결한 습관으로 되돌아갔다. 1975년부터 1977년 사이에 이러한 행위만으로도 32명이 제명 처분을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1975년에 그들이 기대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와 연합하던 일을 중지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들의 관심이 식어지자 그들은 세상적인 관심사를 추구하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77 봉사년도가 끝났을 때, ‘버어마’에서의 왕국 전도인의 수가 1‘퍼센트’ 감소한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형제들은 영적으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거룩한 봉사를 분주히 수행해 왔으며 그 결과 많은 축복을 받았다. 1978 봉사년도 초에 전체 야외에서의 우리의 증거 활동은 다시 증가를 보게 되었다. 즉 매달 왕국 전도인의 신기록을 보게 되었다. 1977년 9월에는 4.3‘퍼센트’의 증가를 보았다. 10월에는 5‘퍼센트’의 증가, 11월에는 8‘퍼센트’의 증가, 12월에는 11‘퍼센트’의 증가로 903명이 그 달에 야외 봉사 보고를 냈다. 처음으로 900명선을 돌파했다. 이 일로 인하여, 이 나라에서는 4번째의 순회구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곳 ‘버어마’에서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여호와의 백성들과 교제해 오고 있다. 예를 들어, ‘T. 타망’이란 ‘요가’를 하는 건강하게 생긴 한 ‘힌두’교인이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이 되어 지난 20년 동안 감독자로서 일해 왔다. 그의 노력으로 많은 ‘힌두’교인들이 거짓 종교 세계 제국인 큰 ‘바벨론’을 떠나 참 하나님 여호와의 찬양자가 되도록 도움을 받았다.—계시 18:1-5.

전망

성서 진리의 불씨가 ‘버어마’에 떨어진 것은 1914년이었다. 그러나 1926년에 와서야 이곳에서의 왕국 사업은 적절하게 조직되었다. 제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왕국 사업이 완전히 중지되었다. 그러나 그 전쟁 이후 우리의 사업은 전국에서 다시 시작되어 1946년에는 8명의 왕국 전도인들이 있었다. 1947년과 1948년에 처음으로 외국 선교인들이 이 나라에 들어 왔다. 그러나 그들은 1966년에 추방되었다. 1946년 이후 32년 동안 우리는 8명의 전도인에서 1977년 12월에는 903명의 전도인으로 발전했다. 1978년 3월중에, 이곳의 최고 왕국 선포자는 905명에 달했다. 그리고 1978년 3월 23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버어마’ 전체에서 2,174명이 모인 것을 알고 우리는 즐거워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악한 사물의 제도의 결말이 오기 전에 양같은 사람들을 모두 그리스도인 회중으로 틀림없이 이끌어 들이실 것을 알고 있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왕국의 좋은 소식이 ·⁠·⁠· 전파될 것입니다. 그러면 끝이 올 것입니다.” (마태 24:14, 신세)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일이 완수되었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우리는 요동하지 않고 계속 왕과 왕국을 광고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버어마’의 참 그리스도인들에게 장차 어떠한 축복들이 임할 것인지 열렬히 기대한다.

[32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인도

중국

방글라데시

라오스

타이

버어마

푸타오

캄티

미치나

칼레묘

라시오

마이묘

맨달레이

헨자다

랭구운

바세인

물메인

타보이

메르귀

뱅골만

앤다만해

사이앰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