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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갈’과 이웃 나라들

‘세네갈’과 이웃 나라들

‘세네갈’과 이웃 나라들

‘세네갈’은 대조점이 많은 나라이다. 이 나라는 ‘아프리카’ 대륙의 서쪽으로 불룩 튀어나온 끝에 위치하고 있어, 북쪽으로는 ‘사하라’ 사막에서 뜨거운 사막의 열풍이, 서쪽과 남쪽으로는 ‘대서양’에서 시원한 해풍이 끊임없이 불어온다. 광활한 사막이 펼쳐져 있는 북쪽 광야는 남부 지역으로 가면서 점차적으로 다습한, ‘정글’과 같은 지역으로 변모한다.

아마도 거대한 ‘세네갈’ 강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물줄기에 이끌려 북부 ‘모리타니’의 방랑 유목민들이 기원 제 11세기경에 점차 남쪽으로 이동해 오면서 ‘아랍’어와 그 풍속 및 회교를 가지고 왔다. 그들은 ‘베르베르’인들 또는 ‘제네가’인들이었는데 이 ‘제네가’라는 말이 아마도 ‘세네갈’이란 이름의 근거를 알려 주는 것 같다. 그러나, 또한 ‘함’의 후손들도 ‘아프리카’ 대륙으로 이주해 왔는데 그들도 대조점이 많은 이 나라에 매력을 느꼈다. 그곳의 온화한 기후와 신선한 해풍에 이끌리어, 남부에서 온 ‘아프리카’의 여러 종족은 북쪽으로 이동하여 ‘캐스만스’ 강과 ‘갬비아’ 강의 비옥한 계곡에 정착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풍속, 언어 및 물활론적인 종교를 함께 가지고 갔다. 이들 두 다양한 종족이 점차적으로 융합함으로서 즉 북쪽의 뜨거운 사막과 내륙 지방의 다습한 ‘정글’을 연결하고 있는 땅에서 만남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국가와 새로운 민족을 위한 기초가 놓여지게 되었다. 결국 그것이 ‘세네갈 공화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상하면서도 매혹적인 이 땅에 눈을 돌린 다른 사람들도 있다. 그리하여 1455년에 최초로 ‘유럽’인들이 도착했다. ‘베니스’의 탐험가 ‘카다 모스토’(‘포르투갈’의 ‘헨리’ 왕자의 임명을 받은)가 ‘대서양’으로 돌출해 있는 이 바위 투성이인 곳에 발을 내딛은 것이 바로 그 때였다. 현재 ‘베르데’ 곶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곳에서 ‘아프리카’의 관문인 근대 수도 ‘다카르’가 현재 자리잡고 있다. ‘유럽’인들은 새로운 풍습과 새로운 언어는 물론 하나의 색다른 종교를 가지고 갔다. 그리하여 그것은 기존 풍물에 대조점을 더욱 증가시켰다.

기원 제 16세기에는 미국의 농장들을 위해 값싼 노동을 공급하기 위해 노예 매매가 시작되었다. ‘네델란드’인들이 인근 ‘고리이’ 섬에 정착했다. 그리고 곧 ‘스페인’인과 ‘포르투갈’인, 영국인, ‘네델란드’인 및 ‘프랑스’인 상인들이 ‘아프리카’의 서해안을 정규적으로 찾아왔다. 1635년에, ‘가톨릭’교 선교인들이 와서 식민지 세력들을 위해 이 나라의 곳곳을 개척했다. 그 결과 이기적인 탐욕이 곧 분쟁과 전쟁을 초래했다. 결국 1817년에 ‘프랑스’인들이 우세한 입장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네갈’을 실제 식민지화하는 일이 뒤따랐다.

진리의 씨가 심어지다

세상 권세들이 ‘아프리카’를 지배하기 위한 경쟁을 하고 있을 때인 기원 1914년에 인자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하늘 정부를 세우셨다. 이 정부는 정한 때가 오면, 압제받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모든 민족에게 상쾌함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면 언제 이 설립된 왕국의 좋은 소식이 ‘세네갈’에 이를 것이었는가? 처음으로 영적인 빛이 이 나라에 비친 때는 1951년이었다. 그 당시의 한 상업적인 회사에 근무하고 있던 ‘여호와의 증인’ 한 사람이 이 나라에서 6개월 동안 머무를 수 있었다.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빛을 비추었는가? 그는 분명히 그렇게 했다! 그는 ‘세네갈’에서 보낸 짧은 기간내에 매우 활동적으로 진리의 첫 씨앗을 뿌렸다.

그러나 심어진 씨가 자라기 위해서는 물과 보살핌이 있어야 한다. (고린도 전 3:5-9) 그 씨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도록 돕기 위하여, 이 뜨거운 태양과 상쾌한 비의 나라에 누가 올 것인가? 여러 가지 면으로 생소한 새로운 나라에 가서 압제받는 영혼들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 자기 가정의 안일을 누가 기꺼이 버릴 것인가? 1953년에 이러한 부름에 호응하여 ‘왙취 타워 협회’에 의해 한 전 시간 왕국 선포자가 이곳으로 파견되어 왔을 때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매우 즐거워하였다.

진리에 대해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평화와 희망의 소식을 가져다 주고자 하는 이러한 진실한 노력을 식민지 당국자들이 환영할 것이었는가? 그와는 반대였다. 이 첫 번째의 특별 ‘파이오니아’는 한 방적 회사의 대표자 신분으로 ‘세네갈’에 들어가야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인 교제와 집회 없이 생활했기 때문에, 혼자 떨어져 있다는 것이 처음에는 약간 어려웠다. 그러나 전파 사업은 나를 계속 분주하게 만들어 주었으며 얼마 안있어 기꺼이 듣고자 하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세네갈’ 사람들은 따뜻하며 손대접을 잘한다.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는 여러 종류의 종교가 있는 한 나라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일반적으로 종교 이야기를 환영한다. 인구의 약 80내지 90‘퍼센트’가 회교도이므로 「성경」과 「코란」의 차이점들에 대해 많은 질문들이 생긴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들은 종종 진지한 토론을 하게 만들어 준다. 그러나 이렇게 조그맣게 시작하던 그 당시에도 역시 반대가 있었다. 그 해에 우리의 잡지가 ‘세네갈’의 한 지역에서 상당히 많이 배부되었다. 그리고 이 활동은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목장이 약탈을 당하고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식적인 간섭과 벌금, 투옥 및 추방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사업은 뿌리를 내렸다. 관심이 발견되었고 발전되었다.

예를 들면, 1953년에 한 ‘포르투갈’인 이발사를 만나게 되었다. 「왕국이 가까왔다」와 우리의 서책을 받고서, 그는 꾸준히 발전하였으며, 곧 한 관심자의 집에서 마련되어 오고 있던 조그마한 집회들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 결과 어떠한 일이 있게 되었는가? 그는 ‘세네갈’에서 최초의 회중 전도인이 되었다. 그리고 1953년 이래로 이 씨는 풍성한 열매를 생산해 왔다. 그리하여 현재 그의 가족 중 17명은 활동적으로 여호와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고 있다.

1954년에, 한 특별 ‘파이오니아’ 부부가 더 도움을 주기 위해 도착했다. 기후와 풍습 및 음식에 적응하는 문제는 제쳐 놓고서라도, 이들 초기의 ‘파이오니아들’은 기타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직면하게 되었다. 만나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불어(국어)를 읽을 줄 몰랐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들에게 읽는 법을 가르치고 성서를 이해하도록 돕는 데 많은 시간을 바쳤다. 그러나 많은 참을성과 여호와의 축복으로 그 사업은 힘을 얻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왕국의 소식이 ‘세네갈’에서 반응을 불러 일으키기 시작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54년에 ‘세네갈’에는 세개의 성서 연구 집단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평균 집회 참석자 수는 20명이었다. 이곳에서 호별 방문 증거를 하고 있던 중에 ‘고리’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섬 주민들의 대다수가 우리의 서적을 읽어 본 일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사실, 그들은 우리 서적에 절대적인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 왔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리’에서 호별 방문을 아직 하기도 전이었지만, “그 섬은 이미 증거를 받았다”고 한 왕국 선포자는 편지했다.

선교인들의 활동이 시작되다

1955년에는 더 많은 증거가 있었다. 5월 15일에는 이 작은 집단은 6명의 새로운 사람들이 여호와의 편에 서는 것을 보는 기쁨을 가졌다. 그 해 말경 ‘마케도니아인의 부름’에 대한 또 다른 응답이 있었다. (사도 16:9) ‘길르앗 왙취 타워 성서 학교’의 한 졸업생인 ‘진 케이로이’가 ‘세네갈’에 도착하였다. 그래서 우리의 사업은 보다 더 견고한 기반 위에 세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어떠한 구역이 이 선교인을 기다리고 있었는가? 그곳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그들은 왕국 소식에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세네갈’은 ‘모리타니’의 ‘아랍’계 유목민들이 시원한 ‘세네갈’ 강 줄기를 발견한 때이거나 아니면 거슬러 올라가 기원 11세기 초에 ‘아프리카’의 이주민들이 처음으로 ‘캐스만스’ 강과 ‘갬비아’ 강 주변에 정착한 때로부터 오랜 세월을 거쳤다. 그 다음 수세기에 걸쳐 여러 특유한 종족들이 이 대조점이 많은 이 나라에서 발전해 왔다.

가장 인구가 많은 종족은 ‘오우올로프’(우올로프) 족속인데, 키가 크고 당당한 체구를 가졌으며 다채로운 의상으로 유명하다. 남자들은 자루처럼 생긴 바지와 땅에 까지 끌리고 화려한 색깔로 장식을 단 커다란 겉옷 즉 ‘보우보우’를 입는다. 종종 ‘오우올로프’(우올로프)인들의 집들은 사각형 모양으로 짚이나 흙으로 만들어진다. 일부다처제가 널리 행해지고 있다. 그리고 ‘세레례’(세레르)인들이 있는데, 그들의 주된 직업은 농업이며, 그들은 기장과 땅콩을 재배한다. ‘페울’(풀라니)인들은 ‘베르베르’족과 ‘아프리카’ 토착민 사이의 결혼으로 생긴 후손들이라고 생각되며, 일반적으로 목축업자들이다. ‘토우코울러’(투쿨로)족은 회교를 맨 처음 받아들인 종족이다. 그리고 또 ‘사라콜레’(소니케)족과 ‘만딩게’(만딩고)족 및 ‘디올라스’(디올라)족이 있는데, 그들은 벼농사를 짓는 농부들과 상인들이다.

‘세네갈’의 주민 거의 모두가 회교도인이거나 ‘가톨릭’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고대 물활론적 종교의 풍습이 어디에서나 눈에 띈다. ‘그리-그리스’ 즉 행운의 부적들을 각 개인의 팔과 허리, 다리 및 발목에 차고 다니거나 머리에 짜 넣은 것을 볼 수 있다. 종종 이러한 물건들을 양과 염소 및 심지어 말들의 목에도 걸어 준다. 이러한 부적을 차고 다니는 사람들을 악령으로부터 보호해 주거나 남편이나 아내의 애정을 지켜 주도록 축수를 받은 이들 부적을 얻는 데 거액의 돈이 든다. ‘세네갈’은 정말로 열심있는 여호와의 종들을 기다리고 있는 대조점이 많은 나라—관목과 숲, 야생조와 맹수, 깨끗하고 신선한 물, ‘말라리아’가 극성을 부리는 지역, 땅콩과 쌀, 기름과 섬유, 목축업자들과 물고기를 잡기 위해 그물을 던지는 어부들, 고풍을 풍기는 ‘아프리카’식의 마을들과 798,700이상의 인구를 가진 거대한 현대 도시 ‘다카르’가 대조를 이루고 있는 나라이다.

선교인 ‘진 케이로이’가 1955년에 이곳에 왔을 때는 참으로 할 일이 많았다. “내가 ‘세네갈’에 도착했을 때, 이곳에는 단지 하나의 조그마한 격지 집단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무르익어 추수할 때가 된 구역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곳은 말할 수 없이 다양했다! ‘다카르’는 ‘포르투갈’인과 기타 ‘유럽’인 특히 ‘프랑스’인들 뿐만 아니라 ‘세네갈’인, ‘기니아’인, ‘말리’인, ‘토고’인, ‘다호미아’인, ‘모리타니’인, ‘레바논’인 및 ‘시리아’인이 어울려 사는 하나의 거대한 복합 도시이다. 우리 앞에는 거대한 사업이 놓여 있었다. 회교도들은 진리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나 얘기는 항상 잘 들었다. 곧 성서 연구들이 시작되었으며,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초기 증인들이 직면한 한 가지 어려움은 야외에서 사용할 충분한 성서 서적을 그 나라에서 공급받는 일이었다. 모든 서적과 출판물은 조그마한 소포 우편물로 부쳐야 했다. 그리고 그 책들이 세관을 통과할 때마다, 그것은 하나의 난처한 상태가 벌어지곤 했다. 종종 열성적인 세관 직원들이 이러한 소포물을 열어서 모든 서적을 보고서는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곤 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여러 개의 소포물이 압수되었다.

성장이 시작되다

이곳에서의 참 그리스도교는 아직 조그마한 시작에 불과했지만, 여호와의 사랑의 조직은 이 나라에서 발전하고 있는 그 조그마한 기초를 간과하지 않았다. 큰 즐거움과 흥분 속에서, 이들 열심히 일하는 왕국 선포자들은 ‘펜실베이니아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이사 중 한 사람인 ‘M. G. 헨첼’의 방문을 맞을 준비를 했다. 그는 ‘해리 아아노트’와 함께 왔다. 그리고 1955년의 여러 대회에서 즐거움을 맛보게 된 것은 부가적인 특권이었다! 1955년 12월 5일부터 7일까지의 3일간의 대회 즉 조그마한 하나의 전도인 집단을 위해 가진 한 대회에서 방문한 형제들은 여섯개의 주요 대회 연설을 들려 주었다. 이 방문의 결과로, ‘세네갈’에서 처음으로 ‘다카르’에서 하나의 회중이 형성되었다. 그 회중은 1956년 봉사년도 중에 18명의 최고 전도인 수를 보고했다.

1957년 기념식에 42명이 참석하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로 가슴흐뭇한 일이었다! 그 해에 최고 전도인 수는 지난 해보다 50% 증가한 22명이었다. 물론 이 기간 중 ‘세네갈’은 여전히 ‘프랑스’의 식민지였고, 많은 ‘프랑스’인들이 이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과 접촉을 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증거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세네갈’에서 계속 머물러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지방 회중에는 일시적인 증가를 가져왔을 뿐이었으며 잠간 동안 머문 후에는 돌아가곤 하였다.

1956년 한 가족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 가족은 후에 이 대조점이 많은 나라에서 왕국의 관심사들을 발전시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가톨릭’ 신자인 한 젊은 부인과 한건의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그 후 얼마 안되어 지방 행정부의 세무 행정관서에서 높은 직위를 가지고 있던 그의 남편이 연구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가족은 ‘다카르’와 ‘상로위’에서 매우 유명한 가문의 출신이었다. 여러 가지 교리적인 문제들도 해결되어야 했지만, 진리는 꾸준하게 좋은 결과를 산출했다. 그 남편은 담배를 몹시 많이 피우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책상 위에는 ‘라이터’, 담배 쌈지 등은 말할 필요도 없고, ‘파이프’들이 무척 많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것들이 다 없어져 버렸다! 그는 확신있게, “그렇습니다. 내가 그들을 전부 없애 버렸읍니다. 이젠 모두 끝났읍니다. 나는 더 이상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하고 말했다. 분명히 올바른 방향으로 한 단계 전진한 것이었다!

온 가족이 담대하게 그들의 입장을 고수했다. 그리고 이 일은 ‘다카르’에서 큰 소란을 일으켰다! “아니! ‘포어컬트’ 가족이 ‘여호와의 증인’이 된다니? 그건 정말로 수치야!” 그들은 고위직에 있는 친척들을 가진 명문가의 출신이었기 때문에, 성서 진리에 대한 그들의 새로운 입장을 보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반대를 무릅쓰면서, 그들은 속히 발전하여 물 침례로써 여호와께 자신들의 헌신을 상징하게끔 되었다. 그 결과 얼마 후 그 가족 모두는 활동적인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

반대를 직면하게 됨

사업은 잘 발전하고 있었지만, 공식적인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륙 지방의 기타 여러 인구 밀집 지역들을 찾아가고자 노력하던 어느날 우리 형제들이 ‘다카르’에서 약 177‘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106,800이상의 인구를 가진 도시 ‘카오래크’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거기서 그들은 그 지방 경찰 국장을 만났다. 한 선교인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그는 나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면서 ‘나는 당신들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소. 나를 따라 오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는 나를 그의 사무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앉으라고 했다. ‘나는 당신들과 같은 사람들을 잘 알고 있소. 그리고 나는 당신들에 대한 한 건의 고발을 받았소’ 하고 그는 말했다. 형제 한 사람이 이미 추방된 것같았다. 그 국장은 ‘그는 이 시에서 거주하다가 당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했기 때문에 이 시를 떠나도록 요구를 받았오!’ 하고 외쳤다. 그리고는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들의 사업은 이곳 ‘세네갈’에서는 금지되어 있소. 여러분이 여기서는 전파할 수 없소.’ 그리고 나는 거기서 책들과 소책자들로 가득찬 가방 하나를 가진 채 그의 앞에 앉았다. 그는 그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는 우리에게 ‘다카르’로 돌아가라고 요구했다. 그리고는 그가 우리에 대해서 보고를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했는가? 우리는 이 전도되지 않은 지역을 전도도 않고 그냥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도시의 다른 지역으로 가서 오전 내내 봉사하여 55권의 서책과 수백부의 소책자를 전했다.” 다행히도 형제들은 당국자들로부터 더 이상 아무런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의 사업은 합법적인 인가를 받지 않고서도 여러 해를 더 계속할 수 있었다.

우리의 노력을 증가시킴

그 ‘파이오니아’ 부부는 1958년 ‘뉴우요오크’ 시에서 개최된 ‘성의 국제 대회’에 참석했다가 새로운 사람들을 세워 주고자 하는 보다 큰 열심을 품고 귀국했다. ‘윌프레드 구우치’ 형제가 1959년 1월에 지역 감독자로서 우리를 방문해 왔으며, 그의 주요한 강연에 참석한 31명은 그의 훌륭한 충고에 대해 크게 감사했다. 즐거운 일이 계속 겹쳤는데 그 당시 ‘왙취 타워 협회’의 협회장인 ‘N. H. 노워’ 형제가 2월에 처음으로 ‘세네갈’을 방문했다. 이것은 분명히 이 다양성이 많은 이 나라에서의 우리의 사업이 발전하는 데 있어서 그 당시까지로서는 가장 뛰어난 일이었다. 우리는 ‘노워’ 형제의 특별 강연을 듣기 위해 참석한 최고 42명의 열심히 듣는 청중들과 함께 감동적인 4일을 보냈다.

‘프랑스’어를 말하는 서부 ‘아프리카’의 기타 나라들에서 일터가 열리기를 기대하면서 ‘진 케이로이’가 1959년 4월에 ‘기니아’로 파견되었다. 그 당시의 ‘코나크리’에는 두명의 활동적인 형제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격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에 놓여 있는 사업을 위해 그들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방문이 있을 때 소요가 있었다. ‘케이로이’ 형제가 ‘코나크리’에서 비행기에서 내리던 바로 그날 밤에 다른 여러 부족들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다. 그 결과 군인들이 개입하였다. ‘케이로이’ 형제는 이렇게 회상한다. “얼마의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부상을 당했다. 그리고 얼마간 화재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우리가 다음날 관심자들을 방문하는 일을 막지는 못했다. 어떤 길에는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었다. 그리고 주민들은 두려워했다. 그러나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어 그 와중에서도 나는 그 두명의 충실한 형제들이 그들의 평화스러운 사업을 계속하도록 도와 줄 수 있었다.”

1959년 5월에, 협회는 ‘케이로이’ 형제에게 ‘아프리카’ 서해안 근해의 ‘대서양’에 위치하고 있으며, ‘포르투갈’의 지배하에 있는 군도인 ‘베르데’ 곶 군도를 방문하도록 요청했다. 이 방문은 크게 유익했다. 왜냐하면 ‘세네갈’에서 진리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찾아 이 섬들로부터 이주해 왔기 때문이었다. ‘케이로이’ 형제는 ‘다카르’에서 ‘포르투갈’인 형제 한 사람을 동반했다. 그들이 이 군도에서 단지 한 섬만을 방문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많은 관심자들과 접촉하게 되었고 서적을 많이 전했다. 그곳 주민들은 몹시 가난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서적은 무료로 전해 주었다. 이 군도는 여러 가지의 다른 종교가 있는 ‘다카르’와는 대조적이었다. 이곳에는 ‘가톨릭’교가 매우 강력하였고, 그 주민들 사이에 많은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다. 교회 앞을 지나가는 사람은 누구나 교회에 대고 절을 해야 했다. 여자들에게는 한쪽 무릎을 땅에다 대면서 무릎을 꿇는 것이 요구되었다. 반면에 남자들에게는 모자를 벗는 것이 요구되었다. 모든 사람은 십자가 표시를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강력한 종교적인 지배하에서도, 형제들은 최선을 다하여 진리의 씨를 뿌렸다.

그 때까지 ‘세네갈’에서 진정으로 성서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포르투갈’과 ‘프랑스’계 사람들이었다. ‘프랑스’계 사람들 중 많은 수는 ‘아프리카’에서 일정 기간을 머문 후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래서 1960년에는 전도인이 약간 감소했다. 그러나 그 떠나는 사람들의 자리는 다른 관심자들에 의해 채워졌다. 그리하여 회중 전도인 수는 거의 같은 수가 되었다.

1960년에, 사랑에 찬 관심에서 협회는 지방 주민들을 더 잘 접촉할 수 있도록 ‘아프리카’인 ‘파이오니아’들이 이곳에서 봉사하도록 마련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유럽’인 혹은 ‘토우바브’가 그들의 가정을 방문하게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대체로 우리가 전하는 소식을 그리 신중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해 3월에 ‘카메루운’에서 한 ‘아프리카’인 ‘파이오니아’가 도착했다. 그는 뜨거운 환영을 받고 크게 감동하였다! 그는 공항에서 걱정스런 기분으로 비행기에서 내릴 때, 자기의 전 소유물이 든 가방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형제들이 그가 오는 것에 대해 감사를 나타내기 위해 조그마한 ‘아파아트’를 하나 빌려 놓고, 침대, ‘스토우브’ 및 필요한 취사 도구들을 갖추어 놓은 것을 알자 그의 두뺨에는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세네갈’인 관심자들을 돌보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이제 진리가 ‘토우바브’ 즉 ‘유럽’인 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인들도 위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 해 기념식에 참석한 45명 가운데 10명의 ‘아프리카’인이 있다는 것을 알고 형제들도 즐거워했다.

그러나 항상 기후의 변화가 심한 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조의 나라는 ‘케이로이’ 부부가 알게 된 바와 같이, 또한 건강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다. 그들이 영적 형제들과 자매들을 남겨 두고 떠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말할 수 없이 섭섭했다!

1960년대 초, 분명히 ‘세네갈’에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었다. (마태 9:37, 38) 더 많은 일꾼들이 필요하였다. 누가 그 부름에 대답할 것인가? 1960년 6월, 전 시간 봉사자 부부가 그곳을 떠나는 바로 그 달에 마침 또 다른 ‘파이오니아’ 부부가 유명한 ‘다카르’ 국제 항구에서 배를 내렸다. ‘카시미르 크로우지크’ 형제와 자매는 그 첫 인상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회상한다.

“우리는 우리가 조금 전까지 거친 항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열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매우 대조적인 점 즉 더위를 느끼게 되었다! 우리가 그 변화에 적응할 수 있게 될 것인가? 여호와의 도움으로 우리는 적응하고자 열심히 노력했다.”

얼마 있지 않으면 곧 떠나 그 부부와 함께 일함으로써, ‘크로우지크’ 부부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는 구역을 돌기가 무척 어려웠고, 특히 재방문을 하는 데 매우 애를 먹었던 날을 기억한다. 왜냐 하면 어떤 주택지에서는 모든 집들이 똑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 집들은 뜨거운 모래 속에 함께 세워 놓은 나무로 지은 오막살이 집들이었다. 그러나 그 집들은 이동하지 않으며, 항상 같은 곳에 있다는 점에 대해 적어도 우리는 감사할 수 있다고 누군가가 말해 주었다. 때가 되면 그 모든 비슷한 집들을 구별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

합법적인 인가를 요구함

모든 사람들의 생활에 영향을 주고, 또한 결과적으로 증거 사업에 좋은 영향을 주게 된 한 가지 중요한 새로운 사실은 1960년에 ‘프랑스’의 식민 세력으로부터 ‘세네갈’이 독립하게 된 것이다. 이미 1958년에 우리는 우리의 사업을 합법화시키려고 처음으로 시도했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식민지 당국자들의 적의 때문에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제 독립이 선언되었으므로, 1961년에 두번째로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동일한 ‘프랑스’ 관리들이 그 때까지도 국가 치안을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에 역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63년, ‘M. G. 헨첼’ 형제가 ‘다카르’에 들렸을 때, 그는 우리에게 ‘세네갈’에서의 우리의 사업을 합법화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라고 격려해 주었다. 1963년에, 세번째의 시도도 소용이 없었다.

그 다음 1964년 초에,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정치 담당 고문관에게 탄원했다. 그 고문은 우리에 대한 거짓 고발 즉 우리가 불순종과 종교적 적의 등등을 선동하는 하나의 비밀 사회 단체라고 한 거짓 고발에 관여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고문이 불시에 우리의 집회에 참석해 보도록 초대하였다. “위에 있는 권세들”에 대한 우리의 복종에 대한 지식은 결국 그에게 여호와의 증인들은 법과 질서를 존중한다는 것을 확신시켰다. (로마 13:1-7) 더구나, 우리의 사건을 취급하고 있던 형제는 우리에 대한 모든 고발은 거짓이라는 취지의 결의문에 서명했다. 마지막 절차는 내무성 장관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세네갈’ 당국이 확신을 갖게 되었다. 우리에게 합법적인 인가를 해 주고자 하는 그들의 결정은 분명히 정부에게 영예가 되는 것이었다. 왜냐 하면 당국자들은 우리의 원수들의 고발에 근거하여 결정을 내리지 않고 공평하게 그 사건을 조사했었기 때문이었다.

“‘여호와의 증인’의 협회”가 등록된 이상, 서적을 들여오고 야외에서 일할 가외의 일꾼들 즉 특별히 훈련받은 ‘길르앗 학교’ 졸업생들을 들어오게 하는 데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일이 잘 되도록 기도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꺼이 우리의 노력을 축복해 주셨음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팔은 짧지 않았다.—이사야 59:1.

잘 조직함

몇년 동안 이곳에서의 우리의 사업은 ‘길르앗’ 졸업생들의 도움 없이도 계속되었다. 왜냐 하면 최초의 선교인들은 떠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963년 9월 24일에 ‘조오지 아마도’ 형제가 ‘세네갈’에 도착하게 되었고, 그 후 얼마 안있어 특별히 훈련받은 다른 선교인들이 도착하게 된 것은 그 당시로서는 정말로 유익했다! 이제 처음으로 하나의 선교부가 마련되었으며, ‘길르앗’ 출신은 아니지만 몇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선교인 마련하에 들어오도록 초대되었다. 이러한 마련이 있게 됨으로써 전 시간 봉사를 하는 더 많은 종들이 그들의 임명에 계속 머무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시점까지 ‘세네갈’에서의 왕국 전파 사업은 ‘프랑스’ ‘파리’에 있는 ‘왙취 타워 협회’ 지부의 지도하에 수행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우리의 활동에 대한 감독을 개선하기 위하여, ‘세네갈’ 자체내에 하나의 지부가 설립되었다. 그렇게 하여, 1965년 8월 22일에 ‘임마누엘 파테라키스’가 자기 아내와 함께 이 대조점이 많은 나라에 지부 사무실을 조직하는 행복한 특권을 누리기 위해 도착하였다. 그 지부는 1965년 9월 1일에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고, 또한 ‘갬비아’, ‘말리’와 ‘모리타니’에서의 왕국 선포 사업을 돌보게 되었다. 우선 지부 선교부를 위한 적당한 터를 발견해야 했다. 이뭏든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축복과 형제들의 끈기로 ‘다카르’에 지부 사무실이 세워지게 되었다.

우리의 활동의 밭을 확장함

때의 긴급성을 고려할 때, ‘세네갈’에서의 활동의 밭을 확장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마련을 하게 되었다. 초기에 ‘아프리카’의 종족들이 ‘캐사만스’ 강변에 정착했을 때, 그들은 그 지역이 매우 비옥한 땅이며, 산림과 물이 많고, 벼와 기장이 잘 자라는 땅임을 알았다. ‘지구인코르’가 ‘캐사만스’의 수도가 되었다. 오늘날 그 도시는 72,700 이상의 거민이 붐비는 번창하는 도시이다. 그리고 초기 개척자들에게 실제적인 물이 풍부히 공급되었던 것처럼 1965년에 생기를 주는 진리의 물이 ‘캐사만스’ 지역의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다른 “파이오니아들”에 의하여 공급되었다. 두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지구인코르’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가톨릭’교가 지배적인 이 지역이 생산적인 밭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풍습과 언어가 다른 이 나라의 다른 지역들은 어떠한가? 이러한 지역들에도 역시 전파되어야 하였다. 1965년 9월에 ‘말리’로부터 한 선교인 부부가 추방되자 그들은 ‘상루이’에서 선교부를 열도록 임명되었다. 약 88,400명의 주민이 있는 이 도시는 초기의 사막 거주 종족들을 이 대조의 나라로 이끌어들인 중요한 수로인 ‘세네갈’ 강 어귀에 위치해 있다. 주로 한 섬에 위치하고 있는 ‘상루이’는 ‘루이’ 14세가 ‘프랑스’를 통치하던 때인 1659년에 창건되었으며, 한 때는 ‘세네갈’의 ‘프랑스’ 식민지 수도였다. 현재는 주로 회교도들이 살고있는 이 도시는 개척하기가 무척 힘든 지역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루이’에서 봉사한 최초의 전 시간 봉사자들은 여러 건의 성서 연구를 시작했으며 그 연구들 중 일부는 후에 결실을 맺었다.

‘디에스’는 ‘디카르’에서 내륙으로 약 64‘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약 117,300명의 주민을 가진 도시이다. 1965년 말경 이 “밭”을 개척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마련이 이루어졌다. 부언하자면, 거의 모든 거리들이 정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먼지와 황사가 많고, 자전거는 말할 필요도 없고, 보행 조차도 곤란했기 때문에, 초기의 처음 두 ‘파이오니아’들은 무척 고생을 했다. 그 괴상하게 생긴 조그마한 판자집과 짚으로 만든 오막살이집들 가운데서 양같은 사람들을 찾으면서 여러 시간을 보낸 후, 한 줄기의 시원한 소나기를 맞는 것은 정말로 상쾌한 일이었다!

공개 강연들이 마련되었고, 협회에서 제작한 영화들을 보여 주었고, 성서 연구들이 시작되었다. ‘디에스’에 임명된 두명의 선교인은 “추수 때”의 일꾼들의 행렬을 증가시켰다. 그러나 역시 어려움이 많았다. 외부로부터 오는 반대와 일부 사람들의 지혜롭지 못한 행동 때문에, 내부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들이 많았다. 시정을 위한 조치들이 있었으며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현재 ‘디에스’에는 그곳에 임명된 선교인들의 도움을 받고 있는 13명의 왕국 전도인이 있다.

반대를 받아도 중지되지 않음

한 ‘가톨릭’교 여신도가 ‘프로테스탄트’교인이 보다 많이 성서를 읽는 경향이 있으므로, ‘프로테스탄트’교인들과 연합하기로 한 일이 있었다. 비록 그들이 성서를 많이 읽기는 했으나 사람들이 성경을 이해하도록 도와 주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점을 그 여자는 곧 깨닫게 되었다. 몇년이 지난 후, 회교 신자인 그의 남편이 ‘여호와의 증인’에게서 받은 세부의 소책자를 가지고 집에 왔다. 그는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말을 비웃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그 소책자들을 읽자마자 진리의 소리를 알아차렸으며 그리하여 협회에 도움을 구하는 편지를 했다. 남편으로 부터 심한 반대가 있었지만 이 진실한 진리 탐구자는 자기의 어린 딸과 함께 성서를 연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렸다. 그 남편은 화가 나서 17세 밖에 안된 딸을 회교 공부를 시키기 위해 ‘레바논’으로 보냈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그 딸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진리를 갖고 있다는 점을 온전히 확신하고 돌아왔다!

이 딸과 그의 어머니는 노한 아버지에 의해 집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평화의 하나님”에게 그 두 사람이 헌신의 상징으로 침례받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빌립보 4:9) 여러 가지 시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음안에서 흔들리지 않았고, ‘다카르’에서 해안쪽으로 수‘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조그마한 도시인 ‘루피스케’에서 최초의 왕국 전도인들이 되었다.

‘갬비아’에서의 시작

1965년에, ‘다카르’에 신설된 지부 사무실은 ‘세네갈’의 중부를 마치 악어 주둥이처럼 물고 있는 그 조그마한 나라 ‘갬비아’에서 왕국 사업을 돌보기 시작했다. ‘갬비아’의 기원과 민족은 ‘세네갈’과 같지만, ‘갬비아’가 ‘세네갈’로부터 분리된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 존재하는 것은 식민지 세력들에 의한 지배탓인 것 같았다. 거대한 ‘갬비아’ 강을 끼고 있는 이 나라는 영국인들이 처음으로 침투했기 때문에, 지방 원주민들이 사용하게 된 언어는 불어가 아니라 영어였다. 1816년에 ‘알렉산더 그란트’ 대위가 ‘배더스트’ 시를 창설했는데, 그 후 이 도시는 50,000명의 인구를 가진 수도가 되었다. ‘갬비아’ 전체의 인구는 약 493,000명이다.

“좋은 소식”이 언제 처음으로 ‘갬비아’에서 선포되기 시작했는지는 알아내기가 매우 어렵다. ‘배더스트’(현재의 ‘방줄’)에서 일하는 형제들이 ‘C. T. 러셀’ 형제가 쓴 「성서 연구」라는 책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이러한 출판물들은 몇년 전에 ‘갬비아’에서 봉사했던 “바이블” ‘브라운’이라고 불리워진 한 ‘여호와의 증인’에 의하여 남겨졌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서적들은 ‘시에라리온’으로부터 들어왔을 것이다.

1949년에, 두명의 전 시간 왕국 선포자가 ‘갬비아’로 들어왔다. 그 해에 상당한 활동이 있었는데, 두명의 선교인과 한 명의 회중 전도인이 1,000권 이상의 서적을 전했고, 8건의 가정 성서 연구를 사회했다고 보고했다. 이들 초기 선교인들은 근 4년 동안 머물렀다. 그들이 떠난 후에 소수의 지방 전도인들이 아무런 ‘파이오니아’의 도움이 없이도 몇년 동안 봉사했다. 그러나, 1958년 12월 21일에, ‘길르앗’ 졸업생인 ‘새뮤얼 애키니미’와 그의 아내가 ‘갬비아’로 임명을 받았다. 그들은 ‘나이지리아’에 있는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 그들 앞에 놓여 있는 봉사를 수행하고자 하는 열의로 가득찼다. 이 기간 동안 ‘갬비아’는 협회의 ‘가나’ 지부의 감독을 받았다.

두명의 특별 ‘파이오니아’와 두명의 회중 전도인으로 된 소집단이 열심히 일함으로써 곧 훌륭한 열매를 산출했는데, 1959년에 최고 9명의 전도인이 야외 봉사를 보고했다. 지역 및 순회 감독자들의 정규적인 방문은 믿음을 세워 주고 조직을 강화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 해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 41명이 참석하였으나 거짓 종교 세계 제국인 큰 ‘바벨론’과의 유대는 매우 강하였고, 고대의 미신과 종교적 관습들은 깊히 뿌리박혀 있었다.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은 몇명되지 않았다. 그리고 ‘갬비아’는 왕국 선포자들에게 다소 어려운 임명임이 나타났다.

교직자들이 소리 높이 항의하다

그리스도교국의 거짓 종교적 목자들의 괴로와 부르짖는 항의의 소리가 전국에서 들렸다. 그들은 이제 막 비치기 시작한 진리의 빛을 꺼 버리고자 안간 힘을 쓰고 있었다. (시 43:3) ‘애키니미’ 부부는 도착한지 겨우 10개월 밖에 안된 때인 1959년 10월 16일, 그들이 금지된 입국자들이기 때문에, 14일 이내에 ‘갬비아’를 떠나야 한다는 통지를 지방 경찰로부터 받았다. 그러면 이러한 조치를 취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들이 물론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것이 그 이유의 전부였다! 그러나 ‘좋은 소식을 변호하고 합법적으로 확립시키기’ 위해 그 사건은 법원에 가지고 갔다. 그 결과 형제들은 승리의 축복을 받게 되었고, 그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갬비아’에 계속 머무를 수 있었다.—빌립보 1:7.

영교 국교회 교직자들이 우리의 집회가 집회 장소로 사용하고 있는 한 지방 극장의 주인에게 협박을 가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겁을 먹기는커녕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사람들은 마귀가 아니라 하나님에 관해 말하고 있소. 내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어떻게 내가 그들을 몰아낼 수 있겠소? 그럴 수 없오. 나는 사제들의 말을 듣지 않겠오!”

1960년 12월에 ‘갬비아’에서의 왕국 사업은 협회의 ‘시에라리온’ 지부의 감독을 받게 되었다. 여행하는 감독자들의 정규적인 방문은 영적으로 매우 격려적이었으며, 1961년에는 최고 전도인이 15명이 되었다.

당국자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을 금지된 입국자들로 규정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1961년과 1962년에는 법정 사건이 발생하였다. ‘시에라리온’에서 온 두명의 특별 ‘파이오니아’와 한 방문하는 순회 감독자가 관련된 두건의 소송 사건이 대법원으로 보내졌고, 우리에게 유리한 판결이 내려졌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그분의 종들을 후원하신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그리하여 활동을 증가시킬 수 있는 문이 계속 열려 있게 되었다.

또 하나 이정표가 만들어졌다. 즉 1962년에 ‘갬비아’에서 여호와의 백성의 첫 번째 회중이 생겼다. 또한 ‘여호와의 증인’들을 금지된 입국자로 선포하는 법률이 폐지되었다. 그 결과 형제들은 더 많은 자유와 마음의 평화를 갖게 되었다. 그 다음 1965년 9월에, ‘세네갈’에 새로 설립된 지부는 ‘갬비아’ 형제들의 필요를 돌보기 시작했다. 같은 해에 ‘세네갈’로부터 오는 순회 감독자의 정규적인 방문은 ‘갬비아’에서의 신권 활동의 꾸준한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갬비아’의 증인들은 ‘다카르’에서 개최되는 순회 및 지역 대회에 참석하는 것이 훨씬 가까왔다. 그곳에서는 그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이 영어로 마련되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을 금지된 입국자들이라고 낙인찍는 그 법이 폐지된 이상, 우리의 선교인들이 도움을 주기 위해 입국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1967년에 이를 위해 애를 써 봤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당국자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갬비아’에서 보유할 수 있는 외국인 대표자들의 수를 세명으로 제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협회와 지방 형제들이 이 명령을 철회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방줄’에 있는 그 조그마한 회중을 강화시켜 주기 위한 어떠한 선교인이나 전 시간 봉사자도 들어갈 수 없었다.

“좋은 소식”이 ‘말리’에 전해지다

협회의 ‘세네갈’ 지부의 감독하에 들어온 세번째 서‘아프리카’ 나라는 ‘말리’였다. ‘말리’는 ‘사하라’ 사막안으로 깊숙히 들어가며 북쪽으로 ‘알제리’와 국경선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내륙 지역으로서, 주로 북부 ‘사헬리’와 ‘사하라’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덥고 먼지 많은 땅 즉 모래 땅이다. 하지만, 남부 지역들, 특히 거대한 ‘니제르’ 강물이 축여 주는 부분은 얼마의 밀림과 무성한 식물로 덮여 있다. 아름다운 수도 ‘바마코’는 ‘니제르’ 강의 양쪽 뚝에 위치하고 있다.

흰 피부를 가진 ‘아라비아’의 사막 유목민들로부터 검은 피부를 가진 ‘아프리카’의 토착민에 이르기까지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는 ‘말리’의 5,000,000주민은 우정적이며 손대접을 잘 하는 민족으로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메마른 사막과는 퍽 대조를 이룬다. 협회가 ‘말리’의 밭을 개간하도록 네명의 ‘가나’인들을 초대하였을 때인 1962년에 처음으로 진리의 “물”이 이곳에서 흐르기 시작했다. 상아해안에 있는 ‘아비잔’에서 ‘프랑스’어 교육을 ‘속성 과정’으로 받은 후, ‘에울리 사아피’ 형제와 그의 동료 세 사람은 그들의 새로운 임지를 열렬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것은 ‘가나’에서와는 매우 다를 것인가?

분명히 그러하였다! 처음에는 이글거리는 태양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네명의 왕국 선포자들은 곧 시원한 낮 시간을 이용하는 방법을 배웠다. 오전 7시에 야외 봉사 모임을 가졌다. 무덥고 지저분한 모래밭을 걸어다니면서, 약 3시간 동안 야외 봉사를 하고 나서 오후 4시에 다시 야외 봉사를 하러 떠나기 전에 휴식도 취하고 식사도 하고 충분한 낮잠을 자기 위해 시원한 피신처인 집으로 갈 시간이 되었다. 종종 시원한 시간인 저녁 늦게까지 봉사를 계속하곤 했다.

이들 두명의 ‘파이오니아’는 1964년에 ‘가나’로 돌아갔다. 그들 대신 특별 ‘파이오니아’인 ‘렌 페이로니트’와 그의 아내가 ‘알제리’에 있는 그들의 임지를 떠나 ‘말리’로 가서 도움을 주도록 초대되었다. 그러나 기후가 몹시 나빠서, 단 몇개월 안되어 건강 문제가 생겼으며, 그들도 ‘프랑스’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1964년 5월 10일에 ‘루시엔 프리즌’ 형제와 자매에 의해 대치되었다. 그들은 ‘바마코’ 시로 임명되었다.

‘바마코’ 사람들은 여러 가구가 다닥다닥 붙어서 조그맣고 비좁은 뜰 안에서 함께 살았으며, 종종 그 조그마한 거처를 함께 사용했다. 동물들이 음식을 준비하면서 잡담을 하고 있는 여자들 사이를 마음대로 비집고 돌아다녔다. 이렇게 복잡한 가운데서도 마치 또 하나의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한명의 연로한 회교인이 자기 옆에 물 대야를 놓고, 망고나무 밑에 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그 물은 기도하기 전에 목욕재계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의 생각을 뚫고 들어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원시적인 상황속에서도 “좋은 소식”은 선포되어야 했다. 여호와의 영의 도움을 위해 기도하면서, 그 ‘파이오니아’들은 자기들 앞에 놓여 있는 사업을 과감히 시작했다. 그들은 평화와 위안의 소식을 충실하게 선포하면서 날마다 지칠 줄 모르게 봉사했다. 1965년 여름에 또 한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그들과 함께 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왕국 소식을 환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공식적인 간섭을 받게 되었다. 왕국 전파 사업이 새로 설립된 ‘세네갈’ 지부의 감독하에 있게 된 때인 1965년 9월에, 네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말리’로부터 추방되었다. 그들 모두는 ‘세네갈’로 재임명되었다.

그러나 대적 마귀는 ‘말리’에 뿌려져서 싹이 난 진리의 씨들을 불태워 버릴 수는 없었다. ‘사피’ 형제는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계속 ‘말리’에 남아, 충실하게 봉사했으며, 또한 아내와 두 자녀를 돌보았다. 그 당시에 매우 열심히 일하던 정규 ‘파이오니아’ ‘존 앤사’ 형제가 권력층에 있는 사람들과 친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려웠던 때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앤사’ 형제가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하고 있고, 현재는 특별 ‘파이오니아’로 계속 봉사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사업에 크게 축복이 된다! 정말로, 그는 인내와 끈기에 대한 훌륭한 본을 보여 준다.

‘모리타니’에서의 초기의 노력

인구가 산재해 있는 ‘모리타니 회교 공화국’에서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사업 역시 협회의 ‘다카르’ 지부의 감독을 받게 되었다. 1966년에 처음으로 증거 활동 보고가 그 지역으로부터 들어왔다. 이것은 그 사막 거주민들을 위한 하나의 조그마한 ‘오아시스’가 있음을 지적해 주었다. 주로 ‘아라비아’ 방랑 유목민들로 구성되어 있는 그 주민들은 현대 문명의 이기는 거의 즐기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낙타가 주요 교통 수단 중 하나이다. 공식 언어는 ‘프랑스’어이다. ‘아랍’어가 국어로서 대부분의 거민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사업에 대한 공식적인 태도는 매우 비우호적이다. 그리고 현재의 상황하에서 제자를 삼는 일은 쉽지 않다. 1966년의 두명의 전도인은 자매들로서, 고용 계약으로 ‘모리타니’에 파견된 사람들의 아내로서 자매였다. 그들은 1967년 5월말에 그 나라를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빛은 1968년 말에 수도인 ‘누아코트’로 이사간 한 형제에 의하여 계속 비쳐지고 있었다. 그는 새로 침례를 받았지만, 우리의 서적을 전하고 가정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데 있어서 많은 일을 수행하였다. 후에 그가 ‘프랑스’로 이사했을 때, ‘세네갈’의 국경 지역 ‘로소’에 사는 한 격지 전도인이 매달 증거하기 시작했다. 이 관심을 가진 여자는 ‘다카르’까지 빈번히 여행할 수 있었으므로 영적인 격려를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다카르’에 있는 한 자매가 서신으로 그와 성서 연구를 했다.

‘세네갈’에서의 큰 발전

‘세네갈’에서의 우리의 사업은 계속 발전했다. 그리고 ‘다카르’에 지부 사무실이 세워진 후, 보다 밀접한 감독을 받게 되어 국내 조직은 정말로 크게 강화되었다. 1966년에는 16명의 특별 ‘파이오니아’와 선교인을 포함하여 98명의 전도인이 보고함으로써 33%의 증가가 있었다. 정기적으로 개최된 순회 및 지역 대회는 영성을 더욱 강화시켜 주었다.

이 대조점이 많은 나라에 진리의 빛이 처음으로 비치기 시작한지 약 15년이 지난 후인 1967년에 최고 120명이 봉사에 참여함으로써 전도인 100명선을 돌파했다. ‘상루이’, ‘디에스’와 ‘지긴코르’에서 열정적인 보고가 정기적으로 들어오고 있다. 직업을 ‘세네갈’화하는 정부의 계획 때문에, 매년 많은 형제들이 ‘세네갈’을 떠남에도 불구하고, ‘다카르’에 있는 두개의 회중은 꾸준하게 확장하고 있었다. 20명의 전 시간 왕국 선포자들은 그 다양한 지역을 계속 방문함으로써 봉사 활동의 선두에 나서고 있었다. 그 해 기념식에 268명이 참석한 것을 보는 것은 정말로 가슴흐뭇한 일이었다! ‘세네갈’은 어부들의 낙원인 동시에, 또한 예수의 말씀과 일치하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사로잡히고’ 있었으며, 고기를 잡기 위해 그들의 영적인 그물을 던지기 위한 훈련을 받고 있었다.—누가 5:9-11.

협회의 출판물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알리는 일에서 이곳에서 훌륭하게 사용되었다. 특히 「깨어라!」 잡지는 잘 알려진 잡지이다. 그 잡지의 가치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에 의해 인정을 받고 있으며, 만나게 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깨어라!」를 읽었거나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잡지의 출판자가 ‘여호와의 증인’임을 알게 되면, 존경심을 가지고 주의깊게 듣는다. 「깨어라!」 덕분에 우리는 길거리에서 종종 발걸음을 멈추게 되며 최근호 잡지 한 부를 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한 많은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1960년대 후반기에, ‘세네갈’에 있는 전 시간 봉사자들의 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다. 1968년에는 더 많은 선교인들이 이 대조의 나라에 들어 오게 되었고, 최고 전도인이 139명에 달했고, 예수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서 339명이 함께 모였다. 처음으로, 증거 사업에 바친 시간이 50,000시간을 넘었고, 매달 266건의 성서 연구가 사회되었다. 장래의 성장을 위한 발판이 놓여지고 있었다.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

그리고 1969년에는 참으로 많은 축복을 누렸다! 전세계에 있는 형제들의 관대한 헌금의 도움으로, 많은 선교인들이 ‘유럽’과 미국에서 열리는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 중의 한 대회에 참석할 수 있는 특권을 즐겼다. 참으로 기쁜 일이었다! 선교인들 외에도 50명 이상의 국내 전도인들이 ‘파리’, ‘뉴렘베르크’와 ‘뉴우요오크’에서 열리는 대회들에 참석했다. 그 당시 ‘갬비아’에서 봉사하고 있던 세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는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한 대회에 참석하러 갔다. 모든 대회 참석자들은 앞에 놓여 있는 사업을 위해 생기와 힘을 얻고 돌아왔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1969년에 열린 더 큰 대회들 중의 한 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세네갈’을 떠날 수 없었다. 그래서 12월 25-28일에 ‘다카르’에서 열린 “지상의 평화” 지역 대회는 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13명의 새로 헌신한 사람들이 침례 연설중에 주어지는 두개의 질문에 “예!”라고 대답하기 위해 일어섰다.

그리하여 1969년은 이 대조의 나라에서 제자를 삼는 사업을 위해 많은 축복이 된 해였다. 즉 158명의 전도인 신기록을 달성하여 왕국 선포자들의 수에 있어서 15%의 증가가 있었고, 30명의 ‘파이오니아’들이 야외에서 활동했으며, 그들 가운데 19명은 특별히 훈련을 받은 ‘길르앗’ 졸업생들이었다. 또한 기념식에 참석한 수는 383명이었다.

우리가 1970년대에 들어서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어떠한 일이 있을 것인가? ‘아프리카’의 어떤 나라에서는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하여 공정치 못한 처사가 있었다. 이러한 일은 ‘아프리카’의 다른 여러 나라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종종 어떤 종교 신문들에는 교직자들의 선동으로 불리한 보도가 실리기 시작했다. 형제들은 박해의 시험을 견뎌낼 수 있기 위해 영적으로 발전하도록,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의 마음에 진리를 넣어 주도록 격려를 받았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1970년 봉사연도에 22명이 침례를 받음으로써 더 많은 증가가 있었다.

하나의 예외적인 모임

1970년은 여호와께 찬양이 된 특별한 행사 즉 12월 1-4일 사이에 있었던 하나의 이례적인 대회로 끝을 맺었다. ‘세네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선의자” 지역 대회는 그 때까지 있었던 것으로는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여호와와 그분의 보이는 조직이 미국과 ‘캐나다’로부터 140명의 형제들과 자매들이 방문해 올 수 있게 사랑스런 마련을 해 주어서 우리는 정말로 감사했다! 그들의 참석은 그 조그마한 ‘다카르’ 회중의 ‘오아시스’를 보다 큰 동산으로 변모시켰고, 그 대회가 정말로 국제적인 대회라는 맛을 풍기게 했다.

방문하는 형제들에게 ‘아프리카’의 진미를 맛보이기 위해 특별한 노력이 기울여졌다. 그들은 이엉을 얹은 ‘아프리카’식 “오두막”에서 숙박을 했다. 또한 대회장에서 방문객들에게 ‘아프리카’의 생활과 풍경을 보여 주기 위해 주로 이곳 선교인에 의해 하나의 특별한 ‘프로그램’이 준비됐다. ‘세네갈’의 시장 현장, 이곳에서의 증거 사업, 여러 가지 풍습, 토속적인 노래와 춤, 이 모든 것이 특별 ‘프로그램’에 들어 있었다.

이것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여러 면으로 특이한 하나의 대회였다. 25명의 지원자들이 침례를 받기 위해 자신들을 제공했다. 이 수자는 그때까지 1년 전체를 통해 ‘세네갈’에서 침례받은 전체 수보다 많은 수였다!

우리의 발전을 살펴봄

흥미롭게도, ‘세네갈’에서 처음으로 왕국 증인이 100명이 될 때까지는 17년이 걸렸지만, 그후 단 4년만에 200명선을 돌파하게 되었다. 왜냐 하면 1971년 4월에는 207명이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데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해에 기념식을 지킨 사람들의 수가 459명이나 된 것은 ‘세네갈’에서의 장래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갬비아’에 있는 형제들은 그들의 임지가 상당히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계속하고 있었다. 그들은 1971년에 기념식을 지키기 위해 24명이 함께 모인 것을 보고 즐거워했다. 이것은 7명의 국내 전도인들에게 참된 격려의 원천이 되었다. 그 당시 ‘말리’에 있던 조그마한 격지 집단은 특별 ‘파이오니아’ 한 사람과 정규 ‘파이오니아’ 한 사람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1971년 중에, ‘모리타니’에서는 3명의 격지 전도인이 야외 봉사 활동을 보고했다. 그 해에 ‘모리타니’에서는 처음으로, 22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이 축하되었다.

1972년에 ‘세네갈’에서 그 때까지 1년 중 가장 많은 수인 45명이 침례받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로 격려적이었다! 577명의 기념식 참석자 수와 241명의 최고 전도인 수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다. 전도인이 200명이 되는 데는 21년이 걸렸는 데 반해서 그 후 단 3년만에(1971년에서 1974년까지) 전도인 수가 300명선을 돌파했다. 1974년에 야외 봉사에 302명이 참여하고 기념식에는 전해보다 100명이 껑충뛴 705명이 참석한 것을 보고서 우리는 기쁨에 넘쳤다. 이러한 증가를 가져 오는 데 분명히 기여한 하나의 행사는 1973년에 가장 생기를 북돋아 준 행사 즉 “하나님의 승리” 국제 대회였다. 먼 나라들에서 방문해 온 약 100명의 형제들이 참석하여 우리를 격려해 주었다. 최고 참석자수는 그 때까지 최고 기록인 510명이었고, 23명이 침례를 받았다. 참석한 사람들은 믿음에 고착함으로 여호와의 승리에 참여하고자 하는 굳은 결의를 했다.

증가는 계속 고무적이어서, 1975년에는 왕국 선포자가 327명이었고, 기념식 참석자 수는 826명으로 훌륭한 기록을 보였다. 그러나 이들 새로운 사람들의 대부분은 대도시들, 특히 ‘다카르’에서 살고 있다. 증인의 방문을 받아 보지 못했던 많은 적은 마을들은 어떠한가?

“마을에서 마을로”

1976년 봉사 연도 중에는 임명되지 않은 구역의 많은 부분을 방문하기 위해 일치된 노력을 기울였다. 도로 사정이 나빠서 문제들이 많았지만, 여호와의 도움으로 훌륭한 일들을 많이 성취하였다. 다음의 말이 그 점을 밝혀 준다.

“우리는 음식과 요리 기구, 천막과 많은 서적을 잘 갖추어 준비했다. 도로 상태가 나쁜 것 말고도, 주민들이 문맹인 점과 우리 자신들이 지방 방언을 모르는 것이 커다란 문제였다. 하지만 자진적인 통역인들의 도움과 주요 방언으로 녹음한 ‘테이프’를 가지고 우리는 잘 해 나아갔다. 한 마을에서 마을 촌장이 한벌의 책을 받아보고 그 책들의 가치를 알고 나서는, 우리를 마을 집회 장소로 인도했으며 우리가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는 집집으로 찾아다니며 모든 사람들을 그곳으로 오도록 초대하였다. 30분도 못되어 대책 50부를 전했다.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길 상태가 나빴기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해변 고가도로’를 이용하여, 바위를 피하고, 모래 수렁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가곤했다. 한번은 모래 속에 숨겨져 있는 뾰족한 한 나무 토막에 두 바퀴가 ‘펑크’가 나서 급정거를 하게 되었다! 밀물에 자동차와 거기 실은 물건들이 쓸려 가기 전에 우리는 급히 마차를 세내서 그 바퀴들을 수리하기 위해 가까운 마을로 싣고 갔다. 그리하여 우리는 빠져나왔다! 우리가 20개의 마을을 방문한 4일 동안 347권의 성서와 서책, 320권의 소책과 663부의 잡지를 전했다. 그리고 20건 이상의 예약을 맡았다.”

우리는 그러한 지역에서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데 즐거움을 얻고 있는 사람들 위에 여호와의 계속적인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한다. 예수와 같이, ‘세네갈’의 그리스도인들은 도시에서 뿐만 아니라 “마을에서 마을로” 왕국 소식을 전파하고 있다.—누가 8:1, 신세.

불굴의 믿음

전도인의 수는 계속 증가했다. 1976년 ‘세네갈’에서의 기념식 참석자 수는 835명으로서, 훌륭한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1977년에는 최고 334명이 야외 봉사에 참여했다. 때때로 증가는 매우 느리다. 그러나 이미 진리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믿음 안에서 굳게 정박해 있는가? 얼마는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대다수는 믿음 안에서 강하게 되었고, 영적인 면으로 뿐 아니라 수적인 면으로도 증가하고 있다.

‘포어콜트’ 가족과 관련하여 이러한 예를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진리를 발견했는지를 이미 언급했다. 그러나, 무서운 재난을 당하게 될 때 그들의 믿음은 얼마나 강할 것인가? 먼저, 자동차 사고가 나서 큰 아들들 두명을 제외하고 온 가족이 중상을 입었다. 거의 모두가 병실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정규적인 성서 연구를 함으로써 가족의 믿음은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 고난의 때는 영성을 발전시켜야 할 중요성이 큼을 알려 주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파이오니아’ 정신을 배양했다. 장님인 ‘헨리’는 정규적인 전 시간 봉사를 하였고, 그 후에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그의 동생 ‘쟝 마르크’도 얼마 후에 동일한 일을 하였다. 그들의 어머니는 정규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그러나 이 열정적이고 연합된 가족에게 더 큰 위기가 닥쳤다. ‘포어콜트’ 자매가 대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 시간을 지혜롭게 사용하여 병실에서 증거했으며, 한건의 성서 연구를 시작했다. 그런데 비극이 또 닥쳤다! ‘포어콜트’ 자매가 퇴원을 하기 직전에 응혈로 인하여 갑자기 사망했다.

‘포어콜트’ 자매가 어린 자녀들을 포함하여, 가족들이 나타낸 장성된 반응을 알았더라면 행복하였을 것이다. 부활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정말로 훌륭했다. (요한 5:28, 29; 11:21-25) 그 당시 11세였던 그의 외동딸 ‘실비’는 장례식이 있은지 몇 시간 후에 신권 학교에서 담대하게 처음으로 학생 연설을 했다. 병원에 입원해 있던 그의 어머니를 위해 이 연설을 녹음해 들려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이제 어머니는 죽었지만 그 연설을 녹음했다. 녹음된 테이프를 받자, 어린 ‘실비’는 그것을 가슴에다 안고 “난 이걸 아주 잘 두어 둘테야. 그래야 엄마가 부활되시면 내가 한 처음 연설을 들려 드릴 수 있거든.” 하고 말했다.

‘포어콜트’의 아들 셋은 현재 전 시간 봉사를 하고 있다. 그들 중 두 사람은 ‘길르앗’ 학교에서 공부했는데, ‘헨리’는 제 55학기에, 그리고 ‘진 마르크’는 제 59학기에 참석했다. 그들은 ‘세네갈’에서 봉사하기 위해 돌아왔다.

‘갬비아’인들 가운데 활동적인 믿음

‘갬비아’에도 충실한 본들이 있다. ‘방줄’ 회중의 한 충성스러운 장로인 ‘랠프 필로트’가 오랫동안 숙환으로 고생하다 사망했다. 장례식에 참석한 수백명의 사람들에게 훌륭한 증거가 주어졌다.

‘갬비아’에 있는 우리 형제들에게 매우 중요했던 한 행사는 1976년 5월에 열렸던 훌륭한 순회 대회였다. 처음으로 세명이 ‘방줄’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두명은 ‘갬비아’ 지방인이었다. 한 사람은 1959년에 처음으로 접촉을 가졌었다. 수년 동안 그는 회중에 종종 나왔으며, 그 동안 자기 교회를 개혁하고자 노력했다. 결국, 그는 큰 ‘바벨론’에서 나와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그 후 침례를 받았다. 같이 침례를 받은 한 여자는 한 유명한 퇴직 교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갬비아’ 강에서 침례를 받는 일은 그 지역 사람들에게 훌륭한 증거가 되었다.

1977년에 ‘갬비아’에서 최고 왕국 선포자들의 수가 11명으로 67%의 전도인 증가를 보게 된 것은 정말로 즐거운 일이었다! 「여호와의 증인들과 피에 관한 문제」라는 소책자와 함께 의료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최근의 운동은 그 나라에서 우리의 사업과 성서적인 입장을 보다 더 잘 알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방줄’ 시에 있는 그 조그마한 전도인 집단은 자기들을 잊지 않고 매번 지구 방문이 서부 ‘아프리카’를 위해 계획되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 1978년 2월에, 그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사도 ‘바울’의 방문을 받을 때 가졌었던 그러한 즐거움으로 통치체의 ‘C. W. 바아버’ 형제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여행 동행자 ‘데이빗 머어칸트’ 형제를 맞이했다. 이 ‘갬비아’ 방문 중에 열렸던 특별 집회들에 참석한 사람들의 총수는 38명이었다.

‘말리’의 그리스도인들은 풍부한 축복들을 누리고 있다

‘말리’에서의 우리의 사업 역사상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가 1973년 1월에 세워졌다. 그 때의 세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다카르’에서 ‘버마코’로 이사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들의 열렬한 노력은 훌륭한 결과를 산출했다. 매달, 그들은 야외 봉사에서 200시간까지 바쳤고, 평균 300부의 잡지를 전했으며, 각자가 23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했다! 한 ‘파이오니아’는 한 달에 100건의 예약을 맡았다. 훌륭한 증거가 뒤따랐다. 1973년 중에 ‘파이오니아’들을 포함하여 ‘말리’에는 단지 7명의 증인이 있었다. 그러나 1975년에는, 23명이 “좋은 소식”을 선포하고 있었고, 1977년에는 야외에서 32명의 왕국 선포자들이 일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1977년 12월에 있은 “즐거운 봉사자” 지역 대회는 ‘세네갈’의 ‘다카르’로 여행할 수 있는 ‘말리’ 형제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경험한 그리스도인 환대와 우정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1978년에 ‘파리’에서 열리는 “승리의 믿음” 국제 대회에 참석할 것을 계획하였다. 물론 1978년 12월에 ‘다카르’에서 열릴 대회를 위해서도 동일한 풍부한 영적 잔치가 계획되었다.

우리는 계속 “목마른 자들”을 부른다

‘세네갈’에 있는 8개 회중에는 56명의 ‘파이오니아’와 선교인이 약 300명의 동료 신자들과 함께 나란히 일하고 있다. 사실은 ‘세네갈’, ‘말리’, ‘갬비아’와 ‘모리타니’에 있는 380명 이상의 왕국 선포자들은 약 11,000,000명의 인구에 비해, 외관상으로는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소수의 집단이다. 그러나, 여호와께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들은 영적인 가뭄에 대항하여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최근에 일부 사람들은 그들의 영적인 시력을 잃었지만,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며”, “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아신다.” (디모데 후 2:19, 신세) 그리하여, 항상 새로와지는 열심을 가지고 “좋은 소식”의 행복한 선포자들은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와서 생명수를 값없이 마시라’고 계속 초대하고 있다. (계시 22:17) 계속되는 한발로 심하게 영향을 받고 있는 이 대조의 나라인 ‘세네갈’에서, 우리는 여호와를 계속 섬기고 있으며, 현재의 영적인 낙원과 같이,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날 그 날을 위해 계속 준비하고 있다.—이사야 35:1.

그 동안, ‘세네갈’, ‘말리’, ‘모리타니’와 ‘갬비아’에 있는 여호와의 충실한 종들은, 마치 메마른 나라에서의 조그마한 ‘오아시스’처럼, 모든 샘의 원천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오라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초대를 계속할 것이다. 전세계에 있는 우리의 동료 신자들과 일치하게, 우리는 계속 다음과 같이 외친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이사야 55:1-3.

[208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세네갈

대가나

상루이

로우가

카이아르

디에스

므바케

다카르

루피스케

디우르벨

므보우르

파티크

카올라크

탬바코운다

비그노나

콜다

지긴코르

대서양

모리타니

말리

기니

갬비아

방줄(배더스트)

기니-비사우

[225면 삽화]

효과적인 증거가 오두막에서 오두막으로 행해진다. ‘세네갈’ 사람들은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주의 깊이 듣지 못할 만큼 바쁜 경우는 별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