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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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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500년, 포르투갈 탐험가들이 방금 상륙한 브라질에 대하여 페루 바스 데 카미냐는 포르투갈 왕에게 다음과 같이 서면으로 보고하였습니다. “이 곳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자원 때문에 ·⁠·⁠· 이 곳 사람들[인디오들]은 구원될 것입니다.” 이 말은 15세기와 16세기에 포르투갈이 해외로 영토 확장을 하게 된 한 가지 주된 이유를 밝혀 줍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국의 종교적 가르침을 다른 나라들에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브라질 주민들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를 구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성서에서 가르치는 것을 직접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포르투갈어 성경 전서를 최초로 구할 수 있게 된 것(일부는 유럽에서, 또 일부는 인도 남부에서)은 1751년이었습니다. 그 성서 중 일부가 브라질에서 사용하는 포르투갈어로 인쇄된 것은 125년이 더 흐른 다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서가 일부나마 브라질의 인디오 부족들이 사용하는 언어 중 하나로 발행된 것은 20세기에 깊숙이 들어와서였습니다.

브라질은 주된 언어가 스페인어가 아닌 남아메리카의 몇 안 되는 나라들 중 하나로서, 주된 언어는 포르투갈어입니다. 국토가 남아메리카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고, 칠레와 에콰도르를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남아메리카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브라질은 매우 다채로운 나라입니다. 이 곳 사람들은 열정적이고 우호적이며, 영적인 문제에 관심을 나타냅니다. 대다수(인구 1억 6100만 명 가운데 85퍼센트)는 가톨릭교를 믿는다고 주장하며, 이 가운데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영매술에 이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근년에 들어서 복음주의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수가 현저히 증가해 왔습니다.

참된 성서 교육이 시작되다

하느님의 뜻은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정확한 지식에 이르는 것”입니다. (디모데 첫 2:3, 4) 19세기가 끝나갈 무렵에 그러한 종류의 지식이 브라질에 전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1899년에 상파울루의 사라 벨로나 페르구손은 미국으로부터 우편을 통해 워치 타워 협회의 출판물을 처음으로 몇 부 받았습니다. 그 여자는 귀중한 성서 진리를 배움에 따라 그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약 25년 후 기회가 오자, 그는 침례를 받았습니다.

한편, 젊은 브라질 해군 병사 여덟 명이 뉴욕 시에 정박한 배에서 내려 휴가를 즐기다가, 성경 연구생들(당시에는 여호와의 증인이 그렇게 알려져 있었음)의 집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집회에서 포르투갈어 성서를 한 권 얻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성서를 이해하도록 도움을 받았습니다. 뉴욕에서 성경 연구생들과 여러 달 교제를 나눈 후 1920년 3월에 브라질에 돌아가서도 그들은 계속 함께 집회를 갖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배운 것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스페인어로 된 워치 타워 협회 출판물을 연구 보조서로 사용하였습니다. 포르투갈어 출판물을 전혀 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몇 년 후 조지 영이 브라질에 파견되어, 서적을 포르투갈어로 번역하고 발행하도록 마련하였습니다. 1923년에는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 지부가 리우데자네이루에 설립되어 이 광대한 나라에 성서 교육 활동을 진척시켰습니다.

많은 사람이 도우러 오다

이렇게 출발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발전은 더뎠습니다. 따라서 당시 워치 타워 협회 회장인 J. F. 러더퍼드의 권고로 1936년에 알스턴 율이 브라질에 도착해, 여호와께서 그분의 보이는 조직을 통해 마련하고 계신 영적 양식으로부터 그 곳에 있는 증인들이 좀더 온전한 유익을 얻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알스턴과 함께 온 사람으로, 알스턴의 아내 모드가 있었고, 동료 일꾼인 안토니우 피레스 데 안드라데도 있었는데, 그는 적어도 처음 얼마 동안은 알스턴의 통역자로도 일하였습니다. 3년 후에는 오토 에스텔만과 에리히 카트너가 파이오니아로 일하도록 유럽에서 파견되어, 사람들의 집을 찾아가 성서 진리가 어떻게 그들에게 유익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일을 헌신적으로 하였습니다. 그 후 1945년에는 길르앗 학교 제1기를 졸업한 두 명의 선교인, 찰스 D. 레스코와 해리 블랙이 왔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들은 물론 열심 있는 다른 많은 왕국 선포자들의 활동을 축복하시어, 1948년에는 브라질에 하느님의 말씀에 들어 있는 귀중한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여호와의 증인이 1000명이나 있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수는 급속히 증가하여 1957년에는 1만 명, 1968년에는 5만 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벧엘 집과 공장은 확장되어야 하였고, 1968년에는 지부 사무실이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상파울루의 더 큰 시설로 이전되었습니다. (1920년에서 1972년까지 브라질에서 수행된 활동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자 한다면, 「1973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영문] 33-88면 참조.)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구할 있게 함

50년쯤 전에, 브라질의 일반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미사에 항상 참석하고 마리아에게 항상 기도하고 사제에게 항상 순종하였지만, 성서는 결코 읽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한 가지 이유는, 사제들이 자기들의 양 무리에게 로마 가톨릭 교회의 출판 허가를 받지 않은 성서를 소유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처럼 교회의 승인을 받은 성서에는 모두 어마어마한 가격표가 붙어 있어 평신도들은 살 엄두도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 당시 증인들이 성서를 구경도 해 본 적이 없는 가톨릭교인을 흔히 만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선교인으로 일한 펀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주의 기도를 읽어 주곤 하였지요. 가톨릭교인들은 그 기도를 외우고 있었지만 그것을 성서에서 보고는 놀라더군요.” 많은 경우, 놀라움은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관심은 다음과 같은 요청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제게 성서를 한 권 구해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증인들은 기쁜 마음으로 브라질 성서 공회에서 구입할 수 있는 번역판을 구해다 주곤 하였습니다.

당시 상파울루에서 활동하던 열 명의 선교인은 그 도시에 있는 성서 공회의 판매 대리점을 자주 들락거렸습니다. 그러나 그 판매 대리점의 프로테스탄트교인 판매원들은 트라두상 브라질레이라—여호와라는 이름이 들어 있는 성서 번역판—의 재고 전량이 판매대에서 선교인들의 가방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하루는 판매원이 그 성서를 더 이상 줄 수 없다고 선교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그 후 곧, 트라두상 브라질레이라가 절판되었습니다. 많은 증인이 새로운 성서가 나오기를 갈망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1963년, 미국에서 열린 국제 대회에 브라질에서 온 대표자 57명이 참석해 있었을 때,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신세계역」 포르투갈어판이 발표되었습니다. 4년 후, 「신세계역」 포르투갈어 전역판을 구할 수 있게 되자, 성서를 감질나게 배부하던 시대는 마침내 끝났습니다.

지난 30년간, 협회 인쇄 공장에서 제작된 수백만 부의 「신세계역」이 이 나라로 흘러 들어가 대중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1987년에 브라질의 유력 주간지 「베자」는 「신세계역 성경—참조주」를 가리켜 이 나라에서 “가장 완벽한 성경 번역판”이라고 묘사하였습니다. 브라질의 여호와의 증인들(현재 43만 명이 넘음)이 공감하며 감격해하는 사실은, 증인들의 성서 배부 운동의 결과로 크고 작은 도시와 마을에 사는 많은 브라질 사람들이 마침내 현재 하느님의 말씀을 개인용으로 소유하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읽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서 진리를 개인적으로 가르침

성서를 읽는 것과, 읽고 있는 내용 및 그것을 적용하는 방법을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개인 성서 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합니다. 1968년—「신세계역」 포르투갈어 전역판이 발행된 지 1년 후—에 브라질의 5만 명의 증인들은 성서 연구에 도움이 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 경험 많은 파이오니아 자매는 그 책을 읽고 나서, “이 책은 수백만 명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될거야!” 하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그 말은 맞았습니다. 연간 서적 배부 수가 세 배 이상 증가하였습니다. 성서 연구 수도 극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브라질 남부 출신인 루테는 그 책으로 연구한 수많은 사람들을 대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진리」 책을 연구할 때, 나는 감사하기도 했고 화가 치밀기도 했지요. 죽은 자의 상태와 낙원 희망에 관한 진리를 배울 때에는 감사함을 느꼈지만, 가톨릭 교회가 평생 동안 나를 그릇 인도한 것을 알고는 화가 나더군요.”

그 후 1983년에 증인들은 새로운 성서 교육 보조서인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책의 포르투갈어판을 반갑게 받아들였습니다. 이 책은 온갖 계층에 속한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1996년 초에는 50만 명이 넘는 브라질 사람들이 성서 교육을 통해 유익을 얻고 있었는데, 대부분은 이 효과적인 가르치는 도구에 근거한 연구를 통해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글을 아는 브라질 대중이 「지상 낙원」 책 내용을 통해 감동을 받고 있는 동안, 2800만 명에 달하는 글을 모르는 브라질 사람들 중 다수는 「땅에서 영원히 사는 길」 팜플렛에 있는 그림들을 통해 성서 진리를 가르침받고 있었습니다. 지난 13년간, 이 팜플렛은 포르투갈어로 600만 부 이상 인쇄되었습니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성서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있습니까? 틀림없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중년이 지난 여성인 마리아의 경우를 고려해 보십시오. 이 팜플렛의 도움으로 그는 자기 이름이 마리아이지 세뇨라가 아닌 것처럼, 하느님의 이름도 여호와이지 세뇨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하느님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전혀 없었지만, 첫 성서 연구에서 이 새로운 진리를 감사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마리아는 자기를 가르치는 증인이 떠날 때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과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마리아의 이 진실한 소원은 분명히 이루어졌습니다. 여호와의 축복으로 브라질에서 성서 교육이 잘 발전하고 있습니다.

다시 인쇄할 있도록 공간을 마련함

지부 사무실이 상파울루로 이전한 지 3년 후인 1971년에 활동적인 증인 수가 7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그 해에 전국적으로 1202개의 회중이 있었고, 여호와의 증인은 공개 봉사의 직무에 1100만 시간 이상을 바쳤으며, 평균 5만 8902건의 가정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교육 프로그램에 필요한 지침과 도구를 제공하려면, 지부 시설을 다시 확장해야 함이 분명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인도를 구하면서 형제들은 이러한 필요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브라질에서는 여러 해 동안 포르투갈어판 「파수대」를 낡은 평판 인쇄기로 인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1957년에는 수요의 증가, 인쇄기(1918년에 제작된 것임)와 관련된 문제, 불충분한 종이 공급 등으로 말미암아 이 인쇄 업무가 뉴욕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이제, 인쇄기와 종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았기 때문에, 형제들은 브라질에서 인쇄 업무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쇄에 필요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지부 시설에 부속 건물을 증축하는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동시에, 고속 활판 윤전 인쇄기를 수입하는 마련도 하였습니다. 우리 잡지는 교육적인 목적으로 발행되므로, 인쇄기에 부과되는 수입 관세를 면제받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런데 종교 단체들이 물품에 대한 면세 승인을 받은 후 그 물품을 이윤을 많이 남기고 파는 일이 이따금 있었습니다. 이해할 만하게도, 일부 당국자들은 종교 단체에 더 이상 면세 승인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근원—불가지론자인 한 정부 관리—으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관리는 우리의 면세 요청에 관심을 보였고, 우리가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알려 주었습니다. 꼭 4개월 후인 1972년 11월에 바라던 면세 승인이 났습니다. 협회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던 아우구스투 마샤두는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우리는 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사실상 아무 것도 모르고 시작하였지만, 여호와께 대한 확신을 가지고 연구를 해 가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얻어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참으로 그분의 종들을 인도하십니다.”

배워야 할 것이 많았다

권지(卷紙)를 사용하는 활판 윤전 인쇄기로 인쇄할 예정이었으므로 새로운 도전이 제기되었습니다. 완전히 해체된 인쇄기가 47개의 커다란 운송 상자에 실려 1972년 12월에 도착하였는데, 그 중에는 무게가 무려 6톤이나 나가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이 인쇄기가 올바로 설치되도록 하기 위해, 세계 본부에서 마일런 밀러가 파견되었습니다. 그는 아홉 명의 형제로 이루어진 팀의 작업을 조정하여 인쇄기를 설치한 다음, 그들에게 운전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인쇄기 설치에 참여한 것은 그들이 그 기계를 관리하는 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대다수가 젊은 형제들로서, 그 때까지 인쇄 경험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설치 작업에 참여했던 카를 리츠는 공장 감독자가 되었으며 지금까지 계속 그 직책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와 거의 동시에, 잡지 인쇄를 위해 수입한 종이가 도착하였습니다. 종이를 가져오도록 벧엘에서 항구로 파견된 에우클리데스 주스티누는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첫 선적량이 150톤이나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종이를 산투스의 항구에서 상파울루의 벧엘로 수송하기 위해 트럭들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실은, 항구에 있는 지게차는 권지를 트럭까지밖에 올려 주지 못하므로 그 육중한 권지들을 트럭에 가지런히 싣기 위해서는 힘센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샤두 형제와 나는 트럭에 올라가 권지—각각 무게가 400킬로그램이나 나가는 권지—를 기울여 세운 다음 굴려서 가지런히 놓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역 인부들은 넥타이를 맨 두 사람이 권지들을 굴리느라 애쓰는 모습을 보고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다행히도 점심 때가 다 되어 우리는 곧 일을 중지하였습니다. 우리는 점심 시간에 인부들을 사서 일을 끝냈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은 권지를 사용하는 윤전기로 인쇄하는 것과 관련된 일들을 점차 배워 나갔습니다.

1973년에 권지를 사용하는 두 번째 윤전기가 도착하였는데, 잡지 인쇄 속도는 시간당 1만 2500부로 첫 번째 윤전기와 비슷합니다. 그 후 더 많은 인쇄기들—4색 인쇄 기능을 갖춘 인쇄기들—이 설치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러 해 동안 성서 서적의 수요를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 증축된 벧엘 건물의 봉헌

이 두 번째 인쇄기가 도착하기 약 4개월 전에 새로 증축된 벧엘 건물을 봉헌하기로 계획이 세워졌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건축 공사가 제때에 마무리될 것인지 의구심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지부 감독자인 프레드 윌슨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우리 형제들을 잘 모르시는군요.” 형제들은 마음을 다해 일하였고, 밤늦게까지는 물론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쉬지 않고 일하였습니다. 봉헌식 날인 1973년 3월 17일에도 형제들은 여전히 마무리 손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정오가 되자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방문객들이 로비로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 마지막 쓰레기를 가득 실은 트럭 한 대가 뒷문으로 빠져 나갔습니다!

당시 워치 타워 협회 회장인 네이선 H. 노어와 브루클린 공장 감독자 맥스 라슨이 이 행사에 참석하였습니다. 노어 형제가 봉헌사를 하였습니다. 다음날 있은 세 시간의 특별 프로그램에는 2만 8000명이 넘는 군중이 참석하여 이비라푸에라 체육관을 가득 메웠습니다. 그 모임에서 노어 형제는 일용할 성구를 정기적으로 고려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한 다음, 포르투갈어로 처음 발행된 「1973 연감」을 발표하였습니다. (이전에는, 일용할 성구 토의의 기초로 사용되던 내용이 포르투갈어판 「파수대」에 실렸다.) 하느님의 말씀의 일부를 그처럼 매일 읽고 토의하는 것은 여호와의 백성의 생활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신 바와 일치한 일입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마태 4:4.

“하느님의 승리” 국제 대회

1973년은 12월 26-30일에 상파울루의 파카엠부 스타디움에서 열린, 브라질에서 여호와의 백성이 일찍이 가졌던 대회 중에서 가장 큰 대회로 막을 내렸습니다. “하느님의 승리”라는 주제를 알리는 커다란 기구를 스타디움 위에 띄워 놓았습니다. 대회 프로그램은 하느님의 왕국에 의한 하느님의 승리가 참으로 인류에게 가장 큰 축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참석자들의 확신을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참석자들은 심지어 대회 중에도, 성서에 기록된 하느님의 뜻에 관한 교육으로 인해 수만 명의 브라질 사람들의 생활이 이미 변화되었다는 증거를 보았습니다. 28년 전, 노어 형제는 근처에 있는 체육관에서 765명의 청중에게 연설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거대한 이 스타디움을 바라보면서 브라질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이 시설을 가득 메울 때가 과연 올 것인지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1973년에 그 생각이 실현되어, 노어 형제가 바로 그 스타디움에서 초만원을 이룬 9만 4586명의 청중에게 연설을 하였습니다! 바로 전날에는, 3187명의 새로운 봉사자가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5일간의 대회 자체가 하느님의 승리의 증거였습니다!

이 나라 전역에서 대표자들이 참석하였습니다. 약 40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아마조나스 주의 주도인 마나우스 시에서는 대표자들이 세 대의 버스와 네 대의 승용차로 왔는데, 위험한 아마존 횡단 도로를 여행한 최초의 그룹이었습니다. 또 다른 그룹은 북부 해안 지방의 벨렘에서 3000킬로미터 이상을 여행해 왔고, 리우데자네이루 주에서는 한 대의 특별 기차와 180대가 넘는 버스가 기쁨에 찬 대표자들을 싣고 왔습니다. 대회가 매우 널리 알려져, 상파울루 주지사와 상파울루 시장이 대회장을 방문하였습니다.

이 수많은 대표자들을 위해 숙소를 마련하는 것은 도전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 중 다수는 호텔 숙박비를 지불할 형편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약 2만 1000개의 방에 대한 요청은 숙박부에서 처리하였습니다. “후대에 힘쓰”라는 성서의 조언과 일치하게, 증인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자기 집을 숙소로 제공하였습니다. (로마 12:13) 6000명이 넘는 대표자들은 왕국회관에 숙박하였습니다. 아마조니아에서 온 대표자들은 모두 어떤 자매의 남편이 내 준 공장에서 묵었습니다. 증인들과 관심자들은 매트리스를 빌려서 사용하였습니다.

두 달 후, 동일한 대회 프로그램이 살바도르와 바이아에서도 진행되었는데, 3만 2348명이 참석하였습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여호와의 증인은 담배 사용을 탐탁지 않게 여겨 왔지만, 1973년까지만 해도 그 문제의 심각성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일부 증인들은 침례를 받았는데도 담배를 계속 피웠습니다. 그러나 적절한 때가 되자,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종들이 이 습관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영향을 미쳐야 하는 성서 원칙들을 분별하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고린도 둘째 7:1; 갈라디아 5:19-21, 「신세—참조주」 각주 참조) 「파수대」(포르투갈어판) 1973년 12월 1일 호에서는, 그 때 이후로 침례받기 원하는 사람은 모두 담배 사용을 중지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이미 침례를 받았는데 아직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이 회중의 일원으로 남아 있고 싶다면, 그 사람에게는 6개월의 기한을 주어 그 습관을 끊도록 하였습니다.

올바른 동기를 가진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더러운 습관을 끊을 수 있었습니다. 1964년에 침례를 받았지만 그 당시에 아직 담배를 피우고 있던 한 형제는, 다른 사람들이 건강을 이유로 담배를 끊을 수 있다면 자기에게는 여호와를 계속 섬기기 위해 담배를 끊어야 할 훨씬 더 많은 이유가 있다고 추리하였습니다. 제명된 사람들이 일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 중 다수는 마침내 정신과 마음이 변화되어 담배를 끊고 복귀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백성은 이런 식으로 거룩함에 관한 하느님의 높은 표준에 맞추어 자신들을 계속 조정하였습니다.—레위 19:2; 베드로 첫째 1:16.

때는 거의 찼는가?

주권 문제에 있어서 여호와의 편에 긴급히 서야 할 필요가 있음을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1970년대에 「왕국 소식」 전도지를 집중적으로 배부하는 일이 수행되었습니다. 「왕국 소식」 16호의 제목은 「인류에게 때는 거의 찼는가?」였습니다. 지난 25년간 벧엘 봉사를 해 온 아마루 산투스는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협회에서는 각 회중에 전도인당 100부에 해당하는 전도지를 보내어, 1974년 3월 22일부터 31일까지 단 열흘 동안 무상으로 배부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전도지는 흥미를 불러일으키도록 인쇄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왕국 소식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눈길이 끌리게 되었습니다. 7000명이 넘는 새로운 전도인들이 다른 증인들에게 가담하여 800만 부의 전도지를 배부하였습니다.”

전도지를 받은 일부 사람들은 자기들이 배운 내용에 대해 신속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상파울루의 22세 된 한 대학생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상황이 긴급하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을 보조 서적으로 사용하여 성서 연구를 하기로 동의하였습니다. 그는 곧 대학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가 배우고 있는 것에 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하였고, 석 달 후에는 그도 다른 전도지의 특별 배부에 참여하였습니다.

외딴 곳에 사는 사람들까지 찾아가기 위해 진지한 노력이 기울여졌습니다. 청소년 전도인들이 기쁘게 참여하였습니다. 그러한 청소년 전도인 중 두 사람이 리우그란데두술 주에서 행한 일에 관하여, 당시 15세였던 벨라르미누 콜라는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우리는 새벽 6시에 집을 나섰지만, 집들이 띄엄띄엄 흩어져 있어 오전 10시까지 아무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이따금 말을 타고 갈 수 없는 오솔길이 있어서 걸어가야 하였습니다. 우리는 저녁 8시 30분까지 봉사하다가 어떤 관심자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7시에 다시 봉사를 시작해서 오후 3시까지 봉사하다가 집을 향해 떠나면 한밤중에 도착하였습니다. 이틀 동안 90킬로미터를 걸어 다녔지만 전도지는 30부밖에 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왕국 선포자들은 자기들이 전하는 소식이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의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며, 브라질에 있는 수많은 사람이 그 소식으로부터 유익을 얻을 기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전도지 16호의 제목이 알려 주는 긴급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증인들을 피해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1974년, 당시 특별 파이오니아였던 에디발두 질 다 실바와 그의 아내 마를리는, 상파울루 주 리베이랑프레투 근처의 외딴 농장에 사는 한 여자와 한 달에 두 번씩 성서 연구를 하도록 마련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곳에 가기 위해 새벽 4시에 우유 배달 트럭을 얻어 타고 간 다음 또다시 10킬로미터를 걸어가곤 하였습니다. 몇 개월간 연구가 잘 진행되다가 남편의 반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남편은 심지어 새로운 주소를 아무에게도 남기지 않은 채 가족을 데리고 이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8년 후 지역 대회에서 한 부부가 에디발두와 마를리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희를 기억하세요? 두 분이 농장으로 방문하셨던 그 부부입니다.” 그 남편은 자신이 이사를 간 것은 여호와의 증인을 피해 도망가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새 집에 도착해 트럭에서 가구를 내리기도 전에 두 명의 증인이 나타나 그들에게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목적에 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 남편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서 연구를 받아들여 잘 발전하였고, 몇 달 후 아내와 함께 침례를 받았습니다.

영적으로 새 힘을 주는 방문

1974년 9월에 상파울루의 형제들은 특별한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무슨 일이었습니까? 당시 워치 타워 협회 부회장인 프레더릭 W. 프랜즈가 방문한 것입니다. 이번이 그의 첫 번째 브라질 방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1945년에 상파울루에서 노어 형제와 함께 대회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칼 클라인을 동반하였는데, 그는 그 후 곧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에서 프랜즈 형제와 함께 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상파울루에서 3일간 휴가를 보내고 있었지만, 또한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 “얼마의 영적인 선물”을 나누어 주는 일을 즐거워하였습니다. (로마 1:11, 12) 영적인 일을 논의하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신속히, 한 극장에서 특별 모임을 갖도록 마련하였습니다. 총 200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1967년 이래 지부 성원으로 일해 온 마사수에 키쿠타는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프랜즈 형제가 유창한 포르투갈어로 연설을 하는 바람에 모두 놀랐습니다. 그는 80세인데도 불구하고 성서나 어떤 골자도 사용하지 않고(그의 시력이 이미 떨어지고 있었음) 시편 91편 전체를 두 시간 이상 한 구절씩 인용하며 설명하였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파라과이의 형제들을 위해서 스페인어로도 똑같은 일을 하였습니다!

열한 명의 고아가 진리를 배우다

그 즈음 고이아스 주의 한 가족은 인간이 고난을 겪는 이유와 삶의 진정한 목적을 이해하도록 도움을 받을 절박한 필요가 있었습니다. 심각한 재정 문제로 우울해 있던 아버지는 자살하였고, 몇 달 뒤 어머니마저 심장 마비로 사망하였습니다. 비냘 가족의 남은 자녀들은 고아가 되었는데—모두 11명이었습니다. 1974년에 이 가족에 이러한 재난이 닥쳤을 때, 맏이는 17세였고 막내는 생후 40일밖에 안 되었습니다. 이 중 다섯 명은 결연한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여 함께 살 수 있었지만, 그보다 어린 여섯 명의 자녀는 친척과 함께 살도록 보내야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위로하려고 그들이 겪는 비극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그런 말은 그들에게 고통만 더할 뿐이었습니다.

맏이인 마리아 루시아는 하느님과 가톨릭 교회에 대해 진지한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어떤 증인이 자신의 직장 동료에게 무료 성서 연구를 제안하는 것을 듣고 관심이 생겼습니다. 마리아가 관심이 있는 것을 본 어떤 직장 동료가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마리아 루시아는 며칠 후 그 증인을 다시 보자 직장 동료에게 제안했었던 무료 성서 연구를 진지하게 요청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요한 5:28, 29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에 설명되어 있는 부활에 대한 약속을 보고 희망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악을 허락하시는 이유에 대해 성서에서 알려 주는 내용을 배우게 되자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잊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때가 되자 막내를 제외한 모두가 다시 한 가족으로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서로 격려하였습니다. 11명의 자녀 모두 성서 연구를 하여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성서에서 그리스도인 행동 원칙을 배웠습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그들은 더는 고아가 아니었습니다.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를 백 배나 갖게 되었습니다. (마가 10:29, 30) 현재, 비냘 가족의 자매들 중 하나는 특별 파이오니아이고, 또 다른 하나는 파라과이에서 선교인으로 일하고 있으며, 파울루는 아내와 함께 브라질 벧엘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전도인 10만 명!

여러 해에 걸쳐 왕국 전도인 수가 꾸준히 증가하였습니다. 1959 봉사 연도는 전년도에 비해 23퍼센트의 증가를 나타냈습니다. 그 후 10년 동안은 증가율이 9퍼센트에서 14퍼센트 사이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1975년에 침례받은 자 수가 1만 6789명으로 증가하여 전도인 수가 처음으로 10만 명 선을 넘어섰는데, 전년도에 비해 17퍼센트 증가한 것입니다. 또한 격지 구역이나 거의 돌보지 못하는 구역에서 봉사하는 것을 더 강조함에 따라 야외에서 일하는 특별 파이오니아 수도 처음으로 1000명 선을 넘어섰습니다. 그 후 10년 동안 증가율이 둔화되었지만, 전파 활동은 진전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증가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브라질의 인구는 1억 명이 넘었는데, 그 중 약 20퍼센트의 주민에게는 좋은 소식이 정기적으로 전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 중 다수는 대도시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조그만 읍에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그리고 관심자가 충분히 있는 곳에 집회를 마련하기 위해, 통치체에서는 이미 특별 파이오니아로 일하고 있는 1000명에 더하여 임시 특별 파이오니아를 임명하도록 승인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일부 파이오니아들이 3개월간 임명되었는데, 후에 그 기간이 연장되었습니다. 이 임시 특별 파이오니아가 처음으로 임명된 것은 1985년 11월이었는데, 그 때 128명이 113개 읍으로 파견되었습니다. 결과는 매우 고무적이었습니다.

고이아스 주의 한 읍에서 파이오니아들이 「신세계역」을 한 부 요청한 적이 있는 어떤 여자를 재방문했는데, 그 여자가 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여자는 「신세계역」 성서에는 하느님의 다른 이름—여호와—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 성서를 읽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도움을 받아 그 문제를 조사해 보고 나서 그 여자와 친구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이 그들 자신의 성서에도 여러 곳에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는 자기 교회의 주임 사제에게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 결과, 45건의 새로운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피아우이 주에서는 진리의 물에 목마른 한 남자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파이오니아들과 만나기 전에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책을 빌려 일부를 읽었습니다. 읽고 있는 내용에 대해 매우 열정적이 된 그는 그 책을 손으로 베끼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이 그를 만났을 때는 이미 21장까지 베꼈습니다. 인쇄된 책을 자기 것으로 받아 그 책으로 정기적인 성서 연구를 하게 되자 그는 참으로 기뻐하였습니다!

세르지페 주에서 일하는 두 명의 파이오니아 자매는 사제 대리로 일하는 교회 부제로부터 많은 반대를 받았습니다. 어떤 결과가 있었습니까? 그 부제는 확성기를 사용하여 대중에게, 여호와는 하느님의 이름이 아니며 오히려 그 이름은 미국의 한 분파가 지어 낸 것이라고 공표하였습니다. 이 일은 많은 교회 성원들의 관심만 불러일으켰을 뿐이며, 파이오니아들은 얼마 안 되어 가정 성서 연구를 67건이나 사회하게 되었습니다!

리우그란데두노르테 주에서 파이오니아들은 한 여자와 연구를 시작하였는데, 그 여자는 첫 연구가 상당히 즐거웠기 때문에 다음 연구에 이웃 사람들이 오도록 초대하였습니다. 그 준비로서 그 여자는 학교에서 긴 의자를 다섯 개 빌려 왔습니다. 30명이 참석하였는데, 더 많은 사람이 참석하기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음번부터는 연구가 학교 안뜰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마투그로수두술 주의 한 조그만 읍에서는 어떤 의사와 그의 아내가 성서 연구를 하였고, 때가 되자 야외 봉사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의사가 집집으로 성서에 대하여 이야기하러 다니는 광경은 그 읍에서 대단한 이야깃거리가 되었습니다. 이 부부와 연구하던 파이오니아들이 떠날 필요가 있게 되었을 때 그 곳에 남은 활동하는 증인은 오로지 그 의사와 그의 아내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보조 파이오니아로 일하였고, 후에는 정규 파이오니아로 일하였습니다. 처음에 그 부부는 자기들끼리만 집회를 가졌지만, 얼마 안 있어 10명의 전도인으로 이루어진 회중이 형성되었습니다. 그 부부는 현재 브라질 벧엘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첫 대회 회관들

전국적으로 여호와의 증인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우리가 순회 대회를 열 만한 마땅한 장소를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우리 소유의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 첫 시도를 한 곳은 바이아 주의 살바도르였는데, 일년 내내 온화한 열대성 기후를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1975년에 부분적으로 덮개를 한 계단식 원형 대회장이 어떤 계곡의 경사지에 건축되었는데, 기다란 콘크리트 좌석에 4000명은 충분히 줄지어 앉을 수 있었습니다. 이 곳은 대회 공원이라고 불리었습니다. 같은 해 후반기에, 상파울루 시에서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상파울루 주 리베이랑피레스 시의 아름다운 숲이 있는 지역에 대회 회관 건축을 시작하였습니다. 몇 년 후, 또 하나의 대회 회관 건물을 앞서 지은 대회 회관 건물과 나란히 건축하여, 폐쇄 회로 텔레비전으로 연결하였습니다. 두 대회 회관 건물의 총 수용 좌석은 3300석입니다. 1979년, 리우데자네이루 근처의 두케데카시아스에 또 다른 대회 회관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대회 회관들의 건축을 위해 일한 사람들은 열정적인 영을 나타냈습니다. 이 훌륭한 영이 많은 사람들의 경험 부족과 적절한 기계와 장비의 부족을 보충해 주었습니다. 일례로, 리베이랑피레스에서는 기초를 놓기 위해 단단한 지반이 나올 때까지 7미터 깊이로 팔 필요가 있었습니다. 굴착기를 사용하였지만, 필요한 깊이의 반 정도까지밖에 못 팠습니다. 나머지는 곡괭이와 삽으로 파야 하였는데, 그러한 구덩이를 20개 이상 파야 하였습니다.

콘크리트를 비비고 붓는 일은 어떠하였습니까? 우리에게는 리베이랑피레스의 공사에 이용할 수 있는 콘크리트 생산 공장이나 콘크리트 믹서 트럭이 없었습니다. 벧엘 가족 성원인 나탈 바툴레비신스는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수작업으로 재료를 공급하는 두 개의 낡은 시멘트 믹서에서 콘크리트를 비벼서 외바퀴 손수레로 작업 장소까지 날랐습니다. 20명에서 30명의 자진 봉사자가 줄지어 손수레를 밀고 다녔습니다. 높아서 올라가기 어려운 장소에는 또 한 사람이 갈고리로 손수레를 끌어서 도와 주었습니다. 바닥 콘크리트 작업을 위해 모든 자진 봉사자—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포함해서—가 이 일에 참여하였는데, 24시간이 걸릴 때도 있었습니다.”

새로운 관리 체제

전세계의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1976년은 지부 조직 구조에 의미 심장한 변화가 있었던 해였습니다. 그 해 2월 1일부터 지부 위원회 마련이 시행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감독자가 아니라 통치체를 대표하는 영적으로 장성된 형제들로 이루어진 위원회가 각 나라의 활동을 감독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이 형제들은 모두 영적인 연로자들로서 하느님의 양 무리의 목자들입니다.

브라질에서는 그 위원회가 처음에 7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마사수에 키쿠타, 존 쿠슈니르, 아우구스투 마샤두, 카를 리츠, 아마루 산투스, 하인리히 셀베르트, 프레드 윌슨입니다. 그 후 여러 해가 지나면서, 셀베르트 형제는 가족 책임 때문에 브라질을 떠나야 하였고, 쿠슈니르 형제는 1988년에 사망하였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계속 위원회에서 일하고 있고, 1995년에 외스텐 구스타브손이 여섯 번째 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976년 말경에는 브라질 지부 위원회의 몇몇 위원들이 전세계에서 온 다른 지부 대표자들과 함께 통치체가 뉴욕에서 개최한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모임은 위원들이 자신들의 책임과 통치체 성원들과 세계 본부를 좀더 충분히 아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대회로부터 많은 유익을 얻음

1976년에는 또한 대회에서 사용하는 음향 시설을 향상시킬 필요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전에는 좁은 장소에 맞게 고안된 앰프, 확성기, 혼 스피커를 사용하였습니다. 특정한 행사 때에는 이따금 종류가 서로 다른 여러 개의 기기—그 중 일부는 매우 낡았음—를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음향 재생이 불충분하여 프로그램이 중단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여러 해에 걸친 작업과 많은 새로운 장비가 필요하였습니다. 지금은 대부분의 대회에서, 참석한 모든 사람이 영적인 프로그램을 명료하게 듣고 즐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일인데, 1995년에 82개의 도시에서 158개의 지역 대회가 열렸으며 72만 4849명이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활력과 자원을 바쳤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그러합니다. 참석자들은 프로그램으로부터 충분한 유익을 얻도록 최상의 음향을 제공받을 만하였습니다. 그 결과에 만족한 리우그란데두노르테의 한 순회 감독자는 1994년에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우리 대회의 음향 상태가 훌륭했다고 알려 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그 결과, 형제들은 귀기울여 잘 들었고 필기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런데 전국에 있는 왕국회관의 음향 상태는 어떠하였습니까? 1993년, 전국적으로 100개 이상의 특별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회중 집회를 위한 음향 상태를 향상시키는 방법에 관한 실용적인 제안을 하였습니다. 9000명 이상의 형제들이 이 강연에 참석하였는데, 한 강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피아우이 주의 플로리아누에서는 극심한 한발 기간에 강연이 행해졌고, 형제들은 재정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초대받은 사람이 모두 참석하였습니다! 참석하기 위해 12시간 이상 여행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카쇼에이라스데마카쿠에서 자유가 중단되다

이따금 공무원들의 오해로 인해 장애가 발생하였습니다. 1976년 6월 13일 일요일, 리우데자네이루 주, 카쇼에이라스데마카쿠에서 그 곳 판사가 내린 명령 때문에 경찰이 왕국회관을 봉쇄하였습니다. 또한 이 자치 시에서 왕국을 전파하는 일도 모두 금지되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이틀 전에 한 17세 된 청소년이 우발적인 사고로 엽총에 의해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는 병원으로 실려 갔는데, 내출혈과 급성 빈혈 증세를 보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에게, 아들을 구하기 위해 의사로서 최선을 다하지만 수혈은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아버지가 분명히 밝힌 의사와는 반대로 수혈이 행해졌지만 그 청소년은 수술 중에 사망하였습니다. 책임 소재를 밝히기 위해 사법적 조사가 행해졌습니다. 결정을 내리는 데 왜곡된 뉴스 보도가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왕국회관을 폐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그 지방 회중의 감독자인 라디슬라우 레키는 변호사 네 명의 도움을 받아 집행 중지 명령을 신청하였습니다. 마침내 10월 26일에 그 신청에 대한 심리가 있었습니다. 변호사 중 한 사람인 오를란두 두 N. 파울라 형제는 그 적절한 기회를 이용하여 그 사건에 대해 재빨리 구두 진술을 하였습니다. 판사들은 만장 일치로 집행 중지 명령을 승인하여 원래의 명령을 취소하였으며, 왕국회관을 다시 사용하고 왕국을 전파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재확인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듬해의 “즐거운 봉사자” 지역 대회에서는, 피를 신성한 것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여호와의 요구 조건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연설이 있었습니다. (레위 17:10, 11; 사도 15:28, 29) 그 대회에서 「여호와의 증인과 피에 관한 문제」라는 소책자가 발표되었고, 1978년 4월과 5월에는 그 소책자를 판사, 변호사, 의사, 간호사, 병원 관리인들에게 전하는 운동이 수행되어, 그들이 여호와의 증인이 취하는 입장을 이해하고 존중하도록 도우려는 노력이 기울여졌습니다. 형제들에게는 자신들의 가정의에게 그 소책자를 한 부씩 주도록 권고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전도인들이 개인적으로 접촉하기 어려운 의사들이나 기타 전문가들에게도 서신을 첨부하여 이 소책자를 전하도록 형제들이 임명되었습니다. 당시 브라질에는 7만 명이 넘는 의사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큰 계획이었고 성공적으로 완수되었지만, 더 많은 일을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후에, 이 문제에 다시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었습니다.

많은 증가를 위한 준비

왕국 선포자 수와 그들의 증거 활동의 범위가 한층 더 늘어나고 있어서 이에 대비해야 하였습니다. (비교 이사야 54:1-3) 출판물을 필요한 만큼 생산하기 위해, 활판 윤전 인쇄 장비를 더 현대식이고 더 빠른 오프셋 인쇄기로 바꿀 필요가 생겼습니다. 더 큰 작업 공간이 필요하였습니다. 1975년에 이러한 필요에 대처하기 위해 임시 방편으로 리베이랑피레스의 대회 회관 건물을 증축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가 사용하는 종이의 일부를 저장할 공간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나 지부 사무실과 인쇄 공장뿐 아니라 벧엘 숙소를 확장할 더 큰 부지를 찾아야 함이 분명하였습니다.

상파울루의 기존 시설 부근에 있는 부지를 더 구입할 수 있는지 고려하였지만, 토지 이용법과 비싼 부지값 때문에 그 생각은 실질적이 아니었습니다. 그에 대한 대안은 지부를 완전히 새로운 장소로 이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통치체에서는 상파울루 시 외곽에서 부지를 찾아보라고 권하였습니다.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본 후, 1977년 8월에 상파울루 시에서 약 150킬로미터 떨어진 상파울루 주, 세사리우란제 자치 시에 있는 115헥타르의 부지를 구입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너무 작은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부지를 구입하자마자 초대장을 보내어 건축을 준비하는 일을 도울 자진 봉사자들을 모았습니다. 또한 건축 계획안을 통치체에 제출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정도의 건축 계획이면 앞으로 오랫동안 확장을 감당할 충분한 공간이 마련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실은, 너무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통치체에서 온 답장을 보고 우리 모두는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분은 너무 작은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계획한 것의 두 배 정도로 건축해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숙소 및 공장/사무실의 공간을 상파울루에 있는 것보다 다섯 배나 크게 계획할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러한 공간이 필요하였습니까? 1977년 이래 브라질의 증인 수는 네 배로 증가하였고, 매년 봉사의 직무에 바치는 시간의 양도 그 때보다 약 여섯 배나 많습니다.

새 지부 시설을 건설 회사에서 건축하도록 마련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형제들도 건축 공사에 필요한 부면들을 돌보았습니다. 경험 있는 증인 토목 기사인 파울루 티노쿠 카르네이루는 자기 가족과 함께 살바도르 시에서 건축 현장 근처로 이사하였습니다. 일부 벧엘 가족을 포함하여 약 150명의 다른 증인들도 관리 및 청소뿐 아니라 알루미늄 창틀을 만드는 일이나 건축 공사자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일과 같은 건축 지원 봉사를 하였습니다. 건축 공사가 한창일 때는 1000명이 넘는 건축 공사자들에게 하루 세 끼의 식사를 제공하였습니다.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건설 회사에서 고용한 상당수의 공사자들로 인해 저녁과 주말에 전파 활동을 할 수 있는 훌륭한 구역이 생겼습니다. 어떤 형제는 「나의 성서 이야기 책」을 건축 공사자들에게 한 달에 80부 이상 전하였습니다.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고, 여섯 명의 건축 공사자들은 침례받을 정도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현재 브라질 벧엘 가족 성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부가적인 책임을 짐

새 지부 시설의 건축으로 부가적인 책임이 생겼습니다. 세계 본부에서 파견된 맥스 라슨은 1980년에 브라질을 방문하는 동안 이 점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는 상파울루의 파카엠부 스타디움에서 행한 격려적인 연설 중에, 각 나라의 형제들이 자기 나라 구역에서 수행되는 전파 활동 및 인쇄 공장과 벧엘 숙소의 건축에 드는 자금을 자체적으로 조달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였습니다. 브라질 형제들이 그러한 책임을 떠맡을 수 있을 것이었습니까? 브라질은 높은 비율의 인플레이션과 실업으로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인데도 반응은 훌륭하였습니다. 회중들과 개인들이 자진하여 정기적으로 기부한 덕분에 공사가 완공되어 필요한 장비가 설치되었습니다. 이 때 나타낸 관대함은, 고대 이스라엘의 다윗 왕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위한 계획이 세워지고 있었을 때 나타낸 영을 생각나게 해주었습니다.—역대 상 29:3-9.

1980년 8월, 225명의 벧엘 가족의 이사와 더불어 모든 인쇄 장비를 상파울루에서 세사리우란제로 이전하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사하기 위해 트럭으로 160대분이 넘는 짐을 옮겨야 하였습니다. 그 후 장비를 설치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기간이 뒤따랐습니다.

봉헌식 프로그램은 1981년 3월 21일에 있었습니다. 통치체 성원인 로이드 배리가 봉헌사를 하기 위해 참석하였습니다. 배리 형제는 예루살렘 성전 낙성식 때 솔로몬 왕이 한 아름다운 말을 인용하면서 훌륭한 벧엘 건물로 인한 영예와 영광은 모두 여호와 하느님의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러한 말로 결론을 맺었습니다. ‘이 건물들이 세워진 것은 전파 활동의 증가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모두가 전파 활동에 끊임없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뒤이어 몇 달 동안 이 나라 전역에서 증인들이 단체로 벧엘을 견학하러 왔습니다. 어떤 휴일에는 하루에 1만 2000명의 방문객이 300대의 버스와 수십 대의 승용차를 타고 왔습니다.

방문객은 지부에서 단지 새 건물에 입주하는 일보다 훨씬 많은 일이 수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성서 출판물 인쇄 분야에서 중요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1981년에는 스페인어판 「파수대」와 「깨어라!」가 브라질에서 인쇄되어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이웃 나라들—볼리비아, 우루과이, 파라과이—로 발송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브라질 지부는 잡지 인쇄뿐 아니라 성서 연구용 서적들도 인쇄하고 제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새로운 장비가 많이 필요하였고, 새로운 기술을 배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1981년에는 새 공장의 제본 라인이 가동되기 시작하여, 첫 작품으로 포르투갈어 1982년 「연감」이 생산되었습니다. 그 후 곧, 네 권으로 된 「성서 이해를 위한 보조서」(Aid to Bible Understanding) 첫 권이 인쇄되고 제본되었습니다. 그리고 1987년부터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책—성서, 즉 포르투갈어판 「신세계역 성경」—이 그 제본 라인을 통하여 생산되었습니다.

협회 트럭으로 배달함

출판물 발송 비용을 줄이고 출판물이 회중들에 틀림없이 도착하도록 하기 위해, 1982년에 협회 차량을 사용하여 배달하는 체계를 확대하였습니다. 그러한 마련은 1974년 이래 시행되어 왔는데, 이제는 북동부 지역에 있는 회중들도 그 마련에 포함되게 되었고 그 중 일부는 거리가 30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습니다.

현재 협회 트럭들은 3주마다 463회의 배달을 하며 3만 킬로미터 이상을 주행합니다. 이 마련으로 4600개가 넘는 회중이 정기적으로 돌보아지고 있습니다. 트럭들은 12개의 노선을 따라 도는데, 가장 긴 노선은 15일이 걸리며 7000킬로미터가 넘습니다. 운전자는 벧엘 가족 성원들입니다. 가는 길에 있는 여러 회중의 증인들은 후대를 나타내어 운전하는 형제들을 자기 집에 유숙할 수 있게 해주며, 그 형제들은 하룻밤 머물면서 그 지방 형제들과 함께 회중 집회에 참석합니다.

고립된 구역까지 이름

증거가 거의 혹은 전혀 되지 않은 지역에까지 가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이 계속되었습니다. 1976년에 프란시스쿠 알부케르케와 그의 아내는 아마존 지역의 테페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축제 때를 이용하여, 보트를 타고 시내에 나온 사람들에게 전파하였습니다. 하루는 프란시스쿠가 어떤 젊은 외판원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을 한 부 전하고, 그 책을 연구하는 방법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2년 후 마침내 그들이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프란시스쿠는 그 젊은이가 그 책을 혼자서 연구하고 자기가 이해한 부분의 답에 밑줄을 그어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젊은이와 주간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젊은이가 사는 곳까지 가려면 보트로 2시간 여행해야 하였으므로, 프란시스쿠가 그 젊은이의 집으로 두 번 가면 그 다음 두 주일은 그 젊은이가 프란시스쿠의 집으로 오곤 하였습니다. 얼마 안 있어, 그 젊은이와 함께 다른 네 명의 남자가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젊은이는 자기 집의 방 하나를 왕국회관으로 사용할 수 있게 바꾸었고, 그 후 곧 회중이 형성되었습니다.

1977년에 이 나라의 중부 지방에 있는 조그만 읍과 시골 지역에서 증거하던 일부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트레일러를 숙소로 사용하였습니다. 그 파이오니아 중 한 사람으로서 지금은 벧엘 가족 성원인 자이르 파이바 페레이라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좀더 큰 중앙 읍에 트레일러를 주차해 놓고 그 곳에서 자동차로 여행하여 증거하였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맛있는 식사를 한 다음, 아침 8시까지 구역에 갔습니다. 하루 종일 봉사하고 나서 강 근처에 자리를 잡고 목욕을 한 다음 저녁을 먹었습니다. 잠은 자동차에서 잤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라고는 바람 소리와 귀뚜라미 소리뿐이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앵무새와 마코앵무새가 근처에서 날고 있는 광경을 보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또한 구역에 사는 사람들이 진리에 목말라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가슴 뭉클한 일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서적을 골고루 한 부씩 받았습니다. 언젠가는 하루에 48부의 서적을 전하였고, 어느 달에는 재방문을 109건이나 했는데도 여전히 만나지 못한 관심자가 있었습니다. 연구가 많이 시작되었고, 많은 사람이 읽는 데 어려움이 있었는데도 상당수가 진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결혼—하느님과 사람 앞에서 존중히 여겨야 하는 일

읽고 쓰는 기본 교육이 부족한 것 외에도 많은 사람이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삼는 데 방해가 된 또 다른 장애는 그들의 결혼 상태였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종교 결혼식에다 민사 결혼식까지 치를 비용이 없어서 종교 결혼식만 치르기로 결정하였는데, 그것은 법적 효력이 없었습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성서 연구를 하게 되면 그들은 결혼을 합법화할 필요에 대해 배우게 됩니다.—히브리 13:4, 18.

미나스제라이스 주, 우베를란디아에 그러한 상태로 사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7년 전에 가톨릭식으로 “결혼”하였는데, 함께 사는 남자는 그들의 결혼을 합법화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 여자는 성서에 대한 이해가 발전함에 따라 남편에게 만일 결혼을 합법화하지 않는다면 자기가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를 떠날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여자의 태도가 진지한 것을 알고서 남편은 마침내 동의하였습니다. 결혼을 합법화한 후에 이 여자는 즉시 침례를 받았습니다.

1977년까지 브라질에는 이혼 규정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결혼한 후 자기 배우자를 떠나 다른 배우자와 살고 있다면 현재의 관계를 합법화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두 번째 결혼을 통해 손자녀까지 두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과거에 무지로 인해 저지른 죄를 용서해 주시는 여호와께서 친히 보이신 모범과 일치하게, 통치체는 그러한 상태에 있는 성서 연구생들이 선언서에 서명하여 자기 배우자에게 충실하겠다고 서약하고, 결혼을 합법화하는 것이 가능할 때는 언제든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다면 침례받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사도 17:30; 로마 3:25) 한때 협회의 서류철에는 그러한 선언서가 꽤 많이 있었습니다.

한 경우는 13명의 자녀를 둔 어머니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성서 연구를 8년간이나 했지만 자기의 결혼 상태를 합법화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선언서에 서명하였고 침례받도록 허락받았습니다. 자녀들은 어머니가 침례받을 자격을 갖추는 데 무엇이 관련되었는지를 알게 되었고, 자녀들 중 여덟 명 역시 성서 연구를 하여, 후에 그 중 다섯 명이 침례를 받게 되었고 다른 자녀는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이혼법이 통과되어, 비록 법적 별거부터 이혼까지 3년간 유예 기간을 규정해 놓긴 했지만, 선언서에 서명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1988년에 정부는 유예 기간을 1년으로 줄였습니다.

봉사의 직무를 위한 특별 강습

1978년에 회중 장로들을 훈련하는 일에 한층 더 주의가 기울여졌습니다. 1959년 이래, 감독자로 임명된 사람들을 위한 특별 훈련이 천국 전도 강습에서 베풀어져 왔습니다. 그런데 1978년에는 브라질의 모든 장로들이, 이전에 강습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이틀간의 특별 강습 프로그램으로부터 유익을 얻도록 초대되었습니다. 그 기간에 장로들은 양 무리의 목자 및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자질을 향상시키는 법, 복음 전파 활동을 인도하는 법, 회중을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유지하는 법, 또한 장로의 회로서 함께 일하는 법을 성서에 근거하여 토의하였습니다. 거의 7000명이나 되는 장로들이 참석하였습니다. 그 후로도 새 힘을 주는 천국 전도 강습 과정이 주기적으로 열렸습니다.

봉사의 종들도 간과되지 않았습니다. 1985년부터 시작하여, 브라질의 봉사의 종들을 위해서도 천국 전도 강습 학급들이 조직되었습니다. 그리고 1988년 이후로는 강습을 위해 왕국회관뿐 아니라 대회 회관을 사용하는 것도 가능해져, 꽤 많은 수의 장로와 봉사의 종들이 강습에 함께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최근의 1995년 강습에는 2만 2092명의 장로와 2만 7544명의 봉사의 종이 참석하였습니다. 회중에서 책임을 맡을 성경적 자격을 갖춘 자진하는 남자들로 이루어진 참으로 훌륭한 집합체입니다!

그런데 1978년에는 브라질에서 또 다른 강습—파이오니아 봉사 강습—이 진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아라 주의 포르탈레자에서 첫 학급이 2주간 열렸습니다. 이 강습의 목표는 파이오니아들이 여호와와의 관계를 강화시키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더 온전히 걷도록 돕고, 봉사의 직무에서 그들의 효율성을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협회 기록에 따르면, 지난 18년간 브라질에서 1650개의 학급이 열렸고 3만 9649명의 정규 파이오니아가 이 놀라운 마련으로부터 유익을 얻었습니다. 1994년 한 해에만도 전국 각지의 파이오니아들을 돕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187개의 학급이 서로 다른 107군데의 크고 작은 도시에서 열렸습니다.

일부 파이오니아들이 강습에 참석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은 주목할 만합니다. 믿지 않는 남편을 둔 한 자매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강습에 가기 전에 가사 일을 돌보았고, 강습이 끝난 후에는 즉시 나와서 학교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자녀들을 데리러 갔습니다. 또 한 자매는 강습에 참석하기 위해 휴가 날짜를 바꾸기를 원하였습니다. 고용주는 이에 동의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이 자매는 계속 그를 설득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대답은 언제나 똑같이 “불가능합니다!”였습니다. 마침내 이 자매는 여호와께 기도한 후 고용주에게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름이 아니라 파이오니아 강습에 참석해야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자매의 진지한 태도에 감명을 받은 고용주는 결국 휴가 날짜를 바꿔 주는 데 동의하였습니다.

첫 학급의 강사인 파울루 아제베두는 한 회견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파이오니아 봉사 강습은, 집주인의 문제와 환경과 생각과 신앙을 고려하여 집주인에게 개인적 관심을 보일 필요가 있음을 강조함으로 파이오니아들이 그들의 구역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도록 도와 줍니다. 그러한 점을 염두에 두는 파이오니아들은 봉사 구역을 새로 받은 것 같다는 데 동의합니다.”

브라질에 파견된 선교인들

선교인들은 조직의 틀을 견고히 확립하는 데 매우 귀중한 봉사를 수행해 왔습니다. 1945년에 길르앗 학교 제1기 졸업생인 두 명의 선교인이 브라질에 처음으로 왔습니다. 1967년에는 길르앗 졸업생의 수가 76명으로 증가하였고, 1974년에는 최고 117명에 달하였습니다. 일부 선교인은 리하르트 부트케와 루트 부트케 그리고 에릭 브리튼과 크리스티나 브리튼처럼 수십 년 간 순회 및 지역 활동을 하였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11개 국에서 온 약 250명의 선교인이 이 나라에서 일해 왔습니다.

일반적으로, 브라질 사람들은 외국인을 존중합니다. 그렇지만 기후와 음식과 언어와 관습이 다른 새로운 나라에 적응하려면 결심과 훌륭한 유머 감각이 필요합니다. 스웨덴에서 온 선교인 쉴비아 구스타브손은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남편 외스텐과 내가 브라질에서 처음으로 재방문한 사람은 미나스제라이스 주의 벨로리존테에 사는 부부였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한 시간 가량 이야기한 다음 이제 가 봐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벌써 가시려고요? 조금 더 계시다 가세요!’ 하고 그들은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정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여 다시 앉아 우리의 방문을 연장하였습니다. 30분 후에 우리는 다시 가 봐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또 ‘벌써 가시려고요? 조금 더 계시다 가세요!’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이 세 번이나 되풀이되어, 마침내 우리가 떠난 것은 거의 자정이 다 되어서였습니다! 뒤이은 몇 차례의 방문 중에도 이러한 극적인 일이 되풀이되자, 그제서야 우리는 ‘벌써 가시려고요? 조금 더 계시다 가세요!’라는 표현이 방문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일종의 예법일 뿐이지 반드시 조금 더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그 부부는 진리에 대해 진실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브라질에서 다른 나라로 파견된 선교인들

브라질에 온 선교인들로부터 받은 훌륭한 도움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1982년에 브라질 출신의 형제들이 다른 나라에서 선교인으로 일하도록 초대받을 것임을 알게 되어 매우 기뻤습니다! 그 해 말에 세 부부가 볼리비아로 임명되었고, 그 이후 90명의 브라질 형제 자매들이 모잠비크, 볼리비아, 앙골라, 파라과이에서 선교인으로 일하도록 초대되었습니다.

이 브라질 선교인 중 일부는 자신들 역시 다른 선교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진리를 배운 사람들입니다. 벨렘 출신의 아틸라 카르네이루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종교에 실망한 사람이었습니다. 선교인인 델피나 뭉위아를 만났을 때 그는 진리에 관심을 나타내 그 선교인 자매로부터 정기적으로 잡지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후, 그 자매는 아틸라가 선교인 형제와 일 주일에 세 번씩 성서 연구를 하도록 마련해 주었습니다. 두 번째 연구 후 아틸라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가 배우고 있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였으며, 심지어 침례받기 전에도 성서 연구를 3건이나 사회하고 있었습니다! 침례받은 후 그는 정규 파이오니아로 일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특별 파이오니아로 일하였습니다. 현재 아틸라 부부는 모잠비크에서 선교인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벤자밈 실바와 그의 아내 이올란다도 모잠비크에서 일하는 브라질 선교인입니다. 그들은 여러 해 동안 브라질 북부 지방에서 파이오니아로 일하였습니다. 그들은 두 가지 큰 책임—파이오니아로 일하면서 자녀를 양육하는 일—을 조화롭게 잘 수행하였습니다. 그들의 딸 마르타가 결혼하자, 부모는 선교인으로 일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마르타도 계속 파이오니아를 하고 있으며, 그 세 사람 모두에게서 여호와의 축복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남부 지방의 홍수

1세기 이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형제들이 큰 곤경에 처해 있을 때 물질적 도움을 베풀어 왔습니다. (사도 11:29, 30) 1983년에 남부의 주(州)들인 파라나, 산타카타리나, 리우그란데두술이 큰 홍수로 황폐되었습니다. 산타카타리나 주의 블루메나우에서는 이타자이아수 강의 수위가 평상시보다 16미터나 높아져서 강물이 거의 도시 전체에 범람하였습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세운 모범과 일치하게, 다른 곳에 사는 증인들이 구호품—43톤의 식품과 41톤의 의복—을 기부하였습니다.

1400킬로미터나 떨어진 마투그로수두술 주의 캄푸그란데에 사는 장로인 주앙 비센팀 카레르는 도우려는 열망을 나타낸 좋은 예가 됩니다. 그는 텔레비전에서 홍수에 관한 보도를 보자 협회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자기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문의하였습니다. 그는 다른 장로들과 함께, 자기가 사는 도시의 회중들에서 제공하는 식품, 의복, 신발, 의약품을 3톤이나 모았습니다. 그와 그의 아들은 텔레비전 보도를 본 바로 그 날 구호품을 가지고 블루메나우로 향하였습니다.

블루메나우의 형제들에게 보내 준 물자를 분배하는 일에 참여한 그 곳의 장로 루이스 보그나르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보트에 바퀴를 달아, 물 위로든 강 위로 돌출한 조그만 땅 위로든 갈 수 있게 개조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고립된 형제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높아진 수위 때문에 전선을 잘라야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열 살과 열두 살 된 두 아들이 나와 함께 갔습니다. 그 애들은 수영을 잘하였습니다. 나는 또한 아이들을 태운 보트는 다른 보트보다 더 많은 배려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 집에서 16명이나 되는 사람을 발견했는데, 이들은 열흘 동안 오도가도 못해서 식품이 동나 버린 상태였습니다. 보트가 도착하기 바로 직전 이들이 일용할 성구를 고려할 때, 한 형제가 여호와께서 적절한 때가 되면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실 것이라고 해설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또 다른 집에서는, 22명이 위층과 다락에 일 주일 간 갇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보트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처음에는 도둑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발테르 제르메르 형제!” 하고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도와 주러 온 형제들이었습니다. “이 일은 증인이 아닌 이웃 사람들에게 훌륭한 증거가 되었습니다”라고, 그 집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지금은 브라질 벧엘 가족 성원인 자니스 두베는 회상합니다. 그 때 공급받은 필수품은 하루나 이틀치 분량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저장 식품의 경우, 여러 달이 지나서야 비로소 다시 살 필요가 있었습니다”라고 이 자매는 말하였습니다.

옮아 가는 특성이 있는 파이오니아 영

여호와의 증인은 긴급한 상황이 발생할 때 서로 물질적으로 돕지만, 주된 활동은 하느님의 왕국에 관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왕국만이 인류의 수많은 문제를 영원히 해결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협회 사무실에서는 1984년에 이 활동을 강조하여 브라질의 침례받은 전도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가 이번에 편지를 쓰는 이유는 여러분이 4월에 보조 파이오니아 봉사에 참여하도록 초대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그 달에 이웃 사람들에게 성서 진리를 전하는 데 적어도 60시간을 바칠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이 초대는 받아들여졌습니까? 이전의 보조 파이오니아 최고 수는 1983년 4월에 기록된 8000명이었는데, 이 초대에 대한 응답으로 3만 3000명—총 전도인 수의 21퍼센트—이상이 참여하였습니다! 참으로 행복한 신권 봉사의 달이었습니다!

부지런한 노력이 요구되었습니다. 트럭 운전 기사인 한 증인과 조적공인 또 다른 증인은 세속일을 끝낸 다음 오후 6시 30분부터 8시 30분까지 정기적으로 야외 봉사를 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집에서 재봉 일을 하는 한 자매는 아침 일찍 일어나 자신의 일을 돌본 다음 야외 봉사를 하러 나갔습니다. 여덟 자녀—맏이는 12세이고 막내는 생후 5개월밖에 안 됐음—를 둔 한 어머니는 가족의 도움을 받았는데, 좀더 나이 든 자녀들이 어린 동생들을 돌보는 일을 돕고 남편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였습니다. 어떤 회중에서는 12명의 전도인 가운데 5명이 보조 파이오니아로 일하였습니다. 그 가운데는 두 명의 가장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자녀가 10명이고 또 한 사람은 자녀가 14명이었습니다. 둘 다 그 회중이 있는 도시로부터 15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1주일에 두 번씩 그 도시로 여행하여 매번 9시간씩 야외 봉사에 참여하였습니다. 걷지 못하는 한 자매는 자기 집 앞 보도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 달에 보조 파이오니아를 하여 이 봉사의 기쁨을 맛본 여러 사람들이 정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신청하였습니다. (시 34:8) 1984년 4월에는 3500명의 정규 파이오니아가 등록되어 있었습니다. 6개월 후에는 4200명이 되었고, 1년 후에는 그 수가 5400명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전국에 2만 2500명이 넘는 정규 파이오니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날 지상에서 수행되는 가장 중요한 일에 그처럼 온전히 참여하는 데서 참으로 기쁨을 느낍니다!

동시 발행

1984년 이전에는 포르투갈어 잡지에 실리는 내용이 영어판에 실리는 내용보다 6개월 늦게 발행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해에 두 대의 오프셋 윤전 인쇄기와 함께 MEPS(뉴욕의 세계 본부에 있는 형제들이 개발한 다종 언어 전산 사식 시스템)가 브라질에 설치되었습니다. 번역한 내용을 직접 컴퓨터에 입력하면 MEPS 프로그램에 의해 지면 조판 작업이 대단히 신속히 이루어집니다. 파울 바우어, 에리히 카트너, 프란츠 슈레들이 뉴욕에 가서 MEPS의 사용 및 유지·관리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리하여 1984년에 영어로 발행되는 내용과 포르투갈어로 발행되는 내용이 동시에 인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각각 시간당 3만 2000부의 잡지를 인쇄할 수 있는 두 대의 오프셋 윤전 인쇄기는 미국 형제들이 기증한 것입니다. 브루클린 벧엘 가족 성원인 해리 존슨이 인쇄기의 설치를 감독하였습니다. 처음으로 거둔 성과는 잡지가 동시 발행되어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더 양질의 종이에 4색으로 인쇄된 잡지가 나왔습니다. 그 결과는 훌륭하였습니다! 이전에는 한 달에 그렇게 많은 잡지 예약—1987년 6월의 5만 건—을 맡은 적이 없었습니다. 예약 건수가 꾸준히 증가하여, 1994년 4월에는 8만 7238건의 예약을 맡아 신기록에 달하였습니다. 현재 포르투갈어와 스페인어로 매달 평균 350만 부의 잡지가 인쇄되고 있습니다.

충절 고수자들이 기록적인 숫자로 모이다

1985년에 있었던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일은, “충절 고수자” 지역 대회를 위해 브라질에서 가장 큰 두 개의 스타디움—상파울루의 모룸비 스타디움과 리우데자네이루의 마라카낭 스타디움—을 동시에 사용한 것입니다. 1985년 8월 23-25일에 열린 이 대회들에는 11개 국에서 온 대표자들이 참석하였습니다. 두 명의 통치체 성원, 존 바와 라이먼 스윙글도 참석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때와 계절—무엇을 가리키는가?”라는 공개 강연은, 상파울루에서는 존 쿠슈니르가 16만 2941명의 청중에게,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아우구스투 마샤두가 8만 6410명의 청중에게 하였는데—총 참석 수가 25만 명에 육박하였습니다! 이것은 1958년에 123개 국에서 온 대표자들이 뉴욕에서 두 개의 스타디움에 동시에 모였을 때 참석한 인원과 거의 맞먹는 수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1985년에 브라질에서 열린 대회의 전부가 아닙니다.

이 두 개의 국제 대회 외에도 이 나라의 여러 지역에서 23개의 다른 대회들이 열려, 총 14만 4000명이 참석하였고 1192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침례받은 사람 중에 리우그란데두술 주, 상레우폴두 출신의 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바로 얼마 전에 사고로 한 자녀를 잃고 그로 인해 영매술에 의존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보이지 않는 영—그들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해가 되는가?」라는 소책자를 읽고, 읽은 내용에 감명을 받아 그 지방 왕국회관을 찾아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성서 연구 제의를 받아들여 침례받을 정도까지 신속히 발전하였습니다. 현재, 그 여자와 그의 남편과 손녀딸이 여호와를 섬기고 있습니다.

거리가 멀어도 ‘함께 모임’

브라질의 우리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은, 함께 모이는 일을 그만두지 말고, 여호와의 날이 다가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더 그렇게 하라는 성서의 교훈을 참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10:24, 25) 이렇게 하려면 때때로 상당한 노력이 요구됩니다. 바이아 주 파젠다타쿠아리 회중의 한 형제는 70세 된 노인으로 다리를 저는데도 8킬로미터를 걸어서 왕국회관에 옵니다. 바이아 주 올린디나 회중의 형제들은 16킬로미터를 걸어오는데, 강을 건넌 후 젖은 옷을 갈아 입으려고 옷이 들어 있는 비닐 봉지를 든 채 그렇게 합니다. 파라에서는 몇몇 가족이 숲 속 길을 6킬로미터나 걸어오는데, 숲에서 재규어의 발자국을 볼 때가 종종 있습니다. 또한 아마조나스 주 레포수두아마타리 회중에서는 15명으로 이루어진 두 가족이 밀림 속을 걸어오는데, 한 어른이 뱀을 쫓기 위해 앞장서서 막대기로 나무와 땅을 두드리며 옵니다.

임신한 상태에서 한 아이를 팔에 안고 다니는 어떤 자매는 트럭을 얻어 타지 못할 때마다 토칸틴스 주의 아시샤라는 조그만 읍에 있는 왕국회관까지 걸어서 16킬로미터를 갑니다. 바이아 주의 어떤 자매는 어린 자녀들을 왕국회관에 데려가기 위해, 당나귀 등 양쪽에 달린 두 개의 큰 바구니에 자녀들을 싣고 당나귀를 끌고 갑니다.

아크레 주, 크루제이루두술에서 순회 대회가 열렸을 때 아마조나스 주 리우바데주 회중에서 37명이 참석하였는데, 그 회중에서 보고한 전도인 수는 9명뿐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8시간을 걸어서 참석하였습니다. 그 가운데는 자녀가 여덟 명이나 되는 한 자매도 있었는데, 막내가 다섯 살이었습니다. 또 다른 열 명의 형제들은 피아우이 주, 플로리아누에서 열린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자전거로 100킬로미터를 여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베풀어 주시는 영적 양식을 참으로 감사하게 여깁니다.

양 무리의 자기 희생적인 목자들

전도인 수가 급속히 증가하면서 하느님의 양 무리를 돌볼 영적 목자들이 더 많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20:28; 베드로 첫째 5:2) 각 회중을 돌볼 장로들뿐 아니라, 여행을 하며 순회구와 지역구에 사랑에 찬 감독을 베풀 수 있는 자격 있는 감독자들이 필요하였습니다. 많은 형제들이 30년 이상 여행하는 감독자로 자신을 아낌없이 바쳐 왔습니다. 매년 평균 12개의 순회구가 새로 생기고 있으며, 지금은 326명의 순회 감독자와 21명의 지역 감독자가 브라질 밭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형제들은 훌륭한 영을 나타내어, 상황이 어떠하든 어디서나 기꺼이 일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하는 데는 무엇이 포함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안락한 집을 뒤로 하고, 다양한 환경에서 사는 우리 형제들이 제공하는 숙소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열대성 기후 때문에 그들은 모기를 비롯한 여러 곤충들을 견뎌야만 합니다. 더위 때문에 침대 대신에, 달아맨 그물 침대에서 잠을 자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붕은 있지만 벽은 없는 집도 있습니다. 외딴 지역에서는 배나 말 혹은 다 낡은 버스를 타고 다니거나 그냥 걸어서 다닙니다.

1970년대에 마라냥에서 순회 감독자로 일한 주세 베르테마티는 이렇게 썼습니다. “시티우세아라와 기마랑에스에 있는 회중들로 가기 위해 나는 아내 마졸리나와 배로 두 시간 여행하고 나서, 무엇이든 타고 갈 수 있는 것이 오기를 기다려야 하였습니다. 버스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트럭을 타고 간 경우도 몇 차례 있었는데, 마졸리나는 트럭 앞에 타고 나는 돼지, 닭, 염소 혹은 밀가루·쌀·콩 포대가 있는 짐칸 위에 타고 갔습니다. 트럭이 진창에 빠지면 우리는 내려서 밀어야 했습니다. 무사히 잘 가도 이렇게 여행하는 데만 다섯 시간쯤 걸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네 시간을 더 걸어가서야 왕국회관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지방 증인들은 이러한 방문을 대단히 고마워하였습니다.

기마랑에스의 왕국회관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일부 형제들은 매주 약 30킬로미터를 걸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는 데는 다섯 시간 내지 여섯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들은 순회 감독자의 방문 중에 그 방문으로부터 온전한 유익을 얻기 위해 일주일 내내 읍내에 머물곤 하였습니다.

어떤 순회구들은 사람들이 드문드문 흩어져 사는 광대한 지역을 망라합니다. 예를 들면, 1980년대의 어떤 순회구는 아크레 주와 론도니아 주, 그리고 마투그로수 주와 아마조나스 주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어 크기가 스페인만하였습니다. 아데니르 알메이다는 그 순회구에서 일하는 동안 아마조나스 주의 라브레아 회중을 방문하였는데, 그 읍은 많은 사람이 한센병 즉 나병을 앓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그 곳에 가기 위해 버스로 네 시간 여행한 다음 하룻밤을 여인숙에서 유숙하고, 아침에 다른 여덟 명의 여행자들과 함께 트럭 뒤 짐칸에 타고 출발하였는데 거기에는 술병이 가득 실려 있었습니다. 더위 속에서 여러 시간 여행하고 나자 그들은 모두 몹시 갈증을 느꼈습니다. 구할 수 있는 음료라곤 병 속에 들어 있는 것들뿐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짐 속에서 슬쩍 훔쳐 낸 술을 같이 마시자고 권할 때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알메이다 형제는 솔직하게 말합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비를 맞아 가며 10시간 동안 여행한 후 그들은 마침내 라브레아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곳에 도착해 보니, 온 회중—두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와 두 명의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이 그를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일요일에 그는 두 명의 전도인에게 침례를 주는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거의 30년 동안 여행하는 감독자로 일해 온 독신 형제 블라디미르 알레크산드루크의 숙박 시설 가운데는 그 지방의 유치장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는 1972년이었는데, 그는 믿지 않는 남편을 둔 고립된 구역에 있는 한 전도인을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작은 읍이라 호텔이 없어서 순회 감독자는 유치장에서 자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웃으며 이렇게 회상합니다. “내가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마음대로 유치장을 들락거리는 것을 보고 다들 나를 새로 온 경찰서장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수용자가 나밖에 없었지만, 이튿날에는 돼지를 훔친 사람을 동료로 두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자기 희생적인 감독자들은 형제들이 나타내는 따뜻한 사랑과 진지한 열심은 어떤 불편이나 사생활의 제약도 상쇄하고 남음이 있음을 기꺼이 인정합니다.

서부를 향해 감

1980년대에 남부 출신의 많은 가족은 “젊은이들이여, 서부로 가시오!”라는 부름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들은 경작하기 알맞은 땅을 찾아 브라질의 서부, 특히 론도니아 주로 이주하였습니다. 정부에서 그 땅을 무상으로 주었습니다. 도로라고 불리는, 길이가 35킬로미터쯤 되는 길이 숲 속에 뚫려, 이 “도로” 양쪽에 있는 땅이 이주자들을 위해 개간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증거할 수 있는 훌륭한 구역이 생겼습니다!

론도니아 주의 피멘타부에누에서 복음주의 종교에 속한 한 이발사가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속한 종교의 목회자들이 각자 돈이 더 많이 걷히는 교회로 가고 싶어 서로 다투는 것을 보고 정신이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그는 증인의 말에는 한번도 귀기울여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루는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길거리에서 봉사하는 모습이 정말 매우 행복해 보이는 것을 보고서, ‘내가 가진 것이 진리라면 내 정신이 이토록 혼란스러운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저들이 “거짓 예언자”라면 저들이 저렇게 행복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그 파이오니아들을 방문하여—밤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성서 연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배우는 내용에 감명을 받아 그 파이오니아들, 조나스 바르보사 데 소자와 로브순 바르보사 데 소자를 초대하여 자기 교회 성원 30명에게 전파하도록 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였고, 결국 그 교회는 문을 닫았습니다. 그 후 오래지 않아, 그 곳의 가톨릭 교회도 문을 닫았는데, 미사를 집전하던 사람과 그의 가족이 모두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순회 감독자가 그 회중을 처음 방문하였을 때 이미 49명의 전도인이 있었고, 공개 강연에는 28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구역이 작아 얼마 안 있어 모든 주민이, 증인이든지 증인과 연구하는 사람이든지 둘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전도인들은 전파하기 위해 트럭을 타고 이웃 촌락들로 가야 하였습니다. 이들은 6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가장 가까운 도시 포르투벨류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여행할 때도 역시 이 (두꺼운 천 덮개가 있는) 트럭을 사용하였습니다.

아마존 지역

아마존 지역에서 증거하는 데는 특별한 도전이 따르지만,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도 간과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곳의 면적은 서유럽보다 더 넓습니다. 브라질 쪽에 있는 아마존의 삼림 지대가 브라질 전 국토의 거의 반을 차지하는데, 주민은 900만 명—브라질 인구의 6퍼센트 정도—밖에 안 됩니다. 이 지역을 흐르는 강의 일부는 정말 바다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면, 아마존 강의 주요 지류 중 하나인 네그루 강은 주도인 마나우스 부근에 이르면 그 너비가 18킬로미터나 되고, 아마존 강 삼각주로 흘러드는 주 수로의 어귀는 너비가 50킬로미터나 됩니다. 아마존 강은 여러 모로 전세계의 강 중 최고로 여겨집니다.

이 지역에서는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가는 데 배를 타고 며칠 동안 가는 것이 보기 드문 일이 아닙니다. 주민이 2만 명인 아마조나스 주의 에이루네페 읍으로 임명된 두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의 임명지로 가는 데 배로 13일이 걸렸습니다. 우리는 배를 우리 구역의 일부로 간주하였습니다. 배로 여행하는 동안 출판물을 여러 부 전하고, 여덟 건의 성서 연구를 시작하여 하루에 두 번씩 사회하였습니다.” 아마존 지역에 있는 213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는 바쁘게 활동하며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유익을 얻도록 돕고 있습니다.

협회의 배를 타고

1991년 이래 우리의 특별 파이오니아 중 일부는 봉사의 직무에 사용하는 상용(常用) 장비의 일부로 배를 이용해 왔습니다. 그 해에 협회에서는 그러한 용도로 사용하도록 배를 두 척 마련하였습니다. 보아스 노바스(좋은 소식)호는 네그루 강, 푸루스 강, 마데이라 강, 솔리몽스 강을 운항합니다. 프로클라마도르 다스 보아스 노바스(좋은 소식의 선포자)호는 아마존 강 어귀에 있는 마라조 섬—네덜란드만한 크기의 섬—을 돕니다.

두 척의 배에는 각각 다섯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임명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씩 두 팀의 파이오니아가 봉사하는 동안 한 파이오니아는 배에 머물러, 있을지도 모를 약탈 행위를 경계할 뿐 아니라 식사 준비도 하고 세탁도 합니다. 그들이 임명된 주된 목적은 강기슭의 작은 마을들에 사는 주민들과 그 밖에 말뚝 위에 세운 오두막이나 수상 이동 가옥에 사는 사람들에게 가서 전파하는 것입니다.

파이오니아들이 이 집들로 다가가면 거의 예외없이 “엔트레!”(어서 오세요!) 하고 반갑게 맞이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뒤이어 40분 이상 증거가 행해집니다. 좀더 큰 촌락에서는 파이오니아들이 거의 두 달간 머물면서 관심자들에게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데, 일 주일에 여러 번 사회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공개 강연과 「파수대」 연구 집회는 일반적으로 학교나 개인 집에서 열립니다. 다른 집회들은 배 위에서 열립니다. 사람들이 여호와를 섬기려는 진실한 열망을 나타내면,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그 곳에 머물러 관심을 발전시키도록 임명을 받습니다.

마나우스에서 배로 3시간쯤 가면, 자나우아카 부근에 그 지방 형제들이 건축한 독특한 대회 회관이 있습니다. 이 곳에서는 먼 곳에서 대회를 보러 오는 사람들을 위해 숙소를 구해야 하는 문제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수상 이동 가옥에 살고 있기 때문에, 배로 자기들의 집을 끌고 가서 단지 섬 위에 지어져 있는 대회 회관 근처에 그 집을 “정박”시킨 다음 상륙해서 대회를 보러 가면 됩니다. 인근에 있는 회중들의 전도인을 다 합해도 100명이 채 안 되는데, 대회 참석 수는 거의 250명이나 됩니다.

인디오들이 진리를 배우도록 도움을 받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인디오를 존중심이 거의 없는 태도로 대하는 일이 너무나 흔하기 때문에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실제로 존중심을 가지고 대해 줄 때 감동을 받습니다. 그들 중 다수는 침례받을 정도로 영적으로 발전하였습니다.—사도 10:34, 35.

인디오가 사는 지역에서 순회 감독자로 일한 아밀툰 비에이라는 인디오들 사이에서 겪은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합니다. 그는 연설 중에, “과식과 과음”에 대해 경고하는 누가 21:34-36을 인용하였습니다. 먼저 그는 “과식”에 대해 논의하였습니다. 청중이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자 그는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인디오들은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웃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과식은 생각만 해도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인디오들도 그들의 생활 방식의 일부로 강 한쪽에서 물고기를 에워싸 잡기는 하지만,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만 잡지 그 이상은 잡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음”에 대해서는 어떠합니까?

안타깝게도, 알코올 음료의 과도한 소비는 인디오들 가운데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인디오들에게 술을 사 주고 그들이 술에 취해 우스꽝스럽게 행동하는 모습을 재미삼아 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알코올을 남용하도록 부추겼습니다. 비에이라 형제는 너무 많이 먹는 것이 어리석은 일인 것처럼 너무 많이 마시는 것도 똑같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설명해 줄 수 있었습니다.

이 지역을 찾아온 사람들은 때때로 좁은 숲 속 길을 걸어가야 하고 또 폭이 좁은 강에 다리처럼 걸쳐 놓은 통나무 위를 걸으면서 균형 잡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 통나무들은 보통 축축하게 젖어 있고 미끄럽습니다. “그 위를 걷는 것이 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라고 비에이라 형제는 회상합니다. “그 지방 형제들은 문제가 없었으며, 심지어 팔에 자녀를 안고 가는 자매들이나 또 내가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는 동안 당황스럽게도 내 가방을 들어 주기까지 하는 자매들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뜻밖에 도움이 된 일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슬라이드 상영이 포함된 공개 강연이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바이아 주, 파타이바에는 주민 1500명과 작은 회중밖에 없었지만, 슬라이드 상영에 1572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게 되었습니까? 순회 감독자인 모아시르 소아레스는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왕국회관이 작았기 때문에 나는 장로들에게 제안하기를, 시장을 찾아가서 가톨릭 교회 맞은편 주 광장에 있는 장터의 사용 허가를 받아 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시장의 허락을 얻어 가판대들을 치우고 관람석을 만들었습니다. 그 때는 ‘성주간(聖週間)’이라, 우리의 공개 강연이 시작되는 시간인 오후 6시에 큰 행렬이 교회에서 출발할 계획이었습니다. 인근 읍들에서 사람들이 초대되었고, 읍내에는 사제가 살고 있지 않아 행렬을 인도할 사제가 외지에서 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제의 차가 타이어에 구멍이 나는 바람에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행렬에 참가하려고 온 대부분의 사람이 그 대신에 우리의 강연에 참석하였습니다. 적절하게도, 강연의 제목은 ‘마지막 때에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함’이었습니다.”

전도인 20만 명!

1987년 1월, 브라질의 왕국 전도인 수가 20만 명을 넘어섰고, 빠른 속도로 증가가 계속되었습니다. 1988년에는 367개의 새로운 회중이 생겼고, 1989년에는 370개가 더 생겼습니다—하루에 평균 한 개가 넘는 회중이 생긴 셈입니다! 일꾼이 많아지자, 출판물도 더 많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돕기 위해, 시간당 3만 8000부의 잡지를 생산해 낼 수 있는 세 번째 윤전 인쇄기를 보내 주었습니다. 또한 회중들에서 보내는 수천 건의 서적 주문을 처리할 수 있도록 발송부 시설을 현대식으로 바꿀 필요가 있었습니다.

기존의 공장 건물을 증축할 계획이 세워져, 작업장의 면적이 2만 7000제곱 미터에서 4만 2000제곱 미터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1988년 12월에 건축이 시작되어, 국제 종들—모두 자진 봉사자—의 전문적인 감독하에 벧엘 건축부에 의해 건축이 진행되었습니다.

국제 종들의 도움

우리는 다른 나라에서 온 35명의 노련한 기술자 형제들과 함께 일하게 되어 기뻤는데, 그들은 이 공장 확장 공사를 도와 주었고, 그 후 숙소 건물을 더 건축하는 일도 하였습니다. 이 형제 자매들 가운데에는 여러 주일 혹은 여러 달 동안 일한 사람들도 있었고, 또 6년 이상 일한 사람들도 몇 명 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일한 것은 격려적이고 세워 주는 경험이었고, 또 그들의 전문 기술 때문에 일이 매우 생산적이었습니다.

이 국제 종들 가운데에는 젊은 사람들도 있었고, 손자녀를 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키스 콜웰과 그의 아내 레이 에타는 1989년 3월에 이 곳에 최초로 도착한 사람들로서, 후자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50세가 넘었습니다. 키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두 딸과 사위들, 네 명의 손자녀,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와 멀리 떨어져 지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따금, 집으로 돌아가서 그냥 ‘할아버지 할머니’로 지내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우리가 사용될 수 있고 우리에게 힘이 있는 한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이사야 6:8의 말씀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말할 것입니다.”

다윈 할리와 그의 아내 셜리도 브라질에서 거의 6년간 일하였습니다. 그들도 향수에 젖을 때는 네 명의 자녀와 여덟 명의 손자녀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생활에서 여호와를 첫째 자리에 두고 그 점에 있어서 자녀들에게 계속 모범을 보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막내 자녀가 결혼하자, 다윈과 셜리에게는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할지에 대해 의문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국제 종들로 계속 일하겠다고 신청하였습니다. 현재 그들은 60세가 넘었지만,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특별한 방법으로 여호와를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에 대해 통치체에 감사합니다.” 다른 나라에서 온 이 충실한 종들 모두와 작별 인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많은 브라질 벧엘 가족 성원들은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이 종들 가운데 일부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고, 다른 사람들은 새 임명지를 향해 떠나갔습니다.

한 사제가 진리를 배우다

여호와께서 브라질에서 행해 오신 놀라운 일들 가운데 으뜸 가는 것은, 거짓 종교에 깊숙이 연루되어 있던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루는 버스에 탄 한 여호와의 증인이 아데미르 데 올리베이라 옆에 앉았는데, 그는 브라질 가톨릭 교회에서 10년간 사제로 일해 온 사람이었습니다. “지옥”이란 말의 의미에 대해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후에, 아데미르는 그 대화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고, 그 후 우리 잡지들을 읽으면서 진리가 머리 속에서 명확하게 정리되었습니다.

아데미르는 자기 교회에서, 여호와가 하느님이며 형상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전파하는 것을 스스로 실천하고 있지 못함을—어쨌든, 자기 교회에 여전히 형상들이 있는 것을—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단지 열 달 간격으로 모두 사망하자, 그는 자기가 가톨릭 교회를 떠날 생각을 한 것 때문에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벌을 내리신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그는 여호와께서는 어머니를 부활시킬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989년에 그는 처음으로 왕국회관에서 열리는 집회에 갔으며, 그 후로는 정기적으로 참석하였습니다. 그는 가톨릭 교회를 떠났으며, 왕국 전도인으로 일한 첫 달에는 60시간을 보고하고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책을 12부 전하였습니다. 그는 침례받은 후 정규 파이오니아가 되었으며, 지금은 또한 상파울루 주, 준디아이에서 장로로 일하고 있습니다.

청소년이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

청소년들이 여호와께서 받아들이실 만하게 그분을 섬기려면, 도움이 필요합니다. (전도 12:1) 1989년에 열린 일련의 “경건한 정성” 지역 대회에서는 그러한 목적으로 사용될 유용한 도구가 제공되었습니다. 15세 된 한 소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프로그램이 시작될 때, 10세에서 19세 사이의 모든 청소년은 청중석 앞자리에 모여 앉으라는 광고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무슨 일이 있을 것인지 궁금해하면서 상당히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프로그램이 끝나갈 때, 열정적인 연설을 한 연사는 청소년들이 「청소년은 묻는다—질문과 효과있는 대답」이라는 제목의 책을 각각 한 부씩 선물로 받을 것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참으로, 참으로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너무 기뻐서 울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꼭 필요했던 책이었습니다. 그 이후 나는 조언을 얻기 위해 그 책을 자주 참조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주신 이 귀중한 선물 덕분에 우리는 이 제도가 가하는 압력에 직면할 준비가 잘 되어 있습니다.” 전국에서 열린 108개 대회에서 7만 부 이상의 서적이 청소년 형제 자매들에게 배부되었습니다.

브라질에서는 회중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 가운데 약 35퍼센트가 청소년인 것으로 추산됩니다. 그들은 물질주의적이고 부도덕한 세상의 타락시키는 영향에 매일 직면합니다. 그들에게 제기되는 도전은, 성인이 되었을 때의 생활을 준비시켜 줄 적절한 세속 교육을 받는 동시에 의로운 신세계로 생존해 들어가도록 준비시켜 줄 수 있는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매우 중요한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 대다수는 이러한 도전에 용감히 대처합니다. 많은 청소년은 심지어 학교에 다니면서도 보조 파이오니아를 하다가, 졸업하자마자 정규 파이오니아로 등록합니다. 그런가 하면, 학교를 자기의 개인 구역으로 생각하고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학교에서 증거하는 청소년들도 있습니다.

미나스제라이스의 어떤 증인이 학교를 방문하여 한 교사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교사는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내가 맡고 있던 학급에는 9세와 11세 된 두 명의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애들이 다른 모든 애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그 애들은 다른 애들처럼 조용히 서 있기는 해도 기도를 따라 하지는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법을 모르는지 혹은 기도하는 것이 못마땅해서 그러는지 물어 보았더니, 여호와 하느님은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기도를 듣지 않으시며 우리가 기도할 때 자기들은 묵묵히 속으로 기도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어떻게 기도하니?’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더 나이 든 아이가 나에게 ‘고개를 숙여 보세요’라고 하더니 기도를 하더군요. 그 애는 부모님과 음식과 선생님에 대해서 여호와께 감사하더니, 자기들에게 성서로부터 진리를 가르쳐 준 어머니의 건강에 대해서도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어,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울고 말았습니다.” 그 교사를 재방문하였을 때, 그 전도인은 그 여학생들의 가족이 이사 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교사가 가르치고 있는 그 읍에는 왕국회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 끝에 그 교사는 “그 아이들이 몹시 보고 싶군요”라고 하였습니다.

진리의 변화시키는 힘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생활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악귀들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 해방되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영매술을 행하는 상파울루의 한 젊은이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13세 때부터 영매술자(마쿰바) 집회 장소에서 책임을 맡아 왔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곳에 와서 온갖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이를테면 가족 문제, 건강 문제, 취직 문제, 구혼 문제 등을 처리해 달라고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의식을 행할 때는 약초를 혼합한 것을 사용하는 일 외에도, 밤에 묘지에서 동물 희생—개구리, 닭, 염소—을 바치는 일이 포함되었습니다. 이따금, 묘지에서 사람의 뼈를 훔쳐 사용할 때도 있었습니다. 19세 되던 해인 1990년에 그는 여호와의 증인과 처음으로 접촉하였습니다. 증인에게서 배운 것이 진리임을 깨닫자, 그는 자기 밑에서 일하는 11명의 영매술자를 불러모아 놓고, 성서에서는 영매술 행위를 승인하지 않는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는 악귀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영매술과 관련된 모든 물건을 태워 버렸습니다. 5개월간 성서 연구를 한 후 그는 전도인이 되었고, 전파에 참여한 첫 달에 12건의 성서 연구를 보고하였습니다. (사도 19:19, 20) 대다수의 연구는 그를 마쿰베이로(마쿰바교의 주술사)로 알고 있는 인근에 사는 사람들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침례받은 후 보조 파이오니아를 하였고, 다음에는 정규 파이오니아로, 그 후에는 브라질 벧엘 가족 성원으로 일하였습니다.

20년간 해마다 사육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온 한 남자의 생활도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유명한 사육제 무도회에서 맡은 역할로 여러 차례 상을 받기도 한 사람입니다. 그의 생활 방식 가운데에는 과음, 도박, 온갖 부도덕을 행하는 사람들과의 교제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진리를 배우고 나서 자기의 생활 방식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그는 현재 봉사의 종으로서, 지역 대회에서 연단을 꾸미는 데 자기의 재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리우데자네이루에 사는 또 다른 젊은이는 축구에 열정을 바쳤습니다. 그는 상대편 응원단원들을 난폭하게 괴롭히는 조직에서 구성한 응원단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가 맡은 일은 연발 권총이나 사제 폭탄으로 무장하고 축구장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거의 시합 때마다 상대편 응원단이나 경찰과 싸웠습니다. 그런데 이전 학교 친구였던 증인이 그와 성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진짜 친구가 누구이며, 자기의 최대의 적이 누구인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서 진리로 인간성을 변화시킨 다음 침례를 받았습니다.

상파울루에 사는 젊은이인 페드루도 폭력적인 생활 방식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카포에이라(일종의 폭력적인 공격 기술)라고 하는 무술을 익혔고, 총기를 휴대하고 다니기를 좋아하였습니다. 키가 2미터 가량 되는 우람한 체격을 가진 그는 끊임없이 싸움에 휘말렸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성서 연구를 하기로 동의하였습니다. 그는 왕국회관에서 성서 강연을 들은 후 자기의 생활을 크게 변화시켜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무기를 없애 버리고 침례받을 정도로 발전하였습니다. 그 후 자기 가족 10명을 도와 자기와 함께 여호와를 섬기게 하였습니다.

진리는 수줍음을 극복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까? 상파울루의 한 여자의 경우에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성서의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자기가 배운 내용에 놀랐습니다. 하지만 집회에 참석하고 좋은 소식을 공개적으로 전파하는 일에 참여하는 데에는 대단한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수줍어하는 성격과 남편을 거슬러 행동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태 10:37과 같은 성구들을 염두에 두고 마침내 야외 봉사에 참여할 용기를 얻었습니다. 여호와를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었지만, 봉사를 하다말고 집에 가고 싶은 충동과 싸우느라 울었던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윽고 증거하는 일이 더 쉽게 느껴져 심지어 그 일을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가 인내한 결과, 어머니와 다섯 명의 남자 형제들과 남편이 모두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고율의 인플레이션에 대처함

1980년대의 주된 문제 중 하나는 심한 인플레이션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경제 계획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 비율이 계속 증가하여, 1989년 5월부터 1990년 4월에 이르는 기간에 6584퍼센트에 달하였습니다. 어떤 달에는 물가가 하루에 거의 3퍼센트나 올랐습니다! 월말이 되면, 동일한 물건을 사는 데 월초에 필요했던 것보다 거의 배나 되는 돈이 필요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정부에서는 1990년 3월부터 18개월 동안 모든 예금 계좌를 동결시켰습니다. 정부에서는 또한 2회 이상, 화폐에서 0을 여러 개 없앤 뒤 새로 인쇄해야 하였습니다.

물론, 인플레이션이 새로 겪는 문제는 아니었지만, 1990년에 있었던 일은 무척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지부에는 인쇄하는 데 필요한 종이나 기타 공급품들의 재고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것들만 구입하고 다른 것들은 뒤로 미루었습니다. 800명의 벧엘 가족은 당분간, 월 실비 변상 금액을 받지 않고 지내기로 동의하였습니다. 협회 사무실이 협회의 운영을 위해 기부금과 대여금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하는 형제들의 전화와 편지를 받는 것 또한 격려적인 일이었습니다. 몇 달 후, 정부는 우리 협회와 같은 비영리 단체들이 다시 정상적으로 운영되게 해주었습니다. 협회는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도 증인들은 봉사의 직무에서 계속 활동적으로 일하였습니다. 그들은 시간과 돈과 활력을 현명하게 사용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왕국을 첫째로 구하라는 경건한 교훈에 대해 참다운 인식을 나타냈습니다. (마태 6:33) 그 결과 1990년에 전도인 수, 파이오니아 수, 서적 배부 수에서 신기록이 달성되었습니다. 이 해에 기록된 11퍼센트의 전도인 증가율을 그 후로 능가한 적이 없습니다.

은행의 예금 계좌가 동결되었을 때, 산타카타리나 주 조인빌레의 플로레스타 회중은 왕국회관 건축에 사용하려고 미화 10만 달러에 상당하는 돈을 예금한 상태였습니다. 이 회중은 건축 계획을 미루었지만, 기부받은 자금으로 은행 예금을 인출하지 않고도 새로운 회관을 건축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은행에 있는 기금이 풀리게 되자, 이 회중에서는 왕국회관 옆에 있는 땅을 주차장으로 매입할 수 있었고 다른 회중의 왕국회관 건축도 도와 줄 수 있었습니다.

이해력을 가지고 성서를 읽는 법을 배움

시편 필자는 행복한 사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낮은 음조로 읽는”] 자로다.” (시 1:2, 「신세」 참조) 그러나 학교에서 읽는 법을 배울 기회가 전혀 없었던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시편 필자가 언급한 기쁨을 경험하도록 도움이 베풀어질 수 있었습니까? 1958년부터,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왕국회관에 특별 학급이 개설되었습니다. 1970년에는 「읽고 쓰기 교본」(Learn to Read and Write)이라는 소책자가 포르투갈어로 발행되어, 이 교육 프로그램이 한 단계 더 발전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증인이 아닌 많은 사람을 포함하여 2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읽는 법을 배우도록 도움을 받아 왔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일부 사람들도 이 학급들에서 얻는 유익을 관찰하고서 그에 대해 고마워하였습니다. 상파울루 시에 사는 한 믿지 않는 남편은, 그 지방 회중에서 자기 아내가 읽는 법을 배우도록 돕기 위해 행한 일에 대해 감사를 표하였습니다. 미나스제라이스 주, 페로스의 경찰서장은 협회가 그 곳 교도소에 있는 재소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행한 일에 대해 표창장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적인 관점에서 보든 육적인 관점에서 보든, 여호와의 증인은 재소자들에게 읽는 법을 가르치는 면에서 본 경찰서장과 협력하여 일해 왔습니다. 조용히 내린 가랑비가 강물을 넘치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증인들은 재소자들이 사회와 융합할 수 있도록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준다면, 읽는 일의 가치는 더할 나위 없이 큽니다. 이 읽고 쓰기 과정으로부터 유익을 얻은 리우데자네이루의 한 74세 된 증인이 바로 그렇게 하였는데, 그 자매는 이제 자기 동네에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읽고 쓰기 교본」이라는 소책자가 발행되었을 때, 전도인들은 그것을 사용해서 그러한 도움이 필요한 관심자들과의 연구를 사회하도록 권고받았습니다. 파라나 주, 쿠리티바에서 선교인으로 일하고 있던 소냐 스프링게이트는 어느 날 자신의 증거를 듣고 있던 여자에게 계시 21:4을 읽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 여자는 머뭇거리더니 “아뇨, 댁에서 읽어 주세요”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사람을 재방문하였을 때, 소냐는 그 여자가 읽을 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는 네 명의 자녀를 돌보느라 바쁘게 지냈지만, 「읽고 쓰기 교본」 소책자의 도움으로 연구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낙심하였지만, 격려를 받고 꾸준히 노력한 결과 1년도 채 안 되어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재, 그와 그의 남편은 침례받은 증인이며, 자녀들도 진리 안에서 발전하고 있습니다.

읽을 줄 아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이해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도움이 필요하였습니다. 이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1990년에 일부 회중에서는 읽기 및 회화 상급반을 조직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현재 거의 6000명의 증인들에게 그러한 도움이 베풀어지고 있으며,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이 학급을 시작하였을 때 리우데자네이루의 한 자매는 회중 서적 연구의 내용을 읽고 이해하는 데 2시간쯤 걸렸습니다. 두 달 간 그 과정을 밟은 후, 그는 그 일을 20분 내에 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별 잡지 배부

여호와의 증인의 독서물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성서를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발행되는 「파수대」가 있습니다. 이 잡지는 우주의 주권자이신 주 여호와 하느님을 높이 찬양하며, 하느님의 왕국이 인류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알려 줍니다. 그 자매지인 「깨어라!」는 현대 사건 배후의 진정한 의미를 지적하며, 평화롭고 안전한 신세계를 실현시켜 주시겠다는 창조주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심어 줍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귀중한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기를 열망합니다. 이 잡지들의 배부 수를 증가시키고 봉사의 직무에 참여할 자격을 갖춘 새로운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 1990년 5월 1일 공휴일에 특별 잡지 배부 마련이 계획되었습니다. 회중들은 오전과 오후와 저녁에 야외 봉사를 조직하도록, 그리고 회중 내의 전 가족이 그 날의 봉사에 참여하도록 권고받았습니다.

아주 좋은 반응이 있었습니다! 일례로, 전도인이 125명인 리우데자네이루의 한 회중에서는 오전 봉사에는 121명이, 오후에는 118명이 나왔습니다. 그 달에 전국의 전도인 수는 28만 8107명으로 신기록에 달하였고, 그 날 하루에 50만 부 이상의 잡지가 전해진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그 후로도 특별 잡지 배부일이 여러 번 계획되었고, 훌륭한 성과가 있었습니다.

“순결한 언어” 지역 대회

대회들은 여호와의 증인의 생활에서 이정표가 되며, 어떤 대회들은 참석자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습니다. 그러한 대회 중 하나가 1990년 8월에 상파울루에서 열렸습니다. “순결한 언어” 지역 대회의 마지막 날, 13만 4000명이 넘는 사람들—모룸비 스타디움의 8만 6186명과 파카엠부 스타디움의 4만 8220명—이 두 명의 연사가 동시에 하는 공개 강연을 들었습니다. 통치체 성원인 C. W. 바버와 A. D. 슈로더를 비롯하여 14개 국에서 온 외국인 대표자 235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양쪽 스타디움에서 마지막 연설이 끝나자, 참석자들은 손수건과 스카프를 흔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목격하고 있는 장면에 깊은 감동을 받아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브라질의 증인들은 그들의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이 이 거대한 행사에 함께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서 온 것에 대해 참으로 감사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종들 사이에서 분명히 볼 수 있는 뛰어난 사랑은 진실한 사람들이 진리를 식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요한 13:35) 한 젊은이와 그 누나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였는데, 그들은 과부가 된 자기 어머니가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 연구하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한 장로가 그 가족을 방문하여, 일요일 오후에 상파울루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석해 보라고 그들을 초대하였습니다. 그 장로는 스타디움에서 자진 봉사자로서 맡은 임무를 돌보아야 했기 때문에, 그들을 일찍 태우고 갔습니다. 그 젊은이와 누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스타디움의 질서와 청결, 일들이 조직되어 있는 방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회 회기 끝에 브라질을 방문한 대표자들을 향해 쏟아지는 사랑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서 연구를 받아들여 잘 발전하였고, 어머니와 함께 침례를 받았습니다. 현재, 그 젊은이는 봉사의 종입니다.

병원 교섭 위원회

모든 여호와의 증인은, 새로 침례받은 사람이든지 경험이 더 많은 사람이든지, 어떤 종류의 피든 멀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요구 조건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창세 9:3, 4; 사도 21:25) 1984년에 경험 있는 장로들로 구성된 다수의 위원회가 결성되어, 의사들과 면담을 한 후 수혈을 거부하는 환자의 결정을 존중해 줄 의사들의 명단을 만들었습니다. 1991년에 상파울루에서 병원 교섭 위원회(HLC) 국제 세미나가 열렸을 때, 이 마련이 강화되었습니다.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병원 안내부에서 파견된 유진 로점과 프레드 러스크가 참석하였습니다. 또한 700명이 넘는 다른 형제들이 세미나에 참석하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HLC 위원들뿐 아니라 의사나 변호사들도 있었습니다.

세미나에서는 차후로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위원회는 재조직될 것이며, 위원들은 의사들이나 의료진들에게 피의 사용과 관련된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무혈 치료법에 관한 과학 논문들을 제시하는 설명회를 개최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의사들과의 관계와 관련하여 위원들 앞에 설정된 목표는 “대결이 아니라 대화와 협력”이었습니다. 재조직된 후, 위원회 수는 1200명의 위원이 있는 200개의 위원회에서 350명의 위원이 있는 64개의 위원회로 줄었습니다. 그 결과, 수는 더 적지만 자격을 더 잘 갖춘 위원회가 대규모 의료 센터가 있는 도시들에 있게 되었습니다.

1992년 10월에 상파울루에서 수혈에 관한 제22차 국제 회의가 열렸을 때, 100여 개 국에서 온 1300명의 의사들 앞에서 설명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행사의 주최측에서는, 혈액학자인 젤리타 다 실바 소자 자매가 65가지 수혈 대체 요법을 열거한 포스터를 전시하도록 승인해 주었습니다. 벧엘에서 일하는 페드루 카타르두와 세르지우 안탕은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어떤 대접을 받을 것인지 다소 염려하였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만나 본 500명이 넘는 의사들은 매우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 회의의 주요 연사 중 한 사람은 그 포스터와 전시물들을 주의 깊이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나중에 주강당에서 연설하는 도중에, ‘뜻밖의 근원—여호와의 증인—으로부터’ 얻은 귀중한 정보에 대해 감탄을 표하였습니다.”

뒤이어 몇 달 동안, 20개 지역 의료 협의회를 상대로 설명회를 열었고, 그 중 몇몇 협의회에서는 수혈과 관련된 문제가 생기면 의사들에게 그 지방 HLC와 접촉해 보라고 권장하였습니다. 지난 4년 간 그러한 설명회가 600회 이상 열렸고, 현재 명단에 올라 있는 협조적인 의사는 1900명이 넘습니다.

흥미롭게도, 대체 요법 즉 무혈 치료법의 장점을 인식하고 있는 많은 의사들이 의료계에 종사하는 다른 사람들과 그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브라질에서 세미나를 마련하였습니다. 의사이거나 HLC 위원으로 일하는 우리 형제들 중 일부도 초대되었습니다. 그러한 세미나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최초로 개최되었고, 뒤이어 다른 도시들에서도 개최되었습니다. 후에, 리우데자네이루의 지역 의료 협의회에서는 대체 요법을 사용하도록 권장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습니다.

“나는 그 기도를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HLC는 아픈 형제들과 그들의 가족에게 많은 지원을 베풀어 왔습니다. 특별 파이오니아인 알라이데 데펜디는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1992년 2월에 내 여동생이 파라나 주, 쿠리티바에서 자동차 사고로 부상을 입었습니다. 의사는 여동생의 생명이 수혈을 받는 것에 달려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HLC에 전화를 걸었고, 15분도 채 안 되어 양복과 넥타이 차림에 서류 가방을 손에 든 세 명의 형제가 병원에 도착하여 의사에게 명함을 내밀었습니다.”

환자를 40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병원으로 이송하도록 마련하였습니다. 수혈을 거부하는 일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약품으로, 골수를 자극하여 적혈구의 생산을 증가시키는 합성 호르몬인 에리트로포이에틴이 있지만, 의사는 브라질에서는 그러한 치료제를 구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상파울루의 HLC 위원에게 연락하여, 바로 그 날 그 치료제를 항공편으로 보내게 하였습니다. 데펜디 자매는 이렇게 말을 맺었습니다. “내 동생이 위독한 상태에 있을 때 HLC 위원 한 사람이 하루 종일 병원에 머물러 있어 주었는데, 그는 위태로운 순간에 나를 한쪽 구석으로 불러내어 ‘여호와께 기도를 드립시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그 기도를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리우의 구릉 지대에 있는 빈민가를 방문함

하느님께 참으로 헌신한 백성이라는 평판 덕분에, 리우데자네이루의 마약 거래가 성행하는 지역에 사는 증인들은 그 지역에서 봉사의 직무를 계속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 지역에는 여러 개의 회중이 있는데, 한 장로의 설명대로, 형제들이 많이 전파할수록 그만큼 더 좋은 결과가 있습니다. 형제들은 마약 상인들에게 알려져 있어서, 그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지 않습니다. 20만 명이 넘는 주민이 빈민굴과 같은 상태로 구릉 지대에 살고 있는데, 이 주민들 대다수는 마약에 연루되어 있지 않지만 재정 형편상 다른 곳에 가서 살 수가 없습니다.

도시의 다른 지역에 사는 어느 장로가 그 곳에 있는 한 회중에서 공개 강연을 하기 위해 빈민가로 차를 몰고 왔습니다. 그가 왕국회관 앞에 차를 주차하자, 두 명의 무장한 젊은이가 나타나서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 장로가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신분을 밝히고 성서 공개 강연을 하러 왔다고 말하자, 그 젊은이들은 차에 손을 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가라고 말하였습니다.

순회 감독자인 프란시스쿠 두아르테는 이러한 경험을 말하였습니다. “한번은, 집회가 끝났는데 마약 상인들이 왕국회관에 와서 형제들에게 총격전이 벌어질 것이라고 경고해 주었습니다. 아내와 나는 다소 놀랐습니다. 그런데 전도인들은 총소리가 들리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잠시 후, 마약 상인들이 돌아와서 총격전이 끝났으니 떠나도 좋다고 말하였습니다.”

외부에서 온 사람이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을 동반하지 않고 돌아다니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입니다. 또한 도둑들의 시선을 끌지 않는 옷차림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아르테 형제의 경우, 그 지역 전도인을 동반하였는데도, 한 남자가 그를 세우며 시계를 요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두아르테 형제는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처음엔 노상 강도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뒤이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새로 오신 순회 감독자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도금한 시계를 계속 차고 다니시면 누군가가 그것이 금시계라고 생각하여 훔쳐갈 것입니다. 내 시계를 사용하시고 그 시계는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십시오.’ 그는 형제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 나는 좀더 조심스럽게 처신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마약 밀매단에 속한 한 젊은이는 성서 연구를 시작한 후 자기 직업을 바꾸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바꿀 것입니까? 그는, 누구든 갱단을 떠나면 대개 보안 조처로 이전 동료들에 의해 살해당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갱단의 비밀이 다른 사람들에게 새어 나가지 않게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젊은이는 용기를 내어, 여호와께 기도한 후 갱단 두목에게 이야기하러 갔습니다. 그 젊은이는 자기가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 연구를 하고 있다고 설명한 후 성서 몇 구절을 읽어 준 다음 더 이상 그 갱단과 함께 일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젊은이는 갱단 두목도 과거에 성서 연구를 한 적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보복당하는 일 없이 갱단에서 나왔으며, 지금은 자기 회중에서 활동적인 전도인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전도인 30만 명!

새로운 사람들이 회중과 연합하게 됨에 따라, 성서 교육 프로그램에 사용할 출판물이 더 많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쇄 공장은 이미 확장되었지만, 지부에서 일하는 자진 봉사자들인 벧엘 가족들이 생활할 숙소가 더 많이 필요하였습니다. 일부 젊은 형제들은 숙소로 공동 침실들을 사용하였는데, 각 침실에는 침대가 20개가 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1990년에 업무용 건물 한 동과 총 384개의 방을 갖춘 숙소 건물 여덟 동을 건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식당도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확장되었습니다.

이 건축 공사를 위해 전국 각지에서 1000명이 넘는 자진 봉사자가 왔습니다. 몇 주 동안 일하러 온 사람도 있고, 몇 달 동안 일하러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자기 분야의 전문가였습니다. (이 중 약 130명은 후에 정규 벧엘 가족 성원이 되었습니다.) 20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바이아 주, 페이라데산타나에서는 12개의 서로 다른 회중에 속한 23명의 형제들이 그룹을 지어 왔습니다. 그들은 버스를 한 대 세내어 40시간을 타고 와서 1주일 간 이 공사를 도와 주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35명의 경험 있는 형제들이 이 공사를 도와 주러 왔습니다. 벧엘 인근의 회중들에서 주말에 와서 도와 준 수백 명의 형제 자매들의 도움 역시 매우 값진 것이었습니다.

1991년에는 전도인 수가 30만 명 선을 넘어섰습니다. 단지 4년 만에 10만 명이 증가한 것입니다! 더 큰 지부 시설이 절실히 필요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빠르군요”

제자삼는 활동이 활발히 진행됨에 따라 더 많은 숭배 장소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여러 해 동안, 바이아 주의 살바도르, 리우데자네이루 주의 두케데카시아스, 상파울루 주의 리베이랑피레스와 쿠스모풀리스와 세르탕지뉴, 미나스제라이스 주의 베팀에 대회 회관이 건축되었습니다. 전국에서 가장 큰 대회 회관은 상파울루 주, 바르젬그란데파울리스타 근처에 있는데, 1992년 10월에 건축 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수용 인원 4000명 규모의 또 다른 대회 회관이 리우데자네이루 주, 케이마두스에 완공되었습니다. 1993년 9월에는, 세아라 주의 포르탈레자, 리우데자네이루 주의 이타부라이, 파라나 주의 쿠아트루바라스, 페르남부쿠 주의 레시페, 리우그란데두술 주의 사푸카이아두술에서 동시에 다섯 개의 대회 회관이 더 봉헌되었습니다. 현재, 16개의 대회 회관이 사용되고 있고, 그에 더해 5개의 대회 회관이 설계 단계에 있습니다.

함께 모이는 일을 그만두지 말라는 성서의 명령과 일치하게, 쇄도하는 양 같은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왕국회관도 더 많이 필요합니다. (히브리 10:23-25) 브라질에서 자체 집회 장소를 가지고 있는 회중은 전체의 3분의 1밖에 안 되며, 왕국회관 건축 비율보다 새로운 회중이 형성되는 비율이 훨씬 높습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왕국회관 하나를 완공하는 데에는 평균 3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1987년에, 건축 경험이 있고 회중 장로의 회에 도움을 베풀 수 있는 장로들로 이루어진 지역 건축 위원회를 구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벧엘 건축 설계부에서도 실용적인 제안들을 하였습니다.

1992년에 왕국회관 속성 건축 계획이 시작되었을 때, 한 단계 더 중요한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첫 건축은 상파울루 주, 아구두스에서 있었는데, 200명의 자진 봉사자와 벧엘에서 한 팀을 이루어 파견된 25명이 그 일을 하였습니다. 그 공사는 3주가 걸렸는데, 그 후로는 이러한 건축에 소요되는 기간이 16일로 줄어들었습니다. 1995 봉사 연도 중에 총 129개의 새로운 왕국회관이 완공되어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위해 봉헌되었습니다.

관찰자들은 공사가 진행되는 속도에 언제나 놀라움을 나타냅니다. 어떤 왕국회관의 경우, 첫 주간의 건축 일이 끝났을 때 형제들이 창유리를 공급하도록 계약한 회사의 직원에게 돌아오는 수요일에는 유리창을 달 수 있도록 꼭 다시 와야 한다고 말하니까 그는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잘못 알고 계시는 거겠지요. 다음주라면 벽도 세우지 못할 텐데, 유리창을 달 준비가 될 리가 없지요” 하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그는 수요일에 다시 왔는데, 창유리를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벽이 세워져 미장이 되어 있고, 창틀이 끼워져 있으며, 지붕이 얹혀져 있는 것—이 모든 일이 일 주일도 채 안 되어 이루어진 것—을 보자, 트럭에서 내리는 데 무려 5분 정도나 걸렸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빠르군요!” 하고 그는 인정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창유리를 가지러 떠났습니다.

왕국회관이 건축되고 있는 곳 근처에 사는 한 남자는 건축 속도에 놀라, “여러분을 도와 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먼저 우리와 함께 성서 연구를 해야 합니다”라는 것이 대답이었습니다. 바로 다음날 그와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수화로 소식을 전함

성장 속도가 빠르다고 해서 청각 장애인이나 시각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필요에 주의를 기울임으로 훌륭한 결과가 있게 되었습니다. 1992년에, 청각 장애인들에게 수화를 가르치기 위해 336면에 달하는 「수화」(Sign Language)라는 서적이 포르투갈어로 발행되었습니다. 그 서적에서는 브라질의 여호와의 증인들 사이에서 사용하는 수화를 통일시켰으며, 또 바빌론적 사상에 기초를 둔 수화는 없애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한 수화 중에 물 뿌리는 행동을 흉내내는 손 동작이 있었는데, 물론 그러한 수화로는 그리스도인 물침례에 대한 개념을 올바로 전달하지 못합니다.

1982년에 리우데자네이루에 처음으로 청각 장애인들과 난청인 사람들을 위한 회중이 형성되었습니다. 지금은 여러 도시에 그러한 회중이 6개 있으며, 50개의 작은 집단이 있습니다. 1994년에는 18개의 대회에 수화 집단이 있었습니다. 그 중 몇 대회에서는 통역자들이 드라마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역을 맡아 통역하였습니다. 1996년에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환한 미소를 짓게 만든 일이 있었는데, 브라질의 청각 장애인 증인들이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팜플렛의 내용 전체를 수화로 제공하는, 협회에서 제작한 비디오테이프를 받은 것입니다. 많은 청각 장애인들이 읽을 줄은 모르지만 수화는 알기 때문에 이 마련은 참으로 유익하였습니다!

이 회중들에서 장로, 봉사의 종, 파이오니아로 일하는 형제들의 자진적인 태도는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수화를 배우려면 시간, 노력, 끈기가 필요하지만, 보람 있는 결과가 있었습니다.

“그 자매는 보지도, 듣지도, 나에게 말을 하지도 못하지만 격려가 되었습니다.” 이 말은 지난 3년간 보조 파이오니아를 해 온 시각 및 청각 장애인인 로세마리 바렐라 자매를 아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그 자매는 태어날 때부터 귀가 먹어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였습니다. 점차 시력도 상실하여 지금은 거의 볼 수도 없습니다. 그 자매는 수화로 의사 표시를 하며, 다른 사람들이 수화를 할 때 그들의 손을 만져서 이해합니다.

로세마리는 진리를 배우기 전에 시력을 잃어, 그것이 남편과의 의사 소통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몹시 낙심해 자살할 생각까지 품었습니다. 그 때, 수화를 아는 젊은 파이오니아인 닐자 카르발류를 만났습니다. 온갖 장애인들을 고쳐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에 대해 알게 되자, 로세마리는 성서 연구를 받아들였습니다. (이사야 35:5) 그는 곧 상파울루의 청각 장애인들을 위한 회중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집회 중에 통역자가 그의 옆에 앉도록 마련하여 손을 만지게 하는 방법으로 통역함으로 연단에서 표현되는 내용을 그에게 전달하였습니다. 후에 그의 남편도 성서 연구를 받아들여 담배를 끊었고, 1992년 2월에 두 사람이 함께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침례받은 후 곧 정규 보조 파이오니아가 되었습니다. 로세마리는 가사일을 돌보면서도 다른 청각 장애인들과 무려 20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해 왔습니다.

시각 장애인들을 돕기 위해, 협회에서는 1980년에 브라유식 점자(1급)로 된 출판물을 포르투갈어로 발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현재, 성서와 「파수대」를 비롯하여 협회의 많은 출판물을 브라유식 점자판으로 구할 수 있습니다. 브라유식 점자로 발행된 포르투갈어 전역 성서는 모두 84권으로 되어 있는데, 결코 가지고 다닐 만한 것이 못 됩니다! 브라유식 점자를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교본도 발행되어 왔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브라질에는 시각 장애인이 100만 명 이상 있습니다.

북동부 지방의 가뭄

브라질 북동부 지방의 가뭄은 만성적인 문제이지만, 1993년에는 상황이 특히 심각하였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비가 2년째 오지 않았습니다. 가장 심한 타격을 받은 사람들은 농촌 지역에서 수확에 의존해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아라 주, 뭄바바에서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줄을 서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샘에서 물을 길어 냈습니다. 가뭄으로 인해 여러 읍의 시장과 슈퍼마켓이 약탈당하였습니다. 이 지역에 사는 형제들을 돕기 위해, 상파울루, 리우데자네이루, 쿠리티바의 회중들은 1세기 빌립보의 그리스도인 형제들처럼 관대함을 나타내어 네 대의 큰 트럭으로 80톤에 달하는 식품과 의복과 신발을 보냈습니다. 통틀어 5개 주 65개 읍의 형제들이 도움을 받았습니다.—빌립보 4:14-17.

한 검문소에서는 경비병이 트럭 운전 기사에게 그처럼 위험한 여행을 하는 대가로 얼마를 버느냐고 물었습니다. 약탈당할 수 있어 위험한 여행이었기 때문입니다. 경비병은 그 운전 기사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여호와의 증인만 이런 일을 무보수로 할거요!”라고 말하였습니다. 간선 도로의 다른 한 검문소에서는 운전하던 형제가 자기는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말하자, 경비병은 「사전 치료 지침 및 면책 각서」를 동료의 것과 함께 보여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경비병은 각서들을 조사해 보더니 다른 경비병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틀림없는 여호와의 증인이야. 보내 줘도 돼.”

파라이바 주의 어떤 사람은 도움이 베풀어지는 것을 보고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말만 하는데, 당신들은 이웃을 위해 정말로 무엇인가를 하는군요.” 형제들은 상황이 어려워도 절망에 빠지지 않았는데, 여호와께서 기본 필수품을 공급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한 자매는 이렇게 썼습니다. “여러분이 비를 갈망하는 우리의 마음을 충족시켜 줄 수 없고, 우리의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우리에게 도움을 베풀어 줌으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혼자가 아니며 우리를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우리의 믿음과 확신을 강화시켜 주었습니다.”—야고보 2:14-17.

“여호와의 증인에게 박수를 보냅시다!”

대회 기간은 여호와의 증인에게 특별히 행복한 때입니다. 그러나 스포츠 행사에 사용되는 시설에서 대회를 열 때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1992년에 상파울루 파카엠부 스타디움에서 “빛 비추는 자” 지역 대회를 열었을 때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스타디움을 사흘간 사용하겠다고 계약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곳에서는 스포츠 행사가 다른 어떤 일보다도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그러한 경우로, 형제들은 목요일 오후—대회 시작 바로 전날—에, 일요일 저녁 6시에 브라질 최강의 두 축구 팀이 시합을 할 것이라는 통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후 4시까지는 스타디움을 비워 주어야 하였습니다.

대회 감독자인 주앙 페르난데스는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계약서에 서명까지 받았는데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금요일 저녁에 각 부서에서 3명씩 파견된 형제들—전부 110명의 형제들—과 모임을 갖고 대회장에서 전광 석화처럼 철수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장비를 철수할 뿐 아니라 스타디움을 빠져 나가는 3만 명을 방해하지 않고 그 장비들을 수송하려면 관련된 모든 사람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할 것입니다. 연단과 확성 장치는 몇 분 만에 철수하였습니다. 다른 장비들은 상파울루의 구벧엘 건물로 가지고 가서 깨끗이 닦아 보관하였습니다. 오후 3:45에—프로그램이 끝난 뒤 1시간 남짓 후에—모든 일이 완료되었습니다.”

대회가 있던 주간에 일부 TV 해설자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축구 팬들이 도착하는 시간에 맞추어 스타디움을 넘겨 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일요일의 스포츠 논평 시간에 다른 스타디움에 있는 한 해설자가 파카엠부 스타디움에 있는 해설자에게 “스타디움의 상황이 어떻습니까? 그 종교인들이 약속을 지켜 스타디움을 제때에 비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대답은 이러하였습니다. “네, 그랬습니다! 스타디움을 제때에 돌려 주었을 뿐 아니라 청소까지 말끔히 해 놓았습니다. 화장실 청소가 되어 있을 뿐 아니라 관중석도 깨끗이 닦여져 있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에게 박수를 보냅시다!”

고립된 지역에서의 약식 대회

아마존 지역에는 대회 도시까지의 거리가 엄청나게 먼 고립된 집단들과 가족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여행 수단이라고는 비행기나 배밖에 없는데, 비행기는 요금이 너무 비싸고 배는 너무 느립니다. 따라서 이 곳의 전도인들은 대개 지역 대회나 순회 대회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조나스 주, 타바팅가에 있는 형제들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였는데, 그 곳은 가장 가까운 대회 도시 마나우스에서 1600킬로미터 정도나 떨어져 있는 곳입니다.

1990년에 이러한 문제를 고려하여, 순회 감독자의 방문 중에 대회 프로그램을 요약하여 제공하도록 마련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3개의 순회구에 있는 5개 읍의 형제들을 위해 이러한 마련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약 50명에서 많으면 180명까지 되는 집단들이, 왕국회관이 있을 경우에는 왕국회관에서,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공회당에서 모입니다.

“이제 나도 파이오니아가 될 있지요?”

침례받기 위해 자신을 제공하는 일부 사람들이 나타내는 영적인 일에 대한 인식은 참으로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1993년에 아마존 지역의 테페에서 열린 소규모 순회 대회에서 순회 감독자 푸블리우 카발칸테는, 침례 지원자를 위해 마련된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 가운데 전에 본 적이 없는 한 젊은이가 앉아 있는 것에 유의하였습니다. 이 지역에는 형제가 매우 적기 때문에, 순회 감독자는 보통 형제들 모두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순회 감독자는 장로들에게 그 젊은이가 침례 지원자석에 잘못 앉아 있는 게 아니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장로들은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아닙니다. 그는 여기서 배로 35시간에서 40시간쯤 가야 하는 곳에 살고 있습니다. 그는 편지로 진리를 배웠습니다. 특별 파이오니아가 6개월에 한 번씩—주루아에 사는—그를 방문해서 한 달쯤 그 곳에 머무르곤 하였습니다.’

설명을 들은 후에 순회 감독자는 그 젊은이에게 다가가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대화 중에 성서 연구를 사회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네, 연구를 11건 가지고 있습니다. 저기 있는 사람이 제 성서 연구생 중 한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면서 그는 청중석에 앉아 있는 다른 젊은이를 가리켰습니다. 대화를 계속하는 중에 자기와 연구하고 있는 두 명의 다른 젊은이를 가리켰습니다. 그 연구생들은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그리고 친구가 침례받는 장면을 보기 위해 자기들의 돈으로 뱃삯을 지불하고 35시간 넘게 여행을 한 것입니다. 그 날 침례받은 후 그 젊은이는 특별 파이오니아에게 “이제 나도 파이오니아가 될 수 있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아직까지는 그 곳에서 집회가 열리고 있지 않지만, 이제 이 전도인이 침례를 받았으므로 특별 파이오니아는 그에게 집회를 사회하는 훈련을 시킬 계획입니다.

거의 봉사되지 않은 구역에서 전파함

여호와의 증인은 자기들이 야외 봉사에 어느 정도 참여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필요한 모든 일을 다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좋은 소식을 들을 기회가 필요함을 알고 있습니다. 브라질에는 어느 회중에도 임명되지 않은 읍들이 많이 있고, 거의 봉사되지 않은 읍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읍들은 대개 작고 외진 곳이거나 가기 어려운 곳들입니다. 1990년에 실시된 한 조사에서 알려 주는 바에 의하면, 임명되지 않은 구역에는 400만 명이, 거의 봉사되지 않은 구역에는 900만 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해에 이 사람들 중 일부를 만나기 위한 특별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2000명 이상의 전도인이 참여하여, 이전에 임명된 적이 없는 177개 읍에서 봉사하였습니다. 후에, 약 30가족이 이 읍들 중 일부로 이사하여, 새로운 회중을 위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는 데 있어서, 증인들에게는 재정 자원의 한계가 극복할 수 없는 장애가 되지 못합니다. 브라질에서 가장 건조하고 가난한 지역 중 하나인 세아라 주, 소브랄에 있는 4개 회중의 장로들은 특정 읍들에서 정기적으로 봉사하는 방법을 결정하기 위해 1993년 9월에 함께 만났습니다. 그들에게는 10개 읍이 임명되어 있었는데, 그 때까지는 비정기적으로 봉사했을 뿐이었습니다. 이 지역들로 다니는 버스의 운행 시간표상 전도인들이 그 곳에 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습니다.

그 읍들은 소브랄에서 반경 약 130킬로미터 이내에 있었으므로, 장로들은 중고 유개 트럭을 한 대 구입해서 전도인들이 그 구역으로 매일 갈 수 있게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전도인들은 아침에 떠나면 밤에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결정이 알려지자 회중들은 유개 트럭을 살 돈을 자진적으로 헌금하였습니다. 그 일에 관여했던 장로 중 한 사람인 빌순 P. 디아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 차의 구입은 지방 회중에서 어느 한 사람이 많은 돈을 기부해서 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노력해서 된 것입니다.” 또 한 형제는 이렇게 썼습니다. “회중들에서 2000달러를 기부하였고, 또한 영국에서 온 한 형제가 동일한 금액을 기부하였으며, 모자라는 대금은 할부로 지불하였습니다.”

50명 이상의 전도인과 파이오니아들이 이 마련에 참여하여, 각자 주중 특정한 날에 구역으로 갑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약 11만 명의 주민을 만납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도와 왕국 선포자가 되게 할 수 있었고, 그 외에도 무활동자들이 재활동하도록 도울 수 있었습니다. 현재 그 중 4개 읍에서 정기적으로 집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1995년 초에는 브라질 지부 사무실의 조정 아래, 임명되지 않은 구역이나 먼 구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을 돌보는 방법으로 또 다른 마련이 제안되었습니다. 어떤 회중들에서는 그러한 지역에 가서 6개월간 봉사하기를 자원하는 정규 파이오니아들의 비용을 대주었습니다. 더 많은 회중이 이 회중들의 본을 따랐고, 그 결과는 대단히 고무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340명 이상의 정규 파이오니아들이 350개 읍에서 봉사하도록 임명되었는데, 그들은 이미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전도인이 되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동시에, 1400명의 특별 및 임시 특별 파이오니아에 의해 많은 훌륭한 일이 수행되고 있습니다. 이들 중 다수는 경험 있는 형제가 부족한 회중들과 연합하여 일하도록 임명됩니다. 예를 들면, 아크레 주 리우브란쿠의 한 회중에는, 90명의 전도인의 필요를 돌볼 사람이 특별 파이오니아 외에는 그 지방 장로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회중이 없는 조그만 읍에서 봉사하고 있는데, 훌륭한 일이 수행되고 있음을 보는 것은 흐뭇한 일입니다.

대도시 출신의 형제들도 먼 구역이나 거의 봉사되지 않은 구역에서 봉사하는 일에 참여해 왔습니다. 리우데자네이루의 형제들은 그룹을 조직하여 몇 주 동안 그러한 구역에서 봉사하는 일을 9년 간 계속해 왔습니다. 최근에는 68명의 형제 자매들로 이루어진 그룹이 파라나 주의 20개 도시에서 봉사하였는데, 17일 간 애쓰는 동안 2500킬로미터 이상을 여행하였습니다. 그들이 유감스럽게 여기는 일이 있다면 다만 이러한 증거 여행을 좀더 일찍 시작하지 못한 것뿐이라고, 그 그룹을 조직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인 제오르제스 가지는 말합니다.

고급 맨션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임명되지 않은 구역에 사는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대도시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방범 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고급 주거 지역이나 고급 맨션 혹은 아파트에 사는 것을 선호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1980년대에 잠시 전 시간 봉사를 했던 한 부부가 상파울루 근처에 있는 이러한 건물 중 하나로 이사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곳을 자기들의 개인 구역으로 여겼습니다. “나는 쇼핑하러 갈 때나 은행에 갈 때 또는 하교하는 아이들을 태우러 갈 때, 항상 이웃과 접촉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라고 이 어머니는 회상합니다. 그는 후에 이웃 사람들을 신중하게 체계적으로 방문하였습니다.

학부모 모임에서 한 어머니가 이 자매에게 자기 아들이 집중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자매는 「깨어라!」지에서 그 문제를 다루는 기사를 복사하여 갖다 주었고, 이로 인해 성서 연구가 진행되었습니다. 마침내 그 여자와 그 여자의 두 딸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또 다른 이웃 여자가 이 자매에게 궁핍한 사람들을 위해 식품을 모으는 일에 자기와 협조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자매는 그 여자에게 자기는 이미 이웃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가정 성서 연구 마련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여자와 그 여자의 남편, 그리고 그들의 18세 된 아들이 연구를 시작하여 마침내 침례를 받았습니다.

또 다른 여자와 그 여자의 딸들인 세 청소년이 성서 연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 여자의 남편은 스스로 종교심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도, 반대하였습니다. 한 딸이 아버지에게 문제를 직접 조사해 보기 위해 집회에 참석해 보라고 제안하자, 그는 동의하였습니다. 며칠 후, 우리의 자매는 그 가족을 자기 집 점심 식사에 초대하였고, 그들은 왔습니다. 그 남편은 자기가 참석한 집회에 대해 이야기하여 모두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후에, 그는 성서 연구를 하기로 동의하였습니다. 현재 그 가족 모두가 여호와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연구를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순전히 그 한 맨션에 사는 사람들로만 구성된 회중이 1991년 11월에 형성되었습니다. 그 회중에는 전도인이 46명 있고, 1995년 기념식에는 8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의 진리는 접근하기 더 어려운 구역까지도 뚫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전도인 40만 명에 많은 사람이 오고 있다!

거의 1세기 전에 처음으로 성서 진리의 씨가 우편을 통해 브라질에 도달하였습니다. 약 25년 후에는, 워치 타워 출판물을 브라질에서 정기적으로 포르투갈어로 번역하여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인쇄하도록 마련하였습니다. 그 다음 25년 동안 약 1000명의 브라질 사람이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고, 하느님의 왕국에 관한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일에 정기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수가 증가하여 1995년 4월에 왕국 전도인이 4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더 있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끝이 오기 전에 왕국 소식이 “사람이 거주하는 온 땅에” 전파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마태 24:14) 브라질에서는 그 일이 어느 정도로 수행되어 왔습니까? 브라질에서 초기에 여호와의 증인(당시에는 성경 연구생으로 알려져 있었음)이 집회를 열었던 곳 가운데 상파울루와 리우데자네이루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그 지역에는 많은 회중이 있는데, 여호와를 사랑하며 그분을 섬기는 사람들로 넘쳐흐릅니다. 대도시인 상파울루에는 현재 837개의 회중이 있고, 리우데자네이루에는 539개, 살바도르에는 276개의 회중이 있습니다. 전국적으로는 6650개가 넘는 회중이 있는데, 열심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많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왕국에 관한 소식을 자주—어떤 지역에서는 매주—들을 기회가 있습니다.

조그만 읍과 농촌 지역에서는 모든 사람을 그렇게 자주 방문하지는 못합니다. 약 350개의 (어림잡아 총 150만 명의 주민이 있는) 조그만 읍 외에도, 어느 회중에도 임명되지 않은 광범위한 농촌 지역이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을 6개월에 한 번 정도 찾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증거가 정기적으로 수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더 큰 도시에 살든 외딴 지역에 살든—성서 소식의 가치를 인식하도록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1995년 4월과 5월에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사람과 직접 만나서 「생활이 왜 이토록 문제들로 가득 차 있는가?」라는 전도지를 전해 주려고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3400만 장이 넘는 전도지가 인쇄되어, 배부용으로 회중들로 보내졌습니다. 한 남자는 그 전도지를 받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오늘 아침 나는 이와 똑같은 질문을 나 자신에게 했고, 다른 사람들과도 그 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 여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수년 간 이 질문을 나 자신에게 해 왔지만, 이에 대한 답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여자는 협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 전도지가 너무 좋아 여러분에게 성서 연구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브라질의 여호와의 증인은 자기들의 일이 끝났다거나, 왕국에 관하여 증거하라는 예수의 예언적 명령에 순종하여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더는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증인들은 그들이 자주 방문하는 지역이라 할지라도 부재자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직장에 가 있거나, 쇼핑을 하고 있거나, 누군가를 방문하고 있거나, 또는 새로운 한 주간을 위해 기력을 회복하려고 늦잠을 자고 있을지 모릅니다. 증인들은 그런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리우그란데두술 주, 포르투알레그레의 순회 감독자는 다음과 같은 작전을 쓰기로 하였습니다. 추운 겨울날에는 있을 만한 가장 따뜻한 곳이 침대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늦잠 자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순회 감독자와 그의 짝은 한 구획을 돌면서 사람들이 일어나 있는 기미가 보이는 집의 문만 두드렸습니다. 그들은 한 구획을 아홉 바퀴 돌았는데, 매번 더 많은 사람이 일어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매 집에 출판물을 전할 수 있었으며, 그리하여 재방문을 위한 길을 터놓았습니다.

브라질에는 하느님의 말씀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며, 여호와의 증인은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 말씀을 일상 생활에 적용하는 법을 배우도록 돕기를 열망합니다. 현재, 증인들이 개인이나 가족들을 상대로 정기적으로 사회하는 가정 성서 연구 수는 50만 건이 넘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은 1995년부터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지식」 책을 사용해서, 의로운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성서의 기본 가르침을 과거보다 훨씬 더 빨리 배우도록 돕기 위하여 고안된 프로그램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한 도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더하여, 전국에 있는 다른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증인들이 배부하는 성서 출판물을 기쁘게 받아들이는데, 1996 봉사 연도 중에 233만 4630부의 서적과 2116만 8979부의 잡지와 278만 7032부의 팜플렛이 전해진 사실을 볼 때 그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신권적인 일에 대한 우리 브라질 형제 자매들의 관심은 브라질 국경 훨씬 너머까지 뻗치고 있습니다. 브라질 출신의 많은 파이오니아들이, 증인들이 아직 널리 퍼지지 못한 나라의 더 크게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기 위해 이사하였습니다. 세사리우란제에 있는 지부에서 공급하고 있는 성서 출판물은 브라질뿐 아니라 독일, 모잠비크,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앙골라, 우루과이, 파라과이 및 포르투갈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과거에 수행된 일의 성과와는 관계없이, 해마다 속도가 계속 더 빨라지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기쁜 일이었다!

참으로, 브라질 전역에 증거하기 위해서는 많은 일이 수행되어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기쁨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아, 물론 좋은 때도 있었지만 어려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신의 충성스러운 종들의 활동을 축복하고 계시다는 증거를 우리 눈으로 직접 목격함에 따라 우리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껴 왔습니다.

에리히 카트너는 일찍이 1939년과 1940년에 브라질의 농촌 지역에서 증거할 때, 출판물을 넣은 가방을 베개삼아 종종 노천에서 자곤 하던 때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 당시는 전국적으로 증인이 몇 백 명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방문한 가정 중에 성서를 가지고 있는 가정은 극소수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는 관심자들에게 배부할 성서를 구하기 위해 그 지방 성서 협회의 서점으로 가곤 하였는데, 그나마도 얼마 후에는 그에게 더 이상 성서를 팔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1963년에 뉴욕 시에서 열린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에 참석하는 감격과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 때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신세계역」이 포르투갈어를 포함해서 6개 언어로 발행되었습니다. 그 성경을 포르투갈어로 받게 되어 나는 여호와께 특히 감사드렸습니다. 그 성경을 브라질의 내 임명지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967년 이래, 창세기로부터 계시의 책에 이르기까지 「신세계역 성경」 전역판을 포르투갈어로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브라질에서의 성서 교육 활동에 참으로 도움이 되었습니다! 브라질에서 활동적으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사람들의 수가 1963년의 3만 118명에서 1996년에는 43만 6000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아우구스투 마샤두는 브라질에 파견된 초기의 선교인 중 한 사람이 자기에게 베푼 도움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자기가 처음으로 참석한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대회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렸습니다. 뉴욕에서 온 N. H. 노어와 M. G. 헨첼이 참석하였습니다. 참석자 수는 불과 1064명이었습니다. 한 연설의 제목은 “사랑의 더 탁월한 길”이었습니다. 마샤두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후 나는 1958년에 뉴욕에서 열린 8일간의 국제 대회에 참석한 25만 3922명의 무리 가운데 포함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두 대회 모두 동일한 사랑의 영이 충만하였습니다. ·⁠·⁠· 나는 여호와의 백성이 부족적, 인종적 분열에서 벗어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전세계적인 성서 교육 활동을 하고 있다는 확신을 이전 어느 때보다 더 굳게 간직한 채 뉴욕에서 돌아왔습니다.”

1985년에 마샤두 형제는 그러한 성서 교육 활동이 브라질에서 달성하고 있는 일에 대한 두드러진 증거를 보았습니다. 그는 상파울루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동시에 열린 국제 대회에서 연설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총 참석수는 거의 25만 명에 달하였으며, 대부분 브라질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10년 후, 브라질 전역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을 지키기 위해 모였을 때, 114만 4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하였습니다.

오늘날 여호와의 모든 헌신한 종들은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할 만한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행해 오신 일과 미래를 위해 약속하신 일을 묵상해 볼 때 우리의 마음은 깊이 감동됩니다. 브라질을 포함한 모든 나라에서 “보배”가 숭배를 위한 하느님의 영적 전으로 모아지고 있습니다. (학개 2:7) 시편 144:15에서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라고 한 말은 참됩니다.

[167면 지도와 삽화]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아마존 강

마나우스

아마조나스

마투그로수

세사리우란제

리우그란데 두술

벨렘

포르탈레자

레시페

살바도르

리우데자네이루

상파울루

[삽화]

1. 레시페의 해변

2. 리우데자네이루

3. 아마존의 우림

4. 아마존 지역에서의 증거

5. 세사리우란제의 지부 사무실

[124면 전면 삽화]

[126면 삽화]

1936년에 브라질에서 봉사를 시작한 알스턴 율과 모드 율

[126면 삽화]

브라질 벧엘에서 여전히 봉사하고 있는 길르앗 제1기 졸업생 찰스 레스코

[133면 삽화]

상파울루에서 가동된 활판 윤전 인쇄기, 1973년

[134면 삽화]

상파울루에서 열린 “하느님의 승리” 대회에서, 대표자들은 연합하여 증거하는 가슴 뭉클케 하는 열매를 보았다

[142면 삽화]

부분적으로 덮개를 한, 살바도르의 “대회 공원”

[145면 삽화]

지부 위원회(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마사수에 키쿠타, 카를 리츠, 아마루 산투스, 외스텐 구스타브손, 아우구스투 마샤두, 프레드 윌슨

[150면 삽화]

1981년 지부 봉헌식에서, 로이드 배리는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에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하고 강력히 권고하였다

[156면 삽화]

파이오니아 봉사 강습에서 3만 9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훈련을 받았다. 상파울루의 소로카바에서 열린 학급

[158면 삽화]

1996년 지구 감독자 방문 중, 선교인들 및 전 시간 봉사를 하는 다른 길르앗 졸업생들이 배우자와 함께 찍은 사진

[162면 삽화]

동시 발행을 하는 데 중요한 도구인 오프셋 윤전 인쇄기와 MEPS

[170면 삽화]

아마존 강 어귀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사용되는 배

[175면 삽화]

현지 형제들이 지부 시설을 건축하는 일을 도와 준, 다른 나라에서 온 자진 봉사자들; 할리 부부(위)와 콜웰 부부

[176, 177면 삽화]

현재 브라질에서 43만 명이 넘는 증인들의 활동을 조정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지부 시설

[192면 삽화]

현재 16개의 대회 회관이 브라질의 여호와의 증인들의 필요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

[193면 삽화]

더 많은 왕국회관이 필요하다. 속성 건축 방식이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194면 삽화]

일부 회중들은 청각 및 시각 장애인들에게 특별한 도움을 베풀고 있다

[205면 삽화]

에리히 카트너는 「신세계역 성경」을 포르투갈어로 구할 수 있게 되어 기뻐하였다

[207면 삽화]

아우구스투 마샤두는 브라질에서 성서 교육이 이루어 낸 성과에 대한 두드러진 증거를 보았다